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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28 22:16:47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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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쿠호 시대 최고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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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 Oda Nobunaga
파일:Oda_Nobunaga.jpg
▲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1]
<colbgcolor=#ffde00><colcolor=#000> 출생 1534년 6월 23일
오와리국 쇼바타성[2]
사망 1582년 6월 21일 (향년 47세)
야마시로국 혼노지(本能寺)
신체 170cm[3]
종교 무종교 (무신론)

1. 개요2. 가문 배경
2.1. 선조2.2. 가족과의 관계
3. 생애4. 평가5. 여담6. 참고 서적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다이묘(大名). 오와리 오다 가문의 당주. 그리고 천하인(天下人).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기에 이 인물을 빼고 센고쿠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인간이며, 당대에 많은 파격을 불러왔지만,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죽은 점 등으로 인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했다.

2. 가문 배경

[ruby(織,ruby=お)][ruby(田,ruby=だ)][ruby(氏,ruby=し)]
오다씨
파일:오다 가몬.svg
<colbgcolor=#ffde00> 오다 가문의 가몬
오다 외꽃
織田瓜
본성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스케모리류(資盛流)(자칭)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토시히토류(利仁流)?
인베씨(忌部氏)?
가조 타이라노 치카자네(平親真)
종별 무가(武家)
화족(華族)(자작)
출신지 에치젠국 오다 장원
(越前国織田庄)
근거지 오와리국 키요스 성
미노국 기후 성
오미국 아즈치 성
도쿄부
지류
분가
츠다씨(津田氏)

2.1. 선조

가족관계 이름 생년 몰년
6대조 오다 히사나가
(織田久長)
불명 불명
5대조 오다 토시사다
(織田敏定)
1452년 1495년
고조부 오다 토시노부
(織田敏信)
1466년 1517년
증조부 오다 스케노부
(織田良信)
불명 불명
조부 오다 노부사다
(織田信定)
불명 1538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1511년 1551년 4월 8일

2.2. 가족과의 관계

관계 이름 생년 몰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1511년 1551년 4월 8일
어머니 도타고젠[4]
(土田御前)
1511년 1594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호랑이라 불리던 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사이토 도산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이에 껴서 곤란한 처지였다. 그래도 노부나가를 신뢰해서 그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부인 이름 생년 몰년 자녀
정실 노히메
(濃姫)
1535년 불명 없음
측실 이코마 키츠노
(生駒吉乃)
1528년 1566년 5월 31일 오다 노부타다(1557 ~ 1582)
오다 노부카츠(1558 ~ 1630)
도쿠히메(1559 ~ 1636)

오다 노부히데의 라이벌인 사이토 도산의 딸인 정실 노히메와는 정략결혼이었고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측실인 이코마 키츠노는 생애 제일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자로, 오다 노부나가는 24명의 자식들 중 이코마 키츠노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오다 노부카츠에게만 군의 총대장 자리를 맡겼다.[5] 어느 정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 많은 만큼 미디어에서는 처첩들 중에서 이 두 사람이 자주 나온다.
자녀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비고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7년 1582년 6월 21일 [6]
차남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1558년 1630년 6월 10일 [7]
3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간베 노부타카, 神戸 信孝)
1558년 4월 22일 1583년 [8]
4남 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1568년 1586년 1월 29일 하시바 집안에 양자로 보내짐
5남 오다 카츠나가(織田勝長) 1569년 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에서 전사
6남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9] 불명 불명
7남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吉) 1573년 1615년 5월 15일
8남 오다 노부사다(織田信貞) 1574년 1624년 7월 21일
9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高)[10] 1576년 1603년 1월 23일
10남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好) 불명 1609년 8월 13일
11남 오다 나가츠구(織田長次) 불명 1600년 10월 21일
장녀 도쿠히메(徳姫) 1559년 11월 11일 1636년 2월 16일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정실
차녀 소우오인(相応院) 1561년 1641년 6월 17일 가모 우지사토의 정실
3녀 히데코(秀子) 불명 1632년 5월 30일 츠츠이 사다츠구의 정실
4녀 에이히메(永姫) 1574년 1623년 3월 24일 마에다 토시나가의 정실
5녀 호우온인(報恩院) 1574년 1653년 9월 6일 니와 나가시게의 정실
6녀 오후리(於振) 불명 1643년 5월 26일 미즈노 타다타네와 결혼
사지 카즈나리와 재혼
7녀 겐코인(源光院) 불명 1600년 11월 13일 마데노코지 아츠후사의 계실
8녀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불명 1603년 3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니죠 아키자네의 계실
9녀 게츠묘인(月明院) 불명 1608년 9월 15일 도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정실

3. 생애

4. 평가

일본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으며 현대 일본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 중 1명이자 사실상 센고쿠 시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많은 매체에 등장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인지도와 인기가 상당히 높다.

