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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0:39:52

고국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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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9대 국왕
고국천왕 | 故國川王
파일: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jpg
고국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전창 36호를 그린 도면.
<colbgcolor=#00000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176년 3월 이전[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197년 5월 (향년 21세 이상)
고구려 국내성
능묘 고국천원(故國川原)[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176년 3월 ~ 179년 12월 (3년 10개월)
고구려 제9대 국왕
179년 12월 ~ 197년 5월 (17년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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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be673> 본관 횡성 고씨
남무(男武) / 이이모(伊夷模)
부왕 신대왕
형제자매 고발기[3], 고발기, 고연우, 고계수
왕후 왕후 우씨
신장 207cm[4][5]
시호 고국천왕(故國川王)
국양왕(國壤王) }}}}}}}}}
과인이 외람되이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아 신하와 백성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아직 백성을 다스림에 구제하지 못하였소. 선생은 능력을 숨기고 지혜를 감춘 채 궁벽하게도 재야에 있은 지 오래 되었소.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번연히 찾아오니, 이는 나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 바라오.
191년 4월, 고국천왕이 을파소에게 남긴 말. #
1. 개요2. 왕위 다툼3. 고국천왕의 실존문제4. 업적
4.1. 국방4.2. 인재 등용 및 진대법4.3. 부자 세습제 확립4.4.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5. 왕후 우씨6. 《삼국사기》 기록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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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9대 군주.

휘는 남무(男武). 태조대왕, 차대왕과의 관계가 미스테리한 신대왕의 장남이다. 장수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 18년간 재위했다. '천왕'으로 끝나서 오해할 수 있는데, 천왕(天王)이 아니라 고국천원(故國川原) 근교에 묻어서 고국川왕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판단력이 좋고 용모가 씩씩하며 힘이 아주 세서 큰 솥도 들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 솥을 드는 사람을 장사로 여겼다. 체격도 커서 키가 무려 9척이었다고 한다. 한나라 기준을 따라 1척을 23cm로 가정하면 신장이 207cm 가량이었던 셈이다.[6] 9척 운운하는 부분은 왕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넣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당시의 고구려 남성보다 훨씬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시호가 비슷한 고국원왕과는 대조되며 고국양왕과는 비슷하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2. 왕위 다툼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의 형 발기(拔奇)가 재능이 불초하다는 이유로 발기 대신 동생인 이이모(伊夷謨)[8]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발기는 이이모를 원망하여 연노부(소노부)의 장과 함께 각각 30,000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 공손강에게 항복했다가 나중에 비류수 유역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생기게 된다. 공손강이 요동을 확보한 것은 산상왕 시기인 204년의 일로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국천왕 치세라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잘리고 고생하던 시기로 요동태수가 되기 이전이다. 공손도의 요동태수 임명 시기는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삼국지》에서는 189년, 《후한서》에서는 184년이다. 이중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고국천왕의 즉위 이후 시점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고발기를 도운 인물이 공손강이 맞다면 이는 이 시기 요동 지역에 존재하였던 동명이인이자 병력만 30,000명이 넘는 유력자인 공손강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시기 동연의 공손강의 경우, 아버지 공손도가 기주자사에서 면직되어 영향력을 잃자 요동군 양평현령 공손소가 공손강을 강제로 끌고 가서 하급 관리로 부려먹는 중이었는데, 이후 간신 동탁이 집권하고 공손도가 복권되어 요동태수가 되자 공손강이 공손소를 체포해 저잣거리에서 때려죽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공손강이 고생하던 시기의 요동태수로 유력한 인물은 장거장순의 반란시에 죽은 양종이다. 동명이인설을 주장해도 당시 요동에 딱히 동연(공손씨 군벌)이 있었던 흔적이 없는데 평범한 어느 공손강이 과연 30,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원해줄 수 있었는지도 문제이다.

