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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9:41:02

현준혁

파일:현준혁.png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다이호 오세이(大砲黃成)[1]
이명 황욱(黃郁)[2]
본관 연주 현씨[3]
출생 1906년 5월 15일[4]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
(現 평안남도 개천시 천리길동)
사망 1945년 9월 3일 (향년 39세)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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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6년 5월 15일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現 개천시 천리길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현시돈(玄始弴)과 어머니 정산 김씨(定山 金氏)[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협성학교, 중동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졸업 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유(敎諭)로 근무하면서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 등을 가르쳤다.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다. 그러나 1932년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그해 12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학교를 떠나야 했다.[6]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현준혁은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 기자로 근무하면서 1933년 8월부터 개천군·영변군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적색노동조합 조직 준비 운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5년 4월 또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36년 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 1939년 6월 30일 출옥한 후에는 한동안 고향에서 은신했다.
파일:현준혁(1935년 촬영).png
1935년 4월 24일, 적색농·노조 조직 준비 혐의로 검거될 당시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며 조선인민공화국 후보위원에 올랐다.

조선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결성하고 서기에 취임한다.

8월 27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출범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위원회를 이끈다. 당시 현준혁은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민족진영에도 환영받을 수 있는 유력인사였다.

그러나 9월 3일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차에 달려든 괴한에게 암살됐다.[7] 광복 이후에 벌어진 최초의 정치 테러 사건이었다.[8]

정설은 백의사 단원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며, 이북 내부의 권력 다툼 과정 속에서 다른 사회주의자 파벌이 보낸 사람이 저질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미 당시 소련군정 비밀 문서에 백의사 등 극우 조직에서 보낸 사람이 현준혁을 암살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등 백의사나 그 비슷한 성향의 극우 측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한편, 자신이 백의사 단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백근옥은 자신의 동생인 백관옥이 현준혁의 암살범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현준혁이 사망한 이후 북한 지역 공산당을 이끌게 된 김용범이 친소련, 친김일성 성향이었기 때문에 그의 암살이 소련이나 김일성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김일성은 이때 귀국하기도 전이었고, 현재로서는 우익 진영의 백의사의 소행이라고 보여진다.

소련군정이 초기에 조만식의 정치적 권위를 세워주며 통치지역 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조만식과 연합하여 정치를 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에 현준혁도 조만식과 연대했다. 현준혁이 살아 있을 시기까지는 남한의 조선공산당 중앙은 지금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필요한 시기라며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했다. 애초에 현준혁은 박헌영의 정치노선을 따르는 박헌영 지지자였다. 현준혁의 연대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 당시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현준혁과 박헌영의 행보를 대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주의자와의 연대 여부는 소련군정과 미군정의 의도를 같이 고려해야지 현준혁이 온건파라서 민족주의자와 연대했고 박헌영이 극좌라서 좌우합작을 반대한 게 아니다. 물론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성향이나 의도는 전혀 영향이 없이 모든 것이 소련과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간 건 아닌 만큼, 현준혁의 중도적 성향도 분명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국내 엘리트 출신이었던 현준혁과 소련 코미테른 출신 김용범의 차이도 있었으며 조만식의 경우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현준혁과의 협력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공산주의자였던만큼 북한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김일성과 경쟁구도가 생겼을 수도 있다. 물론 현준혁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박헌영마저 김일성에게 밀린 와중에 이러한 경쟁구도에서 이겼을 가능성은 높지 않고 적당한 자리를 맡다가 1953년 남로당 숙청 때나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만식과 긴밀히 협력할 정도로 비교적 중도적, 온건파적인 성향이 강했던만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북한 지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9]

3. 기타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북한에서는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때 현준혁의 고향을 평안남도 개천시 준혁리로 바꿨고 이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였지만 김일성이 귀국하기도 전에 일찍 암살당했기 때문에 애국열사릉에 묻히는 등 북한에서도 평가가 나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도 이 사람이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애매하기 때문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될 수 있었다.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2] #[3] 첨정공파 22세 혁(爀) 항렬.[4]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3년생,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 3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다. 연주현씨8수대동보 2권 576쪽에는 190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5] 김처봉(金處奉)의 딸이다.[6] 현준혁이 체포되던 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중 한 명이 박정희다. 현준혁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을 찾아 읽게 된다.[7] 9월 28일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묘비와 여러 증언을 종합할 때 3일에 암살됐다고 보는 편이 더 유력하다.[8] 해방정국 시기에 암살당한 주요 정치인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5명 중 가장 먼저 암살당했다.[9] 예를 들어 조만식이 현준혁의 설득을 듣고 부분적 찬탁을 선택해서 북한에서의 정치생명을 연장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