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京城帝國大學, ruby=けいじょうていこくだいがく)][1] 경성제국대학 Keijō Imperial Univers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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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표[2] | 예과 교표[3] | }}} | ||
<colbgcolor=#003380><colcolor=#fff> 분류 | 제국대학 (국립) | |||
개교 | 1924년 5월 2일[4] (다이쇼 13년) | |||
명칭 | 경성제국대학 (1924년 5월 2일~1945년 10월 16일) →서울대학(경성대학)[5] (1945년 10월 17일~1946년 8월 22일) | |||
폐교 |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의거 서울대학교로 통합하여 해체) | |||
국가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조선) (1924년 5월 2일~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미군정 (1945년 9월 8일~1946년 8월 22일) | |||
소재 | 대학본부 및 법문학부: 경성부 종로구 동숭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6] 의학부 및 부속병원: 경성부 종로구 연건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7] 이공학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캠퍼스) 예과: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청량리정 (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청량리 미주아파트)[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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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제국대학 본관[9] |
한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12]으로 조선의 최고학부이자 유일한 대학(구제)이었다. 또한 경성제대는 대륙 지역에 세워진 유일한 제국대학으로서 초대 총장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취임사에서 동양문화의 권위가 될 것을 표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중국 연구를 사명으로 삼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몽골 개발을 위한 국책연구기관으로서 기능이 강조되었다. 대만에 세워진 다이호쿠제국대학이 대만과 동남아로 이어지는 남양 연구에 특화한 것과 많이 비교된다.
1924년 개교와 함께 예과가 설치되었고, 예과 1회 수료생이 학부로 진학하는 1926년에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1938년 이공학부 예과 과정이 설치되었고 1941년 이공학부가 신설되었다. 1945년 종전 당시를 기준으로 경성제대의 조직은 본부, 부속도서관, 예과[13], 법문학부[14] 및 부속 조선경제연구소[15], 의학부[16] 및 부속 생약연구소[17] 이공학부[18], 고지요양연구소[19], 대륙자원과학연구소[20]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어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 에 따라 9개 전문학교와 함께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공과대학, 법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2. 교정 및 건물
경성제국대학 캠퍼스 위치 |
경성제국대학 교정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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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경성제대 풍경 |
경성제국대학 정문[21] |
경성제국대학의 교정 |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 |
경성제국대학 건물배치도 |
경성제국대학 정문(上) / 부속도서관(下) |
법문학부 본관(上) / 의학부 본관(下) |
의학부 부속의원(上) / 예과 교지(下) |
3. 연혁
경성제국대학 예과 |
- 1921년 4월: 제국대학예과 입시자격 보습과(2년제)[22] 설치
- 1922년 2월 4일: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및 조선제국대학 설립 본격 착수[23]
- 1922년 7월: 대학예과 학교부지(청량리) 확보
- 1923년 4월: 대학예과 본관 착공[24]
- 1923년 10월: 조선총독부, 조선제국대학 초대총장으로 동경제국대학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 교수 초빙
- 1923년 11월 27일: '조선제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위원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25])발족
- 1923년 12월 6일: 조선제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
- 1923년 12월 15일: 조선제국대학 예과 교사 완공[26]
- 1924년 1월: 조선총독부 고시9호로 학무국내에 '예과개설준비사무소' 설치
- 1924년 1월 11일: '조선제국대학 신입생 모집요강'[27] 발표
- 1924년 3월 18일[28]: 조선제국대학 예과 신입생 입학시험 실시
- 1924년 3월 30일: 조선제국대학 예과 제1회 합격자 발표
- 1924년 4월 : 조선제국대학 설립에 관한 칙령, 법제국 심의[29]
- 1924년 4월 19일: 경성제국대학 칙령안 내각회의를 통과해 추밀원에 상정[30]
- 1924년 4월 30일: 추밀원 본회의에 경성제국대학 관련 칙령안 상정[31]
- 1924년 5월 2일: '경성제국대학관제'[32]가 반포•시행되어 경성제국대학 설립[33]
- 1924년 5월 3일: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찬과장 오다 쇼고 임명
- 1924년 5월 5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낙성식
- 1924년 5월 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1회 신입생 선서식
- 1924년 5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1회 입학식
- 1924년 5월 12일: 제1회 신입생 수업 시작(예과 개강)
- 1924년 6월 12일: 경성제국대학 개교기념식[34]
- 1924년 9월: 예과 기숙사((進修寮) 준공 및 입주
- 1926년 3월 15일: 예과 제1회 수료식
- 1926년 4월 1일: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 초대 총장 부임
- 1926년 5월 1일: 법문학부 및 의학부 개설
- 1929년 3월 25일: 법문학부 제1회 졸업식[35]
- 1930년 3월: 의학부 제1회 졸업식[36]
- 1938년 4월 15일: 이공학부 설치 결정[37]
- 1941년 4월 1일: 이공학부 개설
- 1943년 9월: 이공학부 제1회 졸업식[38]
- 1945년 8월 16일: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설립
- 1945년 9월 8일: 미군정, 경성제국대학 공식 인수
- 1945년 10월 17일: 경성제국대학(Keijo Imperial University)을 경성대학(서울대학, Seoul University)으로 개칭[39]
- 1945년 10월 18일: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 박사가 경성대학 총장(The President of Seoul University)으로 부임(참조)[40]
- 1945년 12월: 미군정 학무국, '종대안'[41] 검토
- 1946년 7월 13일: 미군정 문교부, '국대안' 발표
-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 공포 시행으로 당시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으로 대체되면서, 구제 경성대학을 포함하는 신제대학 국립서울대학교로 흡수하여 폐교
4. 설립
일본 제국에서는 1918년 12월 6일 칙령 제388호로 대학령(1919년 4월 1일 시행)이 공포되어 그 때까지 5개 밖에 없었던 제국대학외에도 관립/공립/사립대학 설립이 가능해졌다.[42] 이에 맞추어 1919년 2월 7일에는 칙령 제12호(1919년 4월 1일 시행)로 제국대학령도 개정된다.순번 | 대학명 | 설립연도 |
1 | 도쿄제국대학[43] | 1886년 |
2 | 교토제국대학 | 1897년 |
3 | 도호쿠제국대학 | 1907년 |
4 | 규슈제국대학 | 1911년 |
5 | 홋카이도제국대학 | 1918년 |
6 | 경성제국대학 | 1924년[44] |
7 | 다이호쿠제국대학 | 1928년 |
8 | 오사카제국대학 | 1931년 |
9 | 나고야제국대학 | 1939년 |
조선총독부는 1919년 발표한 조선학제개정안요령을 근간으로 조선에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구제고등학교-구제대학으로 이어지는 학교 시스템을 완성안을 작성한 후, 1920년 12월 23일 임시교육조사위원회[49]를 설치하여 1921년 1월과 5월에 내지준거주의에 의거한 조선교육령 개정안을 심의·확정하였다. 여기서 '대학·대학예과 등은 내지의 제도에 준거한다'고 하여 대학 설립을 사실상 확정하였다.
동시에 1921년 4월에 학제 개정 이전 4년제였던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에게 대학 예과 입시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보습과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부설하였고, 1922년 1월 23일 칙령 제6호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규정'을 공포해 대학 예과 및 학부 교수요원 확보에 나섰다. 그리고 보통학교를 소학교와 같은 6년제로, 고등보통학교를 구제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로 연장하는 총독부의 신학제안이 1922년 1월 25일 추밀원 심의를 거쳐서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공포된 2월 6일 당일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대학예과를 1923년, 학부본과는 1925년에 개교한다고 발표하였다.[50]
이렇게 확정, 공식화된 대학설립 방안은 예산 확보의 문제로 1년이 지연되어, 1923년 5월 3일에 대학예과 부지 지진제(地鎮際)를 거행하고 5월 5일 예과본관 기공식을 거쳐 12월 15일 준공 낙성식을 치렀다. 1923년 11월 27일 '조선제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가 발족하고, 1924년 1월 11일 신입생 모집요강을 발표했다. 조선제국대학은 본래 1924년 4월 1일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일본 제국 중의원 해산과 맞물려[51] 연기되었고 4월부터 이뤄진 내각 법제국의 심사에서 대학 종류[52], 명칭[53] 문제로 이견이 있어 명칭을 '경성'으로 변경하는 대신 제국대학으로 하기로 절충되었다. 이어서 추밀원의 심사를 거쳐[54][55][56] 4월 30일 최종 통과하고 1924년 5월 2일 칙령 제105호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의한다는 건'[57]으로 확정되었다.
관제 등 법령 공포에 따라 1926년 5월 2일부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5월 10일 개교식을 갖고 5월 12일부터 예과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 예과 1회 신입생들이 2년의 예과 과정을 마치고 1926년 3월 15일 제1회 수료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들이 학부 본과로 진학하는 1926년 4월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개강하였다. 이어 1938년 예과에 이공학부 신입생이 입학하고 이들이 학부로 진학하는 1941년 이공학부가 개강하면서 3학부가 완성되었다.
강좌제로 구성된 제국대학으로서(제국대학령 참조), 경성제대는 1945년 광복 당시 기준으로 법문학부 49개 강좌, 의학부 27개 강좌, 이공학부 39개 강좌가 개설되어있었는데 1926년 당시 법문학부는 23개 강좌, 의학부 12개 강좌 도합 35개 강좌로 출범하여,[58] 1928년 법문학부는 49개 강좌가 완성되고 의학부 26개 강좌, 1930년 의학부 27개 강좌가 모두 갖추어졌다. 이공학부는 1941년 24개 강좌로 시작해 1942년 37개 강좌, 1943년 39개 강좌가 완성되었다.
5. 예과
예과 교표 및 예과 교사 |
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
예과 깃발 및 간판 |
1924년 설립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도 내지의 구제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문과와 이과를 두었는데 문과 80명은 법문학부 법과 진학생반인 문과A(40명)와 법문학부 문과계 진학생반인 문과B(40명) 등 2개반으로 나뉘어있었고, 이과로 선발된 80명은 모두 의학부로 진학하였다. 그런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세계적으로 경제대공황이 발생하는 등 경기가 위축되고 조선인들 사이에도 고등문관시험 응시 열풍이 불면서 시간이 갈수록 법학 선호 풍조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법학과로 재입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62] 예과의 문과B반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이 법학과로 진학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렇게 발생하는 법문학부 문과계의 결원은 구제전문학교 출신들의 입학을 받아서 채우게 되었다고 한다.[63]
1934년 제11회 신입생부터 예과의 수학연한이 3년으로 연장되면서 이와 같은 구분 대신, 학과 진학과 무관하게 외국어(영어, 독일어)로 반을 구분하였다. 또 이공학부 설치가 결정되면서, 1938년 4월 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이 개정될 당시 문과와 이과를 각각 갑류와 을류로 나눌 것을 명문화하고 같은 문과/이과 내부에서도 갑류와 을류 사이에 교과목과 교과시간을 달리 편성하였다.[64] 이에 따라 예과 제15회 신입생부터 이과도 이공학부 진학반인 이과갑류(理科甲類)가 신설되었고, 의학부 진학반이었던 기존 이과가 이과을류(理科乙類)가 되었다. 그 결과 경성제대 예과는 文科甲類(40명), 文科乙類(40명), 理科甲類(40명), 理科乙類(80명) 등 4類(총 200명) 체제가 되었다.
예과는 학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므로 자동 진급되는 것이 아니라 매 학년이 끝난 후 평소 학업과 시험 성적을 평가해 학년 수료를 인정받아야했으며(예과규정 19조), 여러 조건[65]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진급이나 수료가 인정되지 않아(예과학칙 27조) 유급을 당하게 되었다(예과학칙 28조).[66] 매 학년은 4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1학기, 8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 2학기,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3학기로 구성되고(예과학칙 제2조), 3월 16일부터 4월 9일까지 춘기휴업과 7월 11일에서 8월 20일까지 하기휴업 그리고 12월 25일부터 1월 14일까지 동기휴업 등의 방학이 있었다. 수업료는 4월에 내는 제1기 30원, 9월에 납부하는 제2기 30원, 1월 제3기가 15원이었다(예과학칙 제36조).[67]
예과 교사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68], 오늘날 주소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35번지, 청량리역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1966년 12월 동숭캠퍼스에 과학관(科學館)이 준공되어 문리대가 전부 舊법문학부 캠퍼스에 집결하기 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의예과[69] 건물로 사용되었다.[70]
이후 청량리캠퍼스는 1971년 총무처에 의해 민간에 불하되어 예과 본관건물은 서울동산병원[71]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부터 한림대학교 치과병원 및 의대 강의실, 세미나실로 이용하였으나 2015년에 철거되었다.[72] 정문이 있었던 자리에는 치과, 안과, 부동산, 비만클리닉, 고시학원 등이 밀집한 복합상가가 들어섰고, 운동장 자리에는 현재 동대문세무서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청량한 느낌을 줬다는 교사 뒷편의 소나무숲에는 청량리 미주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출처).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가
5.1. 제도 도입
자세한 내용은 구제고등학교 문서 참고하십시오.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일본 제국의 학제는 소학교-중학교(구제)-고등학교(구제)/대학예과-구제대학(본과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래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은 모두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에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예과 역시 졸업하면 대학 학부로 진학이 가능하였으나, 오늘날 의예과와 같이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소속 대학 본과에 진학(무시험 최우선 입학)할 수 있다는 점이 고등학교와 다르다.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도쿄·교토·도호쿠·규슈와 달리 예과 제도를 채택했다. 이는 바로 앞서 다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예를 본뜬 것이었는데, 제국대학이 설립되는 1918년 당시의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제고교인 다이호쿠고등학교(臺北高等學校)가 설치되어 있었던 1928년 대만에 설립된 다이호쿠제국대학은 부속예과 없이 2학부[73]만 두었다. 반면 구제고등학교가 없었던 조선에 제국대학 학부만 설립될 경우, 조선인들과 재조선 일본인들은 일본·대만·관동주 등 타 지역의 구제고교로 진학하여 졸업해야만 경성제대에 입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일본 제국 전역에서 진학열이 폭발하던 다이쇼 시대로, 1918년 12월 대학령 공포와 함께 고등학교령이 개정된 후 일본 각지에 구제고등학교가 증설되어 고교 졸업생 숫자가 전체 제국대학 입학정원을 초과하면서 지원이 몰리지 않더라도 학부 입학 탈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참조).[74] 1918년 제2차 고등학교령 공포 전까지 이른바 '넘버스쿨'이라 불린 제1~8고교만 존재했는데, 고등학교령이 개정된 후인 1919년부터 1923년까지 18개의 '네임스쿨'이 개교했으니[75]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 제국대학이 신설되더라도 내지에서 구제고교를 졸업한 일본인들이 쇄도해 조선인과 재조선 일본인들의 경성제대 진학 가능성이 낮을 것이 우려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1919년부터 대학 설립을 추진해온 조선총독부는 1921년 1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 1차 심의에서 '대학과 대학예과는 내지의 제도에 준거한다'고 하여 이미 제국대학예과 형태로 설립할 것임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설립으로 조선에 앞서 1918년 제국대학 승격이 이뤄진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삿포로농학교의 '예수과(預修科)'를 모체로 제국대학예과를 설치했던 것을 참고하여, 조선총독부는 [76] 특히, 총독부는 내지로부터 유입되는 일본인들로 인한 경쟁을 낮추기 위하여 예과 1회부터 입학시험 시행일을 내지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 날짜와 동일한 1924년 3월 18일로 잡았다.[77][78]
당시에도 '고등학교'가 아니라 '제국대학예과'가 설치되는 데 논란이 있었으나, 홋카이도제국대학에만 존재하던 생소한 제도라 일반에 생소했기 때문이었으며 경성제대 초대 예과부장 오다(小田省吾)는 인터뷰에서 '2년 동안 이수하는 학과목이나 그 관제는 물론 예과부장, 교수, 조교수, 생도감 등의 제도와 설비와 편성, 교원, 교과서 등은 모두 대학령에 의거한 고등학교 고등과의 규정을 습용한 것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내지의 고등학교의 그것들과 동일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경성제대 예과는 내지에서 매해 진행된 구제고등학교들간의 정기교류전에 초청되어 참가했으며 다른 구제고교들과 일대일로 구기종목 인터하이를 치르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구제고교 38개교(관립 31개교)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구제고등학교 자체가 제국대학의 예과 성격으로 출발한 학교로서 1918년 고등학교령의 개정 이전까지 전문학부[79]가 아닌 제국대학 진학준비반의 명칭이 대학예과[80] 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것이다. 제국대학으로 진학이 보장된 고등학교는 관립은 물론이고 공립(3개교)와 사립(4개교. 참조)까지 모두 구제고교로서 인정받았으나, 관립대학 예과 3개교는 대부분의 경우 포함되고 있지 않으며[81] 공립대학 예과와 사립대학 예과는 자칭 고등학교의 명칭을 썼을지언정[82] 구제고교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제국대학예과는 각 제국대학에 부속된 기관이었기 때문에 예과를 수료하고 타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려는 학생은 사유서를 써서 예과부장의 허가를 득해야 했다(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 제18조 참조)[83].
경성제대 예과에 있어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예과'의 형식이 아니라 그 수학연한이었다. 3년제였던 내지의 구제고교들과 달리 1924년 개교 당시 경성제대 예과는 2년제로 출발했는데,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의 위상이 내지의 구제고교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인식이 있었고, 1934년 제11회 신입생부터 경성제대 예과는 내지의 구제고등학교들과 동일한 3년제로 개편되었다.[84] 그러나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시행한 학제 개혁안(상세내용 제2차 고등학교령 참조)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18년 대학령과 함께 공포된 제2차 고등학교령에서는 대학예비교육을 행하던 구제고교를 '남자의 중등교육을 완성하는 기관'으로 변경함과 동시이 고등학교 본과의 명칭을 대학예과에서 고등과로 개칭하며 5년제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와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과(3년)를 통합한 7년제 고교를 기본으로 두고, 예외적으로 고등과로만 구성된 고교도 가능하게 해 기존의 3년제 구제고교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그러한 3년제 고교 입시의 응시자격을 기존의 구제중학교 5년 졸업생에서 4학년 수료생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도쿄고교, 다이호쿠고교 등 관립고교 2곳을 포함해 도야마고교, 나니와고교, 부립고교 등 공립 3개교 및 무사시고교, 코난고교, 세이케이고교, 세이조고교 등 사립 4개교는 전부 7년제로 신설되었고 기존 3년제 기존 구제고교들도 중학교 4학년에게 입시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대학령 제13조는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 또는 2년으로 한다"고 규정하면서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 제4학년을 수료한 자"로 그리고 "수업연한 2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지의 구제고등학교가 구제중학교 4년 수료자에게 입학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한 것과 다르게 경성제대 예과 입시는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포함) 5년 과정을 마친 졸업생을 대상으로 실시되므로 2년제로 개교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학제개혁안은 정착되지 못해서 7년제 관공립 고교들이 대부분 오히려 심상과를 폐지하고 3년제 고교로 변화하게 되고, 4학년 수료생이 고교입시를 통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내지의 7년제 구제고교들이 3년제로 이행하는 시점인 1934년에 경성제대 예과도 3년제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5.2. 입시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직원 및 생도 일동 |
경성제국대학 교복[85] |
그리고 1924년 경성제대 예과의 설립은 "입시의 화마에 기름을 부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경성제대(예과)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서열화 구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학생들 거의 모두의 목표는 경성제국대학 입학이 되었고, 예를 들며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생 80~90명 중 20~30명이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 응시했는데 그 중 합격자는 매년 1~2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극소수였고 해마다 지원자가 합격자의 10~15배나 될 정도였으니 학교마다 경성제대 합격생 수를 두고 경쟁이 붙었다.[88] 그 결과 오늘날 고교별 서울대 합격생으로 평가받는 것과 유사하게 조선에 소재한 중등교육기관들은 경성제대 예과 합격생 숫자로 그 서열이 매겨졌던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진성 교수는 「경성제국대학의 입학 및 졸업 기회의 차등적 배분」에서 일제강점기의 경성제대 입시와 고교서열화를 정리한 바 있는데, 예과 1회(1924년 입학)부터 이공학부 신입생 선발이 이뤄지기 시작하기 전인 14회(1937년 입학)까지 경성제대 예과 입학생의 출신 구제중학교 분석 결과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가 430명을 기록해 압도적 1위였으며, 252명의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등학교)와 182명을 배출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가 2위와 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경성제대 예과의 조선인 학생회였던 '문우회(文友會)'(출처) |
1924년 개교 당시 4:1 수준(160명 모집에 조선인 241명, 일본인 406명 등 도합 647명 지원)이었던 입시 경쟁률은 이듬해인 1925년 5.5:1(884명 지원)으로 올라갔고 1930년에는 10.6:1(1701명 지원)을 돌파하는 등 급격히 상승하여 12:1을 넘어서는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 경성제대 개교 당시인 1920년대에는 일본 내지에서도 진학열이 끓어넘치는 시기였고,[91] 1910년대에 오직 넘버스쿨 8개교에 불과했던 구제고등학교가 38개교까지 추가설치되기 때문에, 다른 제국대학들의 입시가 치열해지는 것과 동조적으로 경성제대 예과 입시도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내지에서는 조선에서 가까운 규슈에서 특히 경성제대의 선호도가 높아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는 일본인 학생 중 상당수가 규슈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1924년~1943년 신입생들의 본적지 통계자료에 따르면,[92] 도도부현 순위는 1위 경기도경성부, 인천부, 개성부 포함 290명, 2위 후쿠오카현(福岡) 204명, 3위 야마구치현(山口) 162명, 4위 히로시마현(廣島) 118명, 5위 가고시마현(鹿兒島) 115명, 6위 충청남도대전부 포함 110명, 7위 나가사키현(長崎) 107명, 공동 8위 평안남도평양부, 진남포부 포함 및 경상북도대구부 포함 101명, 10위 함경남도원산부, 함흥부, 흥남부 포함 100명, 11위 오이타현(大分) 97명, 12위 도쿄도 93명, 13위 구마모토현(熊本) 91명, 14위 사가현(佐賀) 88명, 15위 평안북도신의주부 포함 87명(이하 생략)이다. 이를 보면 상위 등수에 후쿠오카(2위), 가고시마(5위), 나가사키(7위), 오이타(11위), 구마모토(13위) 사가(14위) 등 규슈의 각 지방[93]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규슈에 가까운 야마구치(3위), 히로시마(4위)가 합격자를 다수 배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인연에서 덕택인지, 경성제대와 규슈제대는 매년 축구부 시합을 포함해 정기전을 개최하는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94]
본관 앞 운동장에서 예과 생도들 |
아니나 다를까, 치열한 입시 경쟁의 와중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사와 잡지 등 민족언론은 경성제대 설립 직후부터 조선인 입학기회가 낮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여론을 환기했으며,[95] 1934년 경기도의회에서는 조선인 도의원 21인의 찬성으로 조선인 입학비율을 늘려달라는 공식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96] 조선인 비율이 너무 낮으니 늘려달라는 주장은 1945년 패전 때까지 여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예과 1회 신입생을 선발했던 1924년에 29%에 불과했던 경성제대 신입생 중 조선인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소학교 입학때부터 1922년 전면개정된 조선교육령(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른 내선공학 교육을 받고 자란 조선인들이 입시를 치르는 1930년대 중반이 되면 40%대로 올라섰다. 특히 종전 이전 마지막 졸업생인 1942년 예과입학생을 학부별로 보면 법문학부 68명 중 33명(49%), 의학부 64명 중 29명(45%) 등 50%에 근접하였으나 당시 일본 내/외지의 학교를 막론하고 최고 인기학부였던 이공학부가 50명 중 10명(20%)으로 조선인 비율이 특별히 낮아서 전체적으로는 182명 중 72명으로 40%에 그치게 되었다. 비교대상으로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1941년 입학생 내역을 보면 경성제대의 법문학부에 해당하는 문정학부 33명 중 2명(7%), 이농학부 48명 중 1명(2%), 의학부 19명 중 14명(74%)으로 총 100명 중 17명이 대만인이었는데, 이와 비교하면 조선인의 문과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1936년 일본에서 출판된 입시문제집 입시요강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구제고등학교처럼 문과는 갑(甲), 을(乙)류로 구성되어있고, 이 중 갑류반은 수료 이후 법문학과 법학과, 을류반은 철학과나 사학과로 진학하는 걸로 정해져있었다고 한다.[97] 반면 이과는 이 당시 의학부만 존재했기때문에 이과생이면 곧 예비 의대생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시험문제의 경우 매년 미세하게 다르긴 했지만 1936년의 경우 문과는 국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국문법), 영어(영문해석, 영작문, 듣기평가), 수학, 일본과 만주 지리 과목문제가 출제되었고, 이과는 국영수까지는 똑같지만 이과과목으로 동식물 과목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각각 국한문 200점, 영어 200점, 수학 200점, 선택과목 150점으로 총 750점 만점이었다고.#
다만 전체적으로 난이도는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 입시문제와 비슷한 편이며, 당연하겠지만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 등등 일본 본토의 제국대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이는 당연한게, 일본 본토의 제국대는 이미 예과과정이나 마찬가지인 구제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이들이 치르는 시험이었으니 당연히 난이도에서 확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입시 문제는 오늘날의 수능처럼 신문에 공개되었다. 1928년 예과 5회 영어 시험에 대한 평가는 링크 참조. 역사과 문제 일부만 전재하면 아래와 같다.