《삼국사기》의 고국천왕 즉위년 왕위 계승 분쟁 기사는 《삼국사기》 내의 다른 기록과도 충돌한다. 176년(신대왕 12년) 정월, 신하들이 고남무의 태자 책봉을 건의하는 기사와 3월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신대왕 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사실 민중왕모본왕이라는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모본왕이 어렸기 때문에 추대된 특수 사례다. 따라서 《삼국사기》 고국천왕 즉위년 기사는 오류라고 할 수 있고, 고국천왕의 형 고발기는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發歧)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국천왕의 형 발기와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발기가 동일 인물이라면,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비해 세부 요소에서 동일 인물일 경우 일어날 수 없는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의 기사를 후대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윤색된 기사로 보면 아귀가 맞는다.[9]

사실 기록이 이렇게 꼬여버린 데에는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고국천왕을 누락시켰고, 이 착오를 《통전[10]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 한 몫 한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김부식이 《통전》의 기록을 보고 이이모는 백고를 이었기에 고국천왕, 위궁은 백고를 이은 이이모를 이었기에 산상왕일 것이라 여겨 원래는 《삼국지》와 《통전》에서는 산상왕에 대응되던 이이모(伊夷模)를 고국천왕, 동천왕에 대응되던 위궁(位宮)을 산상왕에 각각 대응시킨 후, 이이모와 관련된 기사를 고국천왕 즉위년조로 가져와 인용했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고국천왕의 실존문제

그런데 《삼국지》의 기록대로 신대왕 백고의 뒤를 이은 이이모가 산상왕이고, 위궁이 동천왕이라면, 고국천왕의 존재가 누락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쓰다 소키치 같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한 바 있다.

쓰다 소키치의 고국천왕 부존설은 노태돈에 의해서 반박당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고국천왕이 존재하지 않은 군주가 아니었다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 중국의 역사서에 적힌 우리나라 왕조의 왕계는 누락이나 착오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서긍(徐兢, 1091~1153)의 《고려도경》 〈세차〉 왕씨조(王氏條)에 적힌 고려 왕실의 왕계를 《고려사》와 비교해봤을 때, 그 왕계에 착오[11]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 또한 그랬을 것이란 이야기다.

대표적인 예시로 그는 고구려 신대왕의 재위기간을 들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신대왕이 순제(順帝, 재위 125~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168) 연간에 요동군을 자주 침공했다고 하고, 요동에 자리잡은 공손탁을 도와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한서》에서는 신대왕 백고의 즉위기사에 뒤이어 순제 양가(陽嘉, 132~135) 원년에 현도군 둔전(屯田) 6부(六部)를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따르면, 신대왕은 늦어도 125년 혹은 132년 이전에 즉위했으며, 공손탁의 요동태수 취임 시기인 189년 이후에 승하한 것이 된다.

그리고 고발기가 망명한 시기의 태수는 공손강이었는데, 공손강은 204년에 요동태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신대왕은 204년 이후에나 승하한 것이 되어 재위 기간이 70년을 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면서 《후한서》 〈교현전〉을 인용해 그 기록에서 암시된 신대왕의 즉위년이 《삼국사기》의 즉위년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환제 말에 선비(鮮卑), 남흉노(南匈奴) 및 고구려 사자(嗣子) 백고가 반하여 침구하자, 사부(四府)[12]에서 교현을 천거하여, 탁요장군(度遼將軍)[13]으로 임명하고 황월(黃鉞)[14]을 주었다. 현이 진(鎭, 진영)에 이르러 병사를 휴양한 뒤,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호로(胡虜)와 백고 등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재직 3년에 변경이 안정되었다. 영제 초에 하남윤(河南尹)[15]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소부(少府)[16], 대홍로(大鴻臚)[17]로 전임되었다. 건녕(建寧) 3년(170)에 사공(司空)[18]이 되었다가 사도(司徒)[19]로 전임되었다.
《후한서》 권51 〈교현전〉 中. 《고구려사 연구》에서 재인용.
영제 원년은 168년이다. 교현은 그 이전 3년간 탁요장군의 작위에 있었으므로, 아무리 빨라도 165년 이후에 탁요장군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嗣子)'는 '대를 이을 아들'이란 뜻이다. 이 표현은 신대왕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거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신대왕 즉위년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인용문에서 탁요장군으로 3년간 재직했다는 부분까지의 기록은 채옹이 쓴 교현을 기리는 글 〈황월명(黃鉞銘)〉에도 나온다고 한다.

