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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노구치 히데요 野口 英世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876년 11월 9일 |
일본 제국 후쿠시마현 야마군 이나와시로정 | |
사망 | 1928년 5월 21일 (향년 51세) |
영국령 골드코스트 아크라 (現 가나 아크라)[1] | |
국적 | [[틀:깃발| | ]][[틀:깃발| ]][[일본 제국| ]]
직업 | 세균학자 |
부인 | 메리 로레타 다디스 (1911년–1928년)[2] |
학력 | 교토제국대학 (의학 / 박사) 도쿄제국대학 (이학 / 박사) 브라운 대학교 (이학 / 명예박사) 예일 대학교 (이학 / 명예박사) 파리 대학교 (의학 / 명예박사) 산 마르코스 대학교 (의학 / 명예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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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의사이자 세균학자, 병리학자.장애를 딛고 세계적인 의사가 되었다는 일본 위인전의 단골 인사다. 일부 논란이 존재하지만,[3] 의학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4]도 여럿 세웠던 인물이다.[5]
2. 생애
후쿠시마현 야마 군 이나와시로 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히데요가 아니라 세이사쿠(淸作)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야구선수 장훈과 비슷하게 생후 18개월이던 1878년 5월[6]에 화로에 떨어지는 사고로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붙어버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본의 전통 가옥은 마루 한가운데에 화로가 있어서 이런 사고가 잦았는데, 이 화상 자국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한다. 16살에 손 수술을 받기 전까진 손 때문에 절굿공이라고 놀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수술을 시켜줄 정도였으니 차별이 있었다고 하기도 힘들다. 자세한 것은 아래 '동정론' 문단에서 설명.원래는 교사가 꿈이었지만 손의 상처로 인해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손을 수술해준 와타나베 가나에 박사의 조수로 들어가서 어깨너머로 의학을 배우다가, 의학원인 사이세이 가쿠샤(濟生學舍, 현재의 니혼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 20살에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공부를 꽤 잘한 편이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닥터 노구찌> 만화에 따르면, 당시 의사 면허 시험에는 '타진' 항목이 있었던 듯하다. 애초에 손이 불편해서 필기시험 합격 후 실기에 해당하는 타진 테스트 통과에 애를 먹은 것이다. 만화에 따르면 수술로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보이나… 아래처럼 환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불구가 된 손으로 인해 환자들이 기피하여 의사로 살기가 힘들자, 눈을 세균과 병리학 쪽으로 돌려 질병의 원인을 연구하는 기초의학자로 변신했다.
당시 세계적인 생물학자였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박사의 연구소에 취직했다. [7] 영어를 잘해서 외국 논문들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미국의 유명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플렉스너 박사의 통역을 했다. 이때 플렉스너 박사는 통역해 준 노구치에게 고마움의 뜻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오라."며 인사치레로 말을 했다.
이후 노구치는 국제방역단의 일본 대표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페스트 방역을 했는데, 이 때 선진 의학을 접하고 이를 동경하게 되어 플렉스너 박사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한 걸 기억해내어 "같이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당연히 간단하게 잘렸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1900년에 결혼하고 받은 축의금을 모아 미국 가는 여비를 마련했다. 근데 이 결혼 자체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사기였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아래 '낭비벽' 항목에서 설명. 이렇게 막무가내로 미국에 가서 플렉스너 박사를 찾아가 "그때 그랬으니까 저 좀 넣어줘요!"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나름 감명을 받았는지, 혹은 우격다짐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플렉스너 박사는 결국 자신이 교수로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의 연구원으로 노구치를 취직시켜 주었고, 이후 본인이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옮기자 노구치도 같이 이곳으로 데려간다.
그리하여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플렉스너 박사가 있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이후 플렉스너 박사가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자 노구치도 이곳으로 따라간다.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현재의 록펠러 대학교의 전신으로, 규모가 작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생물학에서는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연구기관이다.
처음에는 뱀의 독 같은 독성학을 연구하다가 이후 진행성 마비를 연구했는데, 마비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추적한 끝에 그것이 '스피로헤타'라는 세균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냈고, 또한 스피로헤타의 발생 원인이 매독에 있음을 밝혀내 다시 한번 명성을 날리게 된다. 여러가지 세균성 질환들을 연구하던 끝에 마침내 황열병의 원인균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도 오르게 되었다.
