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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2:46

설오유

薛烏儒

1. 개요2. 생애
2.1. 요동 공격군의 편성과 성격
3. 같이보기

1. 개요

신라 중대 문무왕 시대의 장수.

성씨나 관등을 보았을 때 진골이 아닌 6두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 만약 그렇다면 676년 기벌포 전투시득과 함께 나당전쟁 당시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대병력을 인솔한 유이한 사례 중 하나.

2. 생애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백제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영향권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보였고, 신라는 고구려 부흥 세력 고연무(高延武)와 연계해서 67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가 점령한 요동 선제 공격을 시도해 7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3월에 사찬(沙湌)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3자불명)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서라벌에서 오골성(요녕성 봉황성)까지는 약 1850리(740 km), 서울에서 오골성까지는 약 1천 리(400 km)이다. 당시의 1일 행군 속도는 30리(12 km) ~ 60리(2 4km)이다.[2]. 장거리에다 대규모 행군이었으므로 1일 평균 30여리로 행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부대가 경주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62일, 한강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33여 일이 소요된다. 물론 이는 당시의 행군로[3]나 보급 여건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수치로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길어졌을 것이다. 즉, 최소 한두 달 가량 시간이 필요하므로, 3월에 압록강을 건너는 부대는 670년 1월쯤에는 주둔지를 출발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대 편성과 계획은 669년 말기에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은 신라 조정에서 설오유 부대 등을 의도적으로 혹한기에 이동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도적으로 설오유 부대를 강행군 시켰다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1월에 출발했고, 3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4월에 교전을 치렀다면 작전 수행 기간만 석 달 이상이 된다. 혹한기에 장거리 행군을 하고, 교전에서 승리를 했으며, 물러났을 시기에도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전략상 후퇴를 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설오유 부대는 사기가 높았으며, 분명 부대의 목적이 뚜렷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 등은 2만이라는 적은 부대가 황해도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까지 침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압록강을 현재의 대동강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노태돈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실제로 압록강이라고 명확히 기록된 것을 신라 주제에 요동까지 어떻게 감? 이라는 식으로 착오라고 볼 근거는 없다.

669년, 고구려 유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작업에 평양 주둔 당군의 상당수가 동원된듯 하다. 이에 대해 669년 9월, 토번이 강성해져서 한반도 주둔 당군이 토번 전역으로 철수 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건은 토번이 당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토번토욕혼을 압박한 사례였고, 토번이 본격적으로 당을 압박한 것은 670년 4월이므로, 안동도호부신성으로 옮긴 것과 병력 철수 등은 고구려 유민과 관련이 깊다고 노태돈은 주장하였다. 평양 주둔 당군이 고구려 유민 강제 이주에 동원됨에 따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과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당군과 충돌 할 수 있었던것은, 당시 평양 일대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공백 상태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되는 개돈양은 위치를 알기가 어렵고, 비정되고 있는 지역도 없다. 다만 오골성 주변이므로 압록강 이북 지역임은 틀림 없을 것이다. 다만 皆敦壤이 아니라, 모두(皆) 돈양(敦壤)에 이르러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만약 개돈양을 돈성, 즉 신성이라고 한다면,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는 669년 신성으로 이동한 안동 도호부를 목표로 이동한 것이 된다.


(이상훈, 나당 전쟁 연구)

그런데 이들이 압록강 유역으로 진군했다면, 평양 부근에 있는 안동도호부 세력을 지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비록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하나 빈 터는 물론 아니다. 이 때 설오유 등이 취할 수 있는 진군로는 크게 3가지다.

오골성평양성을 연결하는 구간은 안동도호부의 주요 간선 도로로서, 고려 시대에는 '복계 서로'라고 불렀으며 거란군의 공격 루트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교통로가 통일 신라의 교통로를 계승하면서 발전했으므로, 설오유와 고연무의 연합군은 북계 동로를 이용, 평양을 조금 우회하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면서 빠르게 북상해 나갔으리라 추정한다.

