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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1 01:07:48

이남덕

<colbgcolor=#444><colcolor=#fff> 이남덕
李男德
파일:이남덕.jpg
목영(牧英)
본관 연안 이씨
출생 1920년 9월 24일
충청남도 아산군 (現 아산시)
사망 2012년 9월 6일 (향년 91세)
가족 배우자 김성칠[1]
아들 김기봉, 김기목, 김기협[2], 딸 1명.
종교 불교 (법명: 영주)
학력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 / 학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 석사[3]·박사[4])
경력 동아대학교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 개요2. 생애3. 가족4.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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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교수.

2. 생애

1920년 9월 24일 충청남도 아산군(現 아산시)에서 아버지 이진균(李眞均)과 어머니 한산 이씨[5]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진균이 3.1 운동 때 만세 사건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해 피신하다 함경남도 고원군에 정착,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으로 내려와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조선어문학 전공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선과생은 일종의 편입생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으나, 선과생으로 본과에 편입하는 것은 여학생도 가능했다.

경성제대 졸업 후 1952년부터 부산여자고등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아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를 거쳐 195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여 1986년 정년 퇴임했다. 교수 재직 시절이던 196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 1971년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이화여대 교수 시절 불교학생회 동아리를 만들어 퇴임 때까지 지도교수를 맡았다.

2000년 한글 발전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12년 9월 6일 사망했다.

3. 가족

파일:김성칠 이남덕 부부.jpg
김성칠 이남덕 부부와 자녀

1942년 경성제대 강의실에서 같은 법문학부 문학과의 사학 전공 생도였던 김성칠을 만나 1944년부터 살림을 시작했다. 당시 김성칠은 유부남으로 이혼 수속이 늦어져 1950년에야 이혼했다.

남편 김성칠은 1913년 경상북도 영천군 출생으로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 근무하다가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사학 전공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51년 10월 8일 6.25 전쟁 중에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남편의 사망 후 홀로 3남 1녀를 키웠고 1993년 남편의 일기를 엮어 '역사 앞에서'(창비)를 펴냈다.

3남 김기협은 1950년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사학과로 전과하여 동양사를 전공하여 졸업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2011년 어머니의 시병 일기를 엮어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을 펴냈다.

4. 저술


[1]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2]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3] 석사 학위 논문 : 국어형태소분류론(1961).[4] 박사 학위 논문 : 十五世紀(십오세기) 國語(국어)의 敍法硏究(서법연구)(1970).[5] 이광규(李光珪)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