- 1925년문1.(총점 100)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정책에 대해 쓰시오.2) 동주시대의 미술·공예에 대해 쓰시오.3)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藏人所(구로도도코로)[98]- 藤原隆家(후지와라노 타카이에)[99]문2.(총점 100)4) 송대의 유학에 대해 쓰시오.5)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鄭和(정화)- 尼布楚條約(네르친스크 조약)
- 1930년(총 100점)1. 메이지 시대 조약개정 문제의 경과에 대해 쓰시오.2. 헤이안 시대의 미술과 공예에 대해 쓰시오.4. 에도 시대 번주를 뽑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쓰시오.
- 1931년(총 100점)1. 파리강화조약 이후 산동문제의 교섭과 해결 과정에 대해 쓰시오.2. 지나(중국)의 약도를 그리고, 아래 지명을 표시하시오.- 낙양, 장안, 건강, 함양, 개봉, 임안, 연경, 무창3. 명대의 기독교 동진(東進)에 대해 쓰시오.4. 다음 각 항에 대해 쓰시오.A. 개원의 치C. 고증학D. 임칙서
- 1934년국사(일본사) 총 100점1. “건무중흥”에 공을 세우고 근왕한 여러 장수들에 대해 쓰시오.3. 다음 항목들에 대해 설명하시오.A. 豊受大神(토요우케오오카미)[100]B. 臨濟宗(임제종)C. 本朝通鑑(본조통감)[101]
6. 학부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등 3개 학부로 구성되어있었다. 경성제국대학학부에관한건(1938.4.15) 참조.6.1. 법문학부
의학부에서 바라본 법문학부 본관(중앙)[102] |
설립 초기에는 산하에 법률학과•정치학과•문학과•사학과•철학과를 두었으나, 1927년 법률학과•정치학과를 법학과로 통폐합하고 1943년 문학과•사학과•철학과를 문학과로 합치면서 법문학부는 법학과와 문학과의 2개과로 구성되었다. 문학과가 문학과•사학과•철학과로 나뉘어있던 시절 문과 학생은 학부 1학년을 마칠 때까지 전공을 정하여 법문학부장에게 제출하도록 되어있었다(법문학부규정 제30조). 다만 당시 일본의 제국대학은 강좌제로 운영되어 대학-학부-강좌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107] 학과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강좌령을 봐도 학부에 소속된 강좌들의 구분되어 있으며 제국대학령에도 학과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108] 단 경성제대 법문학부는 법학부와 문학부를 합친 통합학부의 성격을 갖고 있어 법학과와 문학과가 일종의 소학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법학과는 법률, 정치, 경제 등 사회과학을 담당하는 학과로 내지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초반에는 세부전공 없이 운영되다가, 1935년부터 1류(사법), 2류(행정), 3류(경제)로 전공 코스를 구분하여 운영하였다(《삼천리》(1941년 3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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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는 어문,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을 담당하는 학과로 내지 도쿄제국대학 및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출범시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등 3개 학과가 설치되고 세부전공으로 국어학/국문학[109], 조선어/조선문학, 지나어/지나문학[110], 외국어/외국문학[111], 국사학[112], 조선사학, 동양사학, 철학/철학사, 종교학/종교사, 미학/미술사학, 윤리학, 교육학, 지나철학[113] 등의 전공코스를 두었으나, 전시 총동원 체제 돌입과 함께 1943년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가 문학과로 통폐합되었으며, 이때 세부전공으로 사회학을 추가 신설하였다. 이들 전공은 '한편으로 지나와의 관계 또 한편으로 내지와의 관계로 널리 여러 방면에 걸쳐 조선 연구를 행하고 동양문화 연구의 권위가 된다고 하는 것'이라는 경성제대의 사명과 직결된 연구 중심이었다.
- 국사학/국어학/국문학/조선사학/조선어학/조선문학/지나철학/지나어학/지나문학/동양사학/서양사학/외국어학(영어학)/외국문학(영문학)/철학/철학사/심리학/윤리학/교육학/미학/미술사/고고학/사학개론/지리학/언어학/문학개론/조선어/지나어/동양어/러시아어/희랍어/라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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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의학부
법문학부에서 바라본 의학부 본관 전경 |
의학부 제1회 졸업생 단체사진 |
- 해부학: 계통해부학/조직학/해부학실습/조직학실습 및 현미경사용법/태생학/국소해부학
- 생리학: 생리학/생리학실습
- 의화학: 의화학/의화학실습
- 미생물학: 미생물학/기생충학/미생물학 기생충학 실습/면역학 및 실습
- 약리학: 약리학(처방학 포함)/약리학 실습
- 병리학: 병리총론/병리각론/부검시설/병리조직학실습/병리해부실습
- 위생학예방의학: 위생학 예방의학
- 법의학: 법의학
- 내과학: 진단학 및 실습/내과각론 및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외과학: 외과학총론/붕대실습/외과각론 및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외래수술 실습
- 정형외과학: 정형외과학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산부인과학: 산과학, 부인과학/산부인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산과모형 실습
- 피부비뇨기과학: 피부과학/비뇨기과학/피부과, 비뇨기과 임상강의/피부과, 비뇨기과 외래환자 임상강의
- 안과학: 안과학/안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검안법 및 시기검사법실습
- 이비인후과학: 이비인후과학/이비인후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이비인후검사법 실습
- 소아과학: 소아과학/소아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종두실습
- 신경정신과학: 신경과학, 정신과학/신경과, 정신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방사선의학: 방사선의학/방사선의학 임상강의
- 치과학: 치과학 및 임상강의
- 과외 강의: 의학사/의사법제/사회의학/비교해부학/인류학/유전학/의심리학/특별강의
6.3. 이공학부
이공학부 본관 |
제5대 하야시 총장이 강력하게 주장해온 이공학부의 개설은 중일전쟁 개전으로 이공학부 증설 주장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조선총독부에 의해 1937년 실현 단계에 접어들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115]의 16만 평이 넘는 부지에 이공학부 캠퍼스 공사가 시작되었다. 광대한 교지가 필요한 이공학부의 특성상[116]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있는 대학 본부 근처에 캠퍼스를 마련하지 못했고, 타 학부 캠퍼스와 다소 떨어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건설하게 되면서, 총독부에서는 이공학부 통학을 위해 경춘선을 이곳 바로 앞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여[117] 1939년 여름에 개통된 경춘선과 함께 통학에는 경원선 연촌역(硯村驛)이 함께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38년 4월 15일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1941년 1월 1일부 시행)이 개정되어 경성제국대학의 학부로 기존의 법문학부, 의학부에 이공학부가 추가되었다.[118] 1938년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서 이공학부 진학생(이과甲類)[119]들을 선발하기 시작하여 이들이 예과 3년 과정을 수료한 1941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규정'[120]이 제정됨에 따라 물리학과·화학과·토목공학과·기계공학과·전기공학과·응용화학과·광산야금학과 등 7개 학과로 구성된 이공학부(본과)가 정립되었다.
그런데 1937년부터 시작된 이공학부 교사 신축공사가 동년 개전한 중일전쟁의 여파로 원자재 배급 및 예산 배정에서 후순위로 밀리면서 완공이 지연되었고, 특히 철근 등 철제 보급이 안 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이공학부 제1회(예과 제15회) 37명은 1941년 4월부터 1942년 4월까지 1학년을 대학로(서울)의 법문학부와 의학부 교실을 빌려 수업을 받으면서, 법문학부 북쪽 교실과 학생집회소의 서쪽에 가교실과 가제도실을 신축하고 법문학부의 남쪽에도 온실과 가창고 등을 지어 당시 이공학부의 부족한 시설로 사용했다. 1941년 9월 22일 이공학부 4호관 상량식을 치르고 1942년 4월 경성제대 이공학부 신축교사가 일부 준공되면서 이공학부 캠퍼스에 입주하게 되었고, 1943년에 이공학부 2호관도 완성되어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21]
이공학부 제1회 학생들은 1941년 3월 예과를 제15회로 수료하고 동년 4월 이공학부에 진학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3학년을 마치고 1944년 3월 졸업하였어야 하나,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각급학교의 수학연한이 단계적으로 단축(3개월→6개월→1년)됨에 따라 1943년 9월 졸업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공학부는 1944년 9월 제2회, 1945년 9월 제3회 등 1945년까지 3회 졸업생 총 110명을 배출했다. 제1회 졸업생(예과 15회) 42명 중 조선인은 12명이고 2회 9명, 3회 11명 등 조선인 32명(일본인 포함시 총 110명)이 경성제대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이학사/공학사를 받았는데 이 중에는 수학자 이임학, 기계공학자 김희철, 조선공학자 김재근, 전기공학자 한만춘 등이 있었다. 또 해방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은 3학년 25명, 2학년 19명, 1학년 17명 등 총 61명으로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조선인 학생은 졸업생과 재학생을 합쳐 총 93명이었다고 한다. 포항공대 장수영 교수 글을 참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과학사 연구의 원로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이성규 교수의 논문 이공학부를 중심으로 본 경성제국대학의 식민사적 의미를 참조.[122]
1945년 9월 공릉동 이공학부 건물은 미군병원으로 징발되면서 실험시설을 철거당하고 10월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어 1946년 졸업생을 낸 후, 국대안 시행에 따라 이공학부중 이학계열은 법문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123]이 되었는데 청량리의 옛 예과건물을 임시로 사용하였다가 6.25때 전소되었다고한다경성제대 물리학과의 변천사. 전쟁후 동숭동의 구 중앙공업시험소 시설을 사용하다가 1967년 인근에 과학관을 신축하였으나 곧이어 1975년에 관악캠퍼스로 종합화되면서 인문대, 사회대와 분리되어 오늘날의 자연과학대학이 되었다. 이공학부 공학계열은 조선총독부 소관 관립 구제전문학교였던 경성고등공업학교[124]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재탄생하였는데 공릉동 부지를 계속사용하다가 1980년에 관악산으로 이전하였다.
- 공통 개설과목
- 수학1~2/ 수학특강/ 수학연습1~2/ 수학특강연습/
- 응용역학/ 응용역학개론/ 응용역학연습/ 응용역학개론연습
- 응용물리/ 응용물리학연습1~2/ 응용열역학1~2/
- 광물학/ 지질학/ 광물학실험/ 지질학실험/ 지질실습/
- 분석화학1~4/ 분석화학실험1~2/
- 기술학1~2/ 화약학 및 실험/ 화학병기학/ 건축학개론/ 조병학개론/ 공업경제/ 철학개론
- 물리학과 개설과목
- 물리실험학1~2/ 역학1~2/ 물성론 및 열학/ 전자기학/ 광학1~2/ 상대론물질구조학1~2/ 통계역학/ 양자론/ 고체론 및 액체론/ 핵물리학/ 항공역학/ 지질학/ 기상학/ 천문학/ 지구물리학/ 천체물리학/ 역학연습1/ 물리학연습1~2/ 이론물리학연습/ 물리학실험1~2/ 물리학논강/ 물리학연구/ 물리학연습
- 화학과 개설과목
- 무기화학1~2/ 무기화학실험/ 무기화학특강
- 물리화학개론/ 물리화학개론실험/ 물리화학 1~2/ 물리 화학 실험/ 물리화학 특강
- 유기화학1~2/ 유기화학실험
- 콜로이드화학/ 생물화학/ 콜로이드화학실험/ 화학특별문제연구 및 논강/ 화학외국어 연습
- 토목공학과 개설과목
- 석공학/ 철근콘크리트/ 철도공학1~2/ 도시철도/ 교량공학1~2/ 하해공학1~2/ 상수도공학/ 하수도공학/ 수리학/ 토목재료/ 측량학1~2/ 시공법/ 도시계획/ 교량미학/ 관개배수/ 도로가로/ 토목행정법/ 토목공학개론/ 토목기계/ 발전수력/ 세균학 및 수질시험법/ 방재공학/ 토목공학제도/ 석공학제도/ 철근콘크리트제도/ 철도 계획/ 교량계획1~2/ 하해공학 계획1~2/ 상수도 계획/ 하수도 계획/ 토목재료시험1~3/ 측량학실습1~2/ 하해공학실습
- 기계공학과 개설과목
- 기계역학/ 기계공작법/ 공작기계/ 실험기계공학/ 수력학 및 수력기계/ 수차/ 펌프/ 열기관 일반/ 증기터빈/ 내연기관/ 기계설계개요/ 기계설계1~2/ 유체역학/ 내연기관특강/ 자동차공학/ 항공기 일반/ 선박용 기관/ 철도차량/ 조중기/ 소웅기 및 압축기/ 냉동기 및 냉동법/ 방적기계/ 난방 및 환기/ 원동소설계/ 기계제도개요/ 기계제도1~2/ 기계공작법실습/ 재료강약실험/ 기계공학실험1~2/ 기계공학실습/ 기계공학논문논강
- 전기공학과 개설과목
- 전기자기학/ 교류이론/ 전기회로이론/ 전기계기 및 측정법/ 방전현상/ 고전압공학/ 일반전기공학/ 전기기계기구1~2/ 전기기계설계법/ 전기공학시험법/ 발전공학/ 전력전송/ 전력분배/ 전등조명 및 전열/ 전기철도/ 유선통신/ 방송통신/ 전자공학/ 무선통신1~2/ 전기재료/ 음성공학/ 전기응용공학 및 논강/ 전기법규/ 전기공학실험1~3/ 전기공학연습1~2/ 전기기계제도/ 일반전기공학실험
- 응용화학과 개설과목
- 응용화학1~5A/ 응용화학1~5B/ 화학공업1~2/ 응용화학실험1~5/ 응용화학계획제도/ 응용화학논강
- 광산야금학과 개설과목
- 채광학1~2/ 광산기계학/ 선광학/ 전광학/ 광상학/ 광산측량학/ 광산위생학/ 광산법규/ 재료운반/ 야금학개론/ 야금학/ 철야금학1~2/ 야금기계학/ 합금학/ 제조야금학1~2/ 금속조직학/ 금속재료/ 채광학실험/ 선광학실험/ 광상학실험/ 광산측량실험/ 광산실습1~2/ 야금학실지연습1~2/ 금속조직학실험/ 시금학실험1~2/ 야금학실험1~4/ 야금학계획 및 제도
7. 대학원
1886년 제1차 제국대학령 제2조 그리고 1919년 개정 공포된 제2차 제국대학령 제3조는 '제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각 제국대학에는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구과에 그친 여타 구제대학과 달리 제국대학에는 복수의 연구과가 통합된 대학원이 존재했으므로[125] 경성제국대학에도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석사' 학위가 없었던 일본 제국의 구학제에서[126]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학부를 졸업해 학사 학위를 받고 나서, 연구실에 '연구생'으로 등록하여 연구하고 소정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연구생 자격은 학부 졸업자뿐만 아니라 그와 동등한 학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 자라고 하여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도 쌍방 추천[127]을 받으면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내에서는 관립 전문학교와 제국대학 교수진 간에 인적 이동이 잦았고, 학교들도 같은 동네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가 상당히 강했다. 덕분에 관립 전문학교 출신이라면 경성제국대학 박사 과정에 등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128] 다만, 구제대학 졸업자와 구제전문학교 졸업자의 연구생 신분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는데 학사를 가진 대학 졸업자는 부수(副手)에 임했지만, 학위가 없는 전문학교 졸업자는 부수보(副手補)에 임했다. 참고로 연구생이 소속되는 연구실은 복수의 강좌로 이루어진 전공의 경우는 한 강좌에만 연구실이 있는 등 모든 강좌마다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연구생이 되면 무보수 박사과정생으로 공부를 했는데,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보통 5~7년 가량 소요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이러한 박사 과정을 통해서 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각 학부마다 매해 50~60명 정도였다. 그 중 조선인의 경우에는 각 학부 별로 1~5명 정도가 박사 학위를 받았고 10명이 넘는 해는 드물었다. 참고로, 의학부의 박사 학위 논문 대부분은 현재 한국의사학회(醫史學會)에 소장 중이며, 특정 절차를 거쳐 열람할 수 있다. 201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논문들은 학부 레포트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지만, 당시 일본 본토 의학계에서 주목한 논문도 있었다. 오늘날의 잣대가 아닌 당시의 학문 발달 수준의 기준에 볼 때 상당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경성제국대학 명의 박사학위 수여자의 학위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데이터베이스(해당 링크, 일본어)에서 검색 되는 경우가 있다.[129] 그 중에서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검색되는 경우도 있다.
7.1. 해방 박사
경성제국대학 관련 통계를 찾다보면 1945년에 유독 많은 박사 졸업자를 볼 수 있는데, 이때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해방 박사'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제 패망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편되고 미군정 교육 당국이 학교를 접수했지만, 학교 내에서 중요한 업무를 취급하거나 학교에서 중요 보직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인 교직원들은 여전히 출근하면서 조선인 교직원들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있었다.미군정은 11월 5일 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직원을 파면하였는데, 이 파면 직전에 교수들은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사람들에게 모두 박사 학위를 내주었다. 일본인 교수들이 이제 일본으로 아예 돌아가야 하는 마당에 지도하던 학생들에게 학위나 주고 가자고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당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논문의 형식만 갖추어 제출하면 요식적인 디펜스 토의 과정을 거치는데 내용의 질적 수준과 관계 없이 논문이 바로 통과 되었다고 한다. 논문 디펜스를 사실상 전혀 거치지 않은 것.
특히, 의학부의 경우에는 논문 심사에서 탈락한 이들까지 소급해서 학위를 주었기 때문에 조선인 75명을 포함해서 156명에게 박사 학위를 남발했다.[130]
이 당시 해방 박사 학위를 받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건국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인 상허 유석창 선생인데, 유 박사 본인도 뒷날 '자신의 논문은 미완성품이며, 쓰자키(津崎) 교수가 베풀어준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를 높게 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한 바도 있다.
8. 8.15 광복 이후 재편
8.1. 서울대학(경성대학)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익일 조선인 교직원[131], 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교문 앞에 붙은 경성제국대학 명판의 '제국'을 지우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이후 각 전문학교에 근무하던 명망있는(특히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1945년 9월 미군은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여 진주하면서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일본 제국 및 조선총독부가 행사하던 모든 정부 권한을 접수하였으며, 미군정청은 업무개시와 동시에 학무국을 두고, 구 경성제대의 행정 사무를 접수하였다.
1945년 9월 10일에는 경성제국대학 명의의 마지막 졸업식이 거행되었다.[132] 이후 미군정 포고령에 따라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떠나 귀국하면서 일본인 교원 및 학부생들은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전입/전학하였고,[133] 경성제대 예과 생도들은 내지의 각 구제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참조)[발췌번역].[학교별전입학인원]
이어 1945년 10월에는 미군정 법령 제15호로 명칭이 경성제국대학(Keijo Imperial University)에서 서울대학(Seoul University)으로 변경되었다. 이 법령이 경성제대의 명칭을 서울대학으로 변경한 것이냐, 경성대학으로 변경한 것이냐[136] 여부를 두고는 논란이 있는데, 당시 남조선에서 주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에서는 법령 해석상의 문제가 있을 경우 영문을 기준으로 했고, 영문으로는 서울이든 경성이든 둘 다 Seoul이었으므로 서울대학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137]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玆)에 차(此)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138]에 효력을 생함
1945년 10월 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玆)에 차(此)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138]에 효력을 생함
1945년 10월 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다음 날인 1945년 10월 17일 미군정은 임명사령 제18호로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아 이스턴뉴멕시코대학 교수를 지내다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한 알프레드 크로프츠 박사를 서울대학 총장(President of Seoul University)에 임명하고, 법문학부장•의학부장•이공학부장•예과부장 인사를 발령하여 학부별로 점차 수업을 개시하였다.[139]
8.2. 서울대학교의 시작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140] |
다만 현재 서울대학교에서는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고, 서울대가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 등 10개의 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통합된 학교 중 대학은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고, 나머지 9개 학교는 전문학교[141]를 전신으로 한다.
서울대학교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역사적으로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가 경성제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보는 인식도 일반적이며, 통합 후 서울대학교가 신생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부 자리를 차지하면서 경성제대 출신 동문들도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고, 서울대 동문회 가입 자격도 있다.
원래 경성제대 출신자들은 서울대학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구제 관립 제국대학으로서 조선 유일의 최고학부였던 데 비해, 국대안으로 통합된 서울대학교에는 당시에 격이 떨어진다고 보던 전문학교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 특히 사범학교는 원래 중학교 급이었다가 해방 직전인 1944년에서야 전문학교급으로 승격된 바, 이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들이 주류였던 문리과대학에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폐지를 시도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냈다.
