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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9:31:15

고연무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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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연대 부흥운동 주요인물 결과
670~673 한성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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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고구려 > 보덕국
관등 태대형(太大兄)
직위 대장군(大將軍)
성씨 고(高)
이름 연무(延武)
생몰연도 ? ~ ?

1. 개요2. 생애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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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고 자세한 출신은 불명. 666년 신라에 항복했던 연정토 휘하의 인물로 보는 설, 검모잠 휘하설, 검모잠처럼 관리 출신으로 고구려 멸망 직후 독립적 세력을 이끌다가 신라와 뜻이 맞아 협력한 경우로 보는 설이 있다. 일단은 행적으로 보아 지위가 높고 고구려의 국성인 고씨 성이나 고덕무, 고건무 등과 비슷하게 권위 있어 보이는 한자식 이름을 쓴 것에 미루어보아 왕위에 가까운 고위 왕족, 혹은 사성 고씨의 고위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668년 평양성 함락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에 해외 영토 관리 기구인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고구려를 통치하고 나아가 남은 신라까지 정복하려 시도했다. 이에 고구려부흥운동의 한 갈래를 이끌던 고연무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신라군과 협력한다. 670년 3월 1만 명의 부흥군을 이끌고 신라의 설오유 장군이 이끄는 1만의 신라군과 합류해 압록강 건너 요동의 개돈양(皆敦壤)을 기습 선제 공격하는데 나당전쟁의 첫 전투다.[1] 고연무와 설오유는 현지 백성을 지키며 당나라의 반격을 몇 달간 방어하다가 물러났다.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이므로 이 전투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부흥군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 안승검모잠을 죽이고 신라 땅으로 들어가버리자 문무왕은 옛 백제의 부수도였던 금마저(金馬渚,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살도록 하고 속국인 보덕국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보덕국은 고구려 흡수 명분이 필요하고 백제의 부수도 금마저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만든 괴뢰국인데, 해체되어 신라에 편입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은 옛 고구려의 관직 체계를 그대로 쓰는 등 어느 정도 자치가 이루어졌다. 고연무는 나당전쟁이 끝난 뒤 보덕국에서 관직으로는 대장군(大將軍) 및 관등으로는 태대형(太大兄)이라는 안승에 이은 2인자의 지위를 역임했다. 680년에는 금성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이 조카를 보덕왕비로 맞게 해준 데 대한 답례교서를 전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기록이 아예 없다. 문무왕의 후임인 신문왕숙청 및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683년 보덕국이 사실상 해체된 뒤 684년 안승의 조카 대문을 중심으로 보덕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고연무가 680~684년 사이에 자연사한 것이 아니면서 만약 반란에 가담했다면 반란 가담 정도에 따라 처형되었거나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당시 이름이 남을 만한 지위에 있었음에도 안승과 더불어 별다른 기록이 아예 없는 걸 보면 반란에 가담했다고 확증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도 원로 대우를 받던 사람이니 너무 고령이라 그냥 그 사이에 자연사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반란의 주축은 자치령 축소 및 폐쇄 정책으로 인해 미래를 놓치게 된 소장파쯤 되는 혈기 넘치는 지위에 있던 사람들로 보이는 만큼, 신라 정부에 협조적이라 그동안 대우를 잘 받아온 보수적인 원로층이 적극적으로 가담했을 개연성도 비교적 떨어진다.[2] 결과적으로 반란에 실패한 뒤 보덕인들은 여기저기 사민되었고, 특히 고위층은 남원소경에 주로 사민되었으므로, 고연무가 당시에 이미 사망해 없었더라도 그 일가는 남원소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3]

3. 같이보기


[1] 해석에 따라 지명이 개돈양이 아니라 돈양(敦壤)이라는 설이 있다. 여기에서는 말갈병들이 '모두' 돈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대목이 서술되면서 개돈양이란 단어가 나왔다고 본다.[2] 당장 이 사람들은 적극적인 항전을 주장하면서 패서지역에 꿋꿋이 남았던 검모잠파와 달리 우선 살아남기 위해 남하를 택했던 소극적인 성향이었다. 어쩌면 반란 당시 소장파에 의해 사전에 제압되었거나 이를 피해 도주를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3] 실제로 남원소경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고룡군은 금마저와 마찬가지로 백제인들의 저항이 매우 거셌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고자 보덕국이 건국된 과정과 마찬가지로 친신라 고구려 유민들을 이치시키면서 685년에 남원소경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