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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6년 |
이름 | 남궁원 |
분야 | 배우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
<colbgcolor=#000><colcolor=#fff> 남궁원 南宮遠|Nam Koong Won | |
본명 | 홍경일(洪京日) |
출생 | 1934년 8월 1일 |
경기도 양평군 | |
사망 | 2024년 2월 5일 (향년 89세)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
본관 |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
신체 | 180cm, 75kg |
가족 | 배우자 양춘자(1941년 생)[1] |
자녀 | 장녀 홍성아(1968년 생), 장남 홍정욱(1970년 생), 차녀 홍나리(1972년 생)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2]) |
학력 | 경성창신공립국민학교 (졸업) 중앙중학교 (졸업) 중앙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 / 명예학사[3]) |
데뷔 | 1955년 연극《표본실의 청개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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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1960~19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명배우.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외모가 상당히 흡사하다. 당시만 해도 배우 신성일과 함께 황태자급 지명도와 인지도를 자랑했다.
아들도 아버지만큼이나 유명한 기업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홍정욱인데,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남궁원은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홍경일. 남양 홍씨이다.
2. 생애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냈다. 전쟁 때 적치하에서 혹시 인민군에 징집될까봐 마루 밑에서 숨어 지내는 생활을 했고 서울 수복후에는 집안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했는데 그는 그때를 영어 공부 하는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다녔으나 연예계에 데뷔한 후 대학을 중퇴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미남인게 소문이 나서 영화계 사람들이 영화배우하라고 그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 직후 부실한 대학 교육에 만족하지 못해서 군대를 다녀온 뒤 미국유학 준비를 했다. 콜로라도 주립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불운하게도 어머니가 자궁암 3기 진단을 받고 돈이 필요해지자 친구의 아버지인 영화사 사장에게 찾아가 배우로 데뷔하겠다고 말하고 큰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비에 그 돈을 다 들였음에도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와 계약한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으러 나오라고 보챘는데, 애초에 미국유학만 생각했을뿐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던 남궁원은 마음이 심란했으나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고 영화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몇 년 뒤엔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고 스타가 된다. 데뷔초에는 멋진 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1960년대 중반에는 연기력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된다.반면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대한민국 영화계가 정말 돈이 없던 시절이라, 남궁원처럼 품위있는 외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미남 배우에게 어울리는 영화가 별로 없었기에 캐스팅 운은 별로 없었던 편이다. 1928년생이고 남궁원보다는 땀냄새나는 한국적 남자의 외모를 가져 현대극과 시대극을 오가며 영화계를 풍미했던 신영균과 1937년생으로 젊어서는 반항적 청년, 나이 들어서는 고뇌하는 인텔리역을 맡으며 주연을 도맡아 하던 신성일 사이에 낀 세대였기 때문에 남궁원은 대형배우의 외모를 가지고도 위 두 사람만큼은 각광받지 못했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협객영화, 건달영화가 유행하긴 했으나 남궁원같은 귀족적인 외모의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는 영화였고, 양복이 잘 어울리는 서구적 외모와 큰 키를 가진 그는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는 더욱 자기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가 머슴역을 한번도 못 해본 것이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였다. [4] 당시 007 시리즈를 흉내낸 스파이 영화가 잠깐 제작되기도 해서 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충무로의 주류영화는 아니었다.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 씨는 그런 그를 보고 안타까워서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아깝다. 한 10년, 15년 뒤에만 나왔어도..."라고 할 정도다.
연기는 물론 원래 보이스도 좋은데, 후시녹음이 일반적이던 1960년대엔 남성우 성우가 전담이었고, 1970~80년대에는 영화나 광고에서 거의 유강진 성우가 전문 성우로 더빙을 했다.(신성일의 전담성우로 유명한 이강식 성우도 몇 작품 맡기도 했다. 당시 신성일과 남궁원의 후시녹음은 유강진 아니면 이강식 성우가 전담이다.)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으로 7막 7장의 주인공인 홍정욱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전 (주)헤럴드[5] 회장이다.