이후 중남미에서 열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연락을 듣고 그 곳으로 가서 본인의 연구 방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이후에는 황열병을 직접 연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도 떠났다. 그는 결국 본인이 연구하던 황열병에 감염된다. 시기상으론 5월이라 일본에서도 이 때는 거의 여름에 가까워질 법한 날씨지만, 아프리카의 경우 적도와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특성상 황열병을 옮기는 모기가 이 때부터 극성이었을 것이다. 결국 1928년에 51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8] 그는 평생 2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여러가지 세균 질환을 연구해 원인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가 이렇게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구가 된 자신의 손으로 인한 컴플렉스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컴플렉스로 점철된 생애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업적을 쌓게 했다는 것이 그의 생전에 알려진 이야기다
3. 논란
3.1. 동정론의 실체
노구치는 왼손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는 일부 위인전의 주장이 있다. 다만, 일단 노구치가 의사로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노구치가 개업의가 되지 않은 것은 환자들이 장애인이었던 그를 꺼렸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개업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구치가 개업을 못하자 곧 후원자인 지와키는 노구치에게 다른 직장을 알선해 주었으며, 노구치 그 자신도 어학에 능했기 때문에 통역 등의 일을 맡아 순조로이 진급했다. 이 외에 노구치가 받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사실 교묘하게 감춘 노구치 자신의 악행에 기인한 것들이 많았다.그리고 애초에 왼손이 불구였다는 것도, 실제로는 지와키의 후원하에 무상으로 수술을 받아서 이후 손수 타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일본에서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상시험을 통과해야 되었고, 그 과정에 타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검증이고 뭐고 필요 없는 셈. 따라서 노구치가 받았다는 차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 셈. 게다가 위에서 언급된 고향의 은사나 지와키 같은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노구치는 생활에 대한 염려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어학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파견되거나 미국에 건너가는 등 많은 기회를 얻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되려 동시대의 다른 의학도보다 훨씬 유복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장애인으로서 차별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회하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분명히 그는 출세했고 거액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3.2. 부정당한 연구
황열병 연구의 경우, 노구치의 발견했다는 원인균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세균학자 막스 타일러가 조사한 결과 노구치가 발견했다는 병원균은 황열병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균이었음이 드러났다. 타일러는 이후 연구를 지속해 황열병의 원인은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임을 밝혀냈고, 또한 노구치가 살던 때의 현미경으로는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노구치의 연구는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다.황열병 연구가 틀린 것으로 드러나자 의학계는 노구치의 연구에 대해 대대적인 검증에 착수했다. 노구치는 생전에 소아마비, 트라코마, 광견병의 원인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었으나 결국 이러한 발표들도 모두 검증 불가로 결론내려졌다.[9] 실은 노구치의 생전에도 이미 그의 연구에 대한 의혹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사이먼 플렉스너 교수[10]가 그런 의혹들을 모조리 일축시켜 버린데다, 노구치의 연구에 대한 열정을 보아 설마하니 전부 오류일까, 라는 생각에 당시 다들 엄밀한 검증을 취하지 못한 게 그가 죽고 나서야 그의 연구 대부분이 검증 불가로 드러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연구 자체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구치가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혹은 발견한 세균이 정말로 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발표를 했다면 확실히 '조작'이겠지만, 당시의 의학으로는 바이러스라는 개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19세기 말 그 유명한 담배모자이크병 실험에서 '세균보다 작은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기는 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모습을 시각적으로 발견하는 건 전자현미경이 발명된 후에나 가능했다. 결국 당시 의학의 한계로 인한 착오와 함께 노구치 스스로의 연구과정의 문제 등으로 인해 '특정 세균이 원인'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당시 노구치는 자신이 개발한 황열병 백신을 스스로에게 투여했었다고도 한다.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서, 노구치가 죽기 2년 전인 1926년에 노벨생리학·의학상를 수상한 요하네스 아드레아스 그리브 피비게르가 있다. 그는 기생충인 S.carcinoma가 암을 일으킨다는 실험적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나, 실제 인간의 암 발생 메커니즘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노구치가 살던 100년 전 그 당시는 과학적인 연구 등이 급격하게 태동하던 시대로, 과학적 방법론과 권의주의적인 일부의학계의 한계로 인해 사실 관계를 확실히 검증하지 못 한 채로 틀린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도 노벨상까지 받은 연구는 얼마든지 있었다. 즉 현대인의 시각이 아닌 100년전 당시 시대상으로 감안해 보면, 노구치의 연구에 틀린 내용이 있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난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
