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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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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李滉|Yi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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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표준영정
출생 1501년 (연산군 6년) 1월 13일[1][2]
조선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3]
사망 1571년 (선조 3년) 1월 13일[4] (향년 69세)
조선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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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1c4f1><colcolor=#fff> 시호 문순(文純)
경호(景浩)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淸凉山人)
본관 진성 이씨[5]
부모 부친 - 이식(李埴, 1463 ~ 1502)
모친 - 춘천 박씨(春川 朴氏, 1470 ~ 1537)
형제자매 7남 1녀
배우자 김해 허씨(金海 許氏, ? ~ 1527)
안동 권씨(安東 權氏, ? ~ 1546) - 권질(權礩, 1483 ~ 1545)의 딸
자녀 장남 - 이준(李寯, 1523 ~ 1583) 허씨 소생
차남 - 이채(李寀, 1527 ~ 1550) 허씨 소생
3남(서자) - 이적(李寂, 1531 ~ 1608) 첩 소생
학력 성균관
종교 유교 (성리학)
붕당 }}}}}}}}}
1. 개요2. 생애3. 저서와 작품4. 여담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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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000 앞.jpg
천 원권 지폐 속 초상화[6]
人,者之大。天下之義理無可是己而非人?(불능사기종인 학자지대병 천하지의무궁 기하시기이비인)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義理)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7]
조선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8] 등이 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退溪). 본관은 진보(眞寶) 혹은 진성(眞城), 시호는 문순(文純).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율곡 이이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라면 퇴계 이황은 동인[9]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10]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대한민국에서 유통 중인 화폐 천 원권 지폐의 앞면 모델이기도 하다.

2. 생애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11]에 있는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의 집[12]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모친은 춘천 박씨인 박치의 딸로 전처인 의성 김씨와 사별한 후 이식이 들인 후처였다. 강원도 춘천시에는 현재 퇴계동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모친인 춘천 박씨의 고향이 춘천이다.

이식은 이황이 7개월이 될 때 40세의 나이로 죽고 성장 때까지 친어머니 춘천 박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워 학문의 길에 들었고, 12세에 숙부 이우(李堣)가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고 있을 무렵 논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여 다양한 경과 시를 접했는데 19세 때 주희성리대전을 독파하고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히 알게 되었다."는 말을 뱉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깊어졌다. 20세에 주역을 공부하다가 공부 중독이라도 된건지 몸을 엄청 망가뜨리며 이후에도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가정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21세 허씨 부인과 결혼하지만 이황이 27세 때 둘째 아들을 낳고서 죽는 불행이 닥쳤다. 이황은 사위된 바를 다하며 혼자 남은 장모를 마지막까지 챙겼다고 한다.

30세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하지만 안타깝게도 권씨의 가정사 역시 정치에 크게 희생당한 삶이였다. 권씨의 할아버지 권주(權柱)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사람이라 갑자사화로 교살당했으며 할머니는 관비가 되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어린 권씨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권씨의 아버지 권질은 이황의 인격을 알아보고 유배되었을 때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라며 딸을 보살펴달라 부탁한 것.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사가 어려운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하면서 아내를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보살피는 지극정성을 보였다.[출처] 그러나 결국 권씨 부인은 이황이 46세가 될 때 아이를 낳다가 죽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리고 4년 뒤에 둘째 아들 또한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다.[14]

대학자이니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과거 시험에서 고배를 많이 마셨다.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세부터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3번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 2등으로 합격한 후 1528년 진사시험에 2등으로 오랜 시간 동안 고시 낭인의 시간을 거친 이황은 34세인 1534년 문과 초시 2등으로 급제했다. 어린 시절 덜컥 과거에 붙어버리고 9번이나 과거를 씹어먹는 천재 이이와 다르게 인간적인 코스를 거친 편. 이후 43세까지 종3품 성균관 대사성까지 올랐지만 정치 난맥상에 많이 엮이면서 이후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귀경을 반복하게 된다. 45세에 을사사화에 엮이며 파직당하다가 오래지않아 복직하고 50세에 형 이해가 사화에 휘말리며 유배가는 길에 죽는다. 모진 정난과 가정사를 맞은 이황은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의 외직을 다니며 풍기군수 재직 시절 주세붕에게 건의해 최초로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을 짓게 된다. 50세가 되며 확고하게 귀향을 결심하고 60살에 고향에 도산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덕분에 현재도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의 이미지로 적극적인 행정가였던 이이보다 은자의 이미지가 강한 것.