당대의 여러 배우들과 달리 밤무대 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아들 홍정욱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학비 문제로 밤무대 출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딸도 미국/독일로 각각 유학을 간데다 부인이 암투병 끝에 살아나기도 했으니 여러가지로 돈이 많이 들었을 듯. 홍정욱이 지금도 안타까워한다는 일화. 밤무대도 밤무대지만 역시 아들 유학비 문제로 온갖 에로영화는 물론이고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나 흑역사급 퀄러티를 자랑하는 로봇 태권브이 90에도 출연한 바 있다.
다만 말년에 아들 관련한 일로 인해서 구설수에 오른적도 있다. 범법 행위는 아니고 '족벌 운영'처럼 홍정욱이 설립한 회사에 아버지인 남궁원을 이사로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여담으로 아들보다 키가 크고(남궁원 180cm, 홍정욱 177cm), 풍채도 듬직하고 남자다워서 홍정욱은 아버지에게 키 때문에 열폭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014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는 민도희와 함께 레드카펫에 올랐다.#
1972년 명동에 '빅보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개업해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햄버거 가게를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6]. 그때까지 햄버거는 미군부대에서나 먹을 기회가 있던 낯선 서양요리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햄버거가 너무나 낯설고 입맛에 맞지 않았던데다 가격대도 높았던 까닭에[7] 성공하지 못하고 채 2년도 안 되어 햄버거 사업을 폐업했다고 한다[8].
1934년생으로 나이가 이미 팔순을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동연배인 이순재와 함께 절대 동안이다!. 2015년에 YTN 초대석에 나와 방송 인터뷰를 하였을 때는 꼿꼿한 수트 차림에 60대 정도 밖에 보여지지 않는 초절정 미노년 간지를 내뿜는다. 중후한 중저음이 매력포인트인지라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안녕하세요. 남궁원입니다"라고 운을 띄면 들리는 환호성은 여전한 인기를 실감할 정도.
여담으로, 위에 서술한 YTN 인터뷰에서 "시대극과 현대극을 거슬러 여러 배역을 맡았었지만 이미지에 맞지 않아 머슴역은 못 맡았다는게 아쉽다"라고 하였다.
신인시절에 유명배우 도금봉과 동거 관계였다. 당시 남궁원은 4살 연하의 신인배우였고, 도금봉은 이미 스타였던데다 전 남편과 사이에 두 아이도 있는 상태여서 그 당시 사회적 관점으로는 꽤나 입방아에 오를만한 스캔들이었다.[9] 결별 당시 기사
그러다 2019년 9월 27일 자신의 손녀가 마약 밀반입해 아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얼굴까지 먹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사
최근 근황에서 밝히길 2015년 때의 인터뷰 때와 달리 병환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2022년 1월에는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 치료를 해오다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며, 2년 전부터 투병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거동도 많이 불편해진 상태라고 하며,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2.1. 사망
결국 2024년 2월 5일 오후 4시 경 서울아산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그와 친분이 있었던 배우 신영균과 최불암이 빈소를 찾았고,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 등 여러 정재계 인물들이 화환을 보내왔다. 장남인 홍정욱 전 의원은 "아버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자랑스럽다"며 그를 회상했다.3. 출연 목록
3.1. 영화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1959년작.
제작 임화수, 감독 신상옥에 엄앵란, 최은희, 황정순, 김진규가 주연이고 거의 데뷔작공기도금봉과 최무룡, 김승호, 황해, 주선태와 남궁원이 출연하는 영화. 정치깡패 임화수가 정권아부용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참고로 이승만은 훗날 만들어진 아아 백범김구선생(1960년작)에서는 180도 다르게 나온다.
- 빨간 마후라. 1964년작.
신상옥 감독의 전쟁영화. 김신의 일화를 영화화했다. 피격장면은 정말로 총을 쏴서 유리창을 깼다는 무서운 일화가 있다. 훗날 신상옥이 북한으로 납치될때, 절반의 필름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안타까운 비극이 있는데... 사실 신영균에 비해서는 별로 두각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여주인공격인 최은희의 첫 남편으로 나와 전사하는 역할이기 때문. 영화의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년작.
정창화 감독의 영화로 남방액션물. 그는 강제징용된 군인으로 출연한다.
- 암살자. 1969년작.
이만희 감독의 영화. 장동휘, 박암, 오지명이 나오는 액션영화. 그는 공산당의 자객 1호로 출연하고, 장동휘가 박암을 죽이자 반전으로 암살하지만 그 자신도 트럭에 치여 죽는 역할로 나온다. 여기서 볼수있고, DVD로도 나왔다.
