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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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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만식
曺晩植 | Cho Man-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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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83년 2월 1일
평안도 평양부 의흥부 반석방 반일리 내동[1]
(現 평안남도 대동군 가장리)#1#2
사망 1950년 10월 18일 (향년 67세)
평양시 (추정)[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11호[3]
본관 창녕 조씨[4]
고당 (古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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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조경학, 어머니 김경건
형제자매 누나 조보패, 여동생 조은식
배우자 전선애
손자 조경규
학력 숭실중학교 (졸업)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 / 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약력 평안남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원
평양 숭인중학 이사장·교장
조선일보 제8대 사장
오산학교 제5·7·10대 교장·교사
신간회 회원
관서체육회 회장
을지문덕장군수보회 회장
조선민주당 당수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1. 개요2. 생애
2.1. 해방 전2.2. 해방 후2.3. 북한 정권 수립 이후2.4. 북녘의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북에 남겠다2.5. 사망
3. 대중매체에서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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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95%88%EC%B0%BD%ED%98%B8%EC%84%A0%EC%83%9D_%EB%A7%90%EB%85%84.jpg
▲ 1935년의 조만식.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북녘과 내 고향 동포들이 그자의 통치하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좋게 살라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 남아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
한국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시민 사회 단체인, 정치인.

2. 생애

2.1. 해방 전

22세에 숭실전문학교에 찾아가서 당시 총장인 윌리엄 마튼 베어드 목사를 만나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5]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 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 민간 자본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다. 이후에도 평양 일대에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 등과 수양동우회를 조직하여 평안도 개신교 사회의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6][7]

2.2. 해방 후

광복 3개월 후인 1945년 11월 한국 최초의 우파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해방 이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여운형은 손치웅을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유하지만 조만식은 이를 거절하고 북에 남았다. 자신을 38선 이북 지역의 지도자로 여겨서 이북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여러 정황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그는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듯 친미, 반공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10월 5일 미군정청은 각계 명망 있는 조선인지도자 11명을 군정장관의 고문관[8]으로 임명하였고 북쪽 출신으론 유일하게 그가 포함되었지만 그는 이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남쪽의 민족주의자들과도 서신 등을 통해 연락을 취하였고 미군정과도 비밀리에 교류를 가졌다. 반대로 북한에 주둔한 외세, 즉 소련군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보는 일부의 시각과 달리 그는 내면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태도는 소련군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9]

소련군정 실시 이후 평남 건준이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자 소련군정청은 민족주의 진영이 장악했던 위원회를 좌우 동수로 구성하도록 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좌익 세력과 협력의 틀을 만들어 정국을 운영했는데 현실적으로 소련군의 도움 없이는 정치 활동이 불가능한 데다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서 좌우합작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군의 주선으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김일성의 기독교적 가풍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10]

1945년 11월 3일 그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집 겸 소련군정의 권유를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좌익의 독주를 우려하던 자본가, 지주, 기독교인들이 조선민주당을 지지했다. 조선민주당은 유산계층의 이익까지 옹호하는 독자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삼팔선 이남의 한국민주당과 비교해도 더 보수적이었다. 다만 이때까지 그는 좌익과의 전면적인 대립은 피했으며 김일성에게 조선민주당 입당을 권하기도 했다.[11] 대신 최용건이 김일성을 대신해 조선민주당에 입당해 좌익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민주당에 침투하기 위해 김일성이 보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최용건은 부당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창당 후 몇 개월 간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 차이는 벌어지고 있었다. 자산계층의 이해관계를 일정 부분 대변했던 그가 공산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식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이미 소련군 당국이 그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일부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한 것은 군 당국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당시 소련군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북한 주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었다.

이에 대해 현준혁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직 토지개혁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악랄한 유산인 소작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운동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지주에게 '가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소련군의 행정 정책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1945년 10월 소련군정은 새로운 중앙권력기관으로 '북조선임시민간자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는 북한만의 행정기관 설치가 통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정청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거절로 소련군의 행정 재편안은 백지화됐다. 소련군은 행정기관 설치로 동유럽과 유사한 위성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같은 소련군의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같은 해 11월 중순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처리를 놓고 심한 항의를 하는 통에 이반 치스차코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소련군의 강경진압에 대한 소련군당국의 사과는 없었다.

1945년 11월, 그는 김구, 이승만 등 38선 이남의 지도자들과 정부수립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소련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김일성은 이에 대해 먼저 북쪽에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통일을 지향했던 조만식과 소련군의 지원이라는 유리한 환경 속에서 북한 지역에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해 공산당 및 자신의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김일성의 노선이 갈등을 보인 것이었다. 다만 김일성은 이 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조만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모셨다.