귀향 후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펼치면서 대학자로서 자리매김했다. 당대의 대유학자였던 서경덕과 논쟁을 벌여 '기를 이끄는 이'를 부각시켰으며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조선 시대 주리론(主理論)의 뼈대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치상에 도덕성 회복과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는 원리주의로 대응하려는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한마디로 이황의 사상을 만들어 낸 세기의 논쟁이다. 이황의 전성기. 이때 이황은 58세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서, 이황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교 총장쯤 되는 셈인데 이는 의전에서 국무위원(장관)급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나 국무위원이 이제 갓 시험에 합격해 부서 배치를 받은 5급 사무관이나 7급 주무관과 토론을 벌인 것이다. 현대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이황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였음에도 기대승은 정말 겁없이 대든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건 아니다. 후대의 학자 정약용정조와의 대화에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렸다. 정약용의 집안이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묘한 구석이 있는 부분. 현대 분석철학의 논리적 도구를 이용한 분석 역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리고 있다. 이황의 주리론은 사단과 칠정을 논리적 기준 없이 우열관계로 구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했으며, 우주론과 실천윤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기획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스케일의 학설을 주체적으로 제시한 것 자체가 충분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보다 더 정밀하고 논리적이라고 해서 플라톤의 철학사적 위대함이 반감될 수 없다. 굳이 평하자면 청출어람이었을 뿐.

당대의 거유(巨儒)인 조식과의 라이벌 관계도 유명하다. 학풍도 현실 참여 vs 학문 이론 중시로 갈라졌고 사는 곳이 멀지 않음에도 한번도 만나지 않고 편지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 조식은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다양한 사회 경장론을 제시한 이이와 여러 모로 비교될 만한 실천주의 유학자로 이황의 철학은 실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수시로 조식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반론] 위에 언급된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변 땐 조식이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을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고,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황은 이에 대해 제자들에게 "(조식은) 잘난 척은 심하고 하는 말은 과격하고 노장(老莊=도가)에 물들어 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도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며 디스를 했다고. 그래도 명색이 당대의 대학자들이라 대립은 학문적 논쟁으로 국한되었고, 조식과 이황이 정치적으로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의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여, 겉으로 행하는 것이 반드시 내면에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선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선을 본 때에 이미 스스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선을 보고도 싫어할 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악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악을 안 때에 이미 스스로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 저 표리여일(表裏如一)한 호오(好惡)를 빌려서 배우는 자들에게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권면한 것은 옳지만, 양명이 저 형기의 하는 바를 끌어 대어 의리의 지행에 대한 설을 밝히려 한 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리의 지행을 합하여 말하면 참으로 서로 필요하고 병행하여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나누어 말하면 지를 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은 행을 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합하여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습록논변」
저서인 전습록변(傳習錄辨)을 통해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 유학에서 양명학이 자리잡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임명와 근무와 사임을 반복하다 선조 시절 대제학으로 일하면서 성학십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올렸고,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밖에 예안향약을 짓기도 했지만 이이의 해주향약이 더 유명해졌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들어가 문순공(文純公)의 시호를 받아 동국 18현의 한명으로 모셔진다.
파일:이황 묘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
이황의 묘비 탁본
묘소는 고향인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묘비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직역하면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 이씨의 묘')라고 적혀 있고 이황이 자신의 일생을 짧게 정리한 글인 자명(自銘)이 있다. 생전에 이황이 유언으로 '조정에서 장례를 치러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묘비명도 따로 부탁하지 말고 내가 남긴 이 글만 묘비에 새길 것'이라고 정해 두고 조카에게 이를 지키도록 전했다. 그러면서 '기대승 같은 이가 글을 쓴다면 분명 장황하게 글을 써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뒤끝을 보이기도. 아직 젊은 기대승이 지나치게 이황 자신을 띄워주는 것을 경계한 듯. 그러나 이황 같은 대학자의 묘갈문을 간단히 하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갈문을 쓰기로 결정이 나 버렸고, 결국 기대승이 묘갈문을 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묘비석은 묘의 앞에 있지만, 퇴계 묘비의 비석은 퇴계의 말을 어긴 것 때문에 죽은 퇴계의 눈치를 보아 퇴계의 묘 오른쪽에 세웠다고. 그런데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학문적으로 자주 논쟁을 주고받았던 남명 조식은 이 묘비명 이야기를 듣고 "퇴계는 이 묘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평생동안 벼슬하지 않은 나 같은 이도 은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거늘"이라고 비판했다는 야사가 있다.#

