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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22:37:56

변기종

卞基種
1895년 7월 29일 ~ 1977년 5월 17일

1. 개요2. 생애3. 출연작 목록
3.1. 연극3.2. 영화3.3. 드라마
4. 수상경력5. 참고 자료

1. 개요

대한민국의 연극인으로, 호는 남계(南溪)이며 본명은 변창규(卞昌圭), 세례명은 마르코.

2. 생애

1895년 한성부 인사동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2년부터 계성학교를 다녀 고등과까지 마친 후, 1912년 연흥사에서 우연히 친구들과 함께 혁신단이 공연한 신파극 <진중설>을 보고 감명을 받아 연극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박창한이 지휘하는 신파극단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을 조직해 지방공연을 하다가 평양에서 단장의 도주로 해산된 후, 1913년 황해남도 개성에서 이기세(1888~1945)가 세운 극단 '유일단'에서 2년 동안 실력을 키웠다. 1914년에 유일단이 해산되자 이기세를 따라 '예성좌' 설립에 참여한 후 1919년에 조선문예단에 잠깐 몸담았고, 1920년 김도산(1891~1921)의 '신극단'에 들어가 연쇄극에 많이 나와 노인 연기를 능숙하게 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토월회의 연극을 보며 신파성을 탈피코자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같은 해에 김도산이 만든 영화 <지기>와 <의적>에 출연하여 은막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1922년에 김도산이 급서하자 변기종 자신이 신극단을 이끌게 됐지만 얼마 못가 해산됐고, 1925년에는 당대 인기를 끌던 토월회에 대항코자 이원규와 강성렬, 최성해 등 인기 연극배우들을 모아 '민립극단'을 만들지만 활동이 별로 없어 또 흩어졌다. 이듬해에는 복혜숙과 이경환, 최성해 등을 모아 '조선극우회'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 후 만주 북간도 공연을 준비했지만 함경남도 단천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또 해산됐다.

1929년에 지두한이 신파 연극인들을 모아다가 '조선연극사'를 창설할 당시 그도 참여하여 배우 통솔과 작품 제작을 맡았으며,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될 당시 전속극단 '청춘좌'의 단장이 되어 극단 지휘와 연기 활동에 온 힘을 다했다. 1936년 국내 최초의 갱 영화 <역습>(감독 안종화)에 나온 뒤 1939년 이명우 감독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도 나왔다.

1945년 8.15 광복 후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들이 해산되자 '자유극장'을 새로 만들다가 1951년 '상록극회'를 비롯 1953년 '자유극회', 1955년 '민극' 창설에 각각 참여하며 195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뽑혔고, 1957년 국립극단 창설 후 일시 해산 때까지 2년간 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 외에 1957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과 1958년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등도 맡았다.

1962년 신협과 민극을 합쳐 '국립극단'이 새로 만들어질 때 단원으로 참여해 노익장을 과시하다 1972년 명예단원으로 추대됐고, 1977년 5월 17일 오전 10시반 서울 서대문구 부암동 자택에서 82세에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사후 명동성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어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성산면 영복산 천주교 세종로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3. 출연작 목록

3.1. 연극

3.2. 영화

3.3. 드라마

4. 수상경력

5.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