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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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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李海浪 | |
<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본명 | 이해량(李海良) |
출생 | 1916년 7월 22일 |
경기도 경성부 와룡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 |
사망 | 1989년 4월 8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관악구 |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1] |
학력 | 니혼대학 (예술학 / 학사) |
데뷔 | 1938년 도쿄학생예술좌[2] 〈춘향전〉 |
[clearfix]
1. 개요
1985년 12월 23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대한민국의 배우, 연출가, 정치가. 한국 연극의 1세대 배우.
2. 생애
<colbgcolor=#878787> 이해랑 가족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해랑, 맨 앞줄 가운데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이해랑의 할아버지 이재영, 이재영의 오른쪽이 이세보의 양자이자 이재영의 친형 이재형이다.[3] |
1916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11대손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종응은 풍계군[4]의 양자이자[5] 철종의 친척동생으로 대우받던 경평군(이세보)의 친사촌이었다.[6] 따라서 이종응 역시 철종과 가깝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이해랑의 할아버지 이재영(李載榮)은 왕실의 의전실장 벼슬을 했다.[7] 거기다 아버지 이근용(李瑾鎔)은[8]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외과 의사여서 남부럽지않은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 홍씨가 산후 후유증으로 이해랑이 4살 때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엔 할머니마저 잃자 이해랑은 한동안 방황했다.
6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7살에 교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졸업 후 중학교를 5군데 다녔으며(휘문중학 → 배재중학 → 중동중학 → 료요중학 → 가네자와 중학) 최종적으로 일본 요코하마 가나가와 중학을 졸업했다.#[9] 중국 상하이의 후장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니혼대학 재학 중이던 1935년에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1937년 연극 〈춘향전〉으로 데뷔했고[10] 1938년에는 〈막〉 2호에 최초의 연극론 《신희극》을 발표했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에 가입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당해 1940년에는 '고협', 1941년 '현대극장'에서 각각 활동했다. 그러나 배우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처럼 좋지 않았던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좋은 가문과 학벌을 갖춘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매우 반대했다. 결국 집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하여 한동안 고생했다. 1941년에 아내 김인순과 혼인했고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colbgcolor=#878787> 데뷔작 〈춘향전〉에서 방자 역으로 출연한 이해랑(왼쪽) |
1945년 8.15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이 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뜸한 사이 1945년 황철, 함세덕 등과 함께 조직한 '낙랑극회'에 잠시 몸담았다. 김동원 등과 함께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했으나 좌익 연극계의 강세로 오래가진 않았다. 좌, 우익의 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연극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는 우익 진영에 서서 우익 연극인들을 이끄는 인물로 부상해서 1946년 유치진 등과 '연극브나로드실천위원회'를 결성했다. 1947년에는 김동원, 박상익, 김선영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결성했고, '전국연극예술협회' 창립 때 이사로도 선출됐다.
목소리 자체는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못한 편이라 주연으로서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고 비중있는 조연이나 악역을 주로 맡았지만 1950년 국립극장이 개관하자 극예술협회를 모태로 창단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인과 대표를 맡아 이 때부터 연출을 겸업하면서 연출가로서의 능력 역시 인정받았다. 1948년에는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를 시초로, 은막에서도 발을 담가 26편이나 출연했고, 1961년에는 〈육체는 슬프다〉의 연출을 맡았다.