이렇게 종합대학으로서 '서울대학교'라는 정체성은 사실상 1974년 관악캠퍼스 조성까지는 굉장히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이런 과도기가 지나고 '서울대학교'라는 한국식 학벌 위계 질서의 정점이 수립되고, 경성제대 출신자들도 모교를 사실상 서울대학교라고 여겨도 본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종합대학으로서의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경성제대를 부정하면서도 한때 조선에서 유일한 최고학부였다는 상징성은 놓치고 싶지 않은 서울대학교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은근슬쩍 서울대학교의 '개학연도'를 끌어올리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8.3. 인적 교체
광복 후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거의 대부분의 교수진이 공석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이고 일부 교토제국대학 출신 소수가 있었던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142] 이들의 자리는 대부분 여러 제국대학 출신 조선인들로 채워졌으며 제도적으로도 미국식 학제로 바뀌었다.1945년 10월 미군정은 경성대학의 총장과 학부장을 임명하여 학부 수업을 재개했는데, 이에 앞서 9월부터 미군정 학무국은 유진오, 조윤제, 백낙준, 백남운, 이병도 5인으로 하여금 교수 인선을 담당하게 하여[143] 12월에 한국학자 27명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조교수로 임명하였다.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명의로 1945년 12월 24일부 발령된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56호에 따르면 법문학부의 교수진은 다음과 같았다. 유진오(헌법), 서재원[144](민법), 윤동직[145](형법), 이태진(행정법), 이종갑[146](상법), 김갑수(국제사법), 윤행중[147](경제학), 최호진[148](경제사), 백남운(재정학), 박극채[149](화폐학), 강정택[150](농업정책), 황도연[151] (통계학), 이희승(조선어학/문학), 조윤제(조선문학), 이숭녕(조선문학), 이양하(영문학), 최정우(영문학), 이인영(조선사), 이병도(조선사), 손진태(조선사), 김상기(동양사), 백낙준(서양사), 박종홍(철학), 안호상(철학), 김두헌(윤리학), 이상백(사회학), 이본녕[152](심리학) 등(법문학부장은 백낙준 겸임).[153] 이들 27명의 출신을 보면 경성제국대학 출신이 11명[154]으로 최다였고 도쿄제대 4명[155], 교토제대 3명[156], 규슈제대 1명[157] 등 제국대학 출신이 19명으로 70%였다. 법문학부 외의 다른 학부의 교원 목록은 밑의 명단 참조.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진 명단(1946년)[158] (▲이전, ▼이후)|<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f5f5f5,#2d2f34> 직위 || 담당과목 || 성명 || 출신교 || 학위 || 주요 경력 ||
학부장 | - | 백낙준 | 예일신학교 파크 대학교 사학과 | 신학박사 문학사 | ▲ 연희전문 교수 ▼ 문교부장관, 참의원 의장 |
교수 | 헌법 및 행정법 | 유진오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보성전문 교수 ▼ 고려대 교수, 법제처장, 국회의원 |
조교수 | 헌법 및 행정법 | 이태진 | 와세다대 법학부 | 법학사 | ▼ 월북 |
교수 | 민법 | 서재원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고문 사법과 합격. 변호사 개업. 보성전문 교수 ▼ 납북 |
조교수 | 민법 | 김봉관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농림부 차관보 |
조교수 | 민법 | 주재황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46년 임명 ▲ 고문 사법과 합격 ▼ 고려대 교수. 서울고검 검사. 대법관 |
조교수 | 민법 | 조림행 | 주오대학 법학부 | 법학사 | 46년 임명 ▲ 고문 사법과 합격 ▼ 행방불명 |
교수 | 형법 | 윤동직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고문 사법과 합격 ▼ 이종갑과 변호사 개업. 우익 괴한에게 납치, 사망 |
교수 | 상법 | 이종갑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경성 콤그룹 연루. 고문 사법과 합격 ▼ 월북 |
조교수 | 상법 | 주유순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46년 임명 ▼ 서울법대 교수. 중앙대 교수. 월북 |
교수 | 국제법 | 김갑수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 고문 사법과 합격. 총독부 법관 ▼ 국회의원, 내무부차관, 대법관 |
교수 | 정치학 | 정진태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46년 임명 ▲ 경성제대 조교 ▼ 민전 활동. 월북 |
조교수 | 정치학 | 최희범 | 만주 건국대학 정치학과 | 정치학사 | 46년 임명 ▼ 월북 |
조교수 | 정치학 | 전학연 | 도쿄제대 정치학과 | 법학사 | 46년 임명 ▼ 월북 추정 |
교수 | 외교사 | 신기석 | 경성제대 법학과 | 법학사 | 46년 임명 ▲ 만주고문 합격. 만주국 사무관 ▼ 서울문리대 교수, 부산대 총장, 국회의원 |
교수 | 재정학 | 백남운 | 도쿄상대 | 상학사 | ▲ 연희전문 교수, 조선사정연구회 사건 연루 구속 ▼ 월북,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
교수 | 경제학 | 윤행중 | 교토제대 경제학부 | 경제학사 | ▲ 보성전문 교수 ▼ 월북, 김일성대 교수. 숙청 |
조교수 | 경제학 | 최호진 | 규슈제대 법문학부 | 경제학사 | ▼ 동국대, 연세대 교수 |
교수 | 화폐론 | 박극채 | 교토제대 경제학부 | 경제학사 | ▲ 보성전문 교수 ▼ 월북, 김일성대 교수. 숙청 |
교수 | 농업정책 | 강정택 | 도쿄제대 농경제학과 | 경제학사 | ▼ 농림부차관, 납북 |
교수 | 통계학 | 황도연 | 교토제대 경제학부 | 경제학사 | ▲ 만주 건국대학 교수 ▼ 월북 |
교수 | 조선어문학 | 조윤제 |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 | 문학사 | ▲ 경성사범 교원, 동성상업 등 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 조선어문학 | 이희승 |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 | 문학사 | ▲ 이화여전 교수,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 구속 ▼ 서울문리대 교수 |
조교수 | 조선어문학 | 이숭녕 |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 | 문학사 | ▲ 평양사범 교원 ▼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 영문학 | 이양하 | 도쿄제대 영문학과 | 문학사 | ▲ 연희전문 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 영문학 | 최정우 | 도쿄제대 영문학과 | 문학사 | ▼ 외무부 조사국장, 동국대, 외대 교수 |
교수 | 조선사 | 손진태 | 와세다대 사학과 | 문학사 | ▲ 민속학회 창설, 보성전문 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납북 |
교수 | 조선사 | 이병도 | 와세다대 사학과 | 문학사 | ▲ 이화여전 강사, 조선사편수회 촉탁 ▼ 서울문리대 교수 |
조교수 | 조선사 | 이인영 | 경성제대 조선사전공 | 문학사 | ▲ 연희전문 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납북 |
교수 | 동양사 | 김상기 | 와세다대 사학과 | 문학사 | ▲ 이화여전 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 철학 | 안호상 | 예나 대학교 철학과 | 철학박사 문학사 | ▲ 보성전문 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문교부장관 |
교수 | 철학 | 박종홍 | 경성제대 철학전공 | 문학사 | ▲ 이화여전 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 윤리학 | 김두헌 | 도쿄제대 윤리학과 | 문학사 | ▲ 중앙불전 교수, 진단학회 발기인 ▼ 서울문리대 교수, 숙대 총장 |
조교수 | 심리학 | 이본녕 | 경성제대 심리학전공 | 문학사 | ▼ 서울문리대 교수, 월북 |
조교수 | 사회학 | 이상백 | 와세다대 철학과 | 문학사 | ▼ 서울문리대 교수 |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진 명단(1946년)[159] (▲이전, ▼이후)|<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f5f5f5,#2d2f34> 직위 || 담당과목 || 성명 || 출신교 || 학위 || 주요 경력 ||
교수 | 내과 제1강좌 | 이정복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여의대 교수. 납북 |
교수 | 내과 제2강좌 | 최응석 | 도쿄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월북. 김일성대 교수 |
교수 | 내과 제3강좌 | 이돈희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내과 | 김경식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내과 | 한심석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 총장 |
조교수 | 내과 | 이윤응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개업 |
조교수 | 내과 | 오세헌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개업 |
교수 | 방사선의학 | 이부현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월북 |
조교수 | 방사선의학 | 조중삼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경성여의전 교수 ▼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병원장 |
교수 | 병리학 제1강좌 | 이제구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경희의대 교수 |
학부장 교수 | 병리학 제2강좌 | 윤일선 | 교토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세브란스의전 교수 ▼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 총장 |
조교수 | 병리학 | 박우균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월북 |
조교수 | 병리학 | 정창수 | 경성약전 | ▼ 마산고 교감 | |
교수 | 피부비뇨기과 | 최재위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피부비뇨기과 | 박동일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교수 | 산부인과 | 김석환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국립의료원장 |
교수 | 생리학 | 이갑수 | 오카야마의전 | 의학박사 (교토제대) | ▲ 경성제대 강사 |
교수 | 생리학 | 이종윤 | 경성의전 | 의학박사 (경성제대) | ▼ 전남의대 교수 |
조교수 | 생리학 | 남기용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생리학 | 김봉한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월북. 평양의대 교수 |
교수 | 생화학 | 이기녕 | 경성의전 | ▼ 서울의대 교수. 파리대학 이학박사 취득 | |
조교수 | 생화학 | 김철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가톨릭의대 교수 |
교수 | 미생물학 | 허규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경성여의전 교수 서울의대 교수. 전쟁 중 사망 |
조교수 | 미생물학 | 박진영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교수 | 소아과 | 이병남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개업. 월북 |
조교수 | 소아과 | 이국주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교수 | 안과 | 윤봉헌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육군병원장 |
조교수 | 안과 | 공인호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안과 | 윤원식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교수 | 외과 제1강좌 | 문인주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교수 | 외과 제2강좌 | 김성진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보사부장관 |
교수 | 외과 제2강좌 | 김시창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납북 |
조교수 | 외과 | 한격부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개업 |
조교수 | 외과 | 전성관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외과 | 박병수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월북 |
교수 | 위생학 | 최희영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월북 |
교수 | 이비인후과 | 한기택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이비인후과 | 우형직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월북 |
교수 | 정신과 | 명주완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개업 ▼ 경성대학 부속병원장. 서울의대 교수, 의학협회장 |
조교수 | 정신과 | 임문빈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월북 |
조교수 | 정신과 | 최재혁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도일 |
교수 | 치과 | 조호인 | 미상 | 미상 | |
조교수 | 치과 | 방태우 | 미상 | 미상 | |
조교수 | 치과 | 문동성 | 미상 | 미상 | |
교수 | 해부학 | 나세진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경성여의전 교수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해부학 | 이명복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경성여의전 교수 ▼ 서울의대 교수 |
교수 | 약리학 | 이세규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보건부차관, 이화의대 교수 |
교수 | 약리학 개성생약연구소 | 오진섭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박사 의학사 | ▲ 경성여의전 강사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약리학 | 서성중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약리학 | 최한웅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최남선의 자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약리학 | 이찬범 | 경성제대 의학부 | 의학사 | ▼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 약리학 개성생약연구소 | 우인근 | 경성약전 | ▼ 서울약대 교수 |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원 명단(1946년)[160] (▲이전, ▼이후)|<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f5f5f5,#2d2f34> 성명 || 연령 || 원적 || 전공 || 학력 || 학위 || 직급 || 주요 경력 ||
김재을 | 37 | 전남 | 수학 |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토제국대학 수학과 | 이학사 | 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김지정 | 37 | 평남 | 수학 | 사가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 | 이학사 | 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이임학 | 25 | 함남 | 수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조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재월남 후 서울문리대 교수, 캐나다 유학 |
한필하 | 31 | 함남 | 수학 | 오사카제국대학 수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재월남 후 고려대 교수 |
유충호 | 27 | 경기 | 수학 |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월북. 김일성대, 해주사대 교수 |
박유봉 | 38 | 경기 | 수학 | 미상 | - | 조수(조교) | ▼ 미상 |
박철재 | 42 | 경기 | 물리학 |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이학박사 (교토제대) | 교수 | ▲ 교토제대 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문교부 국장 |
도상록 | 44 | 함남 | 물리학 |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교수 | ▲ 만주 신징공대 교수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원자력연구소장 |
한인석 | 38 | 경기 | 물리학 |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도호쿠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정근 | 28 | 경기 | 물리학 | 경성고등공업학교 전기공학과 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조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전평수 | 31 | 경북 | 물리학 |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홋카이도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조교수 | ▼ 월북 |
김이문 | 34 | 전남 | 물리학 | 도쿄물리학교 | - | 조교수 | ▼ 월북 |
김종철 | 29 | 경기 | 물리학 |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 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서울문리대 교수 |
이태규 | 45 | 충남 | 화학 |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 | 이학사 이학박사 (교토제대) | 교수 | ▲ 교토제대 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도미 |
조광하 | 40 | 함남 | 화학 | 제6고등학교 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 이학사 이학박사 (오사카제대) | 교수 | ▲ 오사카제대 강사 ▼ 서울공대 교수 |
최상업 | 25 | 평남 | 화학 | 제3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화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서울문리대 교수 |
안법섭 | 25 | 전북 | 화학 | 교토제국대학 화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미상 |
김태열 | 25 | 함남 | 화학 | 후쿠오카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화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월북 |
김준용 | 27 | 함남 | 화학 | 경성약학전문학교 | - | 조수(조교) | ▼ 미상 |
김종원 | 48 | 경북 | 지질학 광산학 | 마쓰야마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지질학과 | 이학사 | 교수 | ▲ 경성제대 교수(조선인 유일) ▼ 서울문리대 교수 |
손치무 | 36 | 평남 | 지질학 광산학 | 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 홋카이도제국대학 지질광물학과 | 이학사 | 조교수 | ▼ 서울문리대 교수 |
최평집 | 48 | 평북 | 지질학 | 연희전문학교 상과 홋카이도제국대학 지질광물학과 | 이학사 | 전임강사 | ▲ 조선총독부 식산국 기사 ▼ 미상 |
윤동석 | 30 | 경남 | 광산학 | 야마구치고등학교 도호쿠제국대학 금속공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서울공대 교수 |
오정길 | 27 | 함남 | 광산학 | 경성광산전문학교 채광학과 | - | 조수(조교) | ▼ 남한 잔류 |
문원주 | 43 | 경남 | 야금학 | 제2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채광학과 | 공학사 | 교수 | ▼ 서울공대 교수 |
최호영 | 41 | 함남 | 야금학 |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 규슈제국대학 야금학과 | 공학사 | 교수 | ▲ 경성제대 강사 ▼ 서울공대 교수 |
이재병 | 25 | 경기 | 야금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광산야금학과 | 공학사 | 전임강사 | ▼ 월북 |
안명환 | 30 | 평남 | 야금학 | 아키타광산전문학교 | - | 조수(조교) | ▼ 미상 |
소규흡 | 28 | 평북 | 야금학 | 대동공업전문학교 야금과 | - | 조수(조교) | ▼ 미상 |
최경렬 | 40 | 평남 | 토목공학 | 사가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토목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조선총독부 내무국 기사 ▼ 내무부 건설국장, 서울부시장 |
심윤섭 | 27 | 경기 | 토목공학 | 경성고등공업학교 토목학과 | - | 조교수 | ▲ 경성공전 교수 ▼ 서울공대 교수, 경기공고 교장 |
신영기 | 26 | 경기 | 토목공학 | 야마구치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토목공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서울공대 교수 |
서도원 | 31 | 충남 | 토목공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중퇴) 제3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토목공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미상 |
정보영 | 25 | 경남 | 토목공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응용화학과 | 공학사 | 전임강사 | ▼ 롯데칠성 사장 |
김봉집 | 54 | 평남 | 전기공학 |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연희전문 교수 ▼ 월북 |
황갑성 | 37 | 충남 | 전기공학 | 후쿠오카고등학교 규슈제국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체신부 전무국장, 납북 |
이성준 | 34 | 충남 | 전기공학 |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토제국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월북 |
최창하 | 33 | 충북 | 전기공학 |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최성세 | 32 | 평북 | 전기공학 | 사가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월북 후 북한 국가계획위 부위원장 |
이한희 | 28 | 충북 | 전기공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월북 후 북한 흥남공업대 교수 |
이시현 | 31 | 평북 | 기계공학 | 제5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기계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 미상 |
박영조 | 25 | 경남 | 기계공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기계공학과 | 공학사 | 전임강사 | ▼ 한양대 교수 |
정기호 | 23 | 경북 | 기계공학 |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기계공학과 | 공학사 | 전임강사 | ▼ 한양공대 교수, 납북 |
윤창흠 | 28 | 평북 | 기계공학 | 요코하마전문학교 | - | 조수(조교) | ▼ 사립 정의여고 교장 |
조휘영 | 34 | 함북 | 기계공학 | 도쿄부립고등기계학교(?) | - | 조수(조교) | ▼ 남한 잔류 |
이승기 | 41 | 전남 | 응용화학 | 마쓰야마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 | 공학사 공학박사 (교토제대) | 교수 | ▲ 교토제대 강사 ▼ 월북 후 북한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장 |
김동일 | 39 | 평남 | 응용화학 | 사가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 | 공학사 | 교수 | ▼ 서울공대 교수 |
여경구 | 34 | 경기 | 응용화학 | 와세다대학 응용화학과 | 공학사 | 교수 | ▼ 월북, 북한 국가과학원 후보원사 |
마형옥 | 29 | 함북 | 응용화학 | 다이호쿠제국대학 응용화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월북 후 북한 화학섬유연구소장 |
김용호 | 31 | 경북 | 응용화학 | 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월북, 김일성대 교수 |
이세훈 | 26 | 경기 | 응용화학 |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 | 공학사 | 조교수 | ▼ 월북 |
류점수 | 30 | 충북 | 응용화학 | 도쿄물리학교 | - | 조수(조교) | ▼ 미상 |
임호신 | 25 | 평북 | 응용화학 | 도쿄물리학교 | - | 조수(조교) | ▼ 미상 |
일본인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생긴 빈 자리를 조선인 교원들이 채운 것처럼, 경성제국대학 학부와 예과의 일본인 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생긴 공석에는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도쿄상과대학과 도쿄문리과대학 등의 관립대학 등 국외의 구제대학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들과 구제고등학교 생도들을 편입생으로 받아 충원했다. 이렇게 해방 당시 국외 구제대학 및 구제고등학교 재학생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 편입학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말에는 경성대학 명의로 1946학년도 예과 신입생 모집을 실시하였다.[161] 1946년 7월에는 경성대학 명의로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도 서울대학교도 아닌 경성대학 출신이 되었다.[162]
학생 측면에서 법문학부 문학과[163]와 이공학부 이학계열(물리학과, 화학과)는 타 전문학교와 섞임 없이 순수하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제국대학 예과까지 포괄해 경성제대의 인적 구성이 명백하게 계승되었다.(경성제대 물리학과의 해방 전후 참조)
반면 법문학부 법학과는 명목상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164] 학생들이 제국대학인 경성제대와 구제대학도 아니로 구제전문학교에 불과했던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섞는 것은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하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소속으로의 학적 변경을 거부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 계승이라 여겨지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소속의 정치학과로 끝까지 남았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에는 정치학과가 법과대학이 아니라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래서 초창기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서 오히려 법과대학보다도 더 많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165]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은 실질적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출범하게 되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계승 자격을 주장하면서 청량리 경성법전 캠퍼스에서 동숭동 경성제대 캠퍼스로 이사를 시도했으나, 법문학부 캠퍼스를 계승하고 있던 정치학과 등 문리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실력으로 저지당해 좌절되었고, 결국 법과대학은 동숭동캠퍼스 바로 옆에 있던 방송통신대학 자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법과대학 이전 분쟁 참조. 이러한 연유로 다른 전문학교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후신으로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서울대 중의 진짜 서울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166]
그러나 법과대학이 경성제대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고, 극소수지만 법문학부로 진학이 예정되어있던 경성제대 예과의 문과반 수료생 중에서도 상과대학 등 타 단과대학으로 간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상대 총동창회 회보인 향상의탑 제165호(2018.12)에 실린 정기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10월 경성제대 입학생인 조영휘, 서우택, 송겸호, 최형규 등 4명이 경성경제전문학교의 후신으로 여겨지는 서울대 상과대학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으며 1945년 4월 경성제대 최후 입학기수인 조철 역시 서울상대 제2회 졸업생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국대안 시행 이전까지 경성대학으로 입학한 학생들(대부분은 도쿄제국대학 등 일본의 제국대학 재학생들) 중에서도 17명이 상과대학 소속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또 각 단과대학의 초창기 교수진을 보면 경성제대 출신의 교수들이 있는데, 법학과 졸업생도 대부분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출강했으나, 김증한(민법) 교수처럼 법과대학 교수로 나아가 법대의 기틀을 세운 법학자들도 있으며 황산덕(법철학) 교수처럼 문리대에서 가르치다 한국 전쟁 이후 법대로 옮긴 학자들도 다수 있다.[167]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그 자체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학부보다 하위인 구제전문학교급의 '전문부'로 흡수하였고,[168][169] 당연히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통합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에게 의해 장악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전문부로 편입되어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과 같은 '의학사' 학위를 받지 못했으며, 경성제대 부속병원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으로 메인병원으로 기능한 데에 반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서울대 제2부속병원이 되며 찬밥 취급을 받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일본 제국의 패전 이전 교육학제가 미국식 신학제로 개편되면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구제대학 예과 또한 폐지되는데, 경성제대 예과는 문과(법문학부)/이과갑류(이공학부) 과정을 폐지하고 기존의 의학부 진학과정인 이과을류를 남겨 그대로 의예과로 계승하였다.[170][171] 이로 인해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학생들이 격렬히 반발했고,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교수들은 경성의전 학생들은 경성제대(예과 3년+의학부 4년)과 경성의전의 수학연한 차이만큼 2~3년을 더 다니면 의학사를 수여하겠다고 했으나 경성의전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1947년 제1회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식은 전문부 졸업생 전원이 보이콧하여 의학부 졸업생들로만 치러졌다고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은 경성의전 교장이었던 초대 심호섭 학장이[172] 학사호 파동[173]으로 1년도 되지 않아 낙마한 후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였던 이갑수[174] 제2대 학장의 뒤를 이어 1950년 10월 취임한 제3대 학장부터 1986년 4월 퇴임한 제17대 학장까지 전원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졸업생들에 의해 완전히 독점되었고(참조) 이후 서울대 학사 출신으로 바로 넘어갔다. 또한 서울대병원장 역시 경성제국대학 예과 1회 및 의학부 제1회 졸업생인 명주완 박사가 광복과 동시에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초대 원장[175]으로 취임해 1947년 3월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김두종(1924년 교토부립의전 졸업)·김동익(1924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원로의사) 원장 이후 제4대[176] 진병호 원장[177]과 김성환(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원장까지는 경성의전과 번갈아가며 차지했으나, 제8~9대 한심석 원장[178]부터는 김홍기(제10~13대, 특수법인 초대), 권이혁[179](제2대), 홍창의[180](제3대), 이영균[181](제4~5대) 원장 등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 한용철(제6~7대) 원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이 서울대학교병원장 자리를 독점하였다.
개교와 동시에 설치되어 17~18회 졸업생을 낸 법문학부나 의학부와 달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82] 3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 중 이학계열 2개과[183]가 법문학부와 함께 경성제대의 정체성이 확실한 문리과대학으로 별도 단과대학을 구성한 것과 달리, 공학계열 5개과[184]는 구제전문학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등과 통합되어 서울공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 교사는 미군이 점유해 사용 중이었고 1948년 미군이 철수하였지만 학교당국은 공덕리 교사로 복귀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바 경성광업전문학교 교사에서 강의를 받던 서울공대 전문부와 고등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교사이전운동을 전개하여 1949년 가을 공덕리의 이공학부 캠퍼스에 입주했으며, 기존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후신인 서울공대 학부생들은 상당수가 청량리의 경성제대 예과캠퍼스에 있던 문리과대학 이학부로 옮겼다고 한다. 법과대학의 경우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주축으로 설립되어,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후신으로 동숭동캠퍼스를 독점하고 있던 문리과대학의 거부와 물리적 저지로 문리대-법대 강의실 분쟁사건이 발생한 것과 비슷한 배경이 있으나 결과가 반대가 된 케이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은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서대신동 가교사로 임시 이전하였다가 전쟁 후인 1953년 9월 동숭동의 서울사대부중 교사를 거쳐, 1954년 8월 파손된 건물을 수리하여 다시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공덕리 캠퍼스로 복귀하였다. 이후, 서로 떨어진 여러 서울대학교 캠퍼스들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이 수립되고, 관악캠퍼스를 계획하여 1975년부터 이전이 시작되어 공과대학도 1980년 2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로 건설된 서울공대의 공릉동 캠퍼스 부지와 건물은 당시 경기공업전문대학(현 서울산업대학교)으로 이관되어 1호관은 현재 다산관으로, 2호관은 현재 창학관으로, 4호관은 현재 다빈치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85]
2000년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재평가하는 사조가 과학사학계에서도 대두하였고,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이성규 교수(동양사학과)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식민사적 의의」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며 “경성제국대학이 3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 중 조선인 이공학부 졸업생은 37명으로 이들은 해방 후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로서 대학교육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였다.
8.4. 학부 전공 개편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이공학부, 의학부가 서울대학교의 법과대학[186],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으로 이관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법학과)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류(법학전공) → 법학부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법학과)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법학과 2류(정치학전공) → 정치외교학부 법학과 3류(경제학전공) → 경제학부 문학과 사회학전공 → 사회학과 철학과 심리학전공 → 심리학과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문학과)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문학과 국어국문학전공 → 폐과[187] 문학과 조선어조선문학전공 → 국어국문학과 문학과 지나어지나문학전공 → 중어중문학과 문학과 영어영문학전공 → 영어영문학과 문학과 독어독문학전공 → 독어독문학과 문학과 언어학전공 → 언어학과 사학과 국사학전공 → 동양사학과[188] 사학과 조선사학전공 → 국사학과 사학과 동양사학전공 → 동양사학과 철학과 철학철학사전공,
철학과 지나철학전공,
철학과 윤리학전공→ 철학과 철학과 종교학종교사전공 → 종교학과 철학과 미학미술사전공 → 미학과
-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이학과)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 수리과학부 물리학과 → 물리천문학부 화학과 → 화학부 생물학과 → 생명과학부 지질학과 → 지구환경과학부
-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공학과)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 건설환경공학부 기계공학과 → 기계공학부 광산야금학과 → 재료공학부,
에너지자원공학과전기공학과 → 전기정보공학부 응용화학과 → 화학생물공학부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과 이과을류 → 의예과 의학부 → 의학과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부속병원 산파 및 간호부 양성소 → 간호학과
9. 관련 인물
9.1. 역대 총장
9.1.1. 총장대행
학부 개교 이전까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89]이 경성제국대학 총장대행격인 사무취체역을 맡았다. 현대 한국으로 보면 국무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대행을 맡은 셈인데, 사실 조선제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 시절부터 정무총감이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핫토리 우노기치 초대 경성제대 총장이 부임하는 1926년 학부 설치시까지 총장대행을 맡은 것이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학부 설치 이전 경성제대는 교육은 예과 수업만 진행되었으므로 대부분의 대학 실무는 오다 쇼고 예과부장(당시)이 담당했다.- 초대: 아리요시 주이치 (有吉忠一, 1924년 5월 ~ 1924년 7월)
- 2대: 시모오카 주지 (下岡忠治, 1924년 7월 ~ 1925년 11월)
- 3대: 유아사 구라헤이 (湯浅倉平, 1925년 12월 ~ 1926년 4월)
9.1.2. 총장
- 초대: 핫토리 우노키치 (服部宇之吉, 1926년 4월 ~ 1927년 7월)[190]
- 2대: 마쓰우라 시게지로 (松浦鎮次郎, 1927년 7월 ~ 1929년 10월)
- 3대: 시가 기요시 (志賀 潔, 1929년 10월 ~ 1931년 10월)
- 4대: 야마다 사부로 (山田三良, 1931년 10월 ~ 1936년 1월)
- 5대: 하야미 히로시 (速水滉, 1936년 1월 ~ 1940년 7월)
- 6대: 시노다 지사쿠 (篠田治策, 1940년 7월 ~ 1944년 3월)
- 7대: 야마가 노부지 (山家信次, 1944년 3월 ~ 1945년 10월)
- 경성대학: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 1945년 10월 ~ 1946년 8월)[191][192]
9.2. 교원
9.2.1. 교수
후발 제국대학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도쿄제국대학 출신 신진학자들이 다수 부임한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진은 특히 절대 다수가 도쿄제대 출신이었으며, 모교 학부 출신으로 경성제대 교수로 임명된 졸업생은 예과 2회 출신 일본인 1명뿐이었을 정도로 도쿄 중심성이 강렬했다.- 일본인 교수
-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왠지 '소창진평'이라는 한국식 음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일본어 및 한국어를 전공한 언어학자. 만요가나와 이두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역사상 최초로 향가 해석의 시도를 완료한 사람인데, 문제점들이 많이 지적되어 양주동이 크게 뜯어고쳤다. 그리고 또 한국어 사투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2~1935): 도쿄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였으며,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와 교토제대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였고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찬위원회(1922) 및 조선사편수회(1925)에서 편찬위원/편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고대사(주로 신라사)를 연구하여 여러 연구 논저를 내놓았고, 조선에 대하여 큰 애착심을 가져서 자신의 아들 중 하나에게는 김춘추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하였고 장례식 역시 조선의 전통 장례 방식으로 치를 정도였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단군에 대해서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며 부정했고 또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서도 연대가 일부 앞당겨 졌다고 보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긍정했다.[193] 한편 이마니시는 당대에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등을 위시로 한 만선사관(滿鮮史觀)론자들과 달리[194], 고구려를 한국사로 보았다.
- 모리 다메조
- 다카하시 토오루
- 하나무라 요시키
- 조선인 교수[195]
- 윤일선(尹日善):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3월 30일 ~ 1929년 4월 18일 재임. 경성제국대학 조 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377호)서임.
- 고영순(高永珣): 오사카 의과대학을 나왔다.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로 있던 중 1928년 12월 24일 ~ 26일 조교수로 재임. 이후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여 운영했다.[196] 임명재[197], 심호섭[198]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으며, 해방 후에 윤일선과 함께 '건국의사회'에 참여한 바 있다. 경성제국대학 조 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604호) 서임.
- 윤태동(尹泰東): 1900년 5월 13일 충북 충주 출신. 1925년 3월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1926~1929) 근무를 거쳐 1930년 경성제대 예과 강사로 임명되었고 1934년 7월에는 예과 교수로 승진하여 1934년 11월까지 재임하면서 예과(대입준비)생도들에게 독어를 가르쳤다.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 이사관(친임관 5등)으로 발탁되어 만주로 건너간 후 간도성(間島省) 성장까지 역임했다.경성제국대학 예과(대학입학준비교육기관)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2267호) 서임.