노선과 정책을 두고 발생한 민주당과 로동당 간의 갈등과 공산측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감은 조만식을 따르던 한근조 등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일부 간부들이 남행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전부터 그의 추종자들은 남한의 민족주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민주당 지도부는 보이지 않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추종하였다. 조만식 역시 공공연하게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남한 민족주의 진영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잦았다.

점점 고조되던 갈등은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폭발했다. 1946년 1월 2일 그를 제외한 북한의 주요 정치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를 선언한다. 소련군정과 김일성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조만식은 남한의 반탁 운동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12] 이후 좌익은 일제히 조만식을 반민주주의자, 반소-반공분자, 친일파[13]로 매도했다.

게다가 공산주의 체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본가 및 기독교 세력이 남한으로 쓸려내려가면서 그의 지지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여운형, 김구 등이 수차례 월남을 권했지만 조만식은 이북의 동포들을 버릴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압력에 의해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고려호텔에 연금된 와중에 유익배, 안병성, 정희섭 등 임시정부 계열 정치공작대원들이 찾아와 월남을 권유했으나 "내가 월남하면 북조선 동포들은 누굴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라는 말을 하며 북에 남겠다고 하였다.

이때까지는 연금되기는 했지만 가끔 남한에서 온 여운형이나 미군정 인사들을 만나서 회담하는 등의 활동은 할 수 있었다. 1947년 미군정에서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차 온 브라운 소장을 만났을 때에는 서울로 월남해서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소련군정 측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

1948년 김구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왔을 때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2.3.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당시에도 북한의 조선로동당 일파는 그를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14],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노선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조선민주당은 1970년대 말까지 지역조직이 남아 있었다고는 하지만 엄혹한 공포정치로 인해 별 활동이 없었고, 이미 최용건이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래의 색깔을 잃었으며 이마저도 1981년 조선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완벽한 위성정당이 되어버린다.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대한민국에 제의하기도 하였으나[15]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김상룡이주하가 중범죄자라는 것을 이유로 먼저 조만식을 내려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교착되었다.

이후 북한이 다시 제안을 하자 정부는 UN에 맞교환 알선을 타진하였으나 이번에는 북측이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정부가 다시 북측이 제시한 교환장소인 여현역은 38선 이북 지역이어서 정부는 38선 이남 1km지역을 교환장소로 하여 26일 교환하자고 제안하였는데 북측이 답하지 않다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2.4. 북녘의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북에 남겠다

그가 그렇게 지인과 제자들의 월남 권유와 김일성과 북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월남(越南)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공산 치하에 남게 된 그의 고향인 평안도 향민들과 북녘의 동포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었다.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당 치하에서 우리 북녘 동포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1천만 북녘 동포와 함께하기 위해 북에 그대로 남을 것이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2.5. 사망

1946년 1월 북한 정권에 자택 연금된 지 4개월 후인 5월 3일, 아내인 전선애 여사와 자녀들에게 월남을 권유하며 떠나기 직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역은 바로 그 머리카락과 손톱을 안장한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 당국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끌고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많다. 평양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훗날 모든 정치활동이 배제된 채 시골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택연금이 오래된 탓에 고령의 조만식이 허약해졌고, 계속되는 6.25 전쟁 중의 폭격에 적절한 대피를 하지 못하여 사망했다'[16]는 설도 있으나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남한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세한 사실관계 파악에 어려움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불법 감금이 조만식의 사망에 이르게 된 큰 요인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사실 조소앙보다 2살 많은 독립운동가 김규식도 비슷한 시점에 죽었는데 역시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당시 9.28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에게 쫓기던 상황의 북한군에게 압록강까지 끌려갔다가 납치된 지 2개월여만에 순국했다.

항간에는 NKVD가 친일파라는 모함을 믿고 굴라크에 끌고 가 죽였단 얘기도 있다. 그의 1948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한 것을 볼 때 소련으로 북송된 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다. 더구나 당시 그는 고령이어서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간수로 있는 소련 군인들의 학대를 못 견뎠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비서였던 백선엽 전 대장이 월남을 권유하기도 했다.

1991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조만식의 최후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실렸다. 해당 기사는 전 북한 내무상 강상호와 외무상 부상 박길룡[17]의 증언에 기초한다. 그들의 증언은 공통적으로, 조만식은 1950년 10월 평양이 국군에 의해 탈환되기 전에 평양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고 전한다. 좀 더 자세한 증언으로, 박길룡은 당년도 10월 18일 밤에 허가이의 지시로 조만식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전 북한 고위 간부로 망명한 인사(익명 처리됨)의 증언에 의하면 당년도 9월에서 10월 초순 사이에, 방학세의 결정과 허가이의 형식적인 재가로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 및 반공주의자 500여 명을 총살할 계획이 정해졌고, 사후에 김일성에게 보고되었다 한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김일성 등의 지시로 북한군이 조만식의 눈을 파 버리고 대동강 강변에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평양이 떨어지는 긴박한 순간에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조만식이 그런 상태로 살아서 국군 등에게 발견, 구조된다면 김일성에게 좋을 리 만무하다. 이런 소문이 돌던 80, 90년대 초까지는 대한민국에 반공 분위기에 편승한 카더라 수준의 소문이 마구 양산되던 시기였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난 줄 아는 국민학생들이 꽤 있었다. 공공연하게 주간지에서 가십성으로 북한지도부의 비도덕적 행위들을 과장하거나 지어내기도 했다. 다만 나중에 그 과장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대표적으로 기쁨조)