이황은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내려오고 있어 현재 종손 집안은 대강 16대, 현재 종손 이근필(李根必, 1932. 4. 10 ~ 2024. 3. 7)[16]과 17대 이치억(李致億, 1975. 10. 11 ~ ),[17] 이주현 부부, 18대 이이석(2007 ~ )이다. 2024년 현재 퇴계종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17대 종손인 이치억이다. 이이석은 차종손인 셈. 이근필은 2009년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1909. 5. 20 ~ 2009. 12. 23)의 장례 때 무리를 하여 청력을 잃은 것을 빼면 여전히 직접 쓴 휘호를 손님들에게 선물로 주는가 하면 종택을 방문한 손님들을 대문 앞에서 일일이 배웅하는 등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종손이 손님 받는 거야 종손의 의무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근필의 경우 종택 옆에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설립자이기도 해서 종택을 찾는 손님의 규모가 좀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일이 해내는 것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 정도. 이치억은 젊었을 적 자신이 종손이라는 사실을 굴레라고 생각해서 일본 메지로 대학(目白大學) 아시아지역문화학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지만[18], 할아버지의 사상이 안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에 퍼졌다는 것을 깨닫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2004년 유교철학 전공으로 유학 석사 학위[19], 2013년 2월 유학 박사 학위[20]를 각각 취득했다. 이후 공자의 79세손이자 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의 손자인 공수장(孔垂長)을 한국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3. 저서와 작품

문학, 산문
《단양산수기》
《유소백산록》
《무진육조소》
도산십이곡
저서, 문집
《계몽전의》: 주자의 역학계몽을 변석한 저서
《주자서절요》: 주자대전의 선집
《송계원명이학통록》: 송, 원, 명나라 주자학자들의 행장 및 어록집
《심경석의》: 성리학 경전인 심경 주석서
《사단칠정분리기서》: 사칠논쟁에 대해 정리한 책
성학십도
퇴도선생자성록
《퇴계집》: 이황의 문집

