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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10-29 18:17:40

문무왕

신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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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munmuwang123.jpg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문무왕 표준영정. 김기창 작.[1]
시호 문무대왕(文武大王)[2]
성씨 김(金)
법민(法敏)
왕후 자의왕후(慈儀王后) 김씨
왕태자 김정명(金政明)
부왕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모후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
묘지 대왕암
생몰년도 음력 626년[3] ~ 681년 7월 1일 (54-55세)
양력 626년 ~ 681년 7월 21일
재위기간 음력 661년 ~ 681년 7월 1일 (21년)
양력 661년 ~ 681년 7월 21일

1. 개요2. 출생3. 태자 시절 - 백제 정벌 참전4. 고구려 공격5. 나당전쟁과 삼국 통일 완수6. 전쟁이 끝난 치세 말년7. 내정8. 죽음과 호국대룡 전설9. 삼국사기 기록
9.1. 삼국사기 6권9.2. 삼국사기 7권
10. 오늘날의 문무왕


1. 개요

신라 제30대 왕. 부친은 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이다. 그리고 친동생 김인문,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다. 왕비는 자의왕후.

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 양면에서 활약한 그래서 文武王인 일종의 먼치킨 군주다. 본격 화전양면전술의 달인. 거대한 국력을 가진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전양면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2. 출생

諱法敏 太宗王之元子 母金氏文明王后 蘇判舒玄之季女 庾信之妹也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 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삼국사기

김춘추문명왕후의 일화를 토대로 속도위반으로 태어났다는 드립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태아 상태에서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선덕여왕은 생명의 은인? 다만 이 추측은 무리가 있는 게, 문무왕이 문명왕후의 첫째 아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이고, 속도 위반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2개의 기록을 섞어서 만든 스토리다. 문명왕후 참조. 부모의 혈통을 따지고 보면 신라 왕실과 가야 왕실의 피를 한몸에 담고 태어난 셈이다.[4]삼국사기》에서 왕의 본기 도입부에는 항상 왕에 대한 찬평이 간략하게 나오곤 하는데[5] 문무왕은 영특,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건 립서비스가 대부분이지만 문무왕의 행적에 비춰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3. 태자 시절 - 백제 정벌 참전

진덕여왕 4년인 650년,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654년 아버지 김춘추무열왕으로 즉위하자 파진찬 관등에 오르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에 봉해졌다. 곧이어 태자에 봉해졌다.

이후 그의 나이 35세 때인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에 참전했다. 660년 5월 26일 서라벌에서 신라군이 출병한 후, 태자 법민은 6월 21일 덕물도(지금의 인천 덕적도)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맞이했다.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 기사

이후 태자 법민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본군에 합류하여 백제 사비성 공격에도 직접 참전했다. 사비성 함락 직후, 태자 법민이 직접 의자왕의 아들인 백제 태자 부여융을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참고로 삼국사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국사기의 한문은 매우 정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시대적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쓰여진 문구가 있는데, 부여융을 꾸짖던 문무왕의 발언도 그 중 하나다. 걸러지지 않은 피 냄새와, 백제 신라 양국의 증오가 그대로 전해진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 기사
앞서 선덕여왕 재위기인 642년,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함락된 대야성에서 죽은 대야 성주 김품석의 아내인 김 고타소(또는 '고타소랑')가 여기서 말하는 문무왕의 여동생이다. 아버지인 무열왕은 고타소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상당했던 모양인데, 은근히 한 성깔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연도를 짚어보면 누이 고타소를 잃었을 때 문무왕의 나이는 626년생일 경우 17세였는데, 그 일로 인해 20년간이나 두통을 앓았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끔찍한 남매 사이였던 듯하다. 고타소의 죽음은 아버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나 문무왕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되어, 삼국 통일 전쟁의 시작이 이 죽음의 원한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해석까지 있을 정도다.[6]

현대 문학 작품에선 이상하게 문무왕과 고타소의 관계가 남동생 - 누나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삼국사기 원문에는 분명히 고타소를 여동생(妹)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관계가 역전된 것은 김춘추와 김문희가 이어졌던 이야기를 선덕여왕 즉위 이후로, 즉 632년 이후의 일로 인식하면서 벌어진 것인 듯하다. 고타소마저 632년 이후 출생이라고 하면 642년에 죽을 당시엔 10대 초 ~ 중반 정도밖에 안 된 꼬꼬마 신부였단 소리일 테니.