노태돈은 고구려인들이 기년을 조작하려면 훨씬 접근성이 좋은 〈동이열전〉이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의 기사를 취했으면 취했지, 굳이 〈교현전〉이나 채옹의 〈황월명〉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고구려 신대왕의 즉위년을 〈교현전〉을 참고하여 조작했다면 차대왕과 신대왕을 부자관계로 기록한 《후한서》의 기록과 달리 그들을 형제 관계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며,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국 측 사서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독자적인 전승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지》의 기록이 착오가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중국 측의 고국천왕 누락을 고국천왕이 실존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고구려의 집안(集安) 천도가 산상왕 때 이루어졌음[20]을 근거로, 환인(桓仁)에서 죽은 고국천왕의 왕호가 어떻게 ‘고’국천왕이 될 수 있냐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이는 산상왕이 천도할 때 고국천왕의 시신을 환도성으로 운구해갔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학설이란 것이다. 노태돈은 먼저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한 대목에 있는
其死葬有槨無棺, 停喪百日.
그 장례에 곽은 있으나 관은 없고, 100일이 되는 날에 상을 끝낸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이 구절을 《삼국지》 〈동이전〉 왜조의
始死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飮酒. 已葬, 擧家詣水中澡浴, 以如練沐.
처음 사람이 죽으면 상을 10여 일을 치르며,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가 곡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무, 음주를 한다. 장례를 마치면 온 식구가 물속으로 들어가 목욕하니 이는 중국의 연목과 같다.
라는 대목과 비교하여 고구려인들이 행했다는 '停喪百日'을 장례를 끝내는 기간으로 해석했다.

뒤이어 노태돈은 고구려의 왕실은 민간과는 달리 왕릉을 축조하는 기간이 있어 곧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며,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후임자인 새 임금의 주도하에 치러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산상왕이 왕위 계승 분쟁 당시 고국천왕의 시신을 확보했을 것이고, 집안으로 천도할 때 고국천왕의 시신을 새 도읍지로 운구하여 그곳에서 장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렇게 검토를 마친 노태돈은, 마지막으로 《삼국지》의 단속적인 접촉을 통해 파악된 왕계보다는 고구려 내부에서 스스로 정리해 《삼국사기》에까지 전해진 왕계가 더 사실성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4. 업적

4.1. 국방

파일:고국천왕.jpg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의 이대선 회장이 그린 고국천왕.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이겨낸 것을 넘어 큰 업적을 몇 가지 남겼다. 우선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한족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후한요동 태수가 침략해오자 동생[21] 고계수(신대왕의 4번째 아들)[22]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막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친정해 좌원 전투에서 무찔렀다. 왕후 쪽의 외척 연나부의 좌가려어비류가 자신들의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재하려 했는데 반란을 일으켜 버리자 이를 진압하고 그들을 제거했다.

4.2. 인재 등용 및 진대법

요즈음 들어 사사로운 친분 관계로 관직이 주어지고 덕이나 능력으로 관직에 나설 수 없으니,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 너희 4부는 각기 현명하고 어질면서도 지위가 낮은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라.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며
190년 9월, 어비류좌가려왕후 우씨의 친척들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자제들까지 남의 자녀와 가택을 노략질해 가는 등 횡포를 부리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고국천왕이 화를 내며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는 어비류 및 연나부의 일부 세력들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듬해인 191년 4월,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끝내 국내성을 공격하고야 말았다. 고국천왕은 왕성 주변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간신히 평정한 뒤, 제대로 된 관직 등용의 필요성을 체감하여 4부의 귀족들에게 위와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귀족들은 동부의 안류라는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그는 본인이 미천하고 용렬하여 큰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며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던 을파소라는 자를 천거하였다. 을파소는 왕의 총애를 받아 곧바로 중외대부를 거쳐 국상이라는 최고 관직에까지 임명되었다. 이에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신진 관료인 을파소를 미워하자, 고국천왕은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를 멸족시키겠다는 교서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후 을파소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며 상과 벌을 신중하게 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의 안팎이 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94년 10월에는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갔다가 만난 어떤 백성이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옷과 식량을 준 후 진대법을 실시하여 하호(下戶)[23]들을 구제했다. 진대법은 구휼책으로 매년 음력 3월부터 7월까지는 국고에 있는 곡식을 가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이 있게 빌려주고, 음력 10월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였다. 현대로 따지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은행 또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과 비슷하다.