그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다 노부나가가 그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 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전국의 다른 좋은 땅 물려받은 타고난 다이묘들을 다 제치고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약소 세력까지는 아니었다. 오와리라는 땅 자체가 엄청나게 기름진 땅이라 그리 크지 않은 데도 석고만큼은 웬만한 땅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 후호조씨처럼 더 좋은 땅 차지하고 시작한 다이묘도 있기에 오와리가 최고의 스타팅 포인트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중상위권 정도는 되는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지리 조건 때문에 주변에 적이 많았고 이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일 뿐. 거기다 상술되었다시피 오다 가문은 원래 가문의 방계도 아니고 원래 가문을 하극상한 신하 가문의 방계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그리 통일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11]

노부나가의 성격이 급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그의 전략 및 전술은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다케다 신겐에게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끝까지 외교적 방책을 찾았을 정도. 물론 무적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의 기병을 상대함에 있어선 피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러다가 신겐이 죽은 뒤에 후계자 다케다 카츠요리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리해 사실상 완전한 우위에 서게된다. 일반적인 다이묘라면 군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다케다를 바로 조지러 갔을 테지만 일단은 다시 때를 기다렸다. 그 후 동안 타케다는 경제적, 외교적인 실책으로 자멸에 가까운 지경에 이를 때가 되자 그제서야 타케다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후 7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타케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호죠가 아군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에스기는 내분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야말로 관동공략을 위한 최적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을 봤을때 몇십수 앞을 내다보는 참을성은 가히 경이롭다.

다만 노부나가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당대 최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흔히 노부나가보다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을 높게 보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나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 같은 역사적 사료에도 노부나가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가 패퇴하는 경우가 기술되어있다.[12] 게다가 오다 군 자체에 대한 평가도 그리 높지 않아, 오다 군의 병졸이 다케다 가나 호죠 가, 도쿠가와 가보다 훨씬 약하다는 기술들도 있었다. 허나 노부나가의 전술 능력이 비록 당대 최고는 아닐지는 몰라도, 충분히 비범한 건 사실이다. 최고 지휘관의 몸으로 직접 말을 타고 선두에 달려 적을 격퇴한 적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케하자마 전투이며, 아사쿠라 가문을 멸문시킬 때도 직접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노부나가 군의 최대 장점으로 꼽는 건 바로 참호를 만드는 등의 진지 구축 능력이다. 이 부분의 능력은 단연 으뜸이었다 한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13],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14],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노부나가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 노부히데의 실패와 본인의 행실로 인해 가문 내의 분열에 더해 외부의 적들이 오와리를 노리고 있는 등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불리한 상황에 묻히는 감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오다 가문의 입지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은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오와리의 발전한 상업은 아버지 노부히데 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물려받은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15] 미노를 점령한 뒤 노부나가는 노비 평야로 알려진 미노와 오와리의 매우 비옥한 지방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16], 오와리와 미노는 위치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나이와 교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인 사카이로 뻗어나가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이 노부나가의 능력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재산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많은 다이묘 가문은 고평가되는 다이묘들조차도 대부분 겉은 급성장하면서 내실은 그에 걸맞은 체제를 미처 다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덩치는 전국구급이지만 지방 다이묘의 가신단 수준의 약한 단결력을 가져서 뒤늦게 내분이나 가신단의 이탈, 반란 등의 사태로 인해 발목을 잡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노부나가처럼 가신을 수하의 독립된 영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노부나가라는 군주의 신하처럼 다루는 중앙집권적인 가신단을 구축한 사례는 거의 없었기에 매우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행동이나 정책을 두고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고 특기했고, 이것은 분명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선구적인 용인술은 어쩔 수 없이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반란처럼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은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루는 Samurai Archive의 팟캐스트에선 이런 노부나가를 두고 매니저와 중간 관리자에겐 최악의 보스, 그 밑의 평사원이나 알바들에겐 더없이 좋은 보스 타입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17]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하시바 히데요시[18]와 아케치 미츠히데[19]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다만 노부나가는 본인이 워낙 근면하다보니 부하가 조금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되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20],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21]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혁신자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추세라고 서술되어 있다.