4. 고구려 공격

"함형 원년 경오년 가을 8월 1일 신축시에 신라왕이 고구려 후손 안승을 왕으로 봉한다..."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당의 연호를 쓰면서도 신라의 권위를 내세운 임금의 책문.
이듬해인 661년 6월 부왕인 태종 무열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꾸준히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힘을 기울였다. 문무왕 재위 2년째던 662년에 무열왕을 도와 백제 정복에 공이 컸던 대당 장군 김진주와 그의 동생 남천주 총관 김진흠을 직무 태만으로 처형하고 그들의 일족까지 잡아 죽였는데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군기를 잡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삼은 걸로 추측된다. 이 일로 인해 훗날 나당전쟁시 당에 숙위하고 있던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이 원한을 품고 향도를 자청해 당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2년 기사
그 외에 662년에는 귀족 세력의 본산 중 하나였던[7] 본피궁(本彼宮)을 해체해 문무왕의 측근인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본피궁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등 전쟁 중에도 왕권 강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는 비록 백제 수뇌부는 660년 의자왕의 항복으로 일단 멸망하긴 했으나 복신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이 남아있는 백제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백제 멸망 후 구 백제 영토는 당초 약조와 달리 당나라가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영토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구 백제 영토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들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것은 백제 부흥군을 더욱 결집시켰다. 한편 문무왕은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치한 5개 도독부에 대해 항의하기보다 5도독부의 당나라 군사를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데 이용했다. 또한 나당 연합군이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당나라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신라군을 운용한 덕분에 점차 신라의 직접 지배 영토를 차차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당나라는 5개 도독부를 웅진 도독부로 단일화시킨다. 한편 한때 기세를 올리던 백제 부흥 운동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온 왕자 부여풍이 새로 합류하면서 백제 부흥군 지도층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자중지란을 벌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의자왕의 장남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이 당나라에 끌려간 뒤 귀순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면서 백제 부흥군의 동력이 꺾이게 되었다. 부여융이 부여풍보다 형으로 원래라면 왕위에 더 가까운 인물인데다, 백제 부흥군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 주군이었던 부여융이 자신들을 토벌하러 오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663년 8월 17일에 국에서 보낸 구원병인 1만의 군사와 170척의 전함 등이 백제에 도착했으나 백강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대패당했다. 결국 663년 9월 8일, 그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마지막 남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임존성은 지수신의 지휘 하에 끝까지 버텼지만 흑치상지의 항복으로 결국 주류성 함락 2개월만에 임존성 또한 무너졌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백제가 없어지고 남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문무왕은 공격을 명했는데, 662년에 평양성을 공격하다 역관광을 당하고 오도가도 못하던 당나라 장수 소열에게 군량을 수송해주기도 했으며[8], 668년에도 남쪽에서 수만의 군세를 북진시켜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평양성을 포위해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문무왕의 대 고구려 전쟁은 백제 때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는데, 668년의 북진은 비록 신라에서도 대군을 투입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는 고구려가 연남생 등의 배신으로 사실상 망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막타만 치러 보낸 것에 가깝다. 이미 백제 멸망 직후 시점부터는 언젠가는 당나라와도 대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665년에는 백제의 옛 왕자 부여융과 문무왕을 같은 자리에 모아놓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화해하도록 맹세하는 '취리산 회맹'을 강요하는데 이는 당나라가 부여융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통제하고 있는 옛 백제 지역으로 신라가 침투하지 말 것과, 여차하면 신라도 이미 붕괴한 백제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과 같았다. 이 취리산 회맹 사건으로서 당나라가 신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 노골화되었는데, 다만 아직 신라는 당나라와 당장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전쟁을 대비해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공략하면 신라의 전력도 소모되고 고구려인들의 원한을 지나치게 살 것이므로 그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당전쟁이 시작된 뒤 신라는 고연무, 안승 등 고구려계의 협력으로 좀 더 수월하게 당나라를 몰아낼 수 있었다. 고구려인들 역시 진짜 적은 당나라고 스스로는 당군을 격퇴할 수 없어서 부흥운동 과정에서 신라의 협조를 환영하고, 신라의 울타리가 될 것을 자처했다.

5. 나당전쟁과 삼국 통일 완수

사실, 당은 처음부터 신라에 영토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까지 멸망시켜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것이다. 신라도 당나라의 야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백제 부흥군과 왜국,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들이 아직 건재했기에 두 나라의 충돌은 상당히 미뤄진 것이다.

사비성을 점령하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은 백제 전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했다.

백제 유민들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가 5도독부를 설치하며 무자비한 통치를 실시하자 이에 반발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백제부흥운동의 1차적인 타겟은 신라가 아닌 당나라였다. 이점을 알고 잘 알고 있는 신라는 백제부흥운동 토벌에 동참하라는 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출병했지만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통해 진압한 영토를 신라 본토에 귀속시켰다.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이들 영토를 귀속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신라는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통해 직접 귀속한 영토에 살고 있던 구 백제 주민들에게 유화책을 펼침으로서 백제계 주민들의 민심을 포섭해 나갔다. 당나라는 백제부흥운동 토벌과 고구려 정벌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일단 신라가 옛 백제 땅을 직접 영토로 귀속하는 것을 묵인했다. 결국 663년 당나라는 5도독부 중 웅진도독부를 제외한 나머지 4개 도독부를 폐지하고 만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자 당은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663년 당은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를 통보하고[9]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했다[10] 계림 도독부는 당연하지만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서 끝나버렸다.[11]

백제부흥운동 토벌이 진행되던 660년대 초반 문무왕은 이미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구진천 등에게 명하여 군사 훈련과 무기 개발에 집중했다. 이 때 문무왕은 전국에 174개의 목장을 관청, 그리고 김유신 등 주요 귀족 소유로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기병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0~680년대 신라의 급진적 기병 증설은 669년 목장 재분배와 이를 받은 진골 귀족들의 참여를 상정해 볼 수 있다. [12]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13]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한편으로는 문무왕은 기존 고구려계 주민들에 대한 포섭에도 나섰다. 마침 고구려계 입장에서도 신라는 그래도 당나라보다는 덜 원수진 사이였고 당나라를 몰아낸다는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에 검모잠안승은 신라에 먼저 접근해 왔다. 문무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신라에 형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군량미 등 전쟁물자를 지원하고 군사지원군,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합동작전도 이루어졌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14]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15]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16]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670년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했으며, 나당 전쟁의 시작인 요동 선제 공격도 신라 장수 설오유와 고구려 유민 장수 고연무가 힘을 합쳤다.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 없는 당에 대항하기 위해 옛 백제인들과 고구려인들을 이때부터 '일통삼한'의 기치로 끌어모으기 시작한 듯하다.[17] 비록 고구려부흥운동은 석문 전투, 호로하 전투 등 나당전쟁 전반부의 몇 차례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문무왕은 귀순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18]에 정착시켰다.