1927~1928년에 그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논문 3편이 발표되어, 노구치가 잘못된 원인균을 발표하게 된 것은 황열병과 렙토스피라병을 혼동했기 때문임이 드러났다. 원인균 이전에 질병 자체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그 덕분에 오히려 노구치가 개발한 백신을 렙토스피라병에 대해서는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소아마비 병원체, 광견병 병원체, 황열병 병원체에 관련된 그의 업적은 사후에 부정당했으나, 뱀 독극물의 혈청에 관한 연구, 진행성 마비 환자의 뇌병리 조직에서 매독 병원체를 발견한 점, 페루 사마귀와 오로야 열이 같은 질환의 증상임을 증명하는 등, 여러 의학계 연구를 활발히 진행한 선구자적인 의학자라는 점에서는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브라운 대학교, 예일 대학교, 파리 대학교, 산 마르코스 대학교 등의 여러 명문대에서 명예박사 칭호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3.3. 생체 실험 논란
스피로헤타 연구 과정에서 그는 매독균을 미성년자에게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다만, 이시이 시로나 요제프 멩겔레 같이 길가는 사람 아무나 다짜고짜 잡아다 하진 않았고, 일단 당사자의 동의부터 얻었다. 하지만 동의가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독의 치료법을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비소화합물로 된 비소치료제를 주로 썼는데, 효과는 확실한 대신 부작용 또한 심각했다. 이 생체실험은 노구치 생전에도 비난을 받은데다가, 실험 대상이 된 청소년들의 부모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3.4. 낭비벽
물론 여기까지는 나름 그래도 공과 실이 있는 학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비판 받는 진짜 이유는, 업적이 의문시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성도 전혀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주색잡기로 인한 낭비벽 때문에 평생동안 금전 문제가 깨끗하지 못했다.노구치가 상경할 때 그의 은사는 자신의 월급을 거의 통째로 건네주었고, 그의 후원자였던 지와키 모리노스케는 당시 교사의 1달 월급인 12엔보다 많은 15엔을 매달 그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노구치는 지와키의 지원금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고 보다 못한 지와키는 그 후로 5엔씩 나누어 지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것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그의 월급은 고작 3엔에 불과했다. 이에 부족을 느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방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대로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신의 직장에서 고가의 전문서적을 대출한 후 팔아치우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 후 츠보우치 쇼요라는 작가가 쓴 책에, 시골에서 상경하여 도시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노노구치 세이사쿠'라는 이름의 등장인물이 나오자,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 노구치는 이후 이전의 행동을 반성하는 대신 '세이사쿠'였던 자신의 이름을 '히데요'로 바꿨다. 그 개명 과정조차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고향 근처 다른 마을에 살던 '세이사쿠'라는 사람에게 고향의 다른 노구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달라고 부탁해, 억지로 '노구치 세이사쿠'라는 동명이인을 만들어냈다. 그 후 "같은 마을에 노구치 세이사쿠가 2명 있으니 이상하다"는 이유로 다시 개명을 신청하여 합법적으로 개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틀림없이 돈이 오고 갔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페스트가 번지자 각국은 인도적인 목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노구치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이때 후원자인 지와키가 여비로 쓰라고 준 거금 96엔을 사치에 다 탕진해버렸고, 결국 돈이 떨어져서 청나라로 갈 수 없게 되자 지와키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 결국 지와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서 생긴 돈 5엔을 노구치에게 줬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구치는 청나라 및 러시아 정부에서 지급된 돈 2600엔을 모두 탕진하고 귀국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노구치는 부잣집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 약혼한 다음 처가에서 미국에 갈 돈으로 300엔을 지원 받았는데, 여기서 친구들을 불러 요정에서 호화판으로 놀다가 결국 수중엔 30엔만 남았다. 이미 그 전에 다른 곳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200엔도 받았는데도 말이다. 결국 총 500엔을 미국에 가기도 전에 다 탕진해버린 것. 그래서 노구치는 다시 만만한 지와키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고, 결국 지와키는 이번에는 사채업자에게서 300엔을 빌려서 노구치에게 주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결국 약혼녀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는 결혼하지 않고 미국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일종의 혼인빙자 사기를 저지른 것이다.