1954년에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출받았다. 1957년에는 '국립극단'이 창설되자 초대 극장장을 맡았다가, 이듬해 구 신협 단원들이 '신협'을 재창단하자 운영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에 연극과(현 연극영화학과)가 생기자 교수로 임용되어 1981년까지[11] 후학을 가르쳤다.# 1962년에는 신협과 민극이 합쳐져 국립극단이 재출범되자 부단장이 됐고, 새로 생긴 드라마센터의 극장장을 지냈지만 문을 닫아 잠시 어려움을 겪었다. 1963년에는 '신협' 재건에 참여한 뒤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을 역임 후 신협을 떠났다. 1967년부터 6년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얼마 동안은 연극보다 문화단체 활동에 신경을 썼다. 1970년대 들어 연극 연출에 더 매진하며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으로 피선된 뒤, 1984년부터 3년간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외에 당시만 해도 문화의 혜택을 받기 힘들던 지방 농어촌민들을 위해 1966년에는 '이해랑이동극장'을 발족한 뒤 대형 버스를 개조하여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이동극장운동'을 주도하는 등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의 발전에 헌신했다. 특히 이동극장은 출범 첫해에 무려 7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할 만큼 폭발적 인기를 끌었으며 1973년까지 전국 순회를 진행했다.#
정계와도 인연이 있다. 1963년에 김종필의 권유로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고, 1970년대 들어서는 5·16 민족상 이사를 지낸 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뽑혔으며, 1974년부터 3년 간 제9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3. 사후
1989년 4월 3일 뇌일혈로 쓰러져 5일 후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장례는 국립극장에서 예술인장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광주시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0년 5월에 늘 연극계의 발전을 생각했던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이해랑 연극재단'이 설립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조선일보와 이해랑 연극재단에서 '이해랑 연극상'을 제정했고, 정통극 분야의 연극인이나 연극단체 중에서 후보자를 선정해 199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그의 기일인 4월 8일에 시상하고 있다. #
1991년에는 이해랑 연극론집 《허상의 진실》이 발간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문화부[12]에서는 그를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colbgcolor=#878787>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있는 이해랑 예술극장 |
그를 기리기 위해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기존에 교내에 있던 예술극장을 2008년 리모델링한 뒤 그의 이름을 붙여 '이해랑 예술극장'으로 개관하였다.[13]
4. 작품 목록
4.1. 연극
- 춘향전 (1937) - 사령 / 농부 / 지방 관리 역
- 날이 밝으면 비가 오십니다 (1938)
- 생활도 (1938)
- 지평선 (1938) - 로버트 메이오 역
- 깨어서 노래부르자 (1938) - 찬조출연
- 춘향전 (1940) - 농부 역
- 무영탑 (1940) - 아사달 역
- 동라 (1941)
- 마의태자 (1941)
- 흑경정 (1941)
- 흑룡강 (1941)
- 봉선화 (1943)
- 산적 (1945/1946) - 동생 역
- 검찰관 (1945)
- 봄밤에 온 사나이 (1945)
- 기미년 3월 1일 (1946)
- 호접 (1946)
- 붓도리 군복 (1946)
- 춘향전 (1946)
- 바람부는 시절 (1946)
- 정열의 대지 (1946)
- 여명 (1947)
- 조국 (1947/1948)
- 자명고 (1947/1948)
-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1947)
- 은하수 (1947)
- 목격자 (1947)
- 왕조군 (1947)
- 대춘향전 (1948) - 방자 역
- 청춘 (1948)
- 검둥이는 서러워(원제: 포기와 베스) (1948)
- 별 (1948)
- 죄 (1948)
- 도난기 (1949) - 연출
-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1949) - 연출
- 자유를 찾는 사람들 (1949)
- 비오는 산골 (1949) - 연출
- 간디 (1949)
- 애국자 (1949)
- 햄릿 (1949/1989) - 연출
- 도라지 공주 (1949)
- 인생차압 (1950)
- 높은 암산 (1950)
- 원술랑 (1950)
- 뇌우 (1950) - 조우핑 역
- 전유화 (1950) - 연출
- 혈맥 (1950)
- 자명고 (1950) - 연출
- 뇌우 (1951/1988) - 연출
- 햄릿 (1951/1985) - 연출 / 클로디어스 왕 역
- 붉은 장갑 (1951)
- 오셀로 (1952) - 이아고 역
- 수전노 (1952)
- 맥베스 (1952) - 연출
- 불꽃 (1952)
- 맹진사댁 경사 (1952)
- 빌헬름 텔 (1952) - 연출
- 목격자 (1952) - 연출
- 원술랑 (1953) - 연출
- 자유부인 (1953) - 연출
- 향수 (1953) - 연출
-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53)
- 대춘향전 (1954)
- 은장도 (1954) - 연출
- 줄리어스 시저 (1954) - 연출
- 가야금의 유래 (1954)
- 이슬 (1954) - 연출
- 별 (1955)
- 인수지간 (1955)
- 광복십년 (1955)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55) - 해롤드 미첼 역
-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1955) - 연출