670년 문무왕은 요동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자세한 내용은 나당전쟁을 참조할 것.

6. 전쟁이 끝난 치세 말년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나라가 요동 이서로 철군했으나, 언제 다시 당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677년 사록관을 설치해 전쟁 공신들의 논공 행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11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보덕국[19] 사신을 같이 데리고 가서 보덕국이 신라의 속국임을 명확히 했다. 678년 선박 운용 전담 부서인 선부를 설치하고 지금의 원주시에 북원 소경을 설치해 신라의 소경은 557년 설치한 국원 소경(충주시)와 더불어 2곳이 되었다. 678년에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보내 옛 백제 지역의 직할 통치를 본격화했다.

679년은 문무왕 치세 말기에서 눈에 띄는 해인데,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라고 쓰인 기와가 경주 전역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의봉 4년은 679년인데, 개토는 '모두 다 (신라의) 땅'이라는 의미로[20] 즉 당시 신라 조정은 실질적으로 당과의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 679년을 삼한일통의 원년으로 간주했다는 것이고 이는 학계에서 어느 정도 다뤄지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679년에는 탐라국을 경략하기도 했고,[21]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기 시작했다. 월지(안압지) 부근에 동궁을 건설했으며 이 해에 왕경 남쪽의 남산성을 증축하는 대대적 토목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위 말년인 681년에는 도성 주위를 빙 둘러싼 성벽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건 의상 대사의 간언[22]을 듣고 그만두었다. 문무왕 입장에서는 중국의 도성을 본따서 서라벌을 규격화된 수도로 리모델링하려는 의도였던 듯. 아니면 나당 전쟁까지 내내 마음 졸이며 살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든지. 하지만 전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23] 대대적 토목 공사를 벌인 것은 훗날의 광해군이나 흥선대원군의 사례처럼 분명 백성에게 무리가 가는 조치였기에 명군으로 인식하는 문무왕의 실책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충언을 듣고 그만뒀다는 점에서는 더 낫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남산 무장사(鍪藏寺) 자리에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이후 쓸모없어진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고 한다.

7. 내정

내치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앞서 썼던 김진주, 진흠 형제와 그 일족 몰살을 비롯해 668년 한성 도독 박도유 숙청[24], 670년에는 한성주 총관 수세가, 673년 아찬 대토 처형 등 당과 내통한 귀족들은 모조리 주살하는 등 강력하게 내부결속을 다졌다. 이렇게 진골 귀족에 대해서는 견제와 탄압을 강행했던 반면 하급 관료나 지방 호족, 백성들에 대해서는 우대 정책을 펼쳐 육성, 보호했다. 행정으로는 9주 5소경의 근간을 마련했으며 통일신라의 군사 체제 또한 문무왕의 재위 때 정비되었다. 나당 전쟁을 마지막으로 수백년간 계속되었던 삼국시대의 전란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바꾸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업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불교 신자임에도 절간에 대한 토지 지급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줄이는 정책을 하며 고려 현종보다 종교 문제에 대해 성공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불교에 대한 개혁 정책을 가장 처음 실시했다. 비록 미완이었지만 유교적 시각에서도 꽤 높은 평을 받은 군주였다.

673년에 처음으로 주(행정구역)군(행정구역)에 각각 2명씩, 총 133명(9주 18명 + 115개 군)의 외사정, 즉 감찰관을 파견했다. 당시는 나당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였는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방관을 통제한 것이다.

또한 역대 신라의 군주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였던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고 능력과 공적 위주의 논공행상이나 인사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말갈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맹장 소나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벼슬인 잡찬(신라 17관등 중 3위)에 추증한 점이나, 군공을 세워 김유신의 추천을 받은 장군 열기를 사찬 벼슬에 올려준 사례가 있다. 열기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가문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는데다가 김유신의 추천을 받았을 때도 문무왕은 처음에 "사찬은 너무 지나친 상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던 기록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골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5]

8. 죽음과 호국대룡 전설

문무왕은 나당 전쟁으로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이후 5년 뒤인 681년 음력 7월 1일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김유신과 사망일이 같다.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마지막을 보면 문무왕의 유조 전문이 실려있는데, 이를 보면 문무왕은 자신의 치적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일통도 완수하고 민생도 안정시켜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았고[26] 물론 재위 말년에는 토목질도 했었지만. 당시 초강대국 당에 맞서 나라를 지켜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중략)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조조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27]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돼,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서국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문무왕 21년에 수록된 문무왕 유조 중에서