2.1. 요동 공격군의 편성과 성격

설오유 부대는 정병 1만여 명으로, 고연무 부대의 1만여 병사와 연합으로 요동 작전에 나섰다. 설오유와 고연무의 부대를 정예부대라는 의미의 '정병(精兵)'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군사적 경험이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4월 4일 말갈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공성전이라기보다는, '맞서 싸워' 라는 표현을 보았을때 야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군이 계속 이르자 물러나서 백성을 지켰고, 이는 수성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설오유 부대는 야전과 수성전을 모두 수행했고, 이들은 기병·보병 혼성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휘관 설오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 통일 전쟁기에 접어들어, 신라의 인물 중에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물은 왕, 왕족, 진골 및 유력 귀족 외에는 없다. 그런데 유독 설오유만 사찬의 직위로 1만 명에 이끄는 독립 원정군을 이끌고 있었다.
나당전쟁 시기 신라 관인의 활동 중에,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직접 병력을 지휘한 예는 오직 두 가지 사례 뿐이다. 하나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시득 뿐이다. 기벌포 해전을 지휘한 사찬 시득은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렇다면 사찬의 신분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지휘한 사례는 오직 설오유 밖에 없다.

또한 당시 신라군의 병력 동원 능력에서 1만여 명은 주력까지는 아니라도, 결코 적은 병사도 아니다. 660~670년대 신라의 병력 동원력에 대해 여러 기록과 주장이 있지만 어림잡아 10만 명 정도라 쳐도 나라 전체 군사력의 10분의 1을 적진 깊숙한 위험한 작전에 투입한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원정군을 이끈 지휘관이 진골이 아니라는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테면, 660년 7월 백제공략 시, 장군 대다수는 진골 귀족이었다.

설오유 부대는 또한 진골 귀족의 책임자도 없었다. 672년의 석문 전투 등의 사례에서도 나타나지만, 나당 전쟁 시기 독립 작전을 수행하는 원정군이나 방어군에는 기본적으로 진골 귀족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실무 담당자로 사찬급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설오유가 대규모 원정군의 총 책임자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이는 설오유 부대의 성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오유 부대가 정병이라는 표현이 있고, 실제로 이들은 작전 지속 기간이 3개월 이상으로 비교적 길었으며, 30일 이상의 원거리 행군과 도하 작전을 실시했고, 혹한기에 부대 이동을 강행했다. 또한 행군간 및 전투 후 이탈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또한 적극적으로 당군과 교전했다. 사서에서는 설오유 부대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기라면 고구려의 유력민은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지만, 668년의 기록을 보면,11월 5일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여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는 말이 나오고, 671년의 설인귀서에서는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 또한 가지게 되었다는 표현을 본다면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주장한 이정빈 등은, 신라는 이들을 억류 관리하기보다는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고, 670년 3월의 설오유 부대와 고연무 부대의 요동 진출에는 고구려 포로들의 역할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것이다. 다만 신라군 설오유의 1만과 고구려부흥군 고연무의 1만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설오유의 부대까지 고구려 잔병 출신이라 보기엔 맥락상 부자연스럽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대전쟁 중이었고 작전 내용도 일찍이 신라가 겪지 못한 환경의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을 초월해 전문가인 설오유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예로 흔히 진골과 장군 참모 장교는 엄연히 다르긴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경우 전쟁 대학을 나온 장군 참모 장교가 아니면 장군 진급이 불가능하지만 전쟁 특유의 혼란과 능력 중시로 인해 비 장군 참모 장교들이 장군으로 진급을 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또다른 견해로 설오유의 부대는 사서에는 드러나지 않는 제 3의 세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대동강 이북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고구려 부흥군의 세력이 이에 연관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진골이 아닌 설오유의 신분인 사찬임에도 군대를 통솔한 점, 현실성이 희박한 한겨울 경주에서 압록강까지의 행군, 느닷없는 선제공격에 거기에 신라군이 아닌 고연무 부대와의 합류는 기존 해석에 여러 의문점을 던진다.[4]

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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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신라 역사에서 설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설오유가 신라 계통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등의 추측은 다소 무리가 있다. 이미 신라 출신 용병인 설계두가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군에 고용되어 싸웠고, 원효설총 역시 설씨이다.[2] 이상훈, 나당 전쟁 연구.[3] 신라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서영일,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 문화사, 1999년 참조.[4] 신라군 지휘부가 양면전쟁 위험이 나타나는 만주지역을 단순히 백제지역 공격시 시간을 벌기위해 공격했다는 해석에는 모순된 부분이 존재한다. 공격이 실패할 수도 있으며 보급선이 한강 이북으로 부터 한참 멀어져 있기에, 만약 실패시 후퇴를 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