미국에 건너가서는 조교가 되었지만 월급은 고작 8달러였으므로, 고향에 편지를 보내 또 빚을 지었다. 그 후 승진하여 월급이 50달러까지 늘어났지만, 여전히 낭비벽은 사라지지 않아서 급료를 받은 날에 36달러나 써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노구치의 낭비벽은 당시부터 유명했고,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금세 빚을 지는 버릇은 여전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느 누구도 노구치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록펠러 연구소에 스카웃되어 연봉이 5천 달러까지 상승한다. 당시 일본 환율로 계산하면 노구치의 연봉은 1만 엔이었다. 동시기 일본 총리의 연봉이 1만 2천 엔이었고 미국인의 평균적인 연수입은 약 700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구치는 이런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본에 상을 받으러 갈 때는 돈이 없어서 일본에 있는 친구로 훗날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가 되는 호시 신이치의 아버지로 제약회사를 운영하던 호시 하지메에게 돈을 구걸했다. 일본에 와서 상금 1천 엔으로 그동안의 빚을 갚았는데, 이조차 빌린 액수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노구치의 평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노구치는 그러고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사치를 계속했고, 그 결과 그가 사후에 가족들한테 남긴 재산은 약 1만 3천 달러였다고 한다. 1928년 화폐가치로 1만 3천 달러를 가졌으면 미국이나 일본이나 잘사는 중상류층 수준이었지만, 1914년에 연봉을 5천 달러를 받게 되었고죽은 때는 1928년이니 저축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현대 한국으로 바꾸어 보면 연봉이 10억인데 사치를 하는데 바빠서 유산으로 30억 원쯤을 남긴 셈이다.
위의 행적을 읽어보면 그의 낭비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급여 역시 마치 그의 주색을 채워주려는듯이 계속 늘어났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떨어져나갈지언정, 얄밉게도 경제적으로는 끝까지 몰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낭비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남길 정도의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다.
4. 현 평가
일본의 1000엔권 지폐 E시리즈 (2004년~2024년) |
일본은 그를 일본의 슈바이처라 칭송하며 기리는가 하면, 2004년 새로운 1000엔권 지폐 도안을 나쓰메 소세키에서 노구치로 바꾸기도 했다. 또한 노구치의 생가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노구치 히데요 상이라는 것을 만들어서(한두 개가 아니다.) 노벨상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공적을 세운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2006년에도 노구치 히데요 아프리카상이 제정되어 2008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시상식을 열고 있다.
기존의 1,000엔짜리 도안의 인물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를 굳이 밀어내고 노구치가 들어간 것은, 아무래도 문과 일색인 화폐 도안에 굳이 이과를 하나 넣으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종종 제기된다. 일본에는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들이 있음에도 어이없을 따름이다. 게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현대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일본 내부에서도 이런 지적이 없던건 아니다. 일본 국내에서도 노구치 히데요가 돈 문제에 있어서 그리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여러번 재조명받았기에 알 사람은 알기는 하지만 정부차원에서 많은 부분이 거짓이라도 어쨌든 장애를 가져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인류를 위한 연구를 위해 자기자신을 희생했다는 좋은 사례를 그냥 묻어두기에는 아까운데다 노구치 히데요의 이름을 빌려 상을 만든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외국인을 위한 교재에도 노구치의 이야기가 실렸기에 자칫 돈 문제+위신 추락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노구치를 여전히 치켜 세우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2024년 부터 발행되고 있는 엔화 지폐에서 1000엔권의 인물을 바꾸기로 하였다. 신 도안의 인물은 남작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로 확정되었다. 이 사람은 페스트균의 발견, 파상풍 등 다수의 치료법을 개발하여 일본 의학의 발전을 이끌었던, 노구치와 달리 제대로 된 의사이며 노구치의 스승이기도 하다. 알렉상드르 예르생이라는 프랑스 의사가 비슷한 시기에 균을 발견하고 이 균의 설치류 발병과 전파 원인까지 증명해내 키타사토와 공동 발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근대 일본 의학의 아이콘이며 도쿄대 의학부의 전신인 도쿄의학교 출신으로 독일 유학을 통해서 당시 세균학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코흐에게 사사한다. 하지만 귀국후 모교인 도쿄대학과 척을 지게 되고, 결국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을 받아 전염병 연구소를 창립한다. 하지만 전염병 연구소의 운영권도 반강제로 1914년 도쿄대학에 뺏기게 되는데, 결국 전염병 연구소는 훗날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의 기원이 된다. 이렇게 자리를 잃은 기타사토는 사비로 기타사토 연구소를 설립하고 계속 연구를 진행한다.