라는 유언을 남겼고 서기 681년에 승하하자 역대 신라 왕들이 대규모 고분에 묻혔던 것과 달리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었다. 화장을 했다는 기록은 신라 당대 기록인 문무왕릉비에서도 확인할수 있다.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典葬以積薪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鴻名與天長兮地久(···)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28]
문무왕릉비
문무왕의 유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고 평소에 말했으며 이에 따라 화장하라는 유언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낭산 기슭 능지에서 화장한 뒤 동해 바다에 능을 조성했는데 오늘날의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으로 전해져 온다.[29]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의 업보인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기이 제2, 문무왕 법민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유사에는 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유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30] 사실 위 삼국유사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 용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니 불교윤회관으로는 그리 추천할 것까지는 못 되는 일로 승려가 만류하기도 했지만 문무왕의 의지가 꽤 확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어서까지 용이 되어 동해로 칩입하는 왜구들을 막겠다고 하였다 하니,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하는 문무왕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아들 신문왕 시대에는 문무왕을 따라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세웠다.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한 《삼국유사》의 유언을 토대로 왜가 신라에 군사적으로 위협적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통일신라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태도가 보인다. 사실 문무왕 치세 당대는 일본의 침입보다는 당의 재침이 훨씬 더 우려되는 상황이었고, 일본과는 사신을 이전보다 자주 주고받는 등 백강 전투 이후로는 사이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31] 다만 신라의 삼한일통 이후에도 몇 번이고 일본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하였고 실시하였다(성덕왕경덕왕 때). 모두 무산되거나 격퇴되었지만. 이후 일본의 침공도 이러한 문무왕의 영향으로 이길 수 있었다. 즉 미연의 싹을 자르기 위해 일본을 견제한 것이다. 반면 당은 워낙 대륙에 제도나 인구만 봐도 상대가 쉽지 않았고, 그리고 설인귀 같은 걸출한 무장들이 즐비해 상대가 쉽지 않았다. 문무왕 덕분인지 신라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 몇백 년간 한국사에서 드물게[32] 왜구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33]

전설에 따르면 동해에 원래 섬이 많았는데 용이 된 문무왕이 왜구가 터를 잡고 사니까 한반도의 맥이 자리잡은 울릉도 빼고 다 뽀개버렸다고도 한다. 실제로 울릉도 주변에 해산[34]이 꽤나 자리잡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있었던 지진 등의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군주 56명 중 유일하게 두 권 분량을 차지한 위엄 있는 왕이다. 《삼국사기》의 권6, 권7이 모두 문무왕 본기이다.[35] 어쨌든 여러 이야기거리를 남긴 것도 그렇고 호국대룡 전설이나 신문왕 때 만파식적을 주는 것도 그렇고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 이상으로 신라인들에게 굉장히 특별한 의미로 기억된 군주였던 모양이다.
文武大王之理國也 早應天成家邦(마멸자)晏 恩開大造功莫能宣
문무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일찍이 하늘의 부름에 의해 천하를 편안히 하시고, 은혜를 여시어 크게 이루어졌으니 그 공을 능히 선양하기 어렵다.
애장왕 때 건립된 고선사 서당화상탑비 중에서

