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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00:24:32

모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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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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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5대 국왕
모본왕 | 慕本王
파일:마선구 2381호.png
모본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381호를 그린 도면.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32년 12월 이전[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53년 11월 (향년 21세 이상)
고구려 국내성
능묘 모본원(慕本原)[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32년 12월 ~ 44년 10월 (11년 10개월)
고구려 제5대 국왕
48년 ~ 53년 11월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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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 해(解)?
해우(解憂) / 해애루(解愛婁) / 우(憂)[3]
부모 부왕 대무신왕
모후 원비
형제자매 호동
왕후 고익의 모후
자녀 태자 고익
시호 모본왕(慕本王) }}}}}}}}}

1. 개요2. 내정3. 폭군
3.1. 역사의 피해자?
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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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은 날이 갈수록 난폭해지고 학대하니,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땐 사람을 베고 누웠다. 사람이 혹시나 움직이면 바로 죽였다. 신하 중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쏴 죽였다."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삼국사기
고구려의 제5대 왕.

선왕인 민중왕과 마찬가지로 해씨 고구려설 떡밥에 포함된다.

일단 《삼국사기》에는 제3대 대무신왕(대주류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4]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삼국사기》가 모본왕을 대무신왕의 아들로 칭하고 있으니 이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어머니는 호동 왕자를 시기해 음모를 꾸며 죽게 만들었다고 알려진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 원비다. 다만 장남임에도 불구하고[5] 태자 책봉은 차비 해씨 소생인 호동이 자결한 뒤에 이뤄졌다.

2. 내정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모본왕 기록에는 재위 2년에 군사를 동원했다고 나오며, 그 뒤 관련된 내용은 없이 훗날의 폭정만 서술한다.

모본왕 2년에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일이 있는데 사서에 따라서 기록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한국측 사서인《삼국사기》와 중국측 사서인《후한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 후한 제국의 동북방 지역을 위협했으며, 고구려의 내부 사정으로 전쟁을 잇기 어려워지자 후한과 화친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후한과 승패를 거듭하여 피터지게 싸우는데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는 주체를 고구려가 아니라 맥인으로 적고 있다. 이때 고구려가 침공한 지역은 지금의 탕산 일대와 산시성의 타이위안 지역이었다.

차년조(此年條)의 기재(記載)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고구려조-(東夷傳 高句麗條)에 '(建武) 二十五年春, 句麗寇右北平·漁陽·上谷·太源. 而遼東太守祭彤, 以恩信招之, 皆復款塞'라 한 것을 몇 자(字) 윤색하여 옮겨놓은 것이지만, 동서(同書) <광무 본기>(光武 本紀) 동년조(同年條)에 의하면 거기에는 '(春正月), 遼東徼外貊人寇……云云'이라 했다. 이 맥인(貊人)이 과연 {전(傳)에 보임과 같이} 구려(句麗)를 가리킨 것인지, 혹은 구려(句麗) 이외의 다른 맥인(예여부여){貊人(例如夫餘)}, 다른 새외족(塞外族)의 일컬음인지 자세치 않다. 동서(同書){권 50 〈채동전〉(祭彤傳)}[8]을 보면 당시 요동(遼東) 방면의 변해(邊害)는 흉노(匈奴)·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이 가장 심했고 고구려(高句麗)에 대해서는 다만 '高句麗之屬, 遂駱驛款塞'[9]라 했을 뿐이다. 실제 이때 구려(句麗)의 세력은 능히 그렇게 중국(中國) 방면에까지 침략(侵略)의 발을 내딧었을까가 무엇보다 문제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재(記載)의 사실(事實)은 구려(句麗)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을유문화사판 이병도역 《삼국사기》 번역본 해당 기사에 달린 주석.
역사학자 이병도는 역주한 《삼국사기》 번역본의 주석에서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는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한 주체가 '맥인'(貊人)이라고 달리 나오는데, 이 맥인이 정말 고구려를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고, 《후한서》 〈채동전〉에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기사가 존재하지 않음을 들어 모본왕 2년의 기사가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가 아니라고 추측했다. 실제 '맥인'이란 단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오환이나 선비 등의 북방 유목민족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이기도 했으니 그럴만 했다.

물론 고구려의 침공을 부정하는 설만 있는 것은 아니고, 고구려의 침공을 긍정하는 설,[10] 해당 기록 중 태원(太原) 만이 오기라는 설,[11], 《후한서》<동이열전>에 침공 주체가 '구려'(句麗)라고 기록된 점을 들어 고구려의 지배 영역 바깥쪽에 있었던 원고구려인들이 침공 주체라는 설[12]도 있다. 세 가지 설 모두 오환이나 선비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동일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이 후한의 북변을 공격한 그 해에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 왕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했다.