5. 여담

"그는 중간 정도 키에 가냘픈 체구였으며, 수염은 적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였다. 전투를 매우 좋아하여 군사 훈련에 힘썼으며, 명예심이 충만하였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응징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미와 자비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잠자는 시간이 짧아 아침 일찍 일어났으며 식탐은 없었다. 결심한 바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술을 쓸 때는 매우 노련하였다. 성질이 매우 급하여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신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거의 무시하였으며 가신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식사를 절제하였으며 사람을 다루는 데 매우 솔직하였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때는 오만하였다. 일본의 모든 왕후(王侯)[28]를 경멸하였으며 마치 부하를 대하듯이 그들을 내려 보며 말을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절대 군주를 대하듯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는 전운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도 태연하였으며 인내심이 강하였다. 그는 이해력이 좋았으며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불에 대한 일체의 예배, 숭경, 모든 이교도적 점복과 미신적 관습을 경멸하였다. 당초에는 법화종에 속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지만 높은 관위를 받은 후에는 오만한 태도로 모든 불상을 멸시하였다. 하지만 약간은 선종의 견해를 쫓아 영혼의 불멸, 내세의 상벌 등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저택에 있을 때는 매우 청결하였으며 모든 지시에 양심적이었다. 이야기할 때에 꾸물대거나 길게 전제를 다는 것을 싫어하였고 매우 비천한 자들과도 격의 없이 이야기하였다. 그가 각별히 좋아한 것은 유명한 차 도구, 좋은 말, 도검, 매 사냥이었고, 신분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자기 앞에서 나체로 씨름(스모)을 하게 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누구든 무기를 휴대하고 그와 대면할 수는 없었다.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곤란한 일에 착수할 때는 매우 대담무쌍하여 사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복종하였다."[29]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65] 녀석이 그대(殿)[66]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

6. 참고 서적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 若松和三郎(2013年 10月 1日, 戎光祥出版)[70]
: 阿波三好氏 - 天野忠幸(2012年 10月 10日, 岩田書院)[71]
: 四国と戦国世界 - 四国中世史研究会 · 戦国史研究会(2013年 5月, 岩田書院)[72]
: 戦国史研究 第66号 - 戦国史研究会(2013年 8月 25日, 吉川弘文館 & 戦国史研究会)[73]