9. 삼국사기 기록

9.1. 삼국사기 6권

《삼국사기》 문무왕 상
一年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夏六月 숙위 인문과 유돈 등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다
一年秋七月十七日 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一年秋八月 대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를 타이르다
一年秋九月十九日 대왕이 총관과 대감의 서약을 받다
一年秋九月二十五日 군사들이 옹산성을 포위하다
一年秋九月二十七日 옹산성을 쳐서 항복을 받다
一年秋九月 옹산성 함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一年秋九月 웅현성을 쌓다
一年秋九月 상주 총관 품일이 우술성을 함락하다
一年秋九月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에게 관직과 토지 등을 내려주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사신이 와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황제가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고 명령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 사신이 왕을 책봉을 하다
二年春一月 문훈을 중시로 삼다
二年春一月 양식을 싣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다
二年春一月十八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풍수촌에서 묵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산양에 이르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성천 등이 이현에서 적의 군사를 물리치다
二年春二月一日 아홉 장군이 당의 군영에 사람을 보내다
二年春二月六日 아홉 장군이 당 군사에게 군량미를 전하다
二年春二月 아홉 장군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물리치다
二年春二月 왕이 유신과 인문에게 재물과 토지, 노비를 내리다
二年春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春二月 탐라국이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다
二年秋七月 김인문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秋八月 흠순 등이 백제의 남은 적을 물리치다
二年秋八月 진주와 진흠 등을 죽이다
二年秋八月 여동이 벼락에 맞아 죽다
二年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남산신성에 장창을 짓다
三年春一月 부산성을 쌓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열성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함락하다
三年夏四月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36]로 삼고 왕에게 대도독의 관작을 내리다
三年夏五月 영묘사의 문에 벼락이 치다
三年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과 함께 부흥을 꾀하다
三年冬十月二十一日 지수신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四日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四年春一月 김유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다
四年春一月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다
四年春一月 부인들에게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다
四年春二月 여러 왕의 능원에 백성을 이주시키다
四年春二月 김인문, 유인원, 부여륭 등이 웅진에서 맹약을 하다
四年春三月 반란을 일으킨 백제의 무리를 물리치다
四年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성천과 구일 등에게 당 음악을 배우게 하다
四年秋七月 인문 등에게 고구려 돌사성의 공격을 명령하다
四年秋八月十四日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다
四年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다
五年春二月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다
五年春二月 이찬 문왕이 죽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루다
五年秋八月 왕이 유인원, 부여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를 맺다
五年秋八月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다
五年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로 옮기다
五年 비단 한 필의 기준이 바뀌다
六年春二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六年夏四月 나마 한림과 삼광이 당에 들어가 숙위하다
六年夏四月 왕이 당에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의 이적과 학처준이 연정토의 항복을 받다
七年秋七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七年秋七月 당 황제가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다
七年秋七月 대나마 즙항세를 보내어 당에 조공하다
七年秋七月 당 고종이 신라 군사가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다
七年秋八月 왕이 장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七年秋九月 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
七年冬十月二日 영공이 대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七年冬十一月十一日 왕이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리다
七年冬十二月 중시 문훈이 죽다
七年冬十二月 왕이 대장군의 정절을 받다
八年 아마가 와서 항복하다
八年春三月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다
八年 파진찬 용문을 비열홀주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꼬리별이 천선을 지키다
八年夏六月十二日 유인궤와 김삼광이 당항진에 도착하다
八年夏六月二十一日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六月二十二日 고구려의 군, 성이 귀순하고 인문 등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七日 왕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九日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하다
八年秋七月十六日 당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다
八年秋九月二十一日 고구려 왕이 항복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二日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五日 국원 사신 용장의 잔치 대접을 받다
八年冬十一月五日 고구려 포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八年冬十一月六日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을 찾다
八年冬十一月十八日 전쟁에서 죽은 자를 포상하다
八年冬十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九年春一月 신혜 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다
九年春一月 승려 법안이 자석을 구하다
九年春二月二十一日 신하에게 교서를 내리다
九年夏五月 천정군 등 세 군의 백성을 진휼하다
九年夏五月 당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하다
九年 사찬 구진천이 당에 들어가 쇠뇌를 만들다
九年 여러 신하에게 목장을 나누어 주다
十年春一月 당에 억류되었던 양도가 죽다
十年春三月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十年夏四月四日 설오유고연무말갈 군사를 크게 무찌르다
十年夏六月 모잠안승을 임금으로 받들어 귀순하자 이들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다
十年夏六月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은 여자에게 벼를 주다
十年秋七月 백제의 남은 무리를 여러 곳에서 물리치다
十年秋七月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고 책문을 전하다
十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冬十二月 중시 지경이 물러나다
十年冬十二月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다
十年冬十二月 수세와 진주가 백제의 남은 무리를 진압하다

9.2. 삼국사기 7권

《삼국사기》 문무왕 하
十一年春一月 이찬 예원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一月 백제에 쳐들어갔다가 당주 부과가 죽다
十一年春一月 말갈 군사의 목을 베다
十一年春一月 당 군사의 침공에 대비하여 옹포를 지키게 하다
十一年春一月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가다
十一年夏四月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一年夏六月 장군 죽지 등이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다
十一年夏六月 당 군사와 석성에서 싸우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당 총관 설인귀가 왕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다
十一年秋九月 당 장군 고간 등이 대방을 쳐들어오다
十一年冬十月六日 당 조운선을 치다
十二年春一月 백제의 고성성을 공격하여 이기다
十二年春二月 백제의 가림성을 이기지 못하다
十二年秋七月 당 장수 고간과 이근행이 평양에 군영을 설치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와 싸우다
十二年秋八月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살별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나다
十二年秋九月 왕이 당에 용서를 구하다
十二年 사람들이 굶주리다
十三年春一月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떨어지다
十三年春一月 강수를 사찬으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서형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夏六月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다
十三年秋七月一日 김유신이 죽다
十三年秋七月一日 반란을 일으키려던 아찬 대토를 죽이다
十三年秋八月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秋八月 사열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秋九月 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다
十三年秋九月 서해를 지키게 하다
十三年秋九月 당과 말갈·거란의 군사를 아홉번 싸워 물리치다
十三年 당과 거란·말갈 군사가 고구려의 여러 성을 공격하다
十三年 주군에 외사정을 두다
十三年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다시 두다
十四年春一月 대나마 덕복에 의해 새 역법을 사용하다
十四年春一月 당이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다
十四年春二月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十四年秋七月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다
十四年秋八月 왕이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四年秋九月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다
十四年秋九月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다
十四年秋九月 영묘사 앞 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육진 병법을 보다
十五年春一月 각 관청 및 주군에 구리 인장을 만들어 내려주다
十五年春二月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다
十五年秋九月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기다
十五年秋九月二十九日 이근행이 매초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十五年秋九月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十五年秋九月 안북하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소나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거란·말갈 군사가 칠중성을 포위하자 유동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열여덟 번 싸워 전과를 올리다
十六年春二月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
十五年秋七月 살별이 북하와 적수 사이에서 나타나다
十五年秋七月 당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자 거시지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七月 양궁을 짓다
十五年冬十一月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나당전쟁 종전)
十五年冬十一月 재상 진순이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안석과 지팡이를 주다
十七年春三月 왕이 강무전 남문에서 활쏘기를 보다
十七年春三月 좌사록관을 설치하다
十七年春三月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치다
十八年春一月 선부에 령 1인을 두다
十八年春一月 좌이방부와 우이방부에 경을 각각 1인씩을 더 두다
十八年春一月 북원소경을 설치하다
十八年春三月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삼다
十八年夏四月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다
十八年夏五月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치다
十九年春一月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다스리다
十九年春二月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치다
十九年夏四月 형혹이 우림을 지키다
十九年夏六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고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十九年秋八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八月 각간 천존이 죽다
十九年秋八月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十九年秋八月 사천왕사가 완성되다
十九年秋八月 남산성을 늘려 쌓다
二十年春二月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年春三月 보덕왕 안승에게 예물을 주고 왕의 여동생의 딸과 혼인시키다
二十年夏五月 보덕왕 안승이 왕의 생질과의 결혼을 감사하다
二十年夏五月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다
二十一年春一月一日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둡다
二十一年春一月 사찬 무선이 정예군사를 데리고 비열홀을 지키다
二十一年春一月 우사록관을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二十一年夏六月 천구가 서남쪽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六月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다
一年秋七月一日 문무왕이 죽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보장왕과 더불어 유이하게 책 2권 분량의 기록을 갖고 있다. 위에 보면 알겠지만, 기록의 양이 매우 많다. 신라의 왕들, 아니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시대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기록의 양이 TOP. 그 양이 많아 한참 후대인 고려 시대의 웬만한 왕들을 능가할 정도. 한국 고대사의 왕들 기록이 문무왕 정도만큼만 남았어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안타깝게도 백제개루왕처럼 39년 재위 기간 동안 기록이 고작 7줄 남아있거나, 수많은 고조선, 삼한, 부여, 가야의 왕들처럼 이름조차 제대로 안 전해지는 게 더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 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백제는 의외로 시조인 온조왕이다. [37]