기타사토 연구소는 현재 기타사토대학의 기원이 된다. 앞서 언급한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인연에 보답하기 위해서 기타사토는 1917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도해서 만들어진 게이오대학의 의학과 초대학장을 맡아서 학교를 발전시킨다. 기타사토는 당시 식민지 조선과도 인연이 있는데, 기타사토의 제자인 시가 기요시(志賀潔)는 유명한 세균학자로서 이질균 Shigella를 명명[11]한 당대의 학자이다. 시가는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 의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장,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을 거쳐서 1929년 경성제국대학 총장까지 역임한다.
사실 일본에 노구치 붐이 불기 시작했을 때가 1915년도인데, 100년이 넘은 후에도 국가 차원에서 이 기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5. 여담
- 국내 서점에 가면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위인전이 의외로 많이 출판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과거 출판계가 일본 서적을 가격 문제 때문에 번역+수정 편집 정도만 하고 거의 그대로 들여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벌어진 참상인데,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남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혈액형 성격설도 일본서적이나 방송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출판업자들이 혈액형 성격설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써서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남은 것이며,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가격 문제나 직접 취재해서 쓰는 것보다 베껴쓰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출판계에서 일본 서적을 복붙해 온 경우가 많았고, 방송계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는 않아서 상당수 프로그램 포맷을 일본에서 베껴오는 짓을 했다.[12]
-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닥터 노구찌>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도 정식 발매된 적이 있다. 만화 자체로만 보면 재미도 있고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명작이지만, 문제는 그 감동이 '이 만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한국에서 야인시대 같은 김두한 창작물을 바라보는 인식과 유사한 그것이라는 얘기다. 각각 김두한과 노구치라는 행적이 영 좋지 않은 사람들을 미화했다는 점이 공통이다. 정작 실상은 바탕이 된 실화가 상기에 서술된대로 거짓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심지어 이 만화에서 노구치 히데요는 놀 줄도 모르는 쑥맥으로 나온다. 물론 실제로는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하거나 엄청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절대 아니다. 다만, 술은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툭하면 술독에 빠진다.[13]
- 웹툰 작가 개호주가 상술한 닥터 노구찌를 통해서 존경한 인물이었으나 일본 여행 과정에서 진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노구치의 동인파락호스러운 모습에 존경했으니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한다.
- 구로다 가쓰히로는 <좋은 일본인, 나쁜 일본인>이란 책자에서 "한국 대형서점 문고에서 일본 위인으로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다"고 자랑했던 적도 있다.
- 2012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 외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재들에 한번쯤은 꼭 나온다. 아마도 일본어를 처음 배우는 이들은 예문으로 한번쯤은 접해보는 것이 노구치 히데요일 정도이다.
- Q.E.D. 증명종료에서는 연구 자료가 사라지는 에피소드에서 데이터 조작의 예시로 나온다. 과학 이론 등이 중요한 소재인 만화라 그런지 노구치 히데요의 실험에 대해 눈속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토마도 "일본인은 노구치에 대해 잘 모를 꺼다"라고 얘기한다.