- 독 짓는 늙은이. 1969년작.
황순원의 소설이 원작.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각색해서, 주인공 당손이 장성하여 징용에 갔다와서 회상하는 걸로 시작한다. 영화에서 남궁원은 당손의 친모인 옥수의 옛 애인인 석현으로 등장한다.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년작
장일두 박사역. 경미(김자옥)의 아버지이자 고고학자 필로 등장. 명대사로는하여튼 일을 치르는 데 수고했어전 아무것도 못 해 드렸어요음, 병신! 왜?겁이 났어요 전 경험이 없었단 말이에요이런, 차라리 잘라 버려!
가 있다. 나비가 되는 최후 씬도병맛인상적인 편. #
- 버려진 청춘. 1982년 작.
이기선, 남궁원 주연. 작가 김수현이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중반 쯤 정원에서 이기선이 남궁원에게 사고이후 여자를 안을 수가 없다고 듣자 이기선의 ' 어머, 그러면 아저씨가 병신이란 말이에요?'라는 대사가 일품이다(...).[10] 그리고 고쳐주겠다고 말하자 쿨하게 한마디를 한다. 단추 잠가. 시내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작가 스타일이 딱 나온다
- 내가 마지막 본 흥남. 1983년작.
- 장남. 1984년작.
- 내시. 1986년작.
신상옥의 1968년작 내시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남궁원은 1968년작에서는 왕으로 나왔지만 86년작에는 내시감으로 강등(?)되었다.
- 업. 1988년작. 남궁원, 강수연, 김영철 주연. 이두용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전생에 지은 죄로 인해 여인을 탐낸 사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부부에게 벌어지는 호러영화. 이 영화에서 남궁원은 음흉한 사또 역을 맡았으며, 강수연은 사또에게 NTR 당한 아내, 김영철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또에게 거세를 당하는 남편역으로 나왔다.
3.2. 드라마
3.3. 연극
3.4. 광고
- 아모레퍼시픽 바이스터(1971)
- 유한양행 비네몬500(1972)
- 제일모직 골덴텍스(1976)
- LF(1981)
- 일동제약 아로나민 골드(1982~1987)
- 제일모직 갤럭시(1983~1987)
- 광동제약 썬키스트 훼미리쥬스 (1987)
- 안국약품 포엘(1989)
- 아식스(1991)
- 유한양행 맥생(1991~1992)
- SK바이오팜 기넥신(1993)
- 한독 펄칼크(1994) - 장·노년층을 위한 칼슘제. 광고카피가 "전 펄칼크로 아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였는데, 아내 양춘자씨가 5년간의 암투병 끝에 완치된 사실을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점을 광고 포인트로 삼았다.
- 금강제화 상품권(1994)
- 삼양바이오팜 류마스탑(2000)
- 삼성증권(2002)
4. 참고/관련 문헌
- 한국영상자료원 KMDb 항목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남궁원 - 한국영상자료원. 2015.
5. 관련 문서
[1]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했다.[2] 송파동 비전교회 은퇴장로이다.[3] 1954년에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2014년에 명예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4] 다만 1981년 영화 '피막'에서 머슴 삼돌이 역을 맡은 적 있으나, 주연이 아니어서 비중이 적다.[5]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영자신문인 코리아헤럴드와 석간 경제신문인 헤럴드경제가 나오는 회사다. 2002년 홍정욱이 인수하여 헤럴드미디어로 회사명을 바꿨다가, 2012년에 (주)헤럴드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6] 당시 미군부대 앞 영세한 가게들이 유사 햄버거를 만들어 팔긴 했으나 제대로 된 햄버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7] 개업 당시에 햄버거 단품 160원 밀크쉐이크 90원의 가격이었는데, 당시 서울에서 짜장면이 60 ~ 80원 정도였다고 한다.[8] 1979년 롯데리아가 개업하면서 한국에서 햄버거 시대가 열리고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햄버거가 어느 정도 대중화된다.[9] 당시는 이혼녀가 아니라 미혼녀였어도 동거 자체가 굉장한 스캔들이다.[10] 35분 쯤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