- 계월향 (1956)
- 민중의 적 (1956)
-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1956)
- 다이알 M을 돌려라 (1956) - 연출
- 세일즈맨의 죽음 (1957)
- 풍운 (1957)
- 박쥐 (1957)
- 신앙과 고향 (1957) - 황제의 무사 역
- 발착점에 선 사람들 (1957) - 태만 역
- 인생차압 (1957) - 연출
- 한강은 흐른다 (1958/1962) - 연출
- 소 (1959)
- 의사 지바고 (1959)
- 서울의 표정 (1959) - 연출(이진순과 공동)
-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1959) - 연출
- 안네 프랑크의 일기 (1960) - 연출
- 미풍 (1961) - 연출
- 포기와 베스 (1962) - 연출
- 로미오와 줄리엣 (1962) - 연출
- 갈매기떼 (1963) - 연출
- 학 외다리로 서다 (1964) - 연출
- 오셀로 (1964/1968) - 연출
- 어머니의 모습 (1964) - 연출
- 여성만세 (1965) - 연출
- 그 많은 낮과 밤을 (1965) - 연출
- 춘향전 (1965) - 연출
- 춘향전(박진 작) (1965) - 연출
- 불신시대 (1966) - 연출
- 동의서 (1966) - 연출
- 교류 (1966) - 연출
- 오해마세요 (1966) - 연출
- 세자매 (1967) - 연출
- 오이디푸스 왕 (1967) - 연출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1967) - 연출
- 북간도 (1968) - 연출
- 분례기 (1968) - 연출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1969) - 연출
- 마술사의 제자 (1969) - 연출
- 원술랑 (1970) - 연출
- 인조인간 (1970) - 연출
- 활화산 (1974) - 연출
- 징비록 (1975) - 연출
- 광야 (1975) - 연출
- 이어도 이어도 이어도 (1976) - 연출
- 손탁호텔 (1976) - 연출
- 파우스트 (1977) - 연출
- 천사여 고향을 보라 (1978) - 연출
- 객사 (1979) - 연출
- 산수유 (1980) - 연출
- 라인강의 감시 (1981) - 연출
- 삭풍의 계절 (1982) - 연출
- 리어왕 (1983) - 연출
- 불타는 여울 (1984) - 연출
- 인종자의 손 (1986) - 각색 / 연출
- 밤으로의 긴 여로 (1986) - 연출
- 황금연못 (1987) - 연출
- 들오리 (1987) - 연출
4.2. 영화
- 수우 (1948)
- 코리아 (1954)
-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1956)
- 여성의 적 (1956)
- 여성전선 (1957) - 사장 역
- 마인 (1957)
- 나는 너를 싫어한다 (1957)
- 청실홍실 (1957)
- 화심 (1958) - 의사 B 역
- 자나 깨나 (1959) - 검사장 역
- 밤마다 꿈마다 (1959)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1959)
- 누구를 위한 순정인가 (1959) - 박병훈 역
- 이름없는 별들 (1959) - 하리이 역
- 언덕의 종은 울려도 (1959)
- 구름은 흘러도 (1959)
- 재생 (1960) - 일본인 재판장 역
- 청춘화원 (1960) - 대명토건 중역 역
- 흙 (1960) - 임 변호사 역
- 카츄샤 (1960) - 검사 역
- 그 이름을 잊으리 (1960) - 전 상무 역
- 딸 (1960) - 송두철(기영의 아버지) 역
- 사랑의 함정 (1960) - 판사 역
- 버림받은 천사 (1960) - 백 교수 역
- 군도 (1961) - 칙사 역
- 붉은 두목 (1961) - 조만식 역
- 육체는 슬프다 (1962) - 감독
4.3. 오페라
- 카르멘 (1955) - 연출
- 일 트로바토레 (1960) - 연출
4.4. 저서
- 한국문학사(편집) - 대한민국예술원. 1984.
- 한국연극, 무용, 영화사(편집) - 편찬기관명 동일. 1985.
- 한국음악사전(편집) - 편찬기관명 동일. 1985.
-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 - 보림사. 1985.
- 한국음악사(편집) - 대한민국예술원. 1985.
- 레얼리즘 연극 연출과정 - 대한민국예술원 연극분과. 1986.
- 이해랑 연극론: 허상의 진실 - 새문사. 1991.
5. 연기 철학
한마디로 '리얼리즘'으로 표현할 수 있다.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이 연기관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면 메소드 연기의 시초가 되는 분이다. 그래서 '배우가 연기한다'는 게 아닌, '그냥 그 배우(실제 인물)가 그 사람(극중 캐릭터)'일 정도의 사실적인 연기를 추구했다. 어느 정도로 리얼리즘을 중요시 여겼냐면, 셰익스피어마저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다하여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정도.그래서 연출자가 일일이 개입하는 것보다 배우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인정해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연출을 좋아했다. 리얼리즘을 극에서 구현하려면 당연히 배우가 하는 말과 동작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연출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래라저래라하면 자연스러움이 나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사실주의 성향의 희곡을 많이 쓴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한다.[14]
그런 맥락에서 신파극을 아주 싫어했다. 과장된 연기가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데에 많이 부족하다고 여겨 연극의 격을 더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신파극을 한 연극인들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명은 절친하게 지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연출가 박진이다.
