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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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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3대 태왕
안원왕 | 安原王
파일:호남리 사신총.jpg
안원왕릉으로 추정되는 호남리 사신총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연대 미상[1]
고구려
사망
(음력)
545년 3월[2][3]
고구려
능묘 안원(安原)? / 안강상(安岡上)?[4][5]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23대 태왕
531년 5월 ~ 545년 3월 (13년 10개월)[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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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보연(寶延) / 연(延)[8] / 보영(寶迎)[9]
부모 부왕 문자명왕
모후 미상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10]
왕후 정부인[11], 중부인[12], 소부인[13]
자녀 2남
태자 고평성
왕자 1명
종교 불교
신장 173cm[14]
시호 안원왕(安原王)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15]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연호 연가(延嘉)(?)[16], 건흥(建興)(?)[17]
작위 지절 독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18] }}}}}}}}}
安原王 諱寶延 安藏王之弟也.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안장왕(安藏王)의 아우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안원왕-에 나오는 첫 문구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제23대 태왕.

2. 생애

문자명왕차남으로 후사가 없었던 형 안장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다.[19]일본서기》에 의하면 형인 안장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가속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안원왕이 형 안장왕을 시해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기록의 부재로 근거는 빈약하다.[20] 체격이 매우 장대하여 키가 7척 5촌[21][22]이나 되었다고 하며 도량도 넓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안원왕의 재위기간에는 큰 사건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다. 오히려 중국에서 북위6진의 대란과 이주씨의 난으로 분열하고 화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고구려는 국경을 맞댄 동위와 화친했다. 한편 535년부터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데 535년 5월에 홍수, 10월에 지진, 12월에 우레가 쳤고, 전염병이 돌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으며, 8월에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쳤고, 537년 3월에는 기근까지 이어졌다. 이에 안원왕 본인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수습해 해결하기도 했다.[23]

동위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남량과도 교류를 유지하며 남북조 양면 외교 기조를 유지했다. 백제와는 투닥거렸는데, 540년 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해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24] 여기까지만 보면 기근에 시달렸지만 명군까지는 몰라도 안장왕이 회복시킨 고구려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유지한 제법 나쁘지 않은 군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행적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소수림왕고국양왕 때 강성하여 광개토대왕 때부터 전성기를 구가해 온 고구려가 안원왕의 재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5] 나제동맹에게 연달아 박살나며 망신을 제대로 당한 것은 아들 양원왕 때지만 전조는 안원왕 때부터 배경으로 짙게 깔려있었던 것. 무엇보다 후계 계승 문제가 아주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3일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26]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강상왕)[27][28]가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권38 〈긴메이 덴노〉 6년(545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려에서 정월 병오에 쿠노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3명의 오리쿠쿠(夫人, 부인)[29]가 있었다. 마카리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오리쿠쿠가 마카리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다. 그쪽의 외척이 추군(麁群)이었다. 시소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30]도 아들을 낳았다. 그쪽의 외척은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41 〈긴메이 덴노〉 7년(54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안원왕의 제1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두 소왕후를 들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아들을 1명씩 낳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의 외척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이 자기네 소생의 왕자를 옹립하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0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력이 쇠퇴하는 정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수의 국사학자들은 이 내용을 신뢰하고 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 의하면 551년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고구려를 정탐하러 온 신라거칠부에게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멀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상기한 정치적 혼란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후계 문제로 인한 전쟁인 것 같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전쟁을 후계 전쟁을 빙자한 뿌리깊은 국내계 vs 평양계의 갈등이 터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수왕이 추진한 평양성 천도로 인해 전통적인 북방귀족+동부여 계열 귀족 세력으로 이루어진 국내파낙랑-대방 계열과 남하귀족의 혼합+국왕의 친위귀족 세력으로 이루어진 평양파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31] 당시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개로왕이 쓴 국서에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장이 나오며 그 외 장수왕-문자명왕 시기 《삼국사기》뿐 아니라 《일본서기》, 중국 사서 등에도 조공 기록을 제외한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는 공백기가 나타나는데 이를 근거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진 것 아니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32]