진대법은 복지의 성격이 더욱 강하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짙게 반영된 정책이었다.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굶어죽는 걸 피하려고 직접 자청해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아 귀족의 힘이 강해졌는데, 정부가 빌려주면 굳이 귀족 밑에 안 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 걸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도 서술하듯 이 때는 국가 공민(公民)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입장에서는 국가 통제 아래 역을 지고 조세를 납부할 공민이 필요했다. 부족 연맹체에서 하호나 호민으로서 귀족 아래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귀족의 세력은 커진다.

진대법을 실시하여 굶주린 백성이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복지 이전에 국왕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다. 흔히 진대법이 을파소의 건의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의 진대법 관련 기록에는 진대법은 고국천왕이 백성의 하소연을 듣고 왕이 직접 실시한 이라고 나와 있다. 을파소가 국상의 지위에 있었으니 진대법의 실시에 어느 정도 관여하기는 했겠지만 기록에는 해당 사실이 나와 있지 않으므로 그저 추측의 영역에 그칠 뿐이다.

4.3. 부자 세습제 확립

고국천왕의 치세에 왕위의 부자간 상속제가 확립되었다. 교과 과정에서는 고국천왕 대에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변경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형제 상속제라는 제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불투명해 논란이 있다. 고국천왕 이전의 왕들 중에 왕제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이것을 약한 왕권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으로 봐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고국천왕 이전에도 부자 상속제가 기본이었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었으므로 형제 상속제가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정작 고국천왕은 왕후 우씨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신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이 뒤를 이었다. 즉 형제 상속이 이어진 것이다. 고국천왕 때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면서 정작 그가 죽고 바로 형제 상속이 된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부자 상속은 동천왕 때에 와서야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국천왕 때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는 주장은 잘못됐으며 산상왕-동천왕 시기에 부자 상속이 확립됐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4.4. 부족 5부 체제의 5방위 개편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 등 부명이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등의 방위명으로 전환되는 등 중앙 집권화를 위해 정치 체제가 더욱 정교해젔다. 이런 5방위 체제는 역사가 깊은데 부여, 백제, 발해에도 5부가 있었다. 5부를 방위명으로 개편했다는 직접적 기록이 있는 건 아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2년조에서 왕후 우씨의 출신지를 연나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 고국천왕 13년 4월조에 4부에 국상으로 추천받은 안류의 출신지가 동부(東部)로 기록되어 있는 점, 이후 〈고구려본기〉에서 인물의 출신을 설명할 때 기존 명칭이 아닌 방위명 부로 기록하고 있는 점을 토대로 고구려의 기존 5부가 방위명 부로 개편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5. 왕후 우씨

왕후 우씨와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산상왕 승하 후 동천왕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우씨도 세상을 떠났다. 우씨는 죽기 직전에 '차마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으므로 산상왕 곁에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동천왕은 그 유언을 따랐다. 얼마 후 무당이 찾아와 동천왕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꿈에서 고국천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결국 함께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 《삼국사기》 동천왕 8년 가을 9월

동천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고국천왕의 무덤 주변에 일곱 겹의 소나무를 심어 왕의 능을 꼭꼭 가리게 했다고 한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우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봐도 꽤 재밌는 드라마 소재가 될 법한 이야기다.