- 김종원(金鍾遠): 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당시 이공학부에 지질학과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1944년 김종원이 강사로 임명되었고, 1945년 7월 13일(조선총독부관보제5544호)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당시 유일한 조선인 교수. 해방 후 경성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경성대학이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에 흡수돼 국립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1월 23일 급환으로 사망하였다.[199]
9.2.2. 강사
- 유진오 : 1929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원 형법학연구실(1929~1931), 법철학연구실(1931~1933) 조수로 있으면서 1931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예과 강사로 출강하여 <법학통론> 교과를 강의(참조).
- 최재서 : 1931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후 1934년 3년까지 동대학원에서 수학했고, 야마모토 도모미치(山本智道)[200] 교수의 후임으로 내정되어 1933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강좌의 강사직에 임명되어 (법문학부 소속)非문학과생을 위한 영어 교과목을 담당했다. 이는 조선인/일본인을 막론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생으로서는 최초로 모교의 학부 강사 자리에 오른 것으로, 장안의 일대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 1933.4.30일자 제2면 참조). 그러나 1년만인 1934년 4월 해임되었다.
- 육지수 : 1933년 3월 도쿄제대 경제학부 졸업 후 1936년까지 조수로 근무하다 귀국하여 1937년부터 경성제대 예과 강사로 출강하여 <지리> 교과를 강의.
- 김태준 : 1931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후 명륜학원 강사, 명륜전문학교 조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39년 5월 조선문학강좌 담임교수 다카하시 토오루 교수의 퇴임에 따라 그 후임으로 내정되어 강사로 임명되어 조선문학 강좌를 맡았다.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강사직에 면직되었다.
- 한심석 : 1938년 3월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후 동대학원 미생물학교실 제1강좌(1938~1940), 내과학교실 제2강좌(1940~1943) 조수로 있으면서 1943년 경성제대 의학박사 취득, 이후 내과학교실 제2강좌 전임강사 취임(대한의학회 참조).
9.3. 조선인 동문
9.3.1. 예과 1회
성명 | 진학 | 주요경력 |
유진오 | 법률 | 예과 수석 입학 및 학부 수석졸업, 법문학부 형법연구실(1929~1931년) 및 법철학연구실(1931~1933년) 조수 및 예과 강사(1932~1933년). 전 고려대 총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헌법). |
김처순 | 남해군수(해방전), 경남여고 교장 | |
강성태 | 만주척식 근무(해방전), 재무부차관, 상공부장관, 한국무역협회 회장, 국회의원 | |
박일룡 | 고흥군수(해방전) | |
최병헌 | ||
전승범 | 식산은행 근무(해방전), 전북대 법대학장, 대학원장 | |
이민희 | 상업은행 근무(해방전), 상업은행 전무 | |
주병환 | 정치 | 대구부회 의원(해방전), 매일신문 사장, 국회의원. 사조그룹 창업주 주인용의 사촌형. |
이득영 | ||
조윤제 | 조선어문 | 법문학부 조선어문학연구실 촉탁(1929~1930년) 및 조수(1930~1932년). 경성사범학교 교유(1932~1939년), 경성대학 법문학부장(194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문학). |
최창규 | 지나어문 | 1930~1931년 중국 상하이 거주하며 동아일보에 여행기 장강만리 기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 교장. |
채관석 | 영어영문 | 서울사대, 고려대 교수 |
이종수 | 미국 유학을 거쳐 조선일보 기자, 경성사범 교유, 서울사대 교수, 교육대학원장. | |
노영창 | ||
박충집 | 춘천고등보통학교 교유(, 서울문리대 교수 | |
이재학 | 5선 의원. 국회부의장 | |
김창균 | 조선사 |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수관(1929.4~1943.1), 충청남도 대덕군수(1943.1~1945.5), 청양군수(1945.5~), 대전사범학교 교감, 충남대학교 교수 |
신석호 | 조선사편수회 수사관(1929.4~1945.8) 역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및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영남대학교 대학원장, 국사관(현 국사편찬위원회) 관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국사) | |
김계숙 | 철학•철학사 | 중앙중 교원(해방전), 서울문리대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서양철학) |
배상하 | 이대 교수 | |
박동일 | 대전중 교장 | |
권세원 | 서울상대, 성대 교수 | |
조용욱 | 지나철학 | 동덕여대 학장 |
염정권 | 월북 | |
한제영 | 교육학 | 서울사대 교수 |
홍정식 | 과도정부 문교과장, 납북 | |
임석재 | 심리학 | 양정중 교원(해방전), 서울사대 교수, 한국심리학회 회장,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수상 |
명주완 | 의학 | 약리학교실 조수(1930~1934년), 신경정신과학교실 조수(1934~1937년)등을 거쳐 1938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박사학위[201] 취득.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 원장 및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초대 원장.[202] |
박건원 | 외과학교실 조수. 강원도립강릉의원 외과과장, 조선외과학회(대한외과학회의 전신) 창립. 강원지사, 전남지사 | |
김성진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보건사회부 장관, 국회의원 | |
윤봉헌 | 서울의대 교수, 도일 | |
박천규 | 공군 의무감 | |
이세규 | 세브란스의전 약리학교실 주임교수(1936~1945년), 경성대학 의학부 약리학 교수(1945~1946년), 세브란스의대 교수(1946~1952년),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1952~1970년), 1960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대한약리학회 회장. | |
이정복 | 서울여의대 학장, 서울의대 교수, 도일 | |
함원영 | 월북 | |
어철 | ||
김용업 | 인천적십자요양원장 | |
김능기 | 개업 | |
김봉응 | ||
민영성 | 개업 | |
조래병 | 개업 |
9.3.2. 예과 2회
성명 | 진학 | 주요경력 |
이강국 | 법학 | 해방 전 사회주의 운동가. 해방 후 월북, 숙청. |
최병주 | 고문 사법과 합격. 조선총독부 법관. 해방 후 대법관, 국회의원. 6.25 전쟁 중 납북. | |
박문규 | 해방 전 사회주의 운동가. 해방 후 월북, 북한 농림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 |
임문석 | 고문 행정과 및 사법과 양과 합격. 해방 전 전라북도 과장. 해방 후 국회의원, 변호사 개업 | |
송준동 | 월북. | |
박용익 | 해방 전 예천군수. 해방 후 경상북도 국장, 국회의원 | |
최창홍 | 고문 행정과 및 사법과 양과 합격. 해방 전 평안북도 과장, 해방 후 변호사 개업. 납북. | |
변정규 | 고문 행정과 합격. 해방 전 강서군수. 해방 후 농림부 국장. 충주비료 감사. | |
최용달 | 해방 전 사회주의 운동가. 해방 후 월북. 북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숙청. | |
사경욱 | 고문 사법과 합격. 조선총독부 검사. 해방 후 전주지검장 역임. 변호사 개업. 대법관이자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사광욱의 형. | |
주평노 | 해방 전 만주국 사무관. 해방 후 전라남도 국장. | |
이희승 | 조선어문 | 이화여전 교수. 동경제대 문학박사(1940년)[203].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리대 학장(1957년), 동아일보 사장(1963~1965년), 성균관대 대학원장(1966~1969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어학) 역임. |
이효석 | 영어영문 | 소설가. 해방 전 작고. |
김용환 | 해방 후 서울사대 교수. | |
김영준 | 해방 전 작고. | |
서두수[204] | 국어국문[205] | 이화여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교무처장,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하버드 대학교 연구원, 워싱턴 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총장(제6대) |
성낙서 | 조선사 | 국회의원, 충남대 총장, 성균관장 역임. |
윤용균 | 해방 전 작고. | |
김형철 | 지나철학 | 여주여고 교장. |
안용백 | 윤리학 | 경남중 교장, 국회의원. |
한재경 | 해방 전 양덕군수. | |
한기준 | 교육학 | 해방 전 배재중 교원. |
류지홍 | 의학 | 개업. 월북. |
한기택 | 서울대 의대 교수. | |
이춘남 | 해방 전 작고 | |
강형철 | 해방 전 작고 | |
유병수 | 개업. | |
장지식 | 해방 전 작고 | |
박영인 | 개업. 월북. | |
류석균 | 개업. 월북 . | |
이병남 | 서울대 의대 교수. 월북 후 북한 보건상 역임. | |
장동혁 | 해방 전 작고 | |
임철상 | 개업. | |
양철환 | 월북 후 함흥의대 교수. | |
홍수봉 | 개업. 월북. | |
장익희 | 월북. | |
이인규 | 개업. | |
정하택 | 개업. |
9.3.3. 예과 3회
성명 | 진학 | 주요경력 |
권희준 | 법학 | 청주고, 서울여상 교장. |
노윤화 | ||
이종식 | 해방 직후 중앙여대 부학장. 월북. | |
윤종완 | 서울임업 전무. | |
정창운 | 고문 사법과 합격. 해방 전 총독부 검사. 해방 후 검찰총장. | |
유헌열 | 고문 행정과 및 사법과 양과 합격. 해방 전 총독부 판사. 해방 후 대전지방법원장. | |
김봉진 | ||
이능섭 | 해방 후 외무부 근무. 윤보선의 조카사위. 6.25 전쟁 중 납북 | |
조길행 | 박열장학회 이사 | |
정용신 | 고문 행정과 합격. 해방 전 총독부 서기관. 해방 후 일본 도피. | |
박형식 | 해방 전 작고. | |
노기연 | 만주 고등문관고시 합격 후 만주국 사무관. | |
최순문 | 조선변호사시험[206] 합격 후 해방 전 변호사 개업. 3.1운동 민족대표 최진 변호사의 아들. 해방 후 변협 회장 역임. | |
윤태림 | 심리학(3회) 법학(6회)[207] | 고문 행정과 합격(1941.10). 해방 전 금천군수. 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학장(1952~1963), 문교부 차관(1963 3~1964.2), 숙명여대 총장•이사장(1965), 연세대 문과대학 교수(1969), 경남대 총장 역임. |
김재철 | 조선어 | 조선연극사 출간. 27세 요절. |
이재욱 | 조선총독부 도서관에 촉탁(1931~1939년) 사서(1939~1943년) 부관장(1943~1945년) 역임. 초대 국립도서관(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납북. | |
김태준 | 중문 | 조선총독부 경학원 직원 겸 명륜전문학원 강사(1931~194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문학 제2강좌 강사(1939~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연안행. 광복 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9년 사형 집행. |
최재서 | 영문 | 경성제대 대학원(1931~1934년), 법문학부 영문학강좌 강사(1933~1934년). 이후 런던 대학교 유학 후 보성전문, 경성법전 교수. 해방 후 연세대(1949~1960), 동국대 대학원장(1960~1961), 한양대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
이혜구 | 경성제대 오케스트라 활동 당시 지도교수의 권유로 관심을 갖게 된 아악을 연구,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를 거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발족시 예술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59년 ㅇ음악대학 국악과 창설. 1991년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수상. | |
현영섭 | 해방 전 무정부주의 활동가였으나 친일로 전향. 해방 후 일본 망명. | |
조규선 | 해방 전 사망 | |
정준모 | 해방 후 문교부 국장, 동국대 교수. | |
양주화 | 동양사 | 성동고, 경기고 교장. |
엄무현 | ||
신남철 | 철학 | 평론가.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교수 역임.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이종준 | 경동중, 부산중 교장 역임. 국회의원. | |
권직주 | 윤리 | 막스 베버 최초 연구. 월북 후 북한 인민위원회 교육국 차장. |
정인택 | 충북지사 역임. | |
김문경 | 종교 | 해방 전 작고. |
서병성 | 교육 | 경기고, 휘문고 교장 역임. |
김택원 |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
이준하 | 해방 후 서울사대 교수 역임. 납북 | |
허규 | 의학 | 서울여의대 교수. |
강남구 | 월북. | |
진병호 | 서울대 교수. 서울대병원장 | |
신웅호 | 개업. | |
유염진 | 해방 전 평양 개업. | |
김근배 | 개업. | |
장치순 | 월북. | |
나세진 | 1943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208].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수, 대한민국 육군 중앙병리연구소장(대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1975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해부학) | |
이종식 | ||
임영식 | 개업. | |
김봉수 | ||
최상욱 | 개업. | |
김석환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 주임교수,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국립의료원장 | |
계린치 | 일본 이민. | |
강수만 | 개업. | |
임길호 | 학부 재학 중 사망. | |
정주원 | ||
오진섭 |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209].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전임강사(1941~194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주임교수, 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210] 소장. | |
장경 | 이화여대 교수. 동양맥주 의무실장. | |
이명훈 | 개업. | |
조봉엽 | ||
최재위 | 의학부 1935년 졸업,[211] 피부비뇨기과학교실 조수(1935~1937년), 부수(1937~1940년), 1940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212][213]. | |
김종직 | 개업. | |
신승우 | 미국 이민. |
9.3.4. 예과 4회 이후
- 배정현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2년 졸업, 대학원 촉탁(1932~1933년), 조수(1933~1935년) 근무. 전 대법원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박원선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2년 졸업, 연구실 조수(1932~193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상법).
- 김영재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2년 졸업. 서울지검 차장검사, 월북. 참조.
- 장후영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2년 졸업,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수학. 경성제대 최초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1931년) 합격생.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전봉빈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문학과 1932년 졸업, 재입학하여 법학과 1934년 졸업. 대구대학 초대 학장. 한국전쟁 중 납북.
- 김종무 - 예과 4회(1927년), 법문학부 사학과(동양사학전공) 1932년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
- 신기석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3년 졸업, 국제법외교사연구실 조수(1933~1937년). 만주국 고등문관시험 합격.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1945~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부산대학교 총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외교사/국제정치).
- 조평재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3년 졸업. 판사, 변호사. 조순 전 총리의 숙부.
- 한동석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3년 졸업. 총무처 처장, 국회의원.
- 김성환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3년 졸업. 심계원 차장.
- 이숭녕 - 예과 5회(1928년),[214]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 1933년 졸업.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어학).
- 방종현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 1934년 졸업,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조선어학연구실(1934~1938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언어학연구(1936~1937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1945~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1946년~), 문리과대학 학장(1951년).
- 고형곤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철학과(서양철학전공) 1933년 졸업. 서양철학 1세대 연구자이자, 고건 전 총리의 부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철학).
- 박치우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철학과(서양철학전공) 1933년 졸업, 철학과 연구실 조수(1933~1935년). 숭실전문학교 교유, 조선일보 기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대학원(고대철학전공) 입학(1940년). 월북.
- 이갑섭 - 예과 5회(1928년), 법문학부 철학과 1933년 졸업. 조선일보 조사부장, 정치부장, 주필 역임.
- 조규찬 - 예과 5회(1928년), 의학부 1939년 졸업[215], 의학부 약리학교실(1939~1942년) 및 내과학교실(1942~1944년) 조수, 1945년 2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광주의학전문학교,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학장 및 전남대학교병원장.
- 이국주 - 예과 5회(1928년), 의학부 1935년 졸업[216], 의학부 연구실(1935~1937년), 병리학교실(1940~1945년), 1945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대학 의학부 자치위원회,[217]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학교실 주임교수.
- 현석호 - 예과 6회(1929년), 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전 국회의원, 내무부, 국방부 장관.[218]
- 손석도 - 예과 6회(1929년), 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광복 당시 경기도 경성부 성동경찰서장, 변호사.
- 정진동 - 예과 6회(1929년), 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전 교통부 차관, 국회의원.
- 이태용 - 예과 6회(1929년), 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전 상공부 장관, 국회의원.
- 전병식 - 예과 6회(1929년), 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판사, 검사 재직. 1946년 7월 사망.
- 고정옥 - 예과 6회(1929년), 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전공)로 진학했으나 동년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퇴학, 1936년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로 재입학하여 1939년 졸업. 참조.
- 김용근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 상공부 광무국장.
- 강중식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 한국전쟁 중 납북.
- 권성기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 전 총무처 차장, 농림부 차관, 교통부 해무청장, 국회의웜 역임.
- 김갑수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 전 국회의원, 대법관.
- 계철순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 전 경북대학교 총장.
- 강중인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5년 졸업.[219]
- 홍필선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8년 졸업.[220]
- 류홍렬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과 문학과(조선사학전공) 1935년 졸업. 동성상업학교 교사(1938~194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국사).
- 박의현 - 예과 7회(1930년), 법문학부 철학과(미학미술사전공) 1936년 졸업, 동대학원 조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 교수. 과사 참조.
- 김영택 - 예과 7회(1930년), 의학부 1937년 졸업, 소아과교실 조수(1937~1941년)를 거쳐 의국장(1941~1943년) 역임. 1945년 2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대한소아과학회 회장, 수도의과대학(현 고려대 의과대학) 학장 및 우석대학교 총장 역임.
- 민복기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7년 졸업. 전 대법원장.
- 홍익표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제헌 국회의원.
- 양정수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광주지검장, 부산지검장, 대한변호사협회장.
- 이천상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전 법제처 법제관, 변호사.
- 서재원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대학원 조수로 연구.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판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가지 않고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학문의 길을 지속했다. 1950년 납북.
- 김정제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치안국 보안과장, 경무과장(경무관). 간첩사건으로 사형. 참조.
- 김영년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6년 졸업.
- 최성희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국어국문학전공) 1936년 졸업 후 법문학과 법학과에 재입학하여 1938년 졸업. 논문 참조.
- 김형규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 1936년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문교부 국어연구소 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어학).
- 구자균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 대구사범학교 교유, 고려대학교 교수.
- 차상원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지나어문학전공) 1936년 졸업. 연희전문학교 교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1967년 문학박사(국내 최초 중문학박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중국문학).
- 임학수 - 예과 8회(1931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전공) 1936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외국어문학부장.
- 이제구 - 예과 8회(1931년), 의학부 1937년 졸업, 의학부 병리학교실 조수, 1942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병리학 주임교수, 대한병리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1951~1955년, 1964~1968년),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병리학).
- 조중삼 - 예과 8회(1931년), 의학부 1937년 졸업, 뢴트겐과 조수(1937~194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학교실 주임교수. 대한방사선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장.
- 김경식 - 예과 8회(1931년), 의학부 1937년 졸업, 의학부 내과학교실 부수,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주임교수.
- 고재호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7년 졸업. 전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대한변호사협회장.
- 이도영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8년 졸업. 전 국회의원, 홍익대학교 총장.
- 이종갑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7년 졸업. 1945년 10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상법 교수, 월북.
- 윤동직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7년 졸업. 1945년 10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형법 교수, 월북.
- 김재완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7년 졸업. 전주지방법원 판사.[221]
- 이인영 - 일본 마쓰모토고등학교(松本高等學校)(1930~1933년) 졸업,[222]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조선사학전공) 1937년 졸업. 연희전문학교 교유(1940~1944년), 경성대학 교수 및 초대 도서관장(1945~1946), 문교부 고등교육국장(1948~194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1946~1950) 역임. 1950년 납북[223]. 참조.
- 이의철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철학과(심리학전공) 1938년 졸업, 연구실 조수(1938~1940년).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심리학).
- 한심석 - 예과 9회(1932년), 의학부 1938년 졸업, 미생물학교실 조수(1938~1940년), 내과학교실 조수(1940~1943년), 1943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224]. 경성제대 의학부 전임강사(1943~1945년) 역임.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부속병원장(1964~1968년), 서울대학교 부총장(1970), 서울대학교 총장(1970~1975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내과학).
- 정운갑 - 예과 10회(1933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8년 졸업. 내무부 차관, 농림부 장관, 국회의원. 정우택의 부친.
- 이응규 - 예과 10회(1933년), 법문학부 법학과 1938년 졸업. 출판사 박문서관 3대 사장, 홍익대학교 사무처장.
- 남흥우 - 예과 10회(1933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39년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형법).
- 최재희 - 예과 10회(1933년), 법문학부 철학과 1938년 졸업,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철학).
- 홍진기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0년 졸업. 前 중앙일보 회장, 이건희의 장인.
- 계창업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0년 졸업. 전 대법관.
- 이항녕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0년 졸업. 전 문교부 차관, 성균관대 고려대 교수, 홍익대학교 총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법철학).
- 박재섭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1년 졸업.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경기 양평군수, 충북 보은군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 대학원장.
- 문홍주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0년 졸업. 부산대학교 총장, 법제처장, 문교부 장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민법).
- 전봉덕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0년 졸업. 헌병부사령관, 국무총리 비서실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역임.
- 차락훈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0년 졸업, 1943년 법문학부 대학원 수료.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유, 고려대학교 제7대 총장.
- 김기엽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법학과(3류) 1941년 졸업. 한국은행 부총재,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
- 신구현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전공) 1940년 졸업.
- 이명선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문학과(지나어문학전공) 1940년 졸업, 구제 휘문중학교 교사(1940~194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1946~1949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치하 서울대학교 총장. 참조
- 김석형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사학과(조선사학전공) 1940년 졸업. 아래 김수경과 함께 1946년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
- 김수경 - 예과 11회(1934년), 법문학부 철학과(서양철학전공)[225] 1940년 졸업, 도쿄제국대학 대학원[226](1940~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연구실 촉탁(1944~1945년). 1946년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 김인달 - 예과 11회(1934년), 의학부 1941년 졸업, 피부비뇨기과학교실 부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주임교수,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제2대 원장.[227]
- 이성호 - 예과 11회(1934년), 의학부 1941년 졸업, 제1병리학교실 조수, 제3내과 부수(194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한격부 - 예과 11회(1934년),[228], 의학부 1941년 졸업, 외과학교실 조수, 부속병원장 대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대한의학협회장.
- 황산덕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1년 졸업. 전 법무부, 문교부 장관, 전 서울대, 성균관대 교수.
- 김봉관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1년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제처 법제관.
- 김종규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1년 졸업. 제10대 부산시장(민선).#1#2
- 이기련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1년 졸업.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포병대대장, 11사단 포병단장, 12사단 포병단장, 육군포병학교장. #1, #2, 천승세 소설 포대령의 모델이며 복무 당시 기행으로 유명했다. 백선엽조차 군인 말고 문학가가 되는게 낫겠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였다.
- 정규빈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법학과(3류) 11941년 졸업. 홍익학원 이사장.
- 이근복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사학과 1942년 졸업. 보은경찰서장, 한국 전쟁 당시 화랑부대(전투경찰) 1중대장, 인천수상경찰서장, 서대문경찰서장, 영도경찰서장.
- 박병배 - 예과 12회(1935년), 법문학부 철학과 재학 중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학병. 전 서울시경찰국장, 국방부 차관, 국회의원.
- 부완혁 - 예과 13회(1936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졸업. 경상북도 선산군수, 경산군수,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교수, 조선일보 주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 선우종원 - 예과 13회(1936년), 법문학부 법학과(1류) 1941년 졸업. 전 국회사무총장.
- 서재식 - 예과 13회(1936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1년 졸업. 고등문관시험 합격(1941년), 재무부 회계국장, 한일은행장, 증권거래소 이사장, 부산은행장.
- 충남도경국장, 국회의원.
- 박일경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2년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교수, 법제처장, 문교부 장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헌법).
- 이영섭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2년 졸업. 전 대법원장.
- 주재황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2년 졸업. 전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 김영선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2년 졸업. 국회의원, 재무부 장관, 국토통일원 장관, 주일대사 역임.
- 김경성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4년 졸업.[22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교수.
- 김규영 - 예과 14회(1937년), 법문학부 철학과(서양철학전공) 1942년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서양철학).
- 신한수 - 예과 14회(1937년), 의학부 1943년 졸업, 산부인과학교실 조수. 경성제대 의학부 전임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 주근원 - 예과 14회(1937년), 의학부 1943년 졸업, 제1외과학교실 조수(1943~1945년). 전 서울대병원 부원장.
- 김홍기 - 예과 14회(1937년), 1944년 9월 의학부 졸업, 이비인후과학교실 부수(1944~1945년 8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장(1968~1978),[230] 통합 서울대학교병원 초대원장.
- 현승종 - 예과 15회(193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3년 졸업. 전 국무총리, 전 성균관대 총장.
- 신현확 - 예과 15회(1938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3년 졸업. 전 국무총리.
- 진의종 - 예과 15회(193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3년 졸업. 일본 제국 홋카이도청 농무과장, 전 국회의원, 보건사회부 장관, 국무총리. 이헌재의 장인.
- 김증한 - 예과 15회(1938년), 법문학부 법학과 1944년 졸업.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김재근 - 예과 15회(1938년), 이공학부 기계공학과 1943년 9월 졸업. 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김희철 - 예과 15회(1938년), 이공학부 기계공학과 1943년 9월 졸업. 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 한만춘 - 예과 15회(1938년), 이공학부 전기공학과 1943년 9월 졸업. 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이공학부장(초대), 이공대학장, 산업대학원장.
- 남기동 - 일본 제6고등학교(1937~1940년) 졸업,[231]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1943년 졸업.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공학).
- 정근(丁根) - 경성고등공업학교(1938~1941년) 졸업 후 입학자격시험을 통과하여 1941년 경성제대 이공학부 물리학과 입학, 1943년 9월 제1회 졸업. 월북. 참조.
- 이영균 - 예과 15회(1938년), 의학부 1944년 3월 졸업, 외과학교실 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주임교수, 제4대 원장,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회장. 대한의학회 참조.
- 김성희 - 예과 16회(1939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졸업(1944년). 부산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전 국회의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정치사/정당론).
- 송용기 - 예과 16회(1939년), 법문학부 법학과(3류) ,1944년 졸업.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 이임학 - 예과 16회(1939년), 이공학부 물리학과 1944년 졸업. 수학자.
- 서임수 - 예과 17회(1939년), 법문학부 법학과(2류) 1944년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교수. 대한민국 공군 정훈감, 국민대학교 총장.
- 조성식 - 예과 17회(1940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전공) 1946년 졸업.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영어학).
