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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14:04:47

고연무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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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주요인물 결과
670~673 한성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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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고구려 > 보덕국
관등 태대형(太大兄)
직위 대장군(大將軍)
성씨 고(高)
이름 연무(延武)
생몰연도 ? ~ ?

1. 개요2. 생애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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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출신의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고 자세한 출신은 불명. 666년 신라에 항복했던 연정토 휘하의 인물로 보는 설, 검모잠 휘하설, 고구려 멸망 직후 독립적 세력을 이끌다가 신라와 뜻이 맞아 협력한 경우로 보는 설이 있다. 행적으로 보아 지위가 높고 고구려의 국성인 고씨 성이나 고덕무, 고건무 등과 비슷한 돌림자를 쓰는 것을 미루어보아 왕위에 가까운 고위 왕족일 가능성도 높다.

2. 생애

668년 평양성 함락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에 해외 영토 관리 기구인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고구려를 통치하고 나아가 남은 신라까지 정복하려 시도했다. 이에 고구려부흥운동의 한 갈래를 이끌던 고연무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신라군과 협력한다. 670년 3월 1만명의 부흥군을 이끌고 신라의 설오유 장군이 이끄는 1만 신라군과 합류해 압록강 건너 요동의 개돈양(皆敦壤)을 기습 선제 공격하는데 나당전쟁의 첫 전투다. 고연무와 설오유는 현지 백성을 지키며 당나라의 반격을 몇 달간 방어하다가 물러났다.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이므로 이 전투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부흥군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 안승검모잠을 죽이고 신라 땅으로 들어가버리자 문무왕은 옛 백제의 부수도였던 금마저(金馬渚,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살도록 하고 보덕국을 세웠다. 보덕국은 고구려 흡수 명분이 필요하고 백제 부수도 금마저를 제압할 세력이 필요했던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만든 괴뢰국인데 해체되어 신라의 한 주로 편입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은 옛 고구려의 관직 체계를 그대로 쓰는 등 어느 정도 자치가 이루어졌다. 고연무는 나당전쟁이 끝난 뒤 보덕국에서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이라는 안승에 이은 2인자격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680년에는 경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이 안승에게 조카 딸을 왕비로 맞게 한 데 대한 답례 교서를 전했다.

그 뒤로는 기록이 없는데 신문왕숙청 작업의 일환으로 683년 보덕국이 사실상 해체된 뒤 684년 안승의 조카 대문을 중심으로 보덕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고연무가 680년~684년 사이에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면 반란 가담 정도에 따라 처형되거나 처벌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3.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