10. 오늘날의 문무왕

  • 사극에서는 아버지 무열왕이나 외삼촌인 김유신에 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삼국 통일기의 전쟁에서 문무왕의 활약은 아버지나 외삼촌 못지 않은데, 태자 시절 백제 공격 때는 김유신과 함께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고 고구려 멸망이나 나당 전쟁 승전은 문무왕 치세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삼국 통일기를 다룬 사극들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무열왕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세대 뒤의 문무왕은 그저 이들이 주도한 통일 사업을 마무리하는 군주 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 제갈량 사망까지만 상세하게 나오고 그 뒤는 아예 생략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도 비슷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업적이나 중요도에 비해 사극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한 역사 인물이다. 삼국지도 그렇듯 후반부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제대로 다루기엔 전반부터 달려온 작가의 필력과 근성 문제나 사극의 경우 전쟁씬 연출의 체력적ᆞ비용적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다만 대중적으로는 아버지나 외삼촌에 비해 이미지가 더 좋은 편. 삼국통일이나 거대 제국 당으로부터 삼한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죽기 전 유언의 무게감이나 대왕암 전설의 신비한 이미지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국 통일한 왕'이 누구냐고 물으면 무열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거.
  • 대조영에서는 고구려 부흥 운동에 나선 대조영 일행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이는 문무왕이 대당 전쟁을 위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한 것에서 따온 묘사이다.[38] 배우는 문회원. 헌데 문회원씨가 문무왕으로 출연한 시기는 의자왕 역을 맡았던 연개소문이 종영하고 얼마 후라는 점이다. 그 의자왕이 죽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오빠가 바로 문무왕이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하고 의자왕의 큰아들 부여융이 항복하며 목숨을 살려달라 청하자 당시 신라의 태자였던 문무왕이 누이 동생 고타소를 죽인 의자왕에 대한 원한 때문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네 아버지인 백제의 왕(의자왕)은 지난날 대야성의 내 누이를 죽여 내 마음을 아프게 한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원수의 아들인 너는 내게 목숨을 구걸하는구나!' 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심장해지는 중복 캐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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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속작 평양성에서는 배우가 황정민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는 김유신 못지 않은 능구렁이. 전작의 좀 어리숙한 태자에서 벗어나 제법 정치 경험을 쌓은 모습이 엿보인다. 첫 장면에서 당 고종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백제 땅을 달라고 깐죽대며 은근슬쩍 실속을 챙기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나라 장군 이적이 뭐라고 하자 "니는 주디 닥치라! 지금 왕들 얘기해싸는데 어디 쳐늙은 게!"라고 일갈하는 등 할땐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유신과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로 사사껀껀 자기 일에 트집잡는 김유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삼촌이자 평생 신라에 충성해온 그를 내심 존중해주고 있다. 다만 하도 오랫동안 시달려서인지 이젠 김유신이 땡깡(...) 피우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박해서 데꿀멍 시키기도 한다(...).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이적 행위를 했단 이유로 김유신과 신라군이 몰릴 때 대군을 이끌고 평양에 입성해 이적에게 "(웃으면서) 지랄하네. 우린 15만인데, 당나라 느그들은 얼마나 남았노? 엉? 고마 확 씨, 한 판 붙어볼까?" 대동강 이남은 신라 땅이라고 주장하며, 나당 전쟁의 떡밥을 뿌린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신라의 영웅으로 등장. 어째 공격 모션이 허세 모션이라 공속이 느리다. 그런데 특수기로 메테오 유성술을 사용하여 적을 학살하거나 적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복불복이라 그렇지.