- 김원용 - 예과 17회(1940년), 법문학부 사학과(동양사전공) 1945년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고고학).
- 서명원 - 예과 17회(1940년), 법문학부 철학과(심리학전공) 1946년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부총장. 숙명여대, 충남대 총장. 문교부 장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교육학).
- 김세경 - 예과 17회(1940년), 의학부 1945년 9월 졸업. 전 우석대학교 의과대학(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대한비뇨기과학회 회장.
- 이문호 - 예과 17회(1940년), 의학부 1946년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대한혈액학회, 대한의학회 회장.
- 참조|이용태 - 예과 17회(1940년), 이공학부 물리학과 1945년 졸업. 소련 유학,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참조.
- 이혁기 - 예과 18회(1941년), 법문학부 철학과.
- 이기영 - 예과 18회(1941년), 법문학부 사학과(동양사학전공) 수학(1943~1944년). 벨기에 루뱅대학 학사(1954~1957년), 박사(1960년). 영남대학교, 동국대학교 교수.
- 서병설 - 예과 18회(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가 개편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교실 주임교수, 풍토병연구소장, 학장 역임. 대한기생충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권이혁 - 예과 18회(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총장. 문교부, 보사부, 환경처 장관 역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1986년).
- 채문식 - 예과 19회(194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진학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1948년). 대한민국 국회의장.
- 윤명로 - 예과 19회(194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진학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서양철학전공) 졸업(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서양철학).
- 하영기 - 예과 20회(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진학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1948년). 한국은행 조사역, 부장, 이사, 부총재, 제일은행 행장, 산업은행 총재, 한국은행 총재.
- 진필식 - 예과 20회(194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1948년). 외무부 통상국장, 정무국장, 차관, 주캐나다대사, 주서독대사.
- 조천식 - 예과 20회(194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중퇴(1947년). 한국은행 이사, 은행감독원 부원장.
- 천관우 - 예과 21회(1944년),[232]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진학, 1949년 졸업. 기사 참조.
기타 동문 명단은 중앙일보에 연재된 강성태의 회고록 시리즈 참조.
9.4. 일본인 동문
- 시마자키 아키라(嶋崎 昌) - 예과 9회(1932년), 법문학부 사학과 1937년 졸업, 사학과 조수. 북경 중앙아세아협회 조사원. 1951년 주오대학 교수, 1969년주오대학 학장[233].
- 이즈미 세이이치(泉 靖一) - 예과 10회(1933년), 1938년 법문학부 철학과[234] 졸업.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수, 메이지대학 교수, 도쿄대학 교수.
- 마에다 도시카즈(前田 利一) - 예과 15회(1938년), 1943년 10월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주한일본대사관 개설시 임시대리대사[235], 주아프간 일본대사, 주한국 일본대사(제6대, 1981~1984년),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
9.5. 선과생
- 이광수 - 1926년 법문학부 문학과 선과생, 1930년 제적. 참조
- 현준혁 - 1926년 법문학부 철학과 선과생, 1929년 수료.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서기,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 김용하 - 1926년 법문학부 철학과 선과생, 1930년 수료. 참조 제주도지사 역임.
- 박종홍 - 1929년 법문학부 철학과 선과생, 1932년 수료 및 학부 입학, 1933년 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철학).
- 김용배 - 법문학부 철학과 선과생, 1937년 수료 및 학부 입학, 1939년 졸업(지나철학전공) 및 학부 재입학, 1941년 졸업(서양철학전공 졸업.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 이종달 - 1937년 법문학부 철학과 선과생 수료 및 학부 입학, 1939년 철학과 졸업.
- 이본녕 - 1935년 법문학부 철학과(심리학전공) 선과생, 1938년 수료. 경성대학 심리학과 교수(1945년).
- 박시형 - 1937년 법문학부 사학과 선과생, 1940년 수료.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
- 박노태 - 1940년 법문학부 문학과(지나어문학전공) 선과생. 휘문고보 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독립유공자.
- 김성칠 - 1941년 법문학부 문학과 선과생.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1948~1951년). 참조.
9.5.1. 여학생
구제고등학교 체계에서 동일하게 예과에는 여학생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학부에서는 선과생으로 여학생의 수강이 가능했다. 따라서 여학생은 모두 선과생이다.- 모윤숙 - 1933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 전공) 선과생, 1935년 2학년 제적.
- 국정효[236] -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 전공) 선과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 신진순 - 1942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 전공) 선과생.
- 고옥남[237] - 1942년 법문학부 문학과(영어영문학 전공) 선과생.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 이남덕 - 1942년 법문학부 문학과(조선어문학 전공) 선과생. 위 김성칠과 결혼.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0. 사건사고
서울 대학로 백골 사건[1] 당시의 표기법에 따르면 けいじやうていこくだいがく.[2] 대북제국대학과 동일한 교표로, 일본제국의 제국대학(학부)는 도쿄제국대학부터 나고야제국대학까지 9개교가 공히 이 교표를 사용했다. 책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이충우·최종고/푸른사상/2013)에 실려있는 경성제대 학부 모표 사진 참조.[3] 전서체로 '대학 예과'의 줄임말인 대예(大豫)라고 적혀있다.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제국대학 예과들은 학부와 달리, 타 구제고교들처럼 특색있는 로고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제국대학 예과 및 구제고교들의 교표는 구제고교기념관 탐방기 및 구제고등학교 항목 참조.[4] 다이쇼 13년 칙령 제103호 경성제국대학관제(원문) 공포. 동시에 이날 칙령 제104호 경성제국대학학부에관한건, 칙령 제105호 경성제국대학에관한건 등 칙령이 반포되었고,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21호 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을 공포하고 고시 제102호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위치 및 수업개시 시기를 통보.[5] 해방 직후 조선인 교직원들에 의해 구성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에 의해 간판의 '제국'을 가렸지만, 공식적인 행정 절차는 아니었으며 공식적인 졸업장에도 경성제국대학 명의로 나왔다. 정식으로 교명이 변경된 것은 45년 10월 미군정 법령 제15호에 의해서이다. 또한, 법령에는 대학 이름이 서울대학으로 표기되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경성대학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6]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의 길 건너편이다.[7] 대학본부, 법문학부, 도서관이 위치해있던 마로니에 공원 사이에 대학로를 끼고 있다.[8] 본관 건물은 제국대학예과 및 블로그 참조.[9]
과거 사진. 사진 좌측에 일부 잘려 나온 건물이 법문학부 건물이다.[10] 일본어 위키백과.[11] 경대(京大, 쿄다이)는 이미 교토(京都) 제국대학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여전히 京大는 교토대학의 약칭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제국대학들의 약칭은 도쿄 東大, 교토 京大, 도호쿠 北大, 규슈 九大, 홋카이도 海大, 경성 城大, 다이호쿠 臺大, 오사카 阪大, 나고야 名大이었다.[12] 대학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 교육기관은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이 때문에 성균관대가 건학 600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법령에 근거하여 대학원 등의 연구과를 두고, 학사, 박사 등의 학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근대식 학제를 지닌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경성제국대학이 최초이다.[13] 문과갑류(법학과 진학생반), 문과을류(문학과 진학생반), 이과갑류(이공학부 진학생반), 이과을류(의학부 진학생반) 등 4類로 구성.[14] 법학과, 문학과(1943년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가 문학과로 통합) 2개 학과 49개 강좌로 구성. 강좌의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5] 1928년 법문학부 경제학1강좌 담임교수 시카다(四方博) 주도로 설립. 조선의 경제사회에 관한 연구수행. 주요 성과물은 "조선통계총람", "조선경제연보"(조선은행 등과 분담 집필) 등이 있다.[16] 27개 강좌로 구성.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7] 1939년, 의학부 약리학2강좌교수 스기하라(杉原德行) 주도로, 조선군의부(朝鮮軍一部)의 지원을 얻어 개성에 위치한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를 흡수 확대하여 설립. 군수의약품 개발 보급이 주 목적으로, 제주도에 약초시험장을 두고 있었으며 주요 성과물로 각종 인삼제제의 개발과 구충약, 디기타민 제조 등이 있다.[18] 물리학과, 화학과,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 7개 학과 40개 강좌로 구성.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9] 1943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로부터 거액의 기부를 받아서 설치된 산학협력사업으로 강원도 평강읍에 설치된 총장 직속기관이었다. 의학부 내과학2강좌 담임조교수 노사카(野板三枝)가 책임자를 맡았고, 당시 사망 원인 1위 질병이었던 결핵의 연구 및 전투기의 발달에 따른 기상(기압 온도 습도 풍속 등)과 호흡기질환의 관계 연구였가 주요 활동이었다.[20] 경성제대에서 종래 수행하고 있던 만몽 학술조사의 발전을 위해 1944년 설립되어 해부학3강좌 담임교수 이마무라(今村豐)가 소장을 맡았다. 법문학부, 의학부, 예과의 교관이 위촉되어 만주와 몽강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다.[21] 동숭동 대학본부 캠퍼스 정문에 이공학부 명패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이공학부가 공릉동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인 1941~1942년경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22] 경성제대가 일본 교육제도에 따른 신교육령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구교육령에 따른 학제로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들은 입학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큰 진통을 겪었다. 구교육령(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소학교(6년)와 중학교(5년) 도합 11년의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보통학교(4년)와 고등보통학교(4년)의 8년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에게 경성제대예과 입시 자격을 동일하게 부여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경성제대 설립과 신교육령(제2차 조선교육령) 공식 반포에 앞서 이 제도적인 갭을 메우기 위해 2년제 보습과를 설치해 4년제 고보 졸업생들을 뽑아 교육시켰다. 이 보습과는 경성제대 설립방침을 발표한 1921년 봄 임시교육제도로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부설되어 소속 학생들에게 구제중학교 3~5학년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을 교육토록 하여 신설 예정인 경성제대 예과를 비롯해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 응시자격을 준 이른바 자격부여기관이었다. 고등보통학교가 기존대로라면 1922년 졸업예정인 1918년 입학생들부터 5년제로 연장되어 1923년 5년제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해 자동으로 경성제대예과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므로 보습과는 1921년 입학, 1923년 조립의 1회의 졸업생만 내고 폐지되었다고 한다. 3년 과정을 2년에 이수해야했기 때문에 선발고사가 있어 60여명의 응시자 가운데 31명이 합격했다. 당시에는 보통학교는 물론 고등보통학교도 일본말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른 과목의 실력이 비교적 낮았고 특히 수의과목인 영어실력은 고보를 졸업했다해도 요즘 중학교 2학년생 정도의 수준이었다. 총독부는 내지의 구제중학교에서도 유능한 교사를 데려다 선두 그룹을 형성한 학생을 기준으로 급행 교육을 했고 그 결과 31명의 입학생 중 19명이 중도 탈락하고 12명만이 수료증을 받았다고 한다. 보습과 과목은 입시에 직결된 영어·일어·역사·지리· 물리·화학 등에 국한됐다. 보습과 학생들이 수료한 1923년에 개교 예정이었던 경성제대예과 설립이 예산 관계로 1년 연기되는 바람에 1924년에는 4년제 고등보통학교를 마지막으로 졸업(1921년)하고 2년간 보습과를 수료한 후 1년을 더 기다린 강성태, 5년제 고보의 최초 졸업(1923년) 기수인 김성진, 두 번째 기수 졸업(1924년)생인 유진오를 비롯해 경성고등보통학교 3개년간 졸업생이 예과 동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23]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조선의 민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로 조선에 대학을 세우겠다”고 호언하고 동대문 밖 청량리에 ‘조선제국대학 예과’ 건물 신축 작업에 들어갔다.[24] 당초 1922년에 실시하여 1923년 4월 개교예정이었으나 예산 확보 실패로 1년 연기되었다.[25] 조선총독(육해군 대장) 바로 아래의 2인자이자 문관 중 1인자로 총독을 보좌하며 조선총독부를 통할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로서 현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해당[26] 공사비 657,482엔[27] <조선제국대학 예과 생도 모집>(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자)
조선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의하는 종합대학으로 도쿄, 교토, 규슈, 도호쿠, 홋카이도의 각 제국대학과 완전히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조선제국대학 부속 예과 수료자는 무시험으로 본과에 입학할 수 있다.
(가). 모집인원:
- 문과A: 법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
- 문과B: 문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
- 이과: 의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80명.
(나). 입학지원자의 자격: (구제)중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및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
(다). 입학시험 학과목:
- 문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 작문)•수학(대수, 평면기하)•역사(서양역사와 국사 전부).
- 이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수학(대수, 평면기하, 삼각법)•박물(동물과 박물 통론)
(라). 시험기일: 학과시험 - 3월18~21일, 체격시험 - 3월17일 공고
(마). 시험장소: 경성
바. 출원기일: 1월21일~2월14일
사. 입학검정료: 5원
신동아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참조.[28] 일본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일과 동일. 관립대학 설립을 권하던 내각에 맞서서 신설되는 대학이 반드시 제국대학이 되어야 하며, 그 예과는 구제고등학교에 준해야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쪽.[29] 여기서 제국대학 대신 조선총독부령에 따른 관립대학을 설립하라는 법제국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최고학부인 제국대학 설립을 관철시켰으나, 명칭 문제에서는 법제국 의견을 수용하여 '경성제국대학'으로 변경되게 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473쪽.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하면 "조선제국의 대학"이라는 뉘앙스가 생긴다는 까닭이었다.[30] 추밀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추밀원 심의도 받지 않고 학생까지 다 뽑아놓고 이제와서 추밀원 승인을 득하려한다며 분노하여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4월 20일 가까스로 심사위원회를 통과[31] 추밀원에서는 법문학부 설치를 반대하고 의학부의 경성의전과 중복 문제 및 공학부 농학부의 필요성을 지적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3-475쪽.[32] 다이쇼 13년 칙령 제103호[33] 동시에 칙령 제104호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 칙령 제105호 '경성제국대학에 관한 건' 등 칙령이 반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21호 '경성제국대학 예과규정'을 공포하고 고시 제102호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위치 및 수업개시 시기'를 통보.[34] 경성제국대학 총장 사무취체역(총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아리요시(有吉忠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임석 상관으로, 총독부 요인들과 학부형들이 참석했다. 구한말 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李完用)도 나왔다. 내빈들의 축사에 이어 수석합격자인 유진오(兪鎭午)가 학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낭독했다. 개교식날 입학생에게는 기념메달과 축하떡(모찌)를 주었다. 기념메달은 겉면에는 3층의 예과 건물과 '개교기념(開校紀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경성제국대학 예과(京城帝國大學豫科)ㆍ대정 13年'이라 써 있었다. 예과(豫科)의 조선인 첫 합격자는 45명이었으나 이과에서 1명이 등록을 하지 않아 44명만이 입학했다. 출처[35]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 중 조선인은 총 25명으로 법학과 10명(강성태, 유진오, 김처순, 홍일룡, 최병헌, 주병환, 전승범, 박영배, 이득영, 이민희), 문학과 7명(채관석, 이종수, 조윤제, 박충집, 이재학, 최창규, 노영창), 사학과 2명(신석호, 김창균), 철학과 6명(김계숙, 권세원, 배상하, 박동일, 한제영, 조용욱) 등이었다. 본과는 3년제였던 여타 학부와 달리 4년제였던 의학부 졸업식은 1930년 3월에 치러졌다.[36] 법문학부는 3년제, 의학부는 4년제였으므로 예과1기 이과생들이 진학한 의학부 제1회 졸업식은 1930년 3월에 실시되었다. 이 때 조선인 졸업생은 김성진, 명주완, 이세규, 박건원, 윤봉헌, 김봉응, 이정복, 이의식, 박천규, 김능기, 김용업 등 11명이었다.[37] 칙령 제251호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법문학부/이학부에 이공학부를 추가. 시행일은 1941년 1월 1일부. 따라서 1938년 입학한 예과 18회 신입생 모집부터 기존 이과반을 나누어 이공학부 진학반인 이과갑류(理科甲類)를 설치하고 의학부 진학반은 이과을류(理科乙類)로 규정.[38] 이공학부 역시 법문학부와 마찬가지로 3년제이므로, 1941년 4월 개설 당시 진학한 학생들은 1944년 3월에 졸업했어야하나, 태평양전쟁에 따른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에 따라 법문학부•의학부와 동일하게 방학을 폐지하고 수업을 속행하여 6개월이 단축된 1943년 9월에 학부 졸업식을 실시. 예과 15회가 주축이 되었던 이공학부 제1회 졸업생 42명 중 조선인은 12명.[39] 1945년 10월 16일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15호에 의거 1946년 10월 17일 0시부로 발효[40] 1945년 10월 17일 공포된 미군정 임명사령 제18호에 의거 10월 18일 00시부로 총장 및 법문학부•의학부•이공학부의 학부장과 예과부장이 임명됨.[41] 경성대학의 법문학부와 이공학부를 각각 분리하고 농학부와 교육학부 및 대학원을 설치하여 미국식 대학(American University)로 전환시킨다는 방안[42] 대학령 공포 이전까지 일본제국에는 대학은 오직 제국대학령에 근거한 제국대학만 존재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단과대학(College)으로 번역되는 구제전문학교는 대학이 되거나 그 명칭조차 쓸 수 없었다.[43] 설립 당시 명칭은 '제국대학'[44] 예과 설치 년도[45] 1916년 조선총독부병원 의학강습소(舊대한의원 부속 의육부)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경성공업전습소(舊대한제국 농상공학교)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시켰고, 1918년 역시 舊대한제국 농상공학교를 기원으로 하는 수원농림학교를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시켰으며 1922년 경성전수학교(舊대한제국 법관양성소)를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舊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를 관립으로 이관.[46]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전문학교로 인가하고 1921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가.[47] 서울대학교 70년사, 11페이지[48] 종전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정준영 등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의 전면 개정 반포 이전인 1921년 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세워질 제국대학 예과 입시자격을 주기 위한 4년제 고보 졸업생 대상 보습과를 개교했고(위 연표의 1921년 보습과 설치 참조), 또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규정>을 제정하여 대학예과/학부 교수요원 양성을 시행했으며 1923년 예과 개교 및 1925년 학부 개교를 목표로 1922년부터 예과 부지를 확보하고 건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의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을 식민지에 이식하기로 결정한 데 있어서는 다소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민립대학 설립대학운동으로 경성제대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 폐기된 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간행된 「식민지식과 근대권력 - 경성제국대학 연구」(2011) 참조.[49] 위원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재무국장·내무국장·참사관과 조선은행 총재 등 조선측 관료들구 일본 문부성 보통학무국장·종교국장, 대장성 참사관, 법제국 참사관, 귀족원 의원 4인 그리고 도쿄제국대학 교수, 교토제국대학 교수, 와세다대학 학장 및 수원농림전문학교 교장,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장 등이 위원[50] 동아일보 1922년 2월 7일자.[51] 예산 확보가 안 된 관제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법제국에 대응해 총독부가 대장성과 긴급 협의를 통해 4월에 법제 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52] 제국대학령에 의거한 제국대학을 주장한 총독부와 대학령에 의거한 관립대학으로 변경하라는 법제국[53]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의 사례와 같이 '조선'으로 조선제국대학을 주장한 총독부와 '도쿄', '교토'와 같은 맥락에서 '경성'으로 변경하라는 법제국.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참조.[54] 이 때 기존의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등 조선총독부의 관립전문학교들을 모체로 삼아 제국대학으로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와 설치할 학부의 종류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제국대학 중 거의 유일한 사례로 매우 특이하게도 경성제대는 기존 관립전문학교들을 흡수하지 않고 존치한 상태에서 별도로 설립되었다. 제국대학과 관립대학은 관립 구제전문학교를 기반으로 문과계열 학부를 설치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개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5] 최초 도쿄제국대학의 출발도 의학교+공학교+개성학교였고, 교토제국대학은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가 제3고등학교의 의학부로 편입되고 증설된 공학부, 법학부, 문학부 등과 함께 제국대학으로 승격, 도호쿠제국대학은 '센다이의학전문학교'가 모체이며, 규슈제국대학은 후쿠오카의학교가 '교토제국대학 후쿠오카의과대학'을 거쳐 승격, 홋카이도제국대학은 관립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 삿포로농과대학'을 거쳐 승격한 것이다. 이후 대만 다이호쿠제국대학도 기존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를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해 이농학부를 만들고 문정학부를 더해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도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하며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오사카제국대학도 오사카의학전문학교가 오사카의과대학을 거쳐 승격, 나고야대학은 의학전문학교 → 현립대학 → 관립대학 → 제국대학의 승격 테크를 차례로 밟았다.[5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창설 과정에 기존 경성의학전문학교로부터 교장(1920년 부임하여 당시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가 기요시가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진을 인선하였으며, 그는 경성제대 의학부 초대 학부장을 거쳐 제2대 경성제대 총장이 된다. 그를 따라 경성의전 교수진의 상당수가 경성제대 의학부로 넘어갔다.) 이하 교수진의 상당 부분과 실습 병원격이었던 조선총독부병원(舊 대한의원)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도쿄대학 문학부 대학원 인문사회연구계에서는 경성의전을 경성제대 의학부의 사실상의 전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京城帝大医学部は法文学部とは異なり事実上の前身となる機関(朝鮮総督府医院・京城医学専門学校)を持ったが" 출처 참조. 즉, 경성의전의 입장에서는 교수진의 상당 부분과 실습 병원을 경성제대 의학부에 빼앗긴 셈이고 대신 소격동 종친부 자리에 새로 병원을 짓고 이전하게 되었다. 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조선군(일본제국) 경성육군병원을 거쳐 광복 후 6.25전쟁 와중에는 국군에 징발되어 1965년 국방부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국군서울지구병원과 보안사령부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이외에도 조선의 최고 의료교육기관 지위를 박탈당하는 데 대해 경성의학전문학교측이 격렬히 항의하자 조선총독부측은 경성제대 의학부는 연구와 의학에 중심을 둔 '의학사'를 양성하고, 경성의전은 진료와 치료에 중심을 둔 전문 의료인으로서 '의사'를 양성한다고 하면서 반발을 무마하였다.[57] 경성제국대학에 관해서는 제국대학령에 의한다. 다만 동 령 중 문부대신의 직무는 조선총독이 행한다. 부칙 본 령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58] 이듬해인 1927년에는 법문학부 38개 강좌, 의학부 15개 강좌[59] 대학예비교육을 행하던 구제고교를 '남자의 중등교육을 완성하는 기관'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고등학교 본과의 명칭을 대학예과에서 고등과로 개칭하며 5년제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와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과(3년)를 통합한 7년제 고교를 기본으로 두고, 예외적으로 고등과로만 구성된 고교도 가능하게 해 기존의 3년제 구제고교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그러한 3년제 고교 입시의 응시자격을 기존의 구제중학교 5년 졸업생에서 4학년 수료생으로 확대하도록 했다.[60] '대학령' 제13조는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 또는 2년으로 한다"고 규정하면서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 제4학년을 수료한 자"로 그리고 "수업연한 2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로 규정하여,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생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대학예과는 3년제로, 구제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대학예과는 2년제로 두도록 했다.[61]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생부터 입시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62] 경성제대 학사 졸업 후 재입학해 다시 학사칭호를 획득한 23명 중 18명이 문학과/사학과/철학과 및 의학부 졸업 후 재입학해 법학사를 취득한 경우이다.[63] 예컨대 현준혁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선과생으로 들어와 전검시험을 통해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한 케이스이다.[64] 그 이전까지 나뉘어있던 A반/B반은 예과규정에 명시되어있지 않은 구분이었고 각반 사이에 교과목과 교수 시간의 차이가 없었다.[65] (1) 전과목 평균점 60점 미만, (2) 한 과목이라도 과목 평균점 40점 미만, (3) 과목 평균점이 50점 미만인 과목 2개 이상, (4) 과목 평균점이 60점 미만인 과목이 전체의 1/4 이상이고 그 중 한 과목이 평균점 50점 미만, (5) 과목 평균점이 60점 미만인 과목이 전체의 1/3 이상.[66] 유진오의「구름위의 만상」에 예과 강사였던 유진오로부터 낙제점인 20점을 받아 유급당할 뻔한 생도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있다.[67] 본과인 학부의 수업료는 제1기 35원, 제2기 35원, 제3기 30원이었다.[68] 1924년 설립 당시 주소이며,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다.[69] 2012년 3월부로 자연과학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소속변경[70]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한 동숭동 캠퍼스는 이후 서울대학교의 메인 캠퍼스 역할을 하였다.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문과 계통과 이공학부 이과 계통의 통합 개편으로 이루어진 문리과대학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편제되었다. 문학부는 동숭동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이학부는 청량리의 옛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에 위치하였다. 6·25 전쟁 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가교사를 열어 수업을 이어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서울의 동숭동 본교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이학부의 일부는 청량리 옛 교사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후 문리과대학 내 모든 학과가 동숭동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60년사>) 서울대학교 기록관 설명 참조.[71] 1977년 한림대학교의료원에 의해 인수되어 1979년 동산성심병원으로 개칭하였고, 1992년 기존 170병상에서 202병상으로 증설하였으며, 1999년 1월 16일 폐원시까지 매년 약 11만명의 외래환자와 연인원 4만 2천명에 이르는 입원환자를 치료하였다. 1999년 3월 개원한 평촌성심병원으로 이어진다.[72] 붉은 벽돌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예과 본관 건물은 철거 때까지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73] 문정학부, 이농학부[74]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제국 문부성은 당초 문과계열 학부 설립을 계획하지 않았던 도호쿠와 규슈의 제국대학에 법문학부를 설치해서 정원을 늘리고, 관립의과대학들 역시 별도 예과 설치없이 구제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하도록 했다.[75] 참고로 구제고교별 정원은 큰 차이가 없었다.[76] 조선인이 구제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우수한 인재를 경성제대에 묶어두기 위해 구제고교 대신 예과 형태를 채택했다 설명해온(정선이,「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과거 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조선인의 내지 대학 진학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수치로 간단하게 반박된다. 1942년까지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이 629명인 데 반해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784명에 이르고, 정식 학사를 받지 못했던 선과생이나 전수과 그리고 위탁생과 학업 중도포기자를 합하면 1,000명을 훌쩍 넘기는 조선인이 내지의 제국대학에 유학했음을 알 수 있다(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후머니타스, 2017.).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사립대학들을 제외하고도 내지의 제국대학에 진학한 조선인 수만도 경성제대를 압도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 경성제대 예과를 졸업하고나서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사례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한정된 경우지만 경성제대 예과를 통해 일본 내지로 진학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종현의 연구에 따르면, 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236명의 출신 구제고등학교를 보면 경성제대 예과와 홋카이도제대 예과를 졸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경성제대 예과, 홋카이도제대 예과, 다이호쿠제대 예과 등 제국대학예과 3개교도 넘버스쿨(番號校) 8개교, 네임스쿨(地名校) 19개교 및 학습원 고등과 등과 함께 관립 31개 구제고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설령 제국대학 입시에서 경성제대 예과가 내지의 구제고교 보다 후순위였다 가정하더라도, 구제고교 졸업예정자 대상 입시에서 마감되는 인기학부(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기타 제국대학의 의학부 등) 진학은 불가능했겠지만 구제고교생 대상 입시가 미달나서 구제전문학교인 고등상업학교 및 고등사범학교 졸업생이 다수 입학하던 대부분의 비인기 학부에는 입시를 거쳐 입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77] 이는 신설 대학이 반드시 제국대학이 되어야 하며, 그 예과는 구제고교에 준해야한다는 총독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문부성과 제국의회는 단과 관립대학 설립에 그치려고 했던 것을 조선총독부가 명칭에서 양보(조선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하면서 끝까지 제국대학령에 의거한 제국대학으로 설치할 것을 관철시켰다.