[1] 사인은 황열병[2] 미국 국적의 여성이자, 노구치 박사와 동갑이며 1911년 노구치 박사와 결혼.[3] 평소 행실에 문제도 많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세균을 가지고 결과를 내기 위해 성급히 인체실험을 하는 등의 평소 행실이나 비윤리적인 연구 활동 등이 밝혀졌고, 심지어 과시욕과 낭비벽이 심했는 등 일단 깨끗한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명백히 확인된 사실이다.[4] 뱀의 독을 해독하는 혈청의 개발 및 매독이 유발하는 뇌병변 장애의 연구 등.[5] 사생활 문제야 어쨌든, 분명히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겠다는 숭고한 이상을 지녔던 것도 사실이다. 노구치 히데요가 최후를 맞은 곳은 오늘날의 아프리카의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로, 당시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곳에서 황열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그 곳으로 갔다가 본인이 이 병에 감염되면서 화를 입은 것이다. 물론 황열병은 바이러스성 질병이라서 당시의 의학기술로 병원체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노구치 박사는 그야말로 헛수고한 셈이었지만, 그 헛수고라고 해도 일단은 수백 마리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밤낮없이 실험을 하고, 감염자들의 증상과 경과를 살폈다. 순전한 과시욕 때문에만 전염병이 퍼지는 위험지대로 갔다고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6] 어느 위인전 연표에는 4월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7] 이 사람은 2024년 노구치를 대신해서 새 1000엔권의 인물이 될 사람이다.[8] 죽기 전에 황열병으로 고생하며 난 이 연구만 끝나면 죽어도 좋다 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9] 소아마비는 폴리오 바이러스, 트라코마는 클라미디아 트라코마티스, 광견병은 광견병 바이러스가 유발한다. 이 중 클라미디아 트라코마티스만 세균이고, 나머지 둘은 이름 그대로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병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다. 생물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를 생명체로 분류하지 않는다. 음식을 섭취해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이 없고, 번식에 반드시 숙주세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라기보단 되려 기계에 가깝고, 특히 박테리오파지는 생긴 것도 기계 같다.[10] 사이먼 교수는 미국의 의학 교육 및 의사 제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의학교육을 주장하는 플렉스너 보고서를 주관한 교육가인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형이다. 사이먼과 에이브러험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에이브러험은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사이먼의 의학교육에 관한 견해가 이 보고서에 강하게 반영되긴 했다. 이 플렉스너 보고서는 록펠러 재단이 후원하여 만들어진 보고서로, 당시 의학교육에 자금을 지원하려던 재단이 대체의학과 근대과학적 의학 중 어느 측이 더욱 양호한 의료효과를 보는지를 파악하고 그러한 곳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이 보고서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때까지 미국 의료계에서 한 몫을 하던 동종요법 등 대체의학들은 1920년대까지 모두 퇴출되었다가(당시 미국 내 대체의학교육 시스템은 매우 주먹구구식이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도 플렉스너 시스템 하에서 육성된 근대과학적 의사들이 주관하는 정도. 게다가 이 보고서는 의학 외 다른 학문에서의 대학교육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쳐서 결국 미국의 대학교육 개혁과 학문의 진보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어쨌든 이 정도로 사이먼 교수가 의학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그가 압력을 넣으면 다른 이는 감히 노구치의 연구를 파헤칠 수 없었던 것. 결국 권위가 만든 병폐라고 할 수 있겠다.[11] 세균에 일본인의 이름이 붙은 유일한 사례이다.[12] 그래서 1990년대 이전 서적을 보면 묘하게 일본식 표기나 일본의 시선으로 본 듯한 책들이 은근히 많다. 오죽하면 당시 위인전 전집에 전범기업의 대표 of 대표격인 미쓰비시 재벌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것도 있었다. 당대 한국인의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며, 굳이 전범이나 한일관계 등을 감안하지 않는다 해도 그 정도 급의 실업가들은 구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차고 넘치는 관계로 굳이 위인전에 올릴만한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일본에도 파나소닉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등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것 역시 일본에서 출간된 전집을 그대로 번역 출간하는 바람에 일어난 참사라고 볼 수 있다.[13] 냉정하게 보면 만화책에서 나오는 위인들이 덴마크의 여왕에게 인정받고 노벨상을 받은 핀센, 뮬러 헨리 포드, 토마스 에디슨 등 여러 유명한 인물들이 나오고 이 만난 인물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자신감을 얻는다. 게다가 이런 유명한 인물들이 일본의 듣보잡 학자를 만날 리가 없다. 그리고 윗 항목 낭비벽에 직장에서 고가의 전문서적을 대출한 후 팔아치우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 일화를 마치 동료를 감싸기 위해 자진 누명을 쓴 듯한 묘사로 나온다. 픽션으로서의 완성도도 높은 편은 아니라, 결국 뭐든지 노구치 히데요의 인격, 의료실력으로 해결하고 라이벌(노구치와 같은 전염병 연구소 동기로, 좋은 환경에서 자라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인지라 대학도 못 나온 촌놈 노구치를 무시하는데 라이벌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같은 연구소 일원일 때나 잠깐 괴롭히지 이후 사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매번 처참하게 짓밟힌다.)은 뒤에서 찌질거리다 낭패를 본다는 식의 단편적인 전개만 계속 반복된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꽤 인기를 끌었는지 일본에서도 출간되지 않은 애장판이 '닥터 노구찌 디럭스' 란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참고로 작가는 1955년생 만화가인 '무츠 토시유키' 로, 일본에서의 대표작은 '명문! 제3야구부' 라는 야구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