거기에 문자명왕 시기에는 할아버지 대와 달리 점점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내부 귀족들의 불만이 점점 커짐 → 안원왕이 즉위하고 후계자 문제가 거하게 터지자 이것이 트리거가 되어 갈등이 폭발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나온 세군을 국내파, 추군을 평양파로 보았을 때 이후 양원왕 대에 승리한 평양파가 정국을 주도하여 왕권이 약해졌다가 평원왕 대에 온달처럼 둘 모두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후 추군은 평원왕 대에 온달 등 친위세력의 성장으로 세력이 약해졌다가 온달의 죽음, 영양왕 대에 고구려-수 전쟁을 계기로 부활한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사실 쇠락이 본격화되는데 이전까지는 군주를 도와 내각을 통할하는 국무총리, 즉 국상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양원왕 이후로는 군주를 견제하는 국회의장, 즉 대대로/막리지가 중요해진다. 즉 왕권이 매우 약해졌다. 실제로 평원왕때부터는 국상 임기도 짧아지며, 국상 자리 자체가 공석이 되는 경우가 잦아진다. 신하들이 국상에 임명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승하한 해가 545년 3월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서는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다른 기록들과 3년의 차이가 난다. 선왕들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안원왕도 평균적으로는 장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

고구려가 안원왕의 재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지만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 및 성공적인 대외정책과 재위 말을 제외하면 왕이 국정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조정 내의 구체적인 혼란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는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33] 다만, 안원왕의 왕위계승 문제와 후계자 선정 실패는 안원왕의 실정으로 보고 있다.[34]

동국통감》의 평가는 평범한 치세를 지닌 왕으로 평가했다.
"문자(文咨)·안장(安藏)·안원(安原)은 모두 중재(中材)로서 평범한 군주였으며,(후략)"

4. 기타

“원하옵건대 왕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
-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 명문 중에서 출처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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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안원왕 본기〉
一年夏五月 안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四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春一月 왕자 평성이 태자가 되었다
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 동위가 왕을 책봉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春二月 양에 조공하다
五年夏五月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二月 큰 전염병이 돌다
六年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을 구제하다
六年秋八月 병충해가 발생하다
六年秋八月 동위에 조공하다
七年春三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七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九年夏五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다
十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온난하다
十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十二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三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四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五年春三月 안원왕이 죽다