4. 여담

12월 신축(辛丑)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이황(李滉)이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그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 이황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明宗)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작계(爵階)를 여러 급 올려 자헌(資憲 정2품)까지 되었다. 이황은 예안(禮安)의 퇴계촌(退溪村)에 살면서 퇴계(退溪)라 호(號)하고 의식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같이 보았다. 말년에 도산(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리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 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 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弟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사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아니하였다. 한성(漢城)에 우거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하여 손수 주워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陶山)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길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조야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등의 예(例)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寯)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太學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ㆍ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花潭處士) 서경덕(徐敬德)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趙光祖)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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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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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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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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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501년 11월 25일, 율리우스력 1502년 1월 3일. 한국은행권 천원권이나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는 음력 생일에 맞춰 1501년생으로 표기한다.[2] 이이와 같이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인지라 둘의 나이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둘의 나이 차는 아버지와 아들뻘이다. 실제로 이황의 나이는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보다 1살 어리고, 어머니인 신사임당보다 2살 많다.[3]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지역이다. # 조선 후기에는 예안군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예안군이 안동군에 통합되었고 1995년에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4] 음력 1570년 12월 8일, 율리우스력 1571년 1월 3일. 한국은행권 천원권이나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는 음력 날짜에 맞춰 1570년 사망으로 표기한다.[5] (족보)[6] 참고로 진성 이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황은 "복건이 쓰는 두건과 같은 모양이라 쓰기에 영 좋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대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고 하는데, 정자관은 오천원권 지폐에서 이이가 쓰고 있는 것이다. 창작물의 반영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7] 퇴계집에 실린 표현이다. 이황의 이기론과도 통하는 말로 곱씹어 볼만하다. 이황은 理와 氣가 구분되면서도 각각 따로이 있을 수는 없다는 전제 아래에, 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단의 선함이 이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는데, 끝없는 세상의 이치를 성찰할 것이지 사물에 대한 이해에 집착하여 다투지 말라는 위의 말은, 이황의 理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사단칠정논변) 아래에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이황의 理는 근본주의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8] 청량산에 오르기를 즐겨했다 한다.[9]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인 중 남인 쪽이다. 북인 쪽에는 남명 조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17세기 중반부터 북인은 아예 정치에서 비주류(북인과 편먹고 설치던 광해군의 몰락 후 북인 대숙청)가 되었으므로, 이후 200년 정도 (권력을 갖고 활동하는 동인 = 죄다 남인)이었으니 동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기는 한데, 북인은 그때부터 더 조식이 생전에 주장하던 학문적 주장을 연구하는 식으로 명맥을 이었었다.[10] 사실 서인들 중에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많다. 붕당이 본격적으로 심해진건 이황이 죽고 꽤 시간이 지나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대에 동인 중 남인 쪽이 주로 퇴계를 추종했는데, 북인 측이 망한 것도 있고 북인은 전반적으로 남명 조식을 추종했기 때문이다.[11] 인근의 의촌리, 토계리, 원천리, 단천리와 함께 현재도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12] 이 집이 현재의 노송정종택(노송정은 이계양의 호면서 당호.)인데 퇴계가 태어난 방, 퇴계태실이 있다.[출처] 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14] 이황은 그 해에만 형과 둘째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반론] 그러나 이황의 철학이 실천성을 배제했다는 해석은 과도하는 주장이 있다. 16세기 조선은 내부에서 갖가지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림파들의 학문 탐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양반 계층의 입장에서 민중의 입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한계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붕당 정치 전반의 문제점으로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이황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것.[16] 족보명은 이돈환(李惇煥).[17] 2021년 9월부터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18] 딱 이 시기에 방송사에서 퇴계 종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나왔었는데 일본 유학을 준비하며 결혼은 포기한 상태였다. 15대 종손 이동은 옹의 생전 신문기사를 보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치억씨로 인해 이동은 옹과 이근필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예 반항할 마음으로 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적도 있다고 한다.[19] 석사 학위 논문 : 『中庸』의 中思想 硏究(『중용』의 중사상 연구, 2004).[20] 박사 학위 논문 : 退溪哲學의 主理的 特性에 관한 硏究 : 理發說을 중심으로(퇴계철학의 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 : 이발설을 중심으로, 2013. 2).[21] 첫째 부인이 많은 유산을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에 이황은 그 덕을 보았으며, 첫째 장모를 그녀가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고 한다.[22] 부친 권주(權柱)가 갑자사화에 휘말려 사사당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었고(이 때 권주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중종반정으로 나아지는가 했으나 얼마 안가서 권질도 '신사무옥'에 휘말려 유배당했고 동생 권전(權磌)은 국문중에 매를 못 이기고 장살(杖殺)당해 죽었으며 권전의 아내는 관비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집안이 완전히 망해버린 것.[23] 대추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24] "너희는 모두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지 않았으니 이 초상은 너희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계모가 친모와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대개 뜻을 알지 못하여 경솔하게 하는 말이다. 사람은 의(義)가 아닌 것에 빠져서는 안된다.”[25] 물론 20세기 초반부터는 다른 가문에서도 적서 기록을 없앴으나, 당시 족보에서 적서의 기록을 없애는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26] 심지어 퇴계가 떠난 후 그가 앉았던 마루가 더러워졌다 하여 마룻바닥을 대패로 모두 벗겨내버렸다.[27] 이는 퇴계가 조선 전기의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조선 전기의 가족사회는 비교적 남녀평등에 가까운 시스템을 갖고 있었으나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는 교조적인 성리학과 가부장제가 가족을 지배했기 때문에 과부의 재가에 대해서도 전기보다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갔고, 평민보다 사대부 계층의 재가가, 재가보다 삼가(2번째 재혼)이 훨씬 나쁜 것으로 취급되어 자녀의 관직 진출에도 지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단 예외는 있다. 19세기 중엽의 학자 조병덕이 자신의 셋째 며느리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 고생만 하다 병을 얻자 친정에 아들과 함께 보낸 사례가 있다.[28] 평범한 사람의 인정.[29] 화흠과 관녕은 같이 공부를 하며 살았던 친한 사이였는데, 화흠이 재능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둘이 밭을 갈다가 금을 발견했는데, 관녕은 신경도 안 썼지만 화흠은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혹은 그대로 가지고 갔다는 얘기도 있다). 또 어느날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귀인의 행차인지 거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관녕은 방에서 공부만 했고, 화흠은 밖에 나가서 구경을 하다가 왔는데, 이 일 이후로 관녕은 화흠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화흠은 손권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더 큰 부귀영화를 탐하여 조조 밑으로 들어가 한 황실 찬탈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반대로 관녕은 요동으로 가서 흰 옷을 입고 살며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30]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자 백사 이항복을 손녀사위로 둔 그 권철이 맞다.[31] 이황이 사망하자 그의 제를 지낸 후 이황을 따라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일 뿐 근거가 없다.[32] 퇴계학연구원 논문검색 2015년 vol., no.138, 통권 138호에서 열람 가능하다.[33] 석담일기 상권 융경 사년 경오(隆慶四年庚午) 1570년(선조 3년)[34] 현재 남산타워로 오르내리는 산길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울에서 남산타워로 가는 2번이나 5번 버스를 타고 끝까지 간다면 볼 수 있다.[35] 아닌게 아니라 <선조실록>의 이황 졸기(卒記)문에는 이황이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라고 나와 있다.[36]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다.[37] 둘의 이론이 대조적이고 둘의 학파가 후에 동인서인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두 사람은 붕당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이황은 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했고 이이는 붕당을 막기 위해 가장 노력했다.[38]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39] 심의겸과의 대립으로 동인의 영수가 된다.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40]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A] 서인[A] 서인[43] 성수침의 문하에도 있었다.[A] 서인[45] 서경덕의 문하에도 있었다.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46] 근거: https://ja.wikipedia.org/wiki/%E6%9D%8E%E6%BB%89[47] 이황이 돌아간 뒤에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게 무슨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 같소"라며 투덜거리고 돌이(임꺽정의 아버지)는 "그래도 양반이 직접 백정을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무던한거다"라고 달랜다.[48] 도산서원은 이황이 죽은 후에 도산서당 뒤에 세워진 서원이므로 반영 오류이다.[49]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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