7. 대중매체에서



[1] 일본이건 해외이건 가장 유명한 노부나가의 초상이다. 원본은 아이치현 도요타시 조코지(長興寺)에 소장되어있다. - 三好一族と織田信長 p.11[2]아이치현 이나자와시.[3] 남성 평균키가 160도 안되고 겨우 150대이던 시절에 이 정도 키면 거인이다.[4] 아들 노부나가(1534 ~ 1582), 노부유키(1536 ~ 1557), 히데타카(? ~ 1555), 노부카네(1548 ~ 1614), 딸 오이치(1547 ~ 1583), 오이누(? ~ 1582)의 생모다.[5] 마침 둘이 장남과 차남이기도 했다.[6] 아명은 키묘마루. 노부나가의 후계자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다. 유능한 편이라 만약 살아남아 오다 가문을 이어갔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7] 아명은 자센마루. 키타바타케 가에 양자로 보내졌으나 노부나가 사후 돌아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했지만 임의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강화하면서 산통을 깨버렸고, 아버지의 역작이었던 아즈치 성을 태워버린 전적도 있어서 호부견자로 유명하다.[8] 아명은 산시치마로. 간베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혼노지의 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손잡고 하시바에 맞섰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사망하였다.[9] 조부와 이름이 같다.[10] 셋째형과 이름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11] 다만 이런 약점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오와리는 천하인이 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적합한 곳이었는데 일단 농사짓기 좋아서 그리 넓은 영지가 아니었음에도 석고가 대단히 많으며 또, 사통팔달인 곳이라 적에게 둘러싸이기도 좋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모이기도 쉽고 상업이 발달하기에도 좋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토와 가까워서 참내(천황을 알현하는 것)하기에도 적당한 곳이다.[12] 주로 타케다 군의 무장에게 패퇴[13] 기존 상인들이 형성한 동업자 조합인 이치자(市座)에 주어진 특혜를 폐지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한 시장이다.[14] 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15] 사실 탄탄한 경제력의 기반은 조부 노부사다 때 부터 시작되었다. 시나노, 미노 오와리, 이세 등 4 나라를 관통하는 기소강과 인접한데다 츠시마 신사아래 번성한 몬젠마치를 가진 이세만에 위치한 항구인 츠시마를 장악하고 거점을 아예 그곳에 옮겨 발전을 꾀한이가 노부사다이며, 그 아들인 노부히데 역시 아츠다 신사를 낀 항구 아츠다를 지배하며 상업을 장려했다.이러한 까닭에 홍수로 무너진 궁궐의 수리비로 무려 4천관(약 6억엔)에 달하는 비용을 헌상할 수 있었다. 라이벌이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500관, 사이토 도산은 한 푼도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격차.[16] 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오다 가의 땅은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상술했다시피 매우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고쿠다카로 치면 매우 알찬 땅이었다.[17] 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18] 이쪽은 한 손에는 야망, 한 손에는 근면성실로 패권자까지 올라간 일본 역사상 최고의 독종이기에 클라스가 다르긴 하다. 하시바에 대한 당대 소문 중에는 하시바가 거의 노비급 신입 말단 부하였을때, 현대의 화장실과는 차원이 다르게 불결하던 당대의 변소를, 하도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이 만들어서, 귀가한 노부나가가 변소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히익 변소가 이렇게 깨끗하다니! 그때부터 성실성을 눈여겨 보고 아주 조금씩 승진시켰는데, 승진을 하건 안하건 근면성실한 태도가 변하지 않길래 크게 신용하며 심복으로 키웠다는 것.[19] 단 이 쪽은 다른 다이묘 밑에 꽤 오래 있다가 온 사람이다.[20] 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21] 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22] 에도 초기에 나온 군담소설.[23] 그의 일생을 다룬 사료 중 가장 신뢰성있는 것으로 꼽히는 책으로 한때 한일 양국 인터넷 회선을 달구던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와 노부나가 잔혹설에 반박할 근거가 모두 들어있는 신기한 책이다. 히라이 카즈사(平井上総) 박사는 신장공기를 1차 사료 쪽이 아닌 군키모노나 계도, 예수회 서간이나 실록 등의 편찬 사료 쪽으로 분류하고 있다.[24] 노부나가의 일족들이 배치된 곳은 전부 세토내해를 끼는 지역인데 세토내해에 많은 해안선이 걸쳐진 시코쿠 동부마저 3남 노부타카를 위시로 배치했으니 노부나가는 중세에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는 세토내해를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의 지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코쿠의 아와와 사누키는 칸레이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중요 거점이었으며 특히 아와는 미요시 가문 시대에 걸쳐 목재와 쪽(藍)으로 폭발적인 경제력을 확보했기에 이런 해운을 이용한 경제성을 보고 펼친 정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상 야스나가의 복귀를 명분으로 동세토내해를 차지하는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으로 봐도 될 듯. 후에 히데요시가 아타기 진고로를 미요시 진고로로 부르거나 야스나가에게 양자를 맡기며 오사카에 군림한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동세토내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었는지 간단히 알 수 있다.[25] 노부나가 주인장-야스나가 부장 또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을 알아보는 것에 큰 영향을 주는 사료임에도 연호가 기입되어 있지 않기에 사료의 연도 비정과 오다-쵸소카베 관계를 알아가는데에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주인장 - 부장의 발급 시점은 오다 - 쵸소카베 관계에 있어서의 터닝포인트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아 1578년, 1579년, 1580년, 1581년 등으로 많은 논의와 비정을 거치며 연구가 진행되었다.[26] 나카히라 케이스케 씨는 노부나가가 쵸소카베 가문을 대적하는 시기가 1581년의 말년까지 밀려난다는 것, 아와와 사누키에 모토치카에 의한 직접 지배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은 쵸소카베 가문에서 미요시 가문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반 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복속됨에 따라 적대 세력이 없어지고 쵸소카베 가문과 맞닿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국분의 필요성이 생겨나 양자가 갈등하게 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27] 모토치카가 이요 남부의 우와군(宇和郡)을 침공하자 사이온지 가문이 이를 노부나가에게 전달했고 이를 받은 노부나가의 부교슈(奉行衆)가 사자(上使)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예.