「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쪽.[78]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에서는 부속예과 형태를 택하게 된 또다른 이유로, 경성제국대학관제의 법제국 심사와 추밀원 심의 등 경성제국대학 설립 작업의 막판까지도 제국대학령에 근거한 제국대학이 될 것인지 대학령에 근거한 관립대학이 될 것인지 반발과 논란이 있었을 만큼, 제국대학으로 추진하던 조선총독부도 자신들의 입장이 내각에서 관철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관립대학으로 낙착되더라도 적용이 가능한 예과 형태를 준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79] 의학부, 공학부 등[80] 1918년 개정 고등학교령에서 고등과로 변경.[81] 간혹 여기까지 포함해서 41개교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는데 극히 드물다. 제국대학의 예과로 기능했다는 구제고교의 특성에 해당하지 않기도 하고.[82] 와세다대학의 예과는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교'라는 명칭을 썼다.[83] ①학생은 예과부장의 허가를 얻지 아니하고는 다른 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②전항의 허가를 얻고자 하는 자는 사유서를 구비하고 보증인과 연서하여 출원하여야 한다.[84] 경성제대 예과의 수학연한은 1943년 일제가 구제고등학교를 2년제로 단축함에 따라 2년제로 단축된다(일본어 위키백과 참조. 1942년에 임시조치로 3년을 2.5년으로 단축하고, 1943년부터는 2년제로 단축). 이 때는 총력전을 위한 국민총동원 체제로 가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 2년 과정이 1938년 1년 8개월, 1941년 1년으로 단축), 일본해군병학교(3년 8개월 과정이 1941년 2년 4개월로 단축) 등 사관학교부터 구제전문학교와 관공립/사립을 막론한 구제대학까지 모든 학교들이 구제고교와 마찬가지로 수학 기간이 단축되던 상황이었다.[85] 사진의 인물은 이효석.[86] 학부 본과생은 학생, 예과생은 생도라고 구분해서 불렀다.[87]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경우는 이학부를 기준으로 1순위로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수료자, 2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이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이과 졸업자, 3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문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문과 졸업자를 입학시켰고, 이후에도 결원이 있는 경우 4순위로 고등사범학교와 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생, 5순위로 기타 구제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자격검정시험 합격자, 마지막 6순위로 구제중학교 교원면허소지자로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를 입학시켰다고 한다.[88] 김진섭,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 지성사, 2021. p.116 참조[89] 1938년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전부 중학교로 명칭이 통일된다.[90] 정선이, 「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pp.95-99[91] 경성제국대학 외에 구제전문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등도 일본인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마자 일본인 지원자가 쇄도, 70~90%가 일본인으로 채워졌으며 이는 1933년 개교한 평양의전과 대구의전, 1944년 개교한 광주의전과 함흥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조선의 최고학부라고 개교했더니 학생은 전부 일본인으로 채워지고 조선인 학생 비율이 너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한 조선총독부가 예과제를 채택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92] 정근식 등,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pp.531-532. '표 IX-10. 본적별 예과 입학자수(문과, 이과 전체)' 참조.[93] 미야자키현(宮崎)은 33명.[94]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 기념 국립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1895~1946)」 p.575.[95] 동아일보 1925년 5월 22일 사설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 조선일보 1927년 4월 1일 조간 2면 기사 '백사십칠인 중 조선인은 사십팔-외지대학과 다를 것이 무엇' 등[96] 동아일보 1934년 4월 7일[97] 일본 본토의 구제고는 갑을병류반을 어떤 외국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해졌다.[98] 헤이안 시대 천황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관청[99] 헤이안 시대의 고관으로, 사실상의 규슈 총독인 대재부(大宰府) 대재권수(大宰權帥)를 지냈다.[100] 토요우케히메(豊受姬)라고도 하며, 이자나미가 죽을 때 그 소변에서 태어난 신 와쿠무스비의 딸. 고사기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음식의 신.[101] 에도 시대에 하야시 가호(林鵞峰)가 집필한, 편년체의 고대사 관련 사서.[102] 대학 본관(우측), 도서관(좌측)도 일부 나타나있다.[10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규정 참조.[104] 1907년 개교, 1922년 8월 법문학부 설치 및 1923년 제1회 법문학부생 신입학[1911년] 개교, 1924년 9월 법문학부 설치 개정 및 1925년 제1회 법문학부생 신입학[106] 법학과가 없고 정학과(政學科)가 있었던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28년 문정학부(文政學部)로 설립되었다. 기타 홋카이도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은 1945년 광복시까지 법문계 학부가 없었다.[107] 1919년 개정된 제국대학령에는 '대학에 복수의 '학부'를 둔다고 규정되어 있다.[108] 이러한 학제의 원조는 영국으로, 자세한 것은 현재도 이를 유지하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 문서 참조.[109] 일어학/일문학[110] 중국어학/중국문학[111] 영어학/영문학[112] 일본사학[113] 중국철학[114] 강좌제하에서 학과의 의미가 미미함은 위의 법문학부에서 설명함.[115]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孔德里)'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려고 계획했지만, 마포구에 한자까지 똑같은 공덕동(孔德里)이 또 있기 때문에 인근에 위치한 조선 11대 왕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의 무덤태릉(泰陵)에서 따와 태릉동(泰陵洞)으로 변경하면서 편입되었다. 하지만 기존 공덕리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고, 지역 주민들 간 협의가 이루어져 1970년 '공덕'과 '태릉'에서 한 글자씩 따서 '공릉동'이라고 바꾸면서 공릉동이 되었고, 이것이 역명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경춘선이 이설되기 전 성북역(현 광운대역)에서 분기되던 시절에는 이 곳에 경춘선 신공덕역이 있었는데, 역 이름이 상술한 연유에 의거하였다.[116] 舊 경성제대 이공학부 교지의 넓이는 現서울과기대 캠퍼스를 포함하여 주변의 경기기계공고, 원자력병원, 한국전력연수원(舊 원자력연구원), 초등학교, 특수학교 등을 모두 포함한 엄청난 규모였다.[117] 경춘선 개통 당시 노선을 경성제대 이공학부 앞을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역U자 모양으로 휘어가게 노선을 잡았다. 구 경춘선 노선이 성북역에서 바로 화랑대 방면으로 가지 않고 신공덕역으로 우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118]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공학부는 대전 말기인 1943년에 가서야 설치되었다.[119] 의학부 진학생반이 기존 이과반에서 이과乙類가 되었다.[120] 조선총독부령 제29호[121] 1943년 경성광산전문학교(이후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 5호관) 역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의 경성제대 이공학부 캠퍼스 바로 옆으로 이전되면서 공덕리(현 노원구 공릉동) 캠퍼스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경성광산전문학교의 교사가 같이 위치하게 되었다.[122]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이성규 교수(동양사학과)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식민사적 의의」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며 “경성제국대학이 3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 중 조선인 이공학부 졸업생은 37명으로 이들은 해방 후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로서 대학교육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 조선반도의 유일한 대학으로 군림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관한 국내 사학계의 서술의 비중과 평가에 의도적인 왜곡이 가미되었다고 한다. 그는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조선인 졸업자 수가 ‘37명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비판하며 ‘37명이나 된다’고 평가하며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식민지 과학기술의 전당이자, 해방 후에 신생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에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를 "제국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루어놓은 성과 중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규정한다. 교수신문 2005년 5월 7일자 참조.[123] 제1류 인문학(어문/역사/철학)계열, 제2류 사회과학계열, 제3류 자연과학계열[124] 경성고공 졸업생들이 단순 기술자인지 아니면 전문적인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문적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는 논자들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업하고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정식명칭은 판임관(判任官)이라 하며 관료 중 말단을 형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기술고시 합격하여 부임한 5급 공무원 수준)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봤을때 무조건 단순 기술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단순 기술자로 보는 논자들은, 당시 일본이 실업적 공업 교육과 학문적 공학 교육을 아주 엄밀히 구분하고 있어 공업전문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바탕으로 하고, 대학에서는 학문적인 공학 교육을 행했으므로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들이 실무적 측면에는 어느 정도 밝을지 몰라도 기술적 통찰력은 크게 부족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바로 창업을 하거나 건축 사무실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공장과 같은 산업체나 기수와 같은 기술관으로 나가서 별도의 기술 수련을 받는 식이었다. 실제로 경성고공 출신의 근대 건축가들 모두가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건축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토목회사나 조선총독부의 영선과 말단에서 구르면서 경력을 상당 부분 쌓은 다음에 자신의 사무실을 내었다. 이 논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인적자본 축적과 관련해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다.[125]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들을 규율하는 대학령(1918)은 제3조 제1항에서 "학부에는 연구과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제2항에서 "수 개의 학부를 설치한 대학에 있어서는 연구과 간의 연합협조를 위하여 종합하여 대학원을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대학원이 설치된 대학은 제국대학뿐이었다고 한다.[126] 일본에 도입된 유럽식, 특히 독일 학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독일의 경우 유럽연합의 볼로냐 프로젝트에 따라 EU가맹국가와 대학학제를 통일하기 이전에는 9년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3~4년 연한의 학부를 졸업한 뒤 마이스터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대학원 박사학위과정으로 진학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독일의 학제를 모방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 석사학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이스터학위 자체가 석사학위에 상당하니, 일본의 구학제 학사학위는 신학제 기준으로는 수사(석사) 학위인 셈이다.[127] 졸업한 전문학교의 교수와 입학할 제국대학의 교수[128] 경성제대의 사례는 아니지만 우장춘 박사도 학사 학위 없이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 구레중학교 졸업 후 (원래는 교토제국대학 공학부에 가고싶어 우선 구제고등학교를 가려 했으나) 총독부에서 장학금 수여 조건으로 전문학교에 상응하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 진학을 지시하여 별수없이 농학부 실과로 갔었는데, 졸업 후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다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을 다니며 농학박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다만 박사 취득 전에는 농학부 본과 학사 출신이 아니라 실과 출신이며 무엇보다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별로 우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악조건을 딛고 세계적인 농학자가 된 것이다. 농학부 실과는 이후 도쿄제국대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도쿄고등농림학교로 독립했으며 현재는 도쿄농공대학이 되었다.[129] 지금도 일본 소재 대학 명의로 발급되는 박사학위 수여자의 박사학위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 가능하다.[130] 의학부가 유독 학위 남발이 심했는데, 가장 심한 케이스는 연구생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논문을 쓰지 못해서 이름만 걸어 놓고 개업의로 일하고 있던 사람한테도 지도 교수가 불러다 놓고 갈궈서 보고서 수준의 논문을 급조하게 한 뒤 박사 학위를 준 점이다. 그래서 실제로 당시 해방박사 학위를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박사 학위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어디서 언제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 잘 밝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131] 해방 당시 경성제국대학에 근무하던 전임교원은 김종원 1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공학부 강사였던 김종원이 패망 직전인 7월 13일 강사에서 교수로 승진 임명(조선총독부 관보 5544호)되고 한 달 뒤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비전임 교원인 강사 중에는 조선인들이 약간명 있었으며, 조수나 연구생들 중에도 조선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직원 중에서는 중상위직은 일본인들이 담당했지만 말단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애초에 경성제대 교수로 임명되어 봉직하던 경성제국대학 학부 졸업생은 법문학부 제2회의 일본인 졸업생 1명뿐이었다. 대북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과 유사하게 경성제국대학 역시 제1회 졸업생 배출 후 약 15년 만에 종전을 맞게 된 데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132]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학제에 따라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졸업식은 3월이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0월 16일 칙령 제928호로 수업 연한의 임시단축령이 공포되어 1942년 ~ 1945년 동안에는 6개월씩 단축하여 9월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133]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1회 졸업생인 박영배는 도쿄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신설된 경성제대로 전학해온 바 있었다. 이를 보면 종전 이전의 제국대학간에도 결원이 발생한 경우 어렵지 않게 전학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출처.[발췌번역] 1945년 4월 14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경성제대 예과(이과)에 입학한 야마다 타카시는 4개월 후 종전을 맞고 이듬해 구제 사가고등학교로 전입하여 오사카제국대학으로 진학했다. 1945년 경성제대 예과(문과)에 입학한 후나코시 이치로는 구제 마쓰에고등학교를 거쳐 규슈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야마다씨의 집계에 따르면 종전 당시 경성제대 예과에 재학 중이었던 일본인 학생 463명 중 내지의 구제고교로 전입한 사람이 313명으로, "제6고(오카야마) 등 공습으로 인해 교사가 전소되어 수용될 수 없었던 학교도 있었지만 전국의 거의 모든 고교에서 전입을 받아주었다. 특히 조선과 가까운 규슈의 고교들(제5고, 제7고, 후쿠오카고교, 사가고교 등)이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다만 미군에 점령된 남조선에서는 1945~1946년에 거의 모두 무사 귀국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에 점령된 만주와 북조선에서는 귀국이 지연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가 억류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후 간신히 귀국했어도 이미 시일이 지나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곤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구제중학교 전수관을 졸업하고 1942년 경성제대 예과(문과)에 입학한 미야모토 히로미치는 법문학부 재학 중 입대하여 소련군에 의해 종전 후 4년간 억류되었다가 간신히 귀국했을 때 일본의 연합군총사령부 GHQ에 의한 구제→신제 학제개혁이 진행 중이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학 당시 지도교수님이 도쿄대학 법학부로 전입할 수 있게 해주셨지만 나이까지 먹고 (격이 떨어지는)신제대학에 가야하나 생각하고 가지 않았다. 전쟁이 없었다면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관료가 되었겠지."라고 회고했다.[학교별전입학인원] 주로 서일본, 특히 규슈 지방 출신이 많았던 경성제대의 학생 구성이 반영되어있다.[136] 경성대학이 아니라 서울대학이라고 표현하여 혼동의 여지가 있지만 이 법령의 취지를 교명에서 ‘제국’을 제외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일 시행된 임명사령 제16호("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임명사령 제16호 좌기(左記) 각인(各人)을 경성대학 의학부 별기(別記) 관직에 임명하고 기(其) 직권행사를 명함")를 비롯하여 11월 28일 학무국장의 담화 등과 1946년 8월 21일 법령 제102호에도 ‘경성대학’이라는 교명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서울대학'으로 해석할 경우, 1946년 '경성대학'을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에 통합하는 법령과 충돌한다. 폐지 대상인 '경성대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37] 다만 경성제대(약칭 성대)가 설립되고 20년 이상 지나 굳어진 상황에서 한 순간에 서울대학으로 개칭되지는 않았고,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경성대학'과 '서울대학'이 혼용되었다.[138] 야반은 본래 삼경(三更), 즉 자시(子時)로 밤 11시~1시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가 자정(子正)이다. 여기서는 10월 16일 24시, 즉 10월 17일 0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39] 서울대학교 소개 참조. 사실 1945년 10월 8일자 미군정청 보도자료에 이미 학무국장 로커드(Lockard) 대위가 당시 학무국 학교과장이었던 크로프츠 박사를 서울대학 총장에 임명하기로 했음을 밝힌 바 있으므로 10월 17일 사령장 발령과 동시에 부임한 것으로 판단된다.[140] 서울대학교/학부/인문대학 제2회 심포지엄 제3세션[141] 일제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해방 직전인 1943년에서야 전문학교급으로 승격되었고 그 전에는 중학교 급이었기 때문에 전문학교라는 인식이 미미했다.[142] 경성제국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수는 해방 후 사실상 업무를 중단했고 그해 10월 내지 11월까지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퇴출되었다. 한편 조선인 교수들이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 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다.[143] .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144] 일제강점기 판사였던 서광설 변호사의 아들로, 1931년 경성제대 예과 8회를 입학 수료하고, 1936년 법문학부를 제8회로 졸업하고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판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가지 않고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학문의 길을 지속했다. 6.25 전쟁 당시 아버지와 함께 납북당함.[145]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146] 1912년 출생, 대구농림학교,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하고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경성제대에서 홍진기와 더불어 유이하게 재학 중 경성제대 발행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학생이었다고 하며(홍진기 항목 참조),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147] 아래 박극채와 유사하게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경제법학연구소장 등을 역임[148] 보성전문학교 교수 시절 유진오의 애제자로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149]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에 넘어가 월북하여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부임.[150] 1907년 울산 출신으로 울산공립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제1고등학교를 나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부수로 연구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제2대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기사 참조.[151]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었다.[152] 경북 경산 출신으로 1931년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이후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선과생으로 입학해 철학과를 1938년 졸업. 해방 직후부터 경성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임하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153] 최호진,「경성대재건과 국대안파동의 와중에서」, 신동아, 1990.8, p.251[154] 유진오, 서재원, 윤동직, 이종갑, 김갑수, 이희승, 조윤제, 이숭녕, 이인영, 박종홍, 이본녕[155] 김두헌, 최정우, 이양하, 강정택[156] 박극채, 윤행중, 황도연[157] 최호진[158] 유진오, 김증한 회고 및 최종고 등을 통한 복원[159] 권이혁 회고를 통한 복원[160] 잡지 현대과학 창간호[161] 참고로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경성대학 예과 46학번이다.[162] 이때 졸업생으로 김명윤, 서돈각, 장하구 등이 있다.[163] 舊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164] 제1류 법학전공, 제2류 정치학전공, 제3류 경제학전공[165] 출처: 서울대학교정치학과60년사[166] 출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육십년사.[167] 각 단과대학들의 대학연합 수준이었던 초창기 서울대학교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서 고려대 연세대 등 타 학교까지 전부 다 모여 수업을 받은 전시연합대학 시기를 거치며 단과대학간 인적 교류가 생겨났는데, 덕분인지 전후 문리과대학에 교양과정부를 설치해 모든 단과대학 신입생을 교육하게 하는 등 크게 재편되며 차차 종합대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168]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체제로 대다수 제국대학이 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삼아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제국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하면서 기존의 의학전문학교는 의과대학 부속 전문부(구제전문학교에 상당)로 흡수하였다. 일본어 위키백과 제국대학 항목을 참조하면 종전 당시 제국대학들은 경성제대를 제외하고 8곳 모두 예외없이 부속 의학전문부를 두고 있었다. 이외에 규슈제대는 공학전문부, 홋카이도제대에는 농림전문부와 토목전문부 등이 존재했다.[169]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역시 1936년 의학부를 설치할 때 흡수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1945년 종전때까지 부속 의학전문부로 두고 있었다.[170]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예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청량리의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의예과 캠퍼스로 승계하고, 의예과의 소속 또한 의과대학 대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이라는 문리과대학에 귀속시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완전히 곁가지로 내쳐버렸던 것이다.[171] 참고로 일제강점기에도 의사 선호현상이 상당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의 관립 구제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의 사립 의학전문학교 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 대부분이 경성의전을 지망하는 해도 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경성부는 물론, 평양과 대구, 함흥과 광주 등에 있는 한반도의 관립 의학전문학교 진학희망자가 쇄도하여 전원 일본인 학생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입시에 조선인을 2/3 이상 뽑으라는 지침을 내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방의 의학전문학교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전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절대 도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명주완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개교를 기다리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반수를 해서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바 있다. 전종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 낙방 후 경성의전에 수석 입학했으며, 직장에서 상사로 만난 경성제대 교수의 추천으로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 생활을 했는데 경성의전이 경성제대에 한참 못 미쳤다는 평가를 말년 회고록에 남길 정도였다.[172] 경성대학 의학부장이었던 윤일선 교수는 1946년 통합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영전하였다.[173]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하고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174] 1917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1931~1945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 역임[175]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임[17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었던 제1부속병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었던 제2부속병원이 행정통합된 시점의 초대 통합병원장이었다.[177] 1926년 경성제대 예과 제3회 입학,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외과학교실 조수, 1937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박사학위논문:絞縊性腸閉塞症に関する研究 (1937))[178] 1932년 경성제대 예과 입학, 1938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의학부 연구실 조수로 근무. 1943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를 받고 의학부 강사로 있던 도중에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4년 서울대학교병원장 등을 지내고 의대를 지지기반으로 총장(1970~1975년)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역사상 유일한 연임 총장이다.[179] 1941년 경성제대 예과 제18회 입학, 1943년 9월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5년 8월 3학년 때 광복을 맞이하여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180] 1923년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출생으로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평양제3공립중학교를 1941년 졸업하고 구제고등학교인 야마구치고교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졸업, 동년 10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로 진학했다. 전쟁 중이던 1945년 5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전학하여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53명)이 되었다.[181] 1937년 경성제대 예과 제14회 입학, 1940년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4년 9월 의학부 졸업.[182] 이공학부 1회 학생들은 1938년 예과 이과갑류 입학해 1941년 이공학부로 진학했는데, 이들 중 조선인은 15명이었고, 이공학부 1회 졸업생 중 조선인은 13명이었다.[183] 물리학과, 화학과[184]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185] 경성광산전문학교 건물은 대륙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86] 2018년 완전히 폐지하였으나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후신으로 삼는다.[187] 일어일문학과에 해당하나 광복 후 국립서울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폐과됨. 현재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언어문명전공 담당.[188] 정확히는 일본사학과에 해당하나 광복 후 사학과로 통합되었다가 3사과로 나뉘며 현재의 동양사학과로 흡수[189] 조선총독과 함께 조선총독부에서 둘뿐인 친임관으로서 총독을 보좌하고, 조선군사령관이 담당한 군부(조선군(일본제국))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통할하는 직위였다.[190]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장 겸임.[191] 미군정 법령 제15호에 의거 1946년 10월 17일 0시부로 경성제국대학(Keiji Imperial University)이 경성대학(서울대학, Seoul University)으로 개칭되었으며 미군정 임명사령 제18호에 의거 알프레드 크로프츠 총장이 서울대학 총장(The President of Seoul University)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대학 소개/역사 참조.[192] 투표로 먼저 선출된 총장은 김태준(1905)였으나 좌익이라는 이유로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취임하지 못하였다.[193]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현재 사학계 대다수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이론이다.[194] 이들은 고구려를 조선사에서 분리시켜 만주사로 분류하였다.[195]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거의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대부분 강사나 조수로 근무하였는데 정식으로 교수로 임명된 조선인은 전 기간을 통틀어 단 4명에 불과하고 재임 기간도 매우 짧다. 조선총독부관보와 경성제국대학일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일람에는 본적지도 나와 있어 창씨개명을 했어도 조선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196] 그런데 조교수로 임명되기 전인 12월 12일 ~ 14일 사이에 개업을 알리는 인사(人事), 광고, 기사가 올라온 것을 보면 거취에 대해 모종의 우여곡절 있었던 듯 하다.[197]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198]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199] 경기도 연천의 탄광을 답사하다가 득병하여 귀경한지 3일만 이었는데 식중독 때문이었다고 한다. 근거;손치무교수연설문(지질학회지제12권제3호).[200] 경성고등상업학교 교수 겸임.[201] 박사학위논문 : 生体内に輸入せられたるサリチール酸の運命 (1937)[202]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수학 천재로 유명했던 그는 1923년 졸업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24년 개교하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진학을 염두에 두고 반수하여 경성제대 예과 1회로 입학. 참조.[203] 세부전공 언어학[204]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부친[205] 일어일문[206] 일제는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고문과 별개로 운영하였다.