6.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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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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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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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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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국천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고국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우씨를 왕후로 삼다
二年秋九月 시조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春三月 붉은 기운이 태미를 통과하다
四年秋七月 혜성이 태미에 나타나다
六年 왕이 후한 요동 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八年夏四月 화성이 심성을 지키다
八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二年秋九月 좌가려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十三年夏四月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다
十三年冬十月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다
十六年秋七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冬十月 진대법을 실시하다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九年夏五月 고국천왕이 붕어하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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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산성하 전창 36호 | 칠성산 8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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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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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권 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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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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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6년 3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국천왕은 176년 3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산성하 전창 36호 추정[3] 기록상 모순이 보여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 삼국사기에서 왕의 신장이 9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연의 기준 관우와 키가 같다.[6] 고대사 기록에서 1척은 전한의 기준인 23cm 또는 후한의 기준인 23.7cm를 뜻하는 것이다. 현재의 1척은 일본에서 30.3cm를 기준으로 하는 1피트를 1척으로 번역한 것.[7] 체격이 8척이 넘어가는 다른 군주는 백제의 제25대 무령왕신라의 제26대 진평왕이 있다.[8] 《삼국사기》 원문에 '이이모(伊夷謨)'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伯固薨, 國人以長子拔竒不肖, 共立伊夷謨爲王.) 《삼국지》나 《통전》에는 '伊夷模'라고 적혀 있다.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옮긴《삼국사기》에 이름의 한자가 다르게 적힌 이유는 불명.[9]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조의 왕위 계승 분쟁에 대한 기사에 윤색이 가해졌다는 건 학계에서도 지적되는 사항이다. 권순홍의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한국고대사학회, 2015)를 참조하라.[10] 고국천왕 즉위년조의 왕위 계승 분쟁 기사가 《삼국지》보다는 《통전》의 기사와 유사하여 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삼국지》가 아니라 《통전》에서 인용한 기사라고 추정한다.[11] 대표적인 예시로 고려 제2대 군주인 혜종 왕무(王武)의 동생인 광종 왕소(王昭)를 왕무의 아들로 잘못 기록하고, 제3대 군주인 정종 왕요(王堯)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을 들 수 있다.[12] 중국 후한 때의 네 관아로, 태부(太溥), 대위(大尉), 사도(司徒), 사공(司空)을 이른다.[13] 전한의 관직으로,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14] 금으로 장식한 도끼. 천자(天子)가 정벌을 할 때 쓰는 상징적 도구이다.[15] 후한 때 도읍이 있었던 하남군(河南郡, 지금의 낙양 부근)을 관리하던 직책.[16] 고대 중국의 관직. 진나라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산·바다·연못 등의 세금과 천자의 경비(經費)·궁중 잡무를 관리하였다.[17] 올바른 표기는 대홍려로, 한무제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에 설치된 고대 중국의 관직이다. 진(秦)나라 때 귀순한 이민족의 관리를 맡은 직책인 전객(典客)을 기원으로 한다. 제후와 귀순한 주변 이민족을 관리하였다. 《고구려사 연구》에는 '대홍로'로 오기되어 있는데, 인용문의 표기는 원문 그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여기서는 인용문 원문 그대로 '대홍로'로 표기한다.[18] 고대 중국의 관직. 감옥에 갇힌 죄수의 관리 및 치수(治水), 각종 토목공사를 맡았다.[19] 고대 중국의 관직. 전토(田土)의 관리·재화·교육 등을 맡았다.[20] 현재 통설은 고구려 국내성이 집안 지역이라는 것이지만,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집안 지역 산상왕 천도설이 제기된 바 있었다. 이 학설은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의 천도 기록을 부정하려는 의도로 제기된 학설이라 사장되었다가, 노태돈이 1999년에 공저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문화》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28)조의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는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의 발언을 인용하여 위나암성의 묘사가 집안의 산성자산성보다는 환인의 오녀산성과 비슷함을 지적하고,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성이 집안이 아니라 환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재조명되어 다시 유력한 학설로 부상하고 있다. 노태돈의 집안 지역 산상왕 천도설에서는 일제강점기 학자들의 학설과는 달리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의 천도 기록을 긍정한다.[21] 《삼국사기》 원문에는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王遣王子罽須拒之 不克)[22] 《삼국사기》에 신대왕의 첫째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형으로 기록된 발기(拔奇)는 사실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년조에 등장하는 고국천왕의 동생이자 산상왕과 계수의 형인 발기(發歧)와 동일 인물인데, 김부식이 《통전》의 기록을 옮겨와 건안 연간(196~219)에 있었던 이이모의 왕위 계승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고국천왕 즉위년조에다 인용해 두 명의 발기가 따로 존재했던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23] 평민이나 서민의 고구려식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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