6. 대중매체에서

채널A의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안원왕이 태자 책봉을 중부인의 아들 혹은 소부인의 아들 중 하나로 정하는데 고민을 하던 중 중부인이 아들 양원왕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소부인과 싸우면서 그게 내전으로 번지는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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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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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호남리 사신총 |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
연호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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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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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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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년도가 501년이라는 위키 백과발 주장이 존재하나(지금은 위키 백과에서도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의 선대 생년 연혁을 보면 신빙성이 없다. 선대 연혁을 계산하면 5세기 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증조할아버지인 장수왕의 연혁을 보면 아버지 문자명왕도 거의 8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형인 안장왕 역시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으며, 10년 정도 살아 사망 당시에는 70세 전후일 가능성이 크기에, 안원왕 역시 형 안장왕의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을 감안하면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는 7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한 할아버지보단 양호하다. 물론 늦둥이면 이 계산도 틀리긴 하지만 승하 당시 최소 60대 정도었을 것이다.[3]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따르면 545년 음력 12월 24일(양력 그레고리력 546년 2월 12일, 율리우스력 546년 2월 10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4] 이전 태왕들의 장지형 시호와 고국원왕의 사례처럼 原과 崗上이 무덤을 뜻하는 동의어일시[5] 호남리 사신총 추정[6]일본서기》에 의하면 14년 7개월.[7] 《양서》와 《남사》에서는 526년에 즉위하여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이걸 따르면 22년 간 재위했다.[8]양서》와 《위서》 등 중국 측 기록.[9]삼국유사기록.[10] 고흥안, 안학공주[11] 후사 없음. 고구려의 형사취수제를 생각해보면 안장왕후 한씨와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일본서기》 기록.[12] 추군 소속, 양원왕 고평성의 친모. 《일본서기》 기록.[13] 세군 소속. 《일본서기》 기록.[14] 《삼국사기》에 7척 5촌으로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중국 전한시대의 1척인 23cm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15] 훈독은 '코쿠, 코마(狛) 코쿠(鵠, 國) 카(香) 카(岡) 노(の) 쿠스시스, 아스메스(上) 오리코케(王)'와 '누타(香岡) 스(上) 오리코케(王)'가 있다.[16]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주요 불상인 국보 제119호 연가 7년명 여래입상에서 쓰인 '연가'가 바로 안원왕의 연호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17]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불상인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쓰인 '건흥'이 바로 안원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18] 持節·督營平二州諸軍事·寧東將軍. 안장왕의 봉작을 계승한 것으로 고구려왕이 생략된 표현이라고 본다.[19] 앞서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이 재위 12년만에 승하했을 당시 선대를 이용하여 보령을 계산해보면 꽤 노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웬일인지 후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 측 기록에 고복귀라고 하는 안장왕의 아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참고로 형인 안장왕과는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된다.[20]삼국사기》에는 형인 안장왕이 안원왕을 아꼈고, 사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안원왕이 안장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근거로 쓰기에는 부족하다.[21] 고구려척은 35.6cm인데 이 경우 거의 2.7m에 육박하는 거인이 된다. 아마 사람의 키를 잴 때는 고구려척이 아닌 중국 후한시대에 쓰인 척을 쓰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된다. 한나라의 척인 23cm을 쓸 경우 173cm 정도로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22] 아니면 단순하게 생각하여 당시 《삼국사기》가 이런저런 사서를 인용했으니 후한시대의 척이 쓰인 중국의 기록을 갖다가 붙였을 수도 있다.[23] 과학자들의 빙하기록 연구에 의하면 서기 536년은 역사 기록상으로 살기에 가장 끔찍한 해('the worst year to be alive')였다고 한다. 그 전해인 535년에 일어난 크라카타우 화산아이슬란드의 화산 분화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 전역이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안개가 심했고 여름 기온이 2-3도나 낮았으며(역사상 가장 기온이 낮은 10년간) 여름에 눈이 내렸다.[24] 양원왕 대의 일이지만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사전 답사였던 듯하다.[25] 《일본서기》에 따르면 형 안장왕이 시해당했다고 한다. 다만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의 당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무엇보다 안원왕 말엽부터 혼란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무조건 시해당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26]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구'(駒)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했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27]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곡림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가 있는 쿠시나가르의 숲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던 날 숲의 나무들이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여 그만 하얗게 말라버렸고, 그 모습이 마치 고니떼와 같았다는 데서 고니 '곡' 자를 써서 '곡림'이라고 부른 것이다.[28] 이를 근거로 세군은 국내성에 정치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귀족 불교 세력, 추군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29]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일 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30] '시무(シム)'로 적혀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거해 '시소'(シソ)를 '신'(シン)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시소'를 '신'의 오기로 보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간'(干)이 '칸'(カン)이 아닌 '카무'(カ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고, 세군(細群)의 군(群)이 '군'(グン)이 아닌 '쿠무'(ク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기에 '시무'(シム)에 대응되는 것은 '시소'(シソ)가 아니라 '신'(シン)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발음(撥音)으로 '시무'의 원형은 '신'으로 보인다.[31] 천도에는 백성과 사용인은 물론이고 지배층인 귀족들을 포함한 수많은 인적자원의 이동이 포괄되었던 게 일반적이었던 점, 또한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 좋았던 평양 일대에 친위귀족들도 따라가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옛 5부 출신 전체를 일괄적으로 국내파로 보는 건 무리한 감이 있다. 거기에 소수림왕대부터 이미 국왕 직속인 중부는 말할 것도 없고 5부 전체가 부족제에서 벗어나 관료기구로서 편제된 뒤였기에, 관료기구로서의 5부는 평양성으로 이치되어 존속하게 된다. 따라서 5부 전체를 북방귀족 세력에 대입하기보다는 평양성과 만주의 중간기착지로서 기능했던 국내성 일대에 여전히 남아, 그 일대의 이권을 근거로 분화되고 봉건화된 귀족집단이 북방귀족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32]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이 내용을 지지한다.[33] 고구려 安原王 대의 정국 동향과 대외정책[34] 安原王代의 政局 運營과 大對盧 爭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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