[207] 학사편입[208] 박사학위논문 : 人類遺傳に於ける「ポリメリー」の確率論的研究 (1943)[209] 박사학위논문 : Untersuchungen uber die pharmakologische Wirkung der koreanischen Inula Helenium, L. (1941)[210]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 부속 생약연구소(참조) 산하 개성인삼연구소의 후신[211] 재학 중 신병으로 3년간 요양하느라 1935년 6회 졸업.[212] 박사학위논문 : Sulfanilamidによる淋疾の化学療法について (1940)[213] 당시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세계 최초로 임질의 화학치료법에 대한 것으로 센세이셔널할 것이었으나 외국에 투고되지 않아 그 공을 놓쳤다고 한다.[214] 예과 3회생인 최재서의 고교 동기로 경성제2고보(오늘날의 경복고)를 졸업하고 3수만에 합격. 국립국어원 논문 참조.[215]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동기들보다 5년 늦게 졸업.[216] 예과 재학 중 신병으로 1년 요양 휴학하고 1931년 학부 본과 진학하여 1935년 의학부 제6회 졸업.[217] 이국주 한심석 남기용 주근원 김홍기 등[218] 2020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후의 문민 국방장관[219]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으로 체포.[220]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으로 3년 구류.[221] "경성제일고보 졸업생으로 입학 때와 재학 중에 줄곧 수석을 차지했던 김재완씨는 대표적인 노력형으로 대학에 나올 때 점심은 물론, 저녁 밤참까지 3개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 밤9시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고등고시 준비를 했다.「도서관의 주인 김군」이란 「닉·네임」이 붙기까지 한 김씨는 재학 중에 고시에 합격, 전도가 촉망되던 법관이었으나 해방 전 펫병으로 고인이 되고 말았다. 링크 참조.[222] 휘문고등보통학교(1924~1929년) 졸업 후 도일하여 구제고등학교인 마쓰모토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고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조선사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조선의 경성제대 진학. 경성제대 대학규정에 따르면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223] 그의 제자로 서울대 사학과 1기 졸업생인 김성준 교수의 논문「학산 이인영의 역시인식」참조[224] 박사학위논문 : '경성(京城)에서 유행하는 디프테리아균형에 관한 연구'(京城に流行するヂフテリア菌の菌型に関する研究) (1943)[225] 헤겔 철학을 전공하던 학부때부터 언어학강좌를 수강하며 공부에 열을 쏟았다고 하며,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프라우다, 이즈베스티야 등 소련 출판물을 탐독했다고 한다.[226] 언어학전공, 지도교수 오구라 신페이[227] 초대 원장은 의학부 제1회 선배인 명주완.[228]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부립 제4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 예과 입학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귀국[229] 법문학부 제17회 졸업[230] 예과 9회 선배인 한심석 후임 서울의대 부속병원장으로 신축 서울대병원 본관 공사의 완공을 보았다.[231] 평양제일중학교(1932~1937년) 졸업 후 도일하여 구제고등학교인 제6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둘째형의 사망 후 부모님의 귀국 지시에 따라 귀국한 후 경성제대 이공학부 진학. 경성제대 대학규정에 따르면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232] 1942년 청주중학교 졸업 후 삼수하여 1944년 입학[233] 대한민국의 대학교 총장에 해당.[234] 당초 법문학부 1학년을 마치고 문학과로 전공진입했으나 철학과로 전과.[235] 1965년 6월 일본국 주서울재외사무소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주서울재외사무소장을 거쳐 동년 12월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개설시 임시대사대리 임명.[236] 담양 국씨.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부녀잡지 '우리집' 편집위원. '상업영어'(서울대학교출판부, 1973) 저술.[237] 1921년 3월 강원도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과거 사진. 사진 좌측에 일부 잘려 나온 건물이 법문학부 건물이다.[10] 일본어 위키백과.[11] 경대(京大, 쿄다이)는 이미 교토(京都) 제국대학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여전히 京大는 교토대학의 약칭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제국대학들의 약칭은 도쿄 東大, 교토 京大, 도호쿠 北大, 규슈 九大, 홋카이도 海大, 경성 城大, 다이호쿠 臺大, 오사카 阪大, 나고야 名大이었다.[12] 대학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 교육기관은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이 때문에 성균관대가 건학 600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법령에 근거하여 대학원 등의 연구과를 두고, 학사, 박사 등의 학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근대식 학제를 지닌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경성제국대학이 최초이다.[13] 문과갑류(법학과 진학생반), 문과을류(문학과 진학생반), 이과갑류(이공학부 진학생반), 이과을류(의학부 진학생반) 등 4類로 구성.[14] 법학과, 문학과(1943년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가 문학과로 통합) 2개 학과 49개 강좌로 구성. 강좌의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5] 1928년 법문학부 경제학1강좌 담임교수 시카다(四方博) 주도로 설립. 조선의 경제사회에 관한 연구수행. 주요 성과물은 "조선통계총람", "조선경제연보"(조선은행 등과 분담 집필) 등이 있다.[16] 27개 강좌로 구성.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7] 1939년, 의학부 약리학2강좌교수 스기하라(杉原德行) 주도로, 조선군의부(朝鮮軍一部)의 지원을 얻어 개성에 위치한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를 흡수 확대하여 설립. 군수의약품 개발 보급이 주 목적으로, 제주도에 약초시험장을 두고 있었으며 주요 성과물로 각종 인삼제제의 개발과 구충약, 디기타민 제조 등이 있다.[18] 물리학과, 화학과,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 7개 학과 40개 강좌로 구성. 세부내역은 경성제국대학강좌령 참고.[19] 1943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로부터 거액의 기부를 받아서 설치된 산학협력사업으로 강원도 평강읍에 설치된 총장 직속기관이었다. 의학부 내과학2강좌 담임조교수 노사카(野板三枝)가 책임자를 맡았고, 당시 사망 원인 1위 질병이었던 결핵의 연구 및 전투기의 발달에 따른 기상(기압 온도 습도 풍속 등)과 호흡기질환의 관계 연구였가 주요 활동이었다.[20] 경성제대에서 종래 수행하고 있던 만몽 학술조사의 발전을 위해 1944년 설립되어 해부학3강좌 담임교수 이마무라(今村豐)가 소장을 맡았다. 법문학부, 의학부, 예과의 교관이 위촉되어 만주와 몽강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다.[21] 동숭동 대학본부 캠퍼스 정문에 이공학부 명패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이공학부가 공릉동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인 1941~1942년경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22] 경성제대가 일본 교육제도에 따른 신교육령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구교육령에 따른 학제로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들은 입학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큰 진통을 겪었다. 구교육령(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소학교(6년)와 중학교(5년) 도합 11년의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보통학교(4년)와 고등보통학교(4년)의 8년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에게 경성제대예과 입시 자격을 동일하게 부여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경성제대 설립과 신교육령(제2차 조선교육령) 공식 반포에 앞서 이 제도적인 갭을 메우기 위해 2년제 보습과를 설치해 4년제 고보 졸업생들을 뽑아 교육시켰다. 이 보습과는 경성제대 설립방침을 발표한 1921년 봄 임시교육제도로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부설되어 소속 학생들에게 구제중학교 3~5학년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을 교육토록 하여 신설 예정인 경성제대 예과를 비롯해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 응시자격을 준 이른바 자격부여기관이었다. 고등보통학교가 기존대로라면 1922년 졸업예정인 1918년 입학생들부터 5년제로 연장되어 1923년 5년제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해 자동으로 경성제대예과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므로 보습과는 1921년 입학, 1923년 조립의 1회의 졸업생만 내고 폐지되었다고 한다. 3년 과정을 2년에 이수해야했기 때문에 선발고사가 있어 60여명의 응시자 가운데 31명이 합격했다. 당시에는 보통학교는 물론 고등보통학교도 일본말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른 과목의 실력이 비교적 낮았고 특히 수의과목인 영어실력은 고보를 졸업했다해도 요즘 중학교 2학년생 정도의 수준이었다. 총독부는 내지의 구제중학교에서도 유능한 교사를 데려다 선두 그룹을 형성한 학생을 기준으로 급행 교육을 했고 그 결과 31명의 입학생 중 19명이 중도 탈락하고 12명만이 수료증을 받았다고 한다. 보습과 과목은 입시에 직결된 영어·일어·역사·지리· 물리·화학 등에 국한됐다. 보습과 학생들이 수료한 1923년에 개교 예정이었던 경성제대예과 설립이 예산 관계로 1년 연기되는 바람에 1924년에는 4년제 고등보통학교를 마지막으로 졸업(1921년)하고 2년간 보습과를 수료한 후 1년을 더 기다린 강성태, 5년제 고보의 최초 졸업(1923년) 기수인 김성진, 두 번째 기수 졸업(1924년)생인 유진오를 비롯해 경성고등보통학교 3개년간 졸업생이 예과 동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23]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조선의 민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로 조선에 대학을 세우겠다”고 호언하고 동대문 밖 청량리에 ‘조선제국대학 예과’ 건물 신축 작업에 들어갔다.[24] 당초 1922년에 실시하여 1923년 4월 개교예정이었으나 예산 확보 실패로 1년 연기되었다.[25] 조선총독(육해군 대장) 바로 아래의 2인자이자 문관 중 1인자로 총독을 보좌하며 조선총독부를 통할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로서 현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해당[26] 공사비 657,482엔[27] <조선제국대학 예과 생도 모집>(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자)
조선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의하는 종합대학으로 도쿄, 교토, 규슈, 도호쿠, 홋카이도의 각 제국대학과 완전히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조선제국대학 부속 예과 수료자는 무시험으로 본과에 입학할 수 있다.
(가). 모집인원:
- 문과A: 법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
- 문과B: 문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40명.
- 이과: 의학을 수학코자 하는 자 80명.
(나). 입학지원자의 자격: (구제)중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및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
(다). 입학시험 학과목:
- 문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 작문)•수학(대수, 평면기하)•역사(서양역사와 국사 전부).
- 이과: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수학(대수, 평면기하, 삼각법)•박물(동물과 박물 통론)
(라). 시험기일: 학과시험 - 3월18~21일, 체격시험 - 3월17일 공고
(마). 시험장소: 경성
바. 출원기일: 1월21일~2월14일
사. 입학검정료: 5원
신동아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참조.[28] 일본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입학시험일과 동일. 관립대학 설립을 권하던 내각에 맞서서 신설되는 대학이 반드시 제국대학이 되어야 하며, 그 예과는 구제고등학교에 준해야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쪽.[29] 여기서 제국대학 대신 조선총독부령에 따른 관립대학을 설립하라는 법제국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최고학부인 제국대학 설립을 관철시켰으나, 명칭 문제에서는 법제국 의견을 수용하여 '경성제국대학'으로 변경되게 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473쪽.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하면 "조선제국의 대학"이라는 뉘앙스가 생긴다는 까닭이었다.[30] 추밀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추밀원 심의도 받지 않고 학생까지 다 뽑아놓고 이제와서 추밀원 승인을 득하려한다며 분노하여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4월 20일 가까스로 심사위원회를 통과[31] 추밀원에서는 법문학부 설치를 반대하고 의학부의 경성의전과 중복 문제 및 공학부 농학부의 필요성을 지적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3-475쪽.[32] 다이쇼 13년 칙령 제103호[33] 동시에 칙령 제104호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 칙령 제105호 '경성제국대학에 관한 건' 등 칙령이 반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21호 '경성제국대학 예과규정'을 공포하고 고시 제102호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위치 및 수업개시 시기'를 통보.[34] 경성제국대학 총장 사무취체역(총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아리요시(有吉忠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임석 상관으로, 총독부 요인들과 학부형들이 참석했다. 구한말 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李完用)도 나왔다. 내빈들의 축사에 이어 수석합격자인 유진오(兪鎭午)가 학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낭독했다. 개교식날 입학생에게는 기념메달과 축하떡(모찌)를 주었다. 기념메달은 겉면에는 3층의 예과 건물과 '개교기념(開校紀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경성제국대학 예과(京城帝國大學豫科)ㆍ대정 13年'이라 써 있었다. 예과(豫科)의 조선인 첫 합격자는 45명이었으나 이과에서 1명이 등록을 하지 않아 44명만이 입학했다. 출처[35]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 중 조선인은 총 25명으로 법학과 10명(강성태, 유진오, 김처순, 홍일룡, 최병헌, 주병환, 전승범, 박영배, 이득영, 이민희), 문학과 7명(채관석, 이종수, 조윤제, 박충집, 이재학, 최창규, 노영창), 사학과 2명(신석호, 김창균), 철학과 6명(김계숙, 권세원, 배상하, 박동일, 한제영, 조용욱) 등이었다. 본과는 3년제였던 여타 학부와 달리 4년제였던 의학부 졸업식은 1930년 3월에 치러졌다.[36] 법문학부는 3년제, 의학부는 4년제였으므로 예과1기 이과생들이 진학한 의학부 제1회 졸업식은 1930년 3월에 실시되었다. 이 때 조선인 졸업생은 김성진, 명주완, 이세규, 박건원, 윤봉헌, 김봉응, 이정복, 이의식, 박천규, 김능기, 김용업 등 11명이었다.[37] 칙령 제251호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법문학부/이학부에 이공학부를 추가. 시행일은 1941년 1월 1일부. 따라서 1938년 입학한 예과 18회 신입생 모집부터 기존 이과반을 나누어 이공학부 진학반인 이과갑류(理科甲類)를 설치하고 의학부 진학반은 이과을류(理科乙類)로 규정.[38] 이공학부 역시 법문학부와 마찬가지로 3년제이므로, 1941년 4월 개설 당시 진학한 학생들은 1944년 3월에 졸업했어야하나, 태평양전쟁에 따른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에 따라 법문학부•의학부와 동일하게 방학을 폐지하고 수업을 속행하여 6개월이 단축된 1943년 9월에 학부 졸업식을 실시. 예과 15회가 주축이 되었던 이공학부 제1회 졸업생 42명 중 조선인은 12명.[39] 1945년 10월 16일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15호에 의거 1946년 10월 17일 0시부로 발효[40] 1945년 10월 17일 공포된 미군정 임명사령 제18호에 의거 10월 18일 00시부로 총장 및 법문학부•의학부•이공학부의 학부장과 예과부장이 임명됨.[41] 경성대학의 법문학부와 이공학부를 각각 분리하고 농학부와 교육학부 및 대학원을 설치하여 미국식 대학(American University)로 전환시킨다는 방안[42] 대학령 공포 이전까지 일본제국에는 대학은 오직 제국대학령에 근거한 제국대학만 존재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단과대학(College)으로 번역되는 구제전문학교는 대학이 되거나 그 명칭조차 쓸 수 없었다.[43] 설립 당시 명칭은 '제국대학'[44] 예과 설치 년도[45] 1916년 조선총독부병원 의학강습소(舊대한의원 부속 의육부)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경성공업전습소(舊대한제국 농상공학교)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시켰고, 1918년 역시 舊대한제국 농상공학교를 기원으로 하는 수원농림학교를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시켰으며 1922년 경성전수학교(舊대한제국 법관양성소)를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舊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를 관립으로 이관.[46]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전문학교로 인가하고 1921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가.[47] 서울대학교 70년사, 11페이지[48] 종전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정준영 등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의 전면 개정 반포 이전인 1921년 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세워질 제국대학 예과 입시자격을 주기 위한 4년제 고보 졸업생 대상 보습과를 개교했고(위 연표의 1921년 보습과 설치 참조), 또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규정>을 제정하여 대학예과/학부 교수요원 양성을 시행했으며 1923년 예과 개교 및 1925년 학부 개교를 목표로 1922년부터 예과 부지를 확보하고 건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의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을 식민지에 이식하기로 결정한 데 있어서는 다소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민립대학 설립대학운동으로 경성제대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 폐기된 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간행된 「식민지식과 근대권력 - 경성제국대학 연구」(2011) 참조.[49] 위원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재무국장·내무국장·참사관과 조선은행 총재 등 조선측 관료들구 일본 문부성 보통학무국장·종교국장, 대장성 참사관, 법제국 참사관, 귀족원 의원 4인 그리고 도쿄제국대학 교수, 교토제국대학 교수, 와세다대학 학장 및 수원농림전문학교 교장,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장 등이 위원[50] 동아일보 1922년 2월 7일자.[51] 예산 확보가 안 된 관제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법제국에 대응해 총독부가 대장성과 긴급 협의를 통해 4월에 법제 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52] 제국대학령에 의거한 제국대학을 주장한 총독부와 대학령에 의거한 관립대학으로 변경하라는 법제국[53]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의 사례와 같이 '조선'으로 조선제국대학을 주장한 총독부와 '도쿄', '교토'와 같은 맥락에서 '경성'으로 변경하라는 법제국.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참조.[54] 이 때 기존의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등 조선총독부의 관립전문학교들을 모체로 삼아 제국대학으로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와 설치할 학부의 종류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제국대학 중 거의 유일한 사례로 매우 특이하게도 경성제대는 기존 관립전문학교들을 흡수하지 않고 존치한 상태에서 별도로 설립되었다. 제국대학과 관립대학은 관립 구제전문학교를 기반으로 문과계열 학부를 설치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개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5] 최초 도쿄제국대학의 출발도 의학교+공학교+개성학교였고, 교토제국대학은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가 제3고등학교의 의학부로 편입되고 증설된 공학부, 법학부, 문학부 등과 함께 제국대학으로 승격, 도호쿠제국대학은 '센다이의학전문학교'가 모체이며, 규슈제국대학은 후쿠오카의학교가 '교토제국대학 후쿠오카의과대학'을 거쳐 승격, 홋카이도제국대학은 관립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 삿포로농과대학'을 거쳐 승격한 것이다. 이후 대만 다이호쿠제국대학도 기존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를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해 이농학부를 만들고 문정학부를 더해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도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하며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오사카제국대학도 오사카의학전문학교가 오사카의과대학을 거쳐 승격, 나고야대학은 의학전문학교 → 현립대학 → 관립대학 → 제국대학의 승격 테크를 차례로 밟았다.[5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창설 과정에 기존 경성의학전문학교로부터 교장(1920년 부임하여 당시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가 기요시가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진을 인선하였으며, 그는 경성제대 의학부 초대 학부장을 거쳐 제2대 경성제대 총장이 된다. 그를 따라 경성의전 교수진의 상당수가 경성제대 의학부로 넘어갔다.) 이하 교수진의 상당 부분과 실습 병원격이었던 조선총독부병원(舊 대한의원)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도쿄대학 문학부 대학원 인문사회연구계에서는 경성의전을 경성제대 의학부의 사실상의 전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京城帝大医学部は法文学部とは異なり事実上の前身となる機関(朝鮮総督府医院・京城医学専門学校)を持ったが" 출처 참조. 즉, 경성의전의 입장에서는 교수진의 상당 부분과 실습 병원을 경성제대 의학부에 빼앗긴 셈이고 대신 소격동 종친부 자리에 새로 병원을 짓고 이전하게 되었다. 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조선군(일본제국) 경성육군병원을 거쳐 광복 후 6.25전쟁 와중에는 국군에 징발되어 1965년 국방부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국군서울지구병원과 보안사령부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이외에도 조선의 최고 의료교육기관 지위를 박탈당하는 데 대해 경성의학전문학교측이 격렬히 항의하자 조선총독부측은 경성제대 의학부는 연구와 의학에 중심을 둔 '의학사'를 양성하고, 경성의전은 진료와 치료에 중심을 둔 전문 의료인으로서 '의사'를 양성한다고 하면서 반발을 무마하였다.[57] 경성제국대학에 관해서는 제국대학령에 의한다. 다만 동 령 중 문부대신의 직무는 조선총독이 행한다. 부칙 본 령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58] 이듬해인 1927년에는 법문학부 38개 강좌, 의학부 15개 강좌[59] 대학예비교육을 행하던 구제고교를 '남자의 중등교육을 완성하는 기관'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고등학교 본과의 명칭을 대학예과에서 고등과로 개칭하며 5년제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와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과(3년)를 통합한 7년제 고교를 기본으로 두고, 예외적으로 고등과로만 구성된 고교도 가능하게 해 기존의 3년제 구제고교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그러한 3년제 고교 입시의 응시자격을 기존의 구제중학교 5년 졸업생에서 4학년 수료생으로 확대하도록 했다.[60] '대학령' 제13조는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 또는 2년으로 한다"고 규정하면서 "수업연한 3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 제4학년을 수료한 자"로 그리고 "수업연한 2년의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자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로 규정하여,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생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대학예과는 3년제로, 구제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대학예과는 2년제로 두도록 했다.[61]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생부터 입시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62] 경성제대 학사 졸업 후 재입학해 다시 학사칭호를 획득한 23명 중 18명이 문학과/사학과/철학과 및 의학부 졸업 후 재입학해 법학사를 취득한 경우이다.[63] 예컨대 현준혁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선과생으로 들어와 전검시험을 통해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한 케이스이다.[64] 그 이전까지 나뉘어있던 A반/B반은 예과규정에 명시되어있지 않은 구분이었고 각반 사이에 교과목과 교수 시간의 차이가 없었다.[65] (1) 전과목 평균점 60점 미만, (2) 한 과목이라도 과목 평균점 40점 미만, (3) 과목 평균점이 50점 미만인 과목 2개 이상, (4) 과목 평균점이 60점 미만인 과목이 전체의 1/4 이상이고 그 중 한 과목이 평균점 50점 미만, (5) 과목 평균점이 60점 미만인 과목이 전체의 1/3 이상.[66] 유진오의「구름위의 만상」에 예과 강사였던 유진오로부터 낙제점인 20점을 받아 유급당할 뻔한 생도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있다.[67] 본과인 학부의 수업료는 제1기 35원, 제2기 35원, 제3기 30원이었다.[68] 1924년 설립 당시 주소이며,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다.[69] 2012년 3월부로 자연과학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소속변경[70]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한 동숭동 캠퍼스는 이후 서울대학교의 메인 캠퍼스 역할을 하였다.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문과 계통과 이공학부 이과 계통의 통합 개편으로 이루어진 문리과대학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편제되었다. 문학부는 동숭동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이학부는 청량리의 옛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에 위치하였다. 6·25 전쟁 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가교사를 열어 수업을 이어가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서울의 동숭동 본교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이학부의 일부는 청량리 옛 교사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후 문리과대학 내 모든 학과가 동숭동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60년사>) 서울대학교 기록관 설명 참조.[71] 1977년 한림대학교의료원에 의해 인수되어 1979년 동산성심병원으로 개칭하였고, 1992년 기존 170병상에서 202병상으로 증설하였으며, 1999년 1월 16일 폐원시까지 매년 약 11만명의 외래환자와 연인원 4만 2천명에 이르는 입원환자를 치료하였다. 1999년 3월 개원한 평촌성심병원으로 이어진다.[72] 붉은 벽돌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예과 본관 건물은 철거 때까지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73] 문정학부, 이농학부[74]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제국 문부성은 당초 문과계열 학부 설립을 계획하지 않았던 도호쿠와 규슈의 제국대학에 법문학부를 설치해서 정원을 늘리고, 관립의과대학들 역시 별도 예과 설치없이 구제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하도록 했다.[75] 참고로 구제고교별 정원은 큰 차이가 없었다.[76] 조선인이 구제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우수한 인재를 경성제대에 묶어두기 위해 구제고교 대신 예과 형태를 채택했다 설명해온(정선이,「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과거 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조선인의 내지 대학 진학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수치로 간단하게 반박된다. 1942년까지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이 629명인 데 반해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784명에 이르고, 정식 학사를 받지 못했던 선과생이나 전수과 그리고 위탁생과 학업 중도포기자를 합하면 1,000명을 훌쩍 넘기는 조선인이 내지의 제국대학에 유학했음을 알 수 있다(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후머니타스, 2017.).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사립대학들을 제외하고도 내지의 제국대학에 진학한 조선인 수만도 경성제대를 압도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 경성제대 예과를 졸업하고나서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사례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한정된 경우지만 경성제대 예과를 통해 일본 내지로 진학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종현의 연구에 따르면, 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236명의 출신 구제고등학교를 보면 경성제대 예과와 홋카이도제대 예과를 졸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경성제대 예과, 홋카이도제대 예과, 다이호쿠제대 예과 등 제국대학예과 3개교도 넘버스쿨(番號校) 8개교, 네임스쿨(地名校) 19개교 및 학습원 고등과 등과 함께 관립 31개 구제고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설령 제국대학 입시에서 경성제대 예과가 내지의 구제고교 보다 후순위였다 가정하더라도, 구제고교 졸업예정자 대상 입시에서 마감되는 인기학부(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기타 제국대학의 의학부 등) 진학은 불가능했겠지만 구제고교생 대상 입시가 미달나서 구제전문학교인 고등상업학교 및 고등사범학교 졸업생이 다수 입학하던 대부분의 비인기 학부에는 입시를 거쳐 입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77] 이는 신설 대학이 반드시 제국대학이 되어야 하며, 그 예과는 구제고교에 준해야한다는 총독부의 입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문부성과 제국의회는 단과 관립대학 설립에 그치려고 했던 것을 조선총독부가 명칭에서 양보(조선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하면서 끝까지 제국대학령에 의거한 제국대학으로 설치할 것을 관철시켰다.「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471쪽.[78] 「국립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1895~1946)」에서는 부속예과 형태를 택하게 된 또다른 이유로, 경성제국대학관제의 법제국 심사와 추밀원 심의 등 경성제국대학 설립 작업의 막판까지도 제국대학령에 근거한 제국대학이 될 것인지 대학령에 근거한 관립대학이 될 것인지 반발과 논란이 있었을 만큼, 제국대학으로 추진하던 조선총독부도 자신들의 입장이 내각에서 관철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관립대학으로 낙착되더라도 적용이 가능한 예과 형태를 준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79] 의학부, 공학부 등[80] 1918년 개정 고등학교령에서 고등과로 변경.[81] 간혹 여기까지 포함해서 41개교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는데 극히 드물다. 제국대학의 예과로 기능했다는 구제고교의 특성에 해당하지 않기도 하고.[82] 와세다대학의 예과는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교'라는 명칭을 썼다.[83] ①학생은 예과부장의 허가를 얻지 아니하고는 다른 학교의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②전항의 허가를 얻고자 하는 자는 사유서를 구비하고 보증인과 연서하여 출원하여야 한다.[84] 경성제대 예과의 수학연한은 1943년 일제가 구제고등학교를 2년제로 단축함에 따라 2년제로 단축된다(일본어 위키백과 참조. 1942년에 임시조치로 3년을 2.5년으로 단축하고, 1943년부터는 2년제로 단축). 이 때는 총력전을 위한 국민총동원 체제로 가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 2년 과정이 1938년 1년 8개월, 1941년 1년으로 단축), 일본해군병학교(3년 8개월 과정이 1941년 2년 4개월로 단축) 등 사관학교부터 구제전문학교와 관공립/사립을 막론한 구제대학까지 모든 학교들이 구제고교와 마찬가지로 수학 기간이 단축되던 상황이었다.[85] 사진의 인물은 이효석.[86] 학부 본과생은 학생, 예과생은 생도라고 구분해서 불렀다.[87]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경우는 이학부를 기준으로 1순위로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수료자, 2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이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이과 졸업자, 3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문과 졸업생 및 가쿠슈인 고등과 문과 졸업자를 입학시켰고, 이후에도 결원이 있는 경우 4순위로 고등사범학교와 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생, 5순위로 기타 구제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자격검정시험 합격자, 마지막 6순위로 구제중학교 교원면허소지자로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를 입학시켰다고 한다.[88] 김진섭,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 지성사, 2021. p.116 참조[89] 1938년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전부 중학교로 명칭이 통일된다.[90] 정선이, 「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pp.95-99[91] 경성제국대학 외에 구제전문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등도 일본인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마자 일본인 지원자가 쇄도, 70~90%가 일본인으로 채워졌으며 이는 1933년 개교한 평양의전과 대구의전, 1944년 개교한 광주의전과 함흥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조선의 최고학부라고 개교했더니 학생은 전부 일본인으로 채워지고 조선인 학생 비율이 너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한 조선총독부가 예과제를 채택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92] 정근식 등,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pp.531-532. '표 IX-10. 