1991년 11월 5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발(遺髮:고인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1]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2] 소련으로 강제이송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북한 측에서 사인 및 사망 장소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다.[3] 1991년 11월 5일에 안장되었다.[4] 항렬 26세손[5] 당시 베어드 목사를 찾아가기 전날까지 을 마셔 만취 상태였던 그 자리에서 조만식은 자신을 숭실전문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베어드가 입학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조만식은 개신교 활동을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그대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6] 일제강점기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평안도에서는 개신교가 번창했던 만큼 당시 평안도의 개신교 사회를 이끈다는 것은 종교계 원로 노릇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7] 수양동우회에는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회 신자가 많았다.[8] 이 가운데 9명이 한민당 출신, 1명은 여운형, 1명은 조만식이었다.[9] 미군과 소련군 모두 실제 점령군으로 행세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10] 김일성의 외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외할아버지는 장로, 어머니는 집사였다.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계 미션스쿨 숭실학교(숭실대 전신) 출신이며 조만식의 후배였다.[11] 일각에서는 조만식이 김일성의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조선민주당에 영입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12] 소련군정은 조만식이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에 동참하면 임시정부 대통령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만식이 계속 이를 거절하자 화가 난 테렌티 시티코프가 권총을 뽑아들고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하라고 협박하였으나 조만식은 오히려 저고리 앞섬을 풀어헤치고 "그래 쏴라" 라고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나오자 스티코프는 이에 겁을 먹고 넘어갔다고 할 정도로 조만식은 강심장이었다.[13] 일제강점기 말 매일신보에 실린 글 한 편을 걸고 넘어졌다. 정황상 이름이 도용당했을 가능성이 크다.[14] 당연히 조만식에게 실권을 줄 생각은 없었고, 북한 내에 남아 있던 일부 우익, 기독교 세력에 대한 선전 용도로 추정된다.[15] 실상은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의 제안이었다.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는 사실상 남로당의 활동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16] 이미 구금될 당시 그는 고령의 노인이었는데 노인을 4년 동안 연금시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불보듯 뻔하다.[17] 이들 모두 북에서 숙청되어 소련으로 망명했다.[18] 조만식이 오산학교에서 교장을 했을때 백석이 그 학교 학생이어서 인연을 맺었는데 조만식은 그 시기 백석에 대해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어려서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암기력이 특출나고 문학과 외국어 회화에 능통하여 성적이 좋고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19] 절대 해당 이니셜로 유명한 사이비 교주가 아니다![20] 경호원이었다는 설도 있다.[21] 우익 진영에서 그를 반공주의자의 상징으로 드는 가장 큰 근거가 '신탁통치 반대'를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인데 반공보다는 '신탁통치는 자치론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면서 신탁통치='독립을 유보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일제강점기 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 무저항의 시민 불복종 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22] 조만식은 이북 지역을 대표했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6.25 전쟁 때 살아남아 3백만의 실향민과 함께 남으로 왔으면 조봉암 못지 않은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조만식은 이승만이 아니라 조선로동당과 김일성 일당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오히려 이승만은 월남민들을 대변하는 조선민주당이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했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인 이윤영을 장관으로 기용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는 의미없는 가정이다. 오히려 300만 실향민들의 지지를 흡수하기 위해 이승만이 조만식과 적극적으로 정치적 연대를 맺으려고 했을 거라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며, 실제 역사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23] 참고로 해당 링크는 NL 성향의 매체의 관점에서 조만식을 조명한 것이다. 판단은 알아서[24] 그러나 이 역시 소련군 치하에서 소군정측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 및 인민전선전략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자발적인 협력으로 볼 수 없다.[25] 한마디로 조만식은 자신의 활동 지역이 소련군정의 지배 하에 있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아무리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더라도 모든 통제권, 행정권을 쥐고 있는 소련군정측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고 최소한의 교섭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적인 제약 하에 있었고, 이러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좌익과 어느 정도 타협적 입장을 취했고, 남한에 남아 좌익과 타협을 주장하는 일부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신탁통치 및 분단이라는 현실 인식에 기반한 판단보다는 민족 화합이라는 이상을 목적으로 좌익과의 타협 및 대화를 주장했기에 맥락이 상당히 다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