6. 여담
- 생애 항목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중학교를 여러군데 다녔다. 그중 휘문중학에서 배재중학으로 옮긴 것은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방학 동안 친구와 함께 만주로 무전여행을 떠났는데 신의주를 거쳐 안동[15]으로 가던 중 그만 일본 헌병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당시 조선인 청소년들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사상적 의심을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증빙 서류나 뚜렷한 목적도 없이 만주로 여행을 간 이해랑을 헌병들은 수상하게 여겨 구금시켰다. 이해랑은 결국 아버지 이근용이 당시에 근무하던 부산병원으로 전보를 쳐서 구금 사실을 알렸고, 이근용이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이해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고 교칙 위반으로 휘문중학에서 퇴학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배재중학으로 편입했으나 담배피우는 흉내를 내다 다시 퇴학(...). 다행스럽게도 중동중학 설립자 가문과 그의 집안이 가까웠기 때문에 중동중학으로 다시 편입해서 그곳에서는 무사히 졸업했다. 대학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16]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첫 학교에서는 적응이 힘들어 자퇴, 두 번째 학교는 다행히 잘맞았는지 무사히 졸업했다.#
- 일본 유학 시절에도 갑자기 일본 제국 경찰에 잡혀가 고문당하고 석 달 반을 구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예명 '해랑(海浪)'은 본명 '해량(海良)'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새로 이름을 지을 때 '량(良)' 옆에다 삼수변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 '해량'보다는 '해랑'이 발음하기도 더 편해서 그렇잖아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랑’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위에서 언급했듯, 해방 이후 우익진영에 서면서 좌익 연극인들과 적대관계가 되어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어느 날은 술마시다가 갑자기 좌익 연극인 6명이 불쑥 와서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었지만 인원수에 밀려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 유학 시절 같이 연극한 친구와 하숙을 같이 했던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이념 앞에서는 우정도 소용없었던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 타계 직전까지 연극 〈햄릿〉 연출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때 당시 전성기를 누리며 상당히 바빴던 유인촌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출연을 부탁했고 유인촌은 마지못해 출연했다고 하는데 유인촌은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단순히 나이드셔서 그러신가보다 했고 ‘정말’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 SBS 〈힐링캠프〉 최민식 편에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시절 제자였던 이경규가 밝힌 일화이다. 이해랑이 "한국 연극계가 발전이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다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야"라고 말했고,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이경규는 프로그램 녹화 시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보듯 이해랑 교수가 재직중이던 당시 동국대 연영과에는 이경규, 이효정, 최민식 등 현재도 한국 영화계나 방송계의 중진으로 자리매김하는 동량들이 많이 있었다.
- 슬하에 3남 2녀를 뒀는데, 대를 이어(?) 연극계에 투신한 자녀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중 장남 이방주는 고려대학교 졸업 후 현대그룹에 입사, 현대차와 현대산업개발 사장을 역임했고, 차남 이민주는 연세대학교 졸업 후 1975년 조선무역을 창립, 사람이 안으면 심장이 뛰는 '하트 투 하트' 곰인형을 런칭해 대박을 터뜨린 뒤 수많은 M&A로 부를 축적, 국내 50대 현금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책도 몇 권 출간하셨는데, 2022년 <한국의 역사조작 이념사기극>을 쓴 유사역사학자 겸 새미래북스 대표 이방주와는 동명이인이라 자칫 오인할 수도 있다. 해당 인물 블로그에 따르면 일제 시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자라고 한다.
7. 수상경력
- 서울시 문화상 (1955)
- 대한민국예술원상 (1963)
- 5월문예상 연예부분 본상 (1964)
- 3·1연극상 (1969)
- 국민훈장 모란장 (1972)
- 동랑 유치진연극상 (1985)
- 5·16민족상 (1986)
8. 대중매체에서
9. 참고 자료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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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흥대원군 기준 14대손 '해(海)' 항렬. 파는 다르지만 소설가 이해조, 전 국무총리 이해찬과 같은 항렬이다.[2] 1934년 6월 창립된 재일 조선인 학생극단.[3] 사진 출처 - 《주간한국》.[4]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이자, 은언군의 이복동생 은전군 양자.[5] 안동 김씨 세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860년(철종 11년)에 파양당했다.[6] 왜 굳이 '친사촌'으로 적었냐면, 이종응이 당숙의 양자로 갔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이종응은 이세보와 6촌이다.[7] 이재영은 원래 이종응의 17촌 조카인데, 아들이 없던 이종응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런데다 이재영의 친형 이재형도 이세보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에, 현재 이세보와 이해랑의 가문은 사실상 같은 집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쉽게 말해, 이세보 일가가 이해랑의 큰할아버지 집안이다.[8] 1960년 5월 16일부터 1960년 12월 26일까지 부산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9] 참고로 후술할 평생의 친구 김동원을 배재중학 시절에 처음 만났다.[10] 이 때 같이 활동한 사람이 황순원, 김동원이다.[11] 1971년 정계 진출을 위해 사임한 뒤 1978년에 복직함.[12] 현재 문화체육관광부.[13] 중문인 혜화문 옆에 있다.[14] 그 중에서도 《세 자매》를 제일 선호했다고.[15] 경상북도 안동시가 아닌, 현재 중국 단둥시이다.[16] 당시 중동중학은 각종학교였기 때문에 대학입학자격이 없었다.[17] 다만 극중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다.[18] KBS 〈명성황후〉에서는 천희연 역을,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신호역을, 그리고 〈무인시대〉에서는 한뢰 역을 각각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