본적별 예과 입학자수(문과, 이과 전체)' 참조.[93] 미야자키현(宮崎)은 33명.[94]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 기념 국립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1895~1946)」 p.575.[95] 동아일보 1925년 5월 22일 사설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 조선일보 1927년 4월 1일 조간 2면 기사 '백사십칠인 중 조선인은 사십팔-외지대학과 다를 것이 무엇' 등[96] 동아일보 1934년 4월 7일[97] 일본 본토의 구제고는 갑을병류반을 어떤 외국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해졌다.[98] 헤이안 시대 천황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관청[99] 헤이안 시대의 고관으로, 사실상의 규슈 총독인 대재부(大宰府) 대재권수(大宰權帥)를 지냈다.[100] 토요우케히메(豊受姬)라고도 하며, 이자나미가 죽을 때 그 소변에서 태어난 신 와쿠무스비의 딸. 고사기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음식의 신.[101] 에도 시대에 하야시 가호(林鵞峰)가 집필한, 편년체의 고대사 관련 사서.[102] 대학 본관(우측), 도서관(좌측)도 일부 나타나있다.[10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규정 참조.[104] 1907년 개교, 1922년 8월 법문학부 설치 및 1923년 제1회 법문학부생 신입학[1911년] 개교, 1924년 9월 법문학부 설치 개정 및 1925년 제1회 법문학부생 신입학[106] 법학과가 없고 정학과(政學科)가 있었던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28년 문정학부(文政學部)로 설립되었다. 기타 홋카이도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은 1945년 광복시까지 법문계 학부가 없었다.[107] 1919년 개정된 제국대학령에는 '대학에 복수의 '학부'를 둔다고 규정되어 있다.[108] 이러한 학제의 원조는 영국으로, 자세한 것은 현재도 이를 유지하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 문서 참조.[109] 일어학/일문학[110] 중국어학/중국문학[111] 영어학/영문학[112] 일본사학[113] 중국철학[114] 강좌제하에서 학과의 의미가 미미함은 위의 법문학부에서 설명함.[115]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孔德里)'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려고 계획했지만, 마포구에 한자까지 똑같은 공덕동(孔德里)이 또 있기 때문에 인근에 위치한 조선 11대 왕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의 무덤태릉(泰陵)에서 따와 태릉동(泰陵洞)으로 변경하면서 편입되었다. 하지만 기존 공덕리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고, 지역 주민들 간 협의가 이루어져 1970년 '공덕'과 '태릉'에서 한 글자씩 따서 '공릉동'이라고 바꾸면서 공릉동이 되었고, 이것이 역명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경춘선이 이설되기 전 성북역(현 광운대역)에서 분기되던 시절에는 이 곳에 경춘선 신공덕역이 있었는데, 역 이름이 상술한 연유에 의거하였다.[116] 舊 경성제대 이공학부 교지의 넓이는 現서울과기대 캠퍼스를 포함하여 주변의 경기기계공고, 원자력병원, 한국전력연수원(舊 원자력연구원), 초등학교, 특수학교 등을 모두 포함한 엄청난 규모였다.[117] 경춘선 개통 당시 노선을 경성제대 이공학부 앞을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역U자 모양으로 휘어가게 노선을 잡았다. 구 경춘선 노선이 성북역에서 바로 화랑대 방면으로 가지 않고 신공덕역으로 우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118]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공학부는 대전 말기인 1943년에 가서야 설치되었다.[119] 의학부 진학생반이 기존 이과반에서 이과乙類가 되었다.[120] 조선총독부령 제29호[121] 1943년 경성광산전문학교(이후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 5호관) 역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의 경성제대 이공학부 캠퍼스 바로 옆으로 이전되면서 공덕리(현 노원구 공릉동) 캠퍼스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경성광산전문학교의 교사가 같이 위치하게 되었다.[122]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이성규 교수(동양사학과)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식민사적 의의」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며 “경성제국대학이 3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 중 조선인 이공학부 졸업생은 37명으로 이들은 해방 후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로서 대학교육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 조선반도의 유일한 대학으로 군림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관한 국내 사학계의 서술의 비중과 평가에 의도적인 왜곡이 가미되었다고 한다. 그는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조선인 졸업자 수가 ‘37명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비판하며 ‘37명이나 된다’고 평가하며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식민지 과학기술의 전당이자, 해방 후에 신생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에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를 "제국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루어놓은 성과 중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규정한다. 교수신문 2005년 5월 7일자 참조.[123] 제1류 인문학(어문/역사/철학)계열, 제2류 사회과학계열, 제3류 자연과학계열[124] 경성고공 졸업생들이 단순 기술자인지 아니면 전문적인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문적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는 논자들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업하고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정식명칭은 판임관(判任官)이라 하며 관료 중 말단을 형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기술고시 합격하여 부임한 5급 공무원 수준)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봤을때 무조건 단순 기술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단순 기술자로 보는 논자들은, 당시 일본이 실업적 공업 교육과 학문적 공학 교육을 아주 엄밀히 구분하고 있어 공업전문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바탕으로 하고, 대학에서는 학문적인 공학 교육을 행했으므로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들이 실무적 측면에는 어느 정도 밝을지 몰라도 기술적 통찰력은 크게 부족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바로 창업을 하거나 건축 사무실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공장과 같은 산업체나 기수와 같은 기술관으로 나가서 별도의 기술 수련을 받는 식이었다. 실제로 경성고공 출신의 근대 건축가들 모두가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건축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토목회사나 조선총독부의 영선과 말단에서 구르면서 경력을 상당 부분 쌓은 다음에 자신의 사무실을 내었다. 이 논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인적자본 축적과 관련해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다.[125]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들을 규율하는 대학령(1918)은 제3조 제1항에서 "학부에는 연구과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제2항에서 "수 개의 학부를 설치한 대학에 있어서는 연구과 간의 연합협조를 위하여 종합하여 대학원을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대학원이 설치된 대학은 제국대학뿐이었다고 한다.[126] 일본에 도입된 유럽식, 특히 독일 학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독일의 경우 유럽연합의 볼로냐 프로젝트에 따라 EU가맹국가와 대학학제를 통일하기 이전에는 9년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3~4년 연한의 학부를 졸업한 뒤 마이스터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대학원 박사학위과정으로 진학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독일의 학제를 모방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 석사학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이스터학위 자체가 석사학위에 상당하니, 일본의 구학제 학사학위는 신학제 기준으로는 수사(석사) 학위인 셈이다.[127] 졸업한 전문학교의 교수와 입학할 제국대학의 교수[128] 경성제대의 사례는 아니지만 우장춘 박사도 학사 학위 없이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 구레중학교 졸업 후 (원래는 교토제국대학 공학부에 가고싶어 우선 구제고등학교를 가려 했으나) 총독부에서 장학금 수여 조건으로 전문학교에 상응하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 진학을 지시하여 별수없이 농학부 실과로 갔었는데, 졸업 후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다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을 다니며 농학박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다만 박사 취득 전에는 농학부 본과 학사 출신이 아니라 실과 출신이며 무엇보다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별로 우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악조건을 딛고 세계적인 농학자가 된 것이다. 농학부 실과는 이후 도쿄제국대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도쿄고등농림학교로 독립했으며 현재는 도쿄농공대학이 되었다.[129] 지금도 일본 소재 대학 명의로 발급되는 박사학위 수여자의 박사학위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 가능하다.[130] 의학부가 유독 학위 남발이 심했는데, 가장 심한 케이스는 연구생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논문을 쓰지 못해서 이름만 걸어 놓고 개업의로 일하고 있던 사람한테도 지도 교수가 불러다 놓고 갈궈서 보고서 수준의 논문을 급조하게 한 뒤 박사 학위를 준 점이다. 그래서 실제로 당시 해방박사 학위를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박사 학위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어디서 언제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 잘 밝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131] 해방 당시 경성제국대학에 근무하던 전임교원은 김종원 1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공학부 강사였던 김종원이 패망 직전인 7월 13일 강사에서 교수로 승진 임명(조선총독부 관보 5544호)되고 한 달 뒤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비전임 교원인 강사 중에는 조선인들이 약간명 있었으며, 조수나 연구생들 중에도 조선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직원 중에서는 중상위직은 일본인들이 담당했지만 말단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애초에 경성제대 교수로 임명되어 봉직하던 경성제국대학 학부 졸업생은 법문학부 제2회의 일본인 졸업생 1명뿐이었다. 대북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과 유사하게 경성제국대학 역시 제1회 졸업생 배출 후 약 15년 만에 종전을 맞게 된 데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132]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학제에 따라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졸업식은 3월이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0월 16일 칙령 제928호로 수업 연한의 임시단축령이 공포되어 1942년 ~ 1945년 동안에는 6개월씩 단축하여 9월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133]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1회 졸업생인 박영배는 도쿄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신설된 경성제대로 전학해온 바 있었다. 이를 보면 종전 이전의 제국대학간에도 결원이 발생한 경우 어렵지 않게 전학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출처.[발췌번역] 1945년 4월 14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경성제대 예과(이과)에 입학한 야마다 타카시는 4개월 후 종전을 맞고 이듬해 구제 사가고등학교로 전입하여 오사카제국대학으로 진학했다. 1945년 경성제대 예과(문과)에 입학한 후나코시 이치로는 구제 마쓰에고등학교를 거쳐 규슈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야마다씨의 집계에 따르면 종전 당시 경성제대 예과에 재학 중이었던 일본인 학생 463명 중 내지의 구제고교로 전입한 사람이 313명으로, "제6고(오카야마) 등 공습으로 인해 교사가 전소되어 수용될 수 없었던 학교도 있었지만 전국의 거의 모든 고교에서 전입을 받아주었다. 특히 조선과 가까운 규슈의 고교들(제5고, 제7고, 후쿠오카고교, 사가고교 등)이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다만 미군에 점령된 남조선에서는 1945~1946년에 거의 모두 무사 귀국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에 점령된 만주와 북조선에서는 귀국이 지연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가 억류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후 간신히 귀국했어도 이미 시일이 지나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곤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구제중학교 전수관을 졸업하고 1942년 경성제대 예과(문과)에 입학한 미야모토 히로미치는 법문학부 재학 중 입대하여 소련군에 의해 종전 후 4년간 억류되었다가 간신히 귀국했을 때 일본의 연합군총사령부 GHQ에 의한 구제→신제 학제개혁이 진행 중이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학 당시 지도교수님이 도쿄대학 법학부로 전입할 수 있게 해주셨지만 나이까지 먹고 (격이 떨어지는)신제대학에 가야하나 생각하고 가지 않았다. 전쟁이 없었다면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관료가 되었겠지."라고 회고했다.[학교별전입학인원] 주로 서일본, 특히 규슈 지방 출신이 많았던 경성제대의 학생 구성이 반영되어있다.[136] 경성대학이 아니라 서울대학이라고 표현하여 혼동의 여지가 있지만 이 법령의 취지를 교명에서 ‘제국’을 제외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일 시행된 임명사령 제16호("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임명사령 제16호 좌기(左記) 각인(各人)을 경성대학 의학부 별기(別記) 관직에 임명하고 기(其) 직권행사를 명함")를 비롯하여 11월 28일 학무국장의 담화 등과 1946년 8월 21일 법령 제102호에도 ‘경성대학’이라는 교명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서울대학'으로 해석할 경우, 1946년 '경성대학'을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에 통합하는 법령과 충돌한다. 폐지 대상인 '경성대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37] 다만 경성제대(약칭 성대)가 설립되고 20년 이상 지나 굳어진 상황에서 한 순간에 서울대학으로 개칭되지는 않았고,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경성대학'과 '서울대학'이 혼용되었다.[138] 야반은 본래 삼경(三更), 즉 자시(子時)로 밤 11시~1시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가 자정(子正)이다. 여기서는 10월 16일 24시, 즉 10월 17일 0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39] 서울대학교 소개 참조. 사실 1945년 10월 8일자 미군정청 보도자료에 이미 학무국장 로커드(Lockard) 대위가 당시 학무국 학교과장이었던 크로프츠 박사를 서울대학 총장에 임명하기로 했음을 밝힌 바 있으므로 10월 17일 사령장 발령과 동시에 부임한 것으로 판단된다.[140] 서울대학교/학부/인문대학 제2회 심포지엄 제3세션[141] 일제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해방 직전인 1943년에서야 전문학교급으로 승격되었고 그 전에는 중학교 급이었기 때문에 전문학교라는 인식이 미미했다.[142] 경성제국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수는 해방 후 사실상 업무를 중단했고 그해 10월 내지 11월까지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퇴출되었다. 한편 조선인 교수들이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 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다.[143] .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144] 일제강점기 판사였던 서광설 변호사의 아들로, 1931년 경성제대 예과 8회를 입학 수료하고, 1936년 법문학부를 제8회로 졸업하고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판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가지 않고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학문의 길을 지속했다. 6.25 전쟁 당시 아버지와 함께 납북당함.[145]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146] 1912년 출생, 대구농림학교,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하고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경성제대에서 홍진기와 더불어 유이하게 재학 중 경성제대 발행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학생이었다고 하며(홍진기 항목 참조),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147] 아래 박극채와 유사하게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경제법학연구소장 등을 역임[148] 보성전문학교 교수 시절 유진오의 애제자로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149]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에 넘어가 월북하여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부임.[150] 1907년 울산 출신으로 울산공립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제1고등학교를 나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부수로 연구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제2대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기사 참조.[151]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었다.[152] 경북 경산 출신으로 1931년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이후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선과생으로 입학해 철학과를 1938년 졸업. 해방 직후부터 경성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임하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153] 최호진,「경성대재건과 국대안파동의 와중에서」, 신동아, 1990.8, p.251[154] 유진오, 서재원, 윤동직, 이종갑, 김갑수, 이희승, 조윤제, 이숭녕, 이인영, 박종홍, 이본녕[155] 김두헌, 최정우, 이양하, 강정택[156] 박극채, 윤행중, 황도연[157] 최호진[158] 유진오, 김증한 회고 및 최종고 등을 통한 복원[159] 권이혁 회고를 통한 복원[160] 잡지 현대과학 창간호[161] 참고로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경성대학 예과 46학번이다.[162] 이때 졸업생으로 김명윤, 서돈각, 장하구 등이 있다.[163] 舊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164] 제1류 법학전공, 제2류 정치학전공, 제3류 경제학전공[165] 출처: 서울대학교정치학과60년사[166] 출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육십년사.[167] 각 단과대학들의 대학연합 수준이었던 초창기 서울대학교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서 고려대 연세대 등 타 학교까지 전부 다 모여 수업을 받은 전시연합대학 시기를 거치며 단과대학간 인적 교류가 생겨났는데, 덕분인지 전후 문리과대학에 교양과정부를 설치해 모든 단과대학 신입생을 교육하게 하는 등 크게 재편되며 차차 종합대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168]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체제로 대다수 제국대학이 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삼아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제국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하면서 기존의 의학전문학교는 의과대학 부속 전문부(구제전문학교에 상당)로 흡수하였다. 일본어 위키백과 제국대학 항목을 참조하면 종전 당시 제국대학들은 경성제대를 제외하고 8곳 모두 예외없이 부속 의학전문부를 두고 있었다. 이외에 규슈제대는 공학전문부, 홋카이도제대에는 농림전문부와 토목전문부 등이 존재했다.[169]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역시 1936년 의학부를 설치할 때 흡수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1945년 종전때까지 부속 의학전문부로 두고 있었다.[170]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예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청량리의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의예과 캠퍼스로 승계하고, 의예과의 소속 또한 의과대학 대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이라는 문리과대학에 귀속시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완전히 곁가지로 내쳐버렸던 것이다.[171] 참고로 일제강점기에도 의사 선호현상이 상당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의 관립 구제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의 사립 의학전문학교 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 대부분이 경성의전을 지망하는 해도 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경성부는 물론, 평양과 대구, 함흥과 광주 등에 있는 한반도의 관립 의학전문학교 진학희망자가 쇄도하여 전원 일본인 학생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입시에 조선인을 2/3 이상 뽑으라는 지침을 내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방의 의학전문학교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전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절대 도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명주완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개교를 기다리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반수를 해서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바 있다. 전종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 낙방 후 경성의전에 수석 입학했으며, 직장에서 상사로 만난 경성제대 교수의 추천으로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 생활을 했는데 경성의전이 경성제대에 한참 못 미쳤다는 평가를 말년 회고록에 남길 정도였다.[172] 경성대학 의학부장이었던 윤일선 교수는 1946년 통합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영전하였다.[173]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하고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174] 1917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1931~1945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 역임[175]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임[17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었던 제1부속병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었던 제2부속병원이 행정통합된 시점의 초대 통합병원장이었다.[177] 1926년 경성제대 예과 제3회 입학,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외과학교실 조수, 1937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박사학위논문:絞縊性腸閉塞症に関する研究 (1937))[178] 1932년 경성제대 예과 입학, 1938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의학부 연구실 조수로 근무. 1943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를 받고 의학부 강사로 있던 도중에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4년 서울대학교병원장 등을 지내고 의대를 지지기반으로 총장(1970~1975년)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역사상 유일한 연임 총장이다.[179] 1941년 경성제대 예과 제18회 입학, 1943년 9월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5년 8월 3학년 때 광복을 맞이하여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180] 1923년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출생으로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평양제3공립중학교를 1941년 졸업하고 구제고등학교인 야마구치고교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졸업, 동년 10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로 진학했다. 전쟁 중이던 1945년 5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전학하여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53명)이 되었다.[181] 1937년 경성제대 예과 제14회 입학, 1940년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4년 9월 의학부 졸업.[182] 이공학부 1회 학생들은 1938년 예과 이과갑류 입학해 1941년 이공학부로 진학했는데, 이들 중 조선인은 15명이었고, 이공학부 1회 졸업생 중 조선인은 13명이었다.[183] 물리학과, 화학과[184]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185] 경성광산전문학교 건물은 대륙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86] 2018년 완전히 폐지하였으나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후신으로 삼는다.[187] 일어일문학과에 해당하나 광복 후 국립서울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폐과됨. 현재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언어문명전공 담당.[188] 정확히는 일본사학과에 해당하나 광복 후 사학과로 통합되었다가 3사과로 나뉘며 현재의 동양사학과로 흡수[189] 조선총독과 함께 조선총독부에서 둘뿐인 친임관으로서 총독을 보좌하고, 조선군사령관이 담당한 군부(조선군(일본제국))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통할하는 직위였다.[190]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장 겸임.[191] 미군정 법령 제15호에 의거 1946년 10월 17일 0시부로 경성제국대학(Keiji Imperial University)이 경성대학(서울대학, Seoul University)으로 개칭되었으며 미군정 임명사령 제18호에 의거 알프레드 크로프츠 총장이 서울대학 총장(The President of Seoul University)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대학 소개/역사 참조.[192] 투표로 먼저 선출된 총장은 김태준(1905)였으나 좌익이라는 이유로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취임하지 못하였다.[193]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현재 사학계 대다수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이론이다.[194] 이들은 고구려를 조선사에서 분리시켜 만주사로 분류하였다.[195]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거의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대부분 강사나 조수로 근무하였는데 정식으로 교수로 임명된 조선인은 전 기간을 통틀어 단 4명에 불과하고 재임 기간도 매우 짧다. 조선총독부관보와 경성제국대학일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일람에는 본적지도 나와 있어 창씨개명을 했어도 조선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196] 그런데 조교수로 임명되기 전인 12월 12일 ~ 14일 사이에 개업을 알리는 인사(人事), 광고, 기사가 올라온 것을 보면 거취에 대해 모종의 우여곡절 있었던 듯 하다.[197]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198]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199] 경기도 연천의 탄광을 답사하다가 득병하여 귀경한지 3일만 이었는데 식중독 때문이었다고 한다. 근거;손치무교수연설문(지질학회지제12권제3호).[200] 경성고등상업학교 교수 겸임.[201] 박사학위논문 : 生体内に輸入せられたるサリチール酸の運命 (1937)[202]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수학 천재로 유명했던 그는 1923년 졸업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24년 개교하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진학을 염두에 두고 반수하여 경성제대 예과 1회로 입학. 참조.[203] 세부전공 언어학[204]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부친[205] 일어일문[206] 일제는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고문과 별개로 운영하였다.[207] 학사편입[208] 박사학위논문 : 人類遺傳に於ける「ポリメリー」の確率論的研究 (1943)[209] 박사학위논문 : Untersuchungen uber die pharmakologische Wirkung der koreanischen Inula Helenium, L. (1941)[210]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 부속 생약연구소(참조) 산하 개성인삼연구소의 후신[211] 재학 중 신병으로 3년간 요양하느라 1935년 6회 졸업.[212] 박사학위논문 : Sulfanilamidによる淋疾の化学療法について (1940)[213] 당시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세계 최초로 임질의 화학치료법에 대한 것으로 센세이셔널할 것이었으나 외국에 투고되지 않아 그 공을 놓쳤다고 한다.[214] 예과 3회생인 최재서의 고교 동기로 경성제2고보(오늘날의 경복고)를 졸업하고 3수만에 합격. 국립국어원 논문 참조.[215]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동기들보다 5년 늦게 졸업.[216] 예과 재학 중 신병으로 1년 요양 휴학하고 1931년 학부 본과 진학하여 1935년 의학부 제6회 졸업.[217] 이국주 한심석 남기용 주근원 김홍기 등[218] 2020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후의 문민 국방장관[219]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으로 체포.[220]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으로 3년 구류.[221] "경성제일고보 졸업생으로 입학 때와 재학 중에 줄곧 수석을 차지했던 김재완씨는 대표적인 노력형으로 대학에 나올 때 점심은 물론, 저녁 밤참까지 3개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 밤9시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고등고시 준비를 했다.「도서관의 주인 김군」이란 「닉·네임」이 붙기까지 한 김씨는 재학 중에 고시에 합격, 전도가 촉망되던 법관이었으나 해방 전 펫병으로 고인이 되고 말았다. 링크 참조.[222] 휘문고등보통학교(1924~1929년) 졸업 후 도일하여 구제고등학교인 마쓰모토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고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조선사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조선의 경성제대 진학. 경성제대 대학규정에 따르면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223] 그의 제자로 서울대 사학과 1기 졸업생인 김성준 교수의 논문「학산 이인영의 역시인식」참조[224] 박사학위논문 : '경성(京城)에서 유행하는 디프테리아균형에 관한 연구'(京城に流行するヂフテリア菌の菌型に関する研究) (1943)[225] 헤겔 철학을 전공하던 학부때부터 언어학강좌를 수강하며 공부에 열을 쏟았다고 하며,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프라우다, 이즈베스티야 등 소련 출판물을 탐독했다고 한다.[226] 언어학전공, 지도교수 오구라 신페이[227] 초대 원장은 의학부 제1회 선배인 명주완.[228]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부립 제4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 예과 입학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귀국[229] 법문학부 제17회 졸업[230] 예과 9회 선배인 한심석 후임 서울의대 부속병원장으로 신축 서울대병원 본관 공사의 완공을 보았다.[231] 평양제일중학교(1932~1937년) 졸업 후 도일하여 구제고등학교인 제6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둘째형의 사망 후 부모님의 귀국 지시에 따라 귀국한 후 경성제대 이공학부 진학. 경성제대 대학규정에 따르면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232] 1942년 청주중학교 졸업 후 삼수하여 1944년 입학[233] 대한민국의 대학교 총장에 해당.[234] 당초 법문학부 1학년을 마치고 문학과로 전공진입했으나 철학과로 전과.[235] 1965년 6월 일본국 주서울재외사무소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주서울재외사무소장을 거쳐 동년 12월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개설시 임시대사대리 임명.[236] 담양 국씨.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부녀잡지 '우리집' 편집위원. '상업영어'(서울대학교출판부, 1973) 저술.[237] 1921년 3월 강원도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