10.1. 드라마 대왕의 꿈

대왕의 꿈에서는 주인공 김춘추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역사적 행적으로 볼 때 극이 전개될수록 극의 중심 인물이 될 것이다. 아역 배우는 김진성, 성인 배역은 이종수로 결정되었다. 재미있게도 이종수는 SBS 연개소문에서 청년 시절의 김유신 역을 맡았다.

아역 분량에서도 한성깔 하는 아이로 그려진다. 글 공부보다는 무예를 좋아하는 듯하며 언젠가 삼한을 호령하는 장수가 되어 무례한 당의 사신의 볼기를 칠 것이라고 김춘추에게 말했다. 실제 나당 전쟁의 총 지휘관이었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복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타소의 복수를 했을 때의 사실을 반영한 건지 어째 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이 붙은 듯하다. 동생(김인문)을 임신한 문희와 함께 덕만 공주의 처소를 방문했을 때 덕만이 사내 동생이 좋냐, 누이 동생이 좋냐고 묻자 '전 고타소 누이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동생이 뒷날 삼국 통일 전쟁에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39]

극중에서 시노의 딸(사실은 승만 왕후의 딸)인 연화에게 반했는데 승만 왕후의 아들(사실은 바꿔치기한 유랑민 출신의 아이)인 원자 만화가 연화를 괴롭히자 성질을 못 이기고 달려들어 원자를 때려눕힌다. 물론 문희에게 뺨까지 맞으며 승만에게 데꿀멍.[40] 문희에게 엄한 가르침을 받고 성장.

장성해서는 김유신의 아들이자 외사촌인 김삼광, 그리고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는 화랑인 천광[41]과 함께 백제 국경에 가서 백제 병사들을 도발하는 행동을 하는 게 첫 등장. 불 같은 성격도 여전해서 차분한 성품의 동생 김인문과 티격태격한다. 어릴 때 만났고 장성해서 기녀로서 비담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연화와는 플래그가 서 있었으나 비담의 난이 진압된 후 연화는 자결.

비담의 난 전에는 철 없는 김춘추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의 지도 아래 성장해 가는 성장형 캐릭터이다. 특히 비담의 난 이후에는 다혈질인 성격은 여전하지만 어느 정도 통찰력도 있고 지도력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춘추와 동생 김인문의 친당 정책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어 태자가 된 후에는 아버지보다는 외숙인 김유신과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을 알고는 아버지와 화해했고 아버지가 죽은 후 왕이 되어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삼한을 통일한다.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문무왕 재위기는 단 4회 분량이었다는 것. 또한 나당 전쟁 와중에 당으로부터 신라 왕으로 임명된 동생 김인문과는 끝내 돌아서게 된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는 등장 인물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말을 달리며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는데 그 해변이 바로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대왕암 해변가이다. 그 장면에서 바다 위의 대왕암을 볼 수 있다.

10.2. 한국사기

KBS 한국사기에서는 김법민이 당에게 시를 전하고 당이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로 삼으려 하자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안승보덕국 왕으로 삼는다. 2017년 8월 4일 통일신라 문무왕 편이 방송되었다. 마지막 나레이션에서는 문무왕이 고구려인과 백제인에게 벼슬을 주었고 융합 정책으로 하나로 뭉치게 하고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고 하였는데 지금 시대에는 진정 하나인가 시청자들에게 의미심장하게 질문하며 방송은 끝이 났다.