3. 폭군

기록으로만 따지면 모본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폭군이다. 그러나 다소 논란이 있는 부분으로 이에 관해서는 다음 단락에 서술되어 있다.[13]

모본왕은 인간 베개[14]였던 두로가 왕의 막 나가는 행태를 더는 버티다 못해서 휘두른 칼에 시해되었으며, 이후에 신하들이 불초하다면서 태자를 폐하고, 종실에서 고궁이라는 어린 아이를 왕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제6대 태조대왕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두로에게 말하길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15]라고 했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두로는 이를 듣고 모본왕을 시해했다고 한다.

한때 후한 제국의 동북방 일대를 위협할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학정을 일삼다가 암살을 당한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3.1. 역사의 피해자?

다만 실제 폭군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모본왕의 뒤를 이은 태조왕은 왕위 세습을 계루부 고씨의 왕위 세습을 고정시켰고 기존의 5부족 연맹체를 국가 시스템상의 5부로 개편했는데, 이를 통해 알아봤을 때, 태조왕 이전의 왕위 세습 문제로 각 부족간의 다툼이 있었고 계루부 고씨의 왕위 세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전대인 모본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생겼을 수도 있다. 이런 사례는 꽤 흔한 사례이며, 당장 고려사 집필과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는 내용이다. 조선에서 기록한 고려 말기의 왕은 신돈의 사생아로 평가되며 원문을 볼 때 신우, 신창으로 격하하여 부른다. 또한 이성계가 왕으로 세운 공양왕은 왕씨로, 이성계가 비로소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후대 왕조의 정통성면에서 봤을 때 모본왕도 이러한 측면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질 수 있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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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모본왕 본기〉
一年 모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홍수가 나다
一年冬十月 왕자 익을 태자로 삼다
二年春 장수를 보내 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가 요동태수의 요청으로 후한과 화해하다
二年春三月 거센 폭풍이 불다
二年夏四月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다
二年秋八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四年 모본왕이 사납고 잔인해지다
六年冬十一月 두로가 모본왕을 죽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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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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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년도가 32년이라는 위키 백과발 주장이 존재하나(지금은 위키 백과에서도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가 32년 12월에 태자가 되었음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없고, 실제로는 32년 12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모본왕은 32년 12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마선구 2381호 추정[3]삼국유사》 기준.[4]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대주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계보상 계승 순위로 본다.[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에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맏아들(元子)이라는 기록이 있다.[6] 현재의 톈진 및 베이징 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넘어 요서를 공략한 기록은 제6대 태조대왕의 치세에도 나와서, 요동의 정확한 위치를 비롯해 역사학자들을 골치아프게 한다.[7] 현대 기준으로 북평하면 베이징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북경은 연경, 계, 광양군으로 불렸고, 오히려 한나라의 '우북평군'이 삼국시대인 조위 시절 '북평군'으로 개칭되는 등(《진서》 14권), 우북평=북평이었다. 베이징 일대를 북평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남경만을 수도로 인정하느라 '북경'이라는 호칭을 피한 중화민국 시기에나 들어서였다. 이 북평/우북평 지역은 현재의 탕산시(唐山市) 일대이다.[8] 실제 〈채동전〉은 《후한서》 〈열전〉 제10권에 실려있다. 〈채옹전〉과 혼동한 듯 하다.[9] 고구려의 무리들이 마침내 국경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 다른 종족 만리(滿離)와 고구려의 무리가 마침내 국경으로 나와 담비 갖옷과 좋은 말을 바치니 황제가 항상 그 배로 상을 내렸다.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해석[10] 출처: 박세이, 〈고구려 태조왕대 이전의 선비 관계〉, 《지역과 역사》vol.30, 부경역사연구소, 2012[11] 출처: 이재성, 〈고구려와 읍락연맹시기의 선비〉, 《동국사학》vol.37, 동국사학회, 2002, pp.467-468[12] 출처: 윤병모, 〈AD.2세기 이전 고구려의 요서원정〉, 《국학연구》vol.17, 한국국학진흥원, 2010[13] 여담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우리 역사 최초의 폭군은 모본왕 다다음 왕인 고구려 제7대 군주, 차대왕 고수성이다.[14] 《삼국사기》에서 "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는 언제나 사람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언제나 사람을 베고 누웠는데 그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 잘못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죽였다." 라고 했으니 두로는 모본왕이 베고 잤던 사람이다.[15] 撫我則后 虐我則讎.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편-(泰誓篇)에 있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