[28] 다이묘를 말함.[29]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에서 발췌. 해당 서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편역본이다.[30] 당시 승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불도를 닦는 것과 학문에 전념하는 것의 비중은 비슷했다. 이 점은 서양의 성직자도 비슷하다.[31] "그 소행(엔랴쿠지 방화/학살)이 비록 잔인하다고는 하나, 기나긴 에이잔 승려들의 해악을 뿌리뽑았기에 천하에 공을 세운 일이라 할 것이다."(아라이 하쿠세키, 에도 시대의 유학자)[32] "당이나 승방이나 전부 엉망인 꼬락서니였다. 아아, 한탄스럽다. 에이잔의 승려들은 완전히 엉망이고 학문을 닦는 것을 게을리하여 행실도 어지럽고 불법도 난잡해졌다. 산의 전 사찰이 전멸한 것도 당연한 과보라 할 수 있겠다. 여타 대부분 사찰이 전부 그런 식이었다. 진실로 가련하구나." (타몬인 일기, 승려 시점의 기록이다.)[33] <신장공기>에는 대학살로 고명한 승려와 학자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사찰에서 온갖 미소년과 미녀들이 쏟아져나와 "악한 승려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는 살려달라"며 빌었다는 기술이 있다.[34] 중국 본토[35] 유통에 따른 상업 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36] 당시 일본인 평균 신장은 155cm였다.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 치환하면 약 186cm에 달한다.[37] 겐지헤이케가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것이 무가의 형세라는 사상. 센고쿠 시대 전에 일본을 지배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이 겐지였다.[38] 박수철,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39] 대표적으로 우에스기씨가 후지와라 북가 카슈지계열이다.[40]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41] 아니메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42] 阿波三好氏 p.239[43] 宮本義己, 2010, 『誰も知らなかった江』, p. 61-62.[44] 엔랴쿠지 학살 및 방화사건이 대표적이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참살하는 묘사나,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등의 구절이 있다.[45] 구태훈 교수, "오다 노부나가"[46] 四国と戦国世界 p.148[47]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48] 아츠모리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 고전 무용 음악. 실제로 노부나가는 아츠모리를 좋아해 즐겨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49]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50]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감각에서는 지방인 오와리 출신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많은 전장에서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 짠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교토의 공가(公家)식 요리는 현재도 심심한 간에 은은한 귀족적 풍미가 특징이다.[51]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52]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53]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철자법인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であるか로 쓴다.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54]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 문서에 따르면 작위를 받은 오다씨는 4명인데, 2명은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의 후손이고, 나머지 2명은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信雄)의 후손들인데, 메이지유신 당시 오다 노부토시(織田信敏, 노부카츠의 4남 노부요시(信良)의 후손)는 텐도(天童)번,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高長)의 후손)는 카이바라(柏原)번의 다이묘였던 이유로 자작을 받은 것.[55]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또한 노부나리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정확한 구체적 증거가 아닌 노부나리의 증조부가 자칭한 것이 시초라서 정말로 그가 노부나가의 후손인지는 미스테리. 참고로 앞서 나온 직계 후손 노부타카는 이를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56] 사후에도 노부나가의 후손은 실록에 딱 2명 등장한다. 숙종시절에 사신으로 온 하타모토 오다 노부카도(織田信門,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의 외손자다)와, 구한말에 고종에게 훈장을 받은 화족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앞에서 언급했지만 타카나가계) 자작.[57] 제기차기와 비슷한 원리로 공을 높이 차올리며 그 횟수를 겨루어 노는 경기. 당시 교토 귀족들의 소양이었다.[58] 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59]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60] 신장공기 1권 '뱀을 물리친 일' 조.[61] 유명 무장으로 노부나가의 젖형제이기도 하다. 후일 하시바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하시바군으로 참전해 전사한다.[62] '키쇼'란 맹세 의식이다. 예를 들어 '키쇼몬'의 경우 맹세장을 의미한다.[63] 당시 히데요시의 거성이다.[64] 신장공기 14권 텐쇼 9년 4월 10일조 기사.[65] 藤吉郞.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66] 원문은 도노.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67] 城下町. 다이묘의 성 근처에 조성된 상업 도시 구역. 전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68] 일본, 중국, 인도를 의미한다.[69] 신장공기 13권 텐쇼 8년 3월 20일 기사.[70] 내용 자체는 1989년에 와카마츠 씨가 출판한 『篠原長房』에 수정과 가필을 더한 서적이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凡例/新版の刊行にあたって[71] 아마노 박사가 중심이 되어 70 ~ 10년대의 논고들을 묶은 서적이다.[72] 참조한 것은 아마노 박사 논고.[73] 참조한 것은 나카히라 씨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