참고 문서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삼국통일전쟁


[1] 무열왕 표준영정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2]삼국유사》 원문에는 '문호왕(文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이 쓰여진 시대가 고려 시대였고, 고려 제2대 왕인 혜종의 휘 무(武)를 피휘했기 때문. 비슷한 사례로 고려 시대에 문무 양방 중 무반을 호반(虎班)이라고 불렀다. 한자 '武'를 흔히 '호반 무'라고 읽는 것도 여기서 유래. 결국 '무반 무'인 셈이다.[3]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생년이나 수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생년은 문무대왕비에 기록된 '왕이 죽었을 때 56세'라는 내용으로 역산한 것. 《삼국유사》에서 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의 만남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에서 이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선덕여왕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다. 문희와의 에피소드가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해석하는 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생겼다. 게다가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이 629년 생인데 그 역시 진평왕 때 태어났다. 그로 볼 때 위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4] 그래서인지 문무왕도 가야 멸망 후 제대로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수로왕의 제사와 능역 관리에 신경을 썼다.[5] 용모가 웅장했다거나, 백성을 사랑했다거나, 앞 일을 미리 예측할 줄 알았다거나 등.[6] 다만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무열왕과 문무왕의 개인적 복수심을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스토리 전개의 주요 동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물론 그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수는 있어도 김춘추의 경우는 대야성이 함락된 가장 큰 책임이 김품석에게 있었으므로 이는 장인인 김춘추에게도 상당한 정치적 책임이 돌아갈 일이었다. 비담알천 같이 김춘추 계파와 경쟁하는 귀족세력이 신라 정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춘추가 큰 충격을 받은 건 자식을 잃은 것도 있지만 본인의 큰 정치적 위기이기도 했다.[7] 석탈해의 석씨 가문의 본궁으로 추정한다.[8] 이걸 근거로 김유신을 까는 자들은 김유신을 쌀 배달꾼이라고 비하하기도 하는데, 군학에서 보급은 직접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9] 물론 백제 영토와 달리 신라 영토는 당나라가 직접 지배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계림 도독부는 이름 뿐인 상징적 기관이었다.[10] 게다가 이미 멸망한 나라인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화맹을 맺게 한것을 보면 당이 신라를 나라가 아니라 자기네 행정 구역으로 취급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11] 물론 당이 이를 정식으로 인정한 건 후의 일이다.[12] 서영교,『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역사와 현실[13] 현재 인천의 소야도[14] 주몽을 의미[15]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별칭.[16] 한군현의 현도군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역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의미.[17] 신라의 9서당 중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고구려, 말갈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무려 6개다.[18] 현재의 익산. 즉, 옛 백제 땅 이다. 그것도 백제 무왕미륵사와 왕궁을 세웠을 정도로 사비, 웅진 다음가는 백제의 중심 지역. 즉 고구려인을 이용해 백제인을 견제한 것이다.[19] 당시에는 보덕국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라고 했다.[20] 광개토(廣開土)와도 뜻이 통한다.[21] 사실 탐라국은 476년 백제의 속국 → 662년 군주였던 좌평 도동음률이 신라에 항복한 상태였다. 679년의 탐라 경략 기록은 전쟁으로 신라가 바쁘다가 전쟁이 끝난 이 때 실질적으로 복속했다는 기록이거나, 그 사이에 탐라가 마음을 바꿔 자립을 시도해서 이 때 다시 공략했다고 보기도 한다.[22] "비록 들판의 띠로 엮은 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그것이 곧 복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아무리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쌓아도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23] 특히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대군과 전쟁을 치르느라 당시 신라는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24] 박도유가 백제 부흥군과 공모했기에 처형했다 하는데, 668년의 백제 부흥군이란 웅진 도독부, 즉 부여융 등 당나라 휘하의 세력을 말한다.[25] 사실 열기의 사례는 문무왕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유신이 "관직은 공평한 그릇이니 공을 세운 자에게 보수로 주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뒷날 열기는 김유신 사후 김유신의 아들 삼광에게 청해서 삼년산군 태수 자리를 받아내기도 한다.[26] 삼국시대 수백 년간 전쟁은 사람들에게 일상이었으나 문무왕 시대에 그것이 끝나, 단발적 반란이 아닌 전면 전쟁은 200여년간 사라지게 되었다. 백성 입장에서는 안정된 삶이 제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업적은 작지 않다.[27] 한마디로 손권과 조조처럼 화려한 업적을 쌓고 불꽃 같은 삶을 산 인물들도, 결국 죽고나면 이름만이 남아 전해진다는 소리.[28] 이후 글자 훼손이 심해 알아볼수가 없다.[29] 다만 대왕암에 문무대왕릉이라고 써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일 뿐이라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감은사이견대의 위치를 보아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울산 앞바다에 있는 고래바위가 문무대왕릉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치상 가능성이 희박하다.[30] 이런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후대(고려시대)의 문헌 기록인 삼국유사 뿐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이 직접 남긴 울주 천전리 각석에도 남아있는데, 각석의 우측 하단에 보면 신문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감은사의 3층 석탑을 연상시키는 3층 석탑과 그것을 감싼 용, 그리고 석탑에 문왕랑(文王郞, 문무왕의 동생 김문왕)이라고 써 있는 것이 그것이다.[31]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한동안 소원하게 지내다가 7세기 후반부터 다시 관계를 열기 시작했고, 이 즈음부터 다시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점점 데면데면해진다.[32] 문무왕 이전의 신라는 물론 이후의 고려, 조선까지 한국사 전반적으로 왜구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33] 외려 문무왕 죽고 몇백 년이 지나 신라 후기에 일본은 신라구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려, 큐슈는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할 정도였다. 가히 고려 말 왜구가 장소와 국적만 바뀌어 과거에 나타났던 꼴이다. 다른점이 있다면 신라구는 그냥 털어먹는 것만 목적이었고 왜구들은 고을을 점령하기까지 했다는 거지만.[34] 이 해산 중 물 밖으로 끄트머리가 빠져나온 것이 독도다. 그 외에도 물 속에서 올라오다 끝나는 봉우리는 여러 개가 있다.[35] 참고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는 보장왕 본기가 두 권(권21, 22)이고 백제는 의자왕 본기가 한 권(권28)이다.[36] 해당 문서를 들어가면 알수있듯이 사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37] 이것은 다른 백제왕들의 기록이 얼마나 처참한 수준으로 남아있는지 알 수 있는 반례이기도 하다.[38] 다만 문무왕이 지원한 고구려 부흥군은 고구려 남부,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부흥군이었고, 대조영 세력이 이들과 같이 활동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39]화랑세기》의 설정이 일부 반영된 극중에서는 이복 남매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과 고타소는 둘 다 문희의 소생으로 엄연한 동복 남매다. 이랬건 저랬건 남매 사이가 좋았던 건 틀림없는 듯. 가족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40] 사실 승만에게 데꿀멍한 것보다는 문희에게 뺨을 맞은 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승만도 문희의 행동에 다소 놀랄 정도였으니.[41] 실존 인물로 고구려 원정과 나당 전쟁 때 장수로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