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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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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전경.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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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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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2대 국왕
826년 10월 ~ 836년 12월 (10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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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秀宗) / 수승(秀昇)[2] → 경휘(景徽)[3]
부모 부왕 혜충왕
모후 성목태후 김씨
형제자매 김준옹, 김언승
동생 김충공
배우자 정목왕후 김씨[4]
자녀 태자 김충공(?)[5]
왕자 김능유[6], 김의종[7]
종교 불교
시호 흥덕대왕(興德大王)[8]
골품 진골(真骨)
관등 이찬(伊飡)
직위 시중(侍中), 부군(副君)[9], 상대등(上大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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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비편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기록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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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42대 군주. 제38대 열조 원성왕태자 김인겸의 3남으로 제39대 소성왕과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며, 제40대 애장왕의 숙부였다. 신라 군주들 중에서도 생년이 명확한 몇 안 되는 군주인데 흥덕왕릉의 비석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수명을 기록한 부분은 남아 있다. 군주가 죽었을 때 세는나이로 60세(만 59세)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역산하면 흥덕왕의 생년은 777년이다.

2. 생애

804년 시중에 임명되었고, 형제인 김언승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 대의 왕권 강화 정책을 이끌었다. 이후 김제옹이 김수종의 다른 이름이나 초명으로 애장왕을 시해하고 헌덕왕을 옹립하는 공을 세웠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김수종은 형 김언승이 조카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0] 819년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며, 822년 부군이 되어서 왕위 계승의 기반을 마련했다.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보력(寶曆) 2년 병오년(826)에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홀로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왕은 사람을 시켜 앞에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가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고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
삼국유사》 <앵무조>
겨울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으니, 추봉하여 정목왕후(定穆王后)라 하였다. 왕이 왕비를 생각하며 잊지 못하고, 슬퍼하며 즐거워하는 일이 없자, 군신들이 표를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짝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는 어떠하겠는가.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바로 다시 아내를 얻겠는가.”라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또 시녀를 가까이 하지 않고, 좌우의 시자(使者)로는 오직 환관만을 두었다.
《삼국사기》 <흥덕왕 본기>
삼국유사》에는 흥덕왕 자신과 같은 처지인 앵무새에 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 쌍의 앵무새 중 암컷이 죽고 혼자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거울을 수컷 앵무새 곁에 걸어두었던 것. 그러나 앵무새는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 거울 속 앵무새가 자신인 것을 곧 알아채고 수컷도 곧 따라 죽었다. 흥덕왕은 짝을 잃은 앵무새에 대해 부인을 잃은 자신의 처지와 동질감을 느꼈던 듯하며 이를 보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지만 전해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면모를 이야기하면 흥덕왕도 애처가였으며, 왕비는 제39대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章和夫人)[11]인데 흥덕왕이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승하하여 왕을 크게 상심시켰다. 주위에서 신하들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권했지만 흥덕왕은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궁중의 여성들을 건드리는 일도 없었으며 왕의 주변에는 단지 내시들만 있었다고 한다. 훗날 흥덕왕은 죽은 후 먼저 떠나보낸 아내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되었는데 고려의 제31대 공민왕과 비슷한 면모이다.

흥덕왕 부부의 합장릉인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중 다른 설없이 능 주인이 본인들임이 확실한 몇 안 되는 왕릉 중 하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시대에는 왕가에서 근친혼이 흔했으니 조카와 혼인했다는 건 그리 특이한 게 아닌데 따져보면 장화부인은 흥덕왕이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애장왕의 누이이다. 흥덕왕이 형 헌덕왕의 정변에 가담했던 것을 상기하면 장화부인 입장에서 남편 흥덕왕은 친동생의 목숨을 앗아간 불구대천의 원수인 셈. 흥덕왕이 아내에 대해 유별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것은 처남을 죽게 놔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속죄였을 가능성도 있겠다.[12]

한편 재위기 동안 애장왕에서 헌덕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는데 왕족을 측근으로 삼아 권력의 집중과 신흥 계급의 수용을 통한 왕권 강화라는 열조 원성왕계의 전통적인 전략을 이은 것이었다. 역시 같은 이치로 아우 김충공을 상대등에 임명한 걸 시작으로 숙부인 김예영의 아들 김헌정김균정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를 위한 왕족 우대 정책은 힘 있는 왕족들끼리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원인이 되고 말았는데 흥덕왕이 장화부인과의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김충공의 아들인 김명이찬 김헌정의 아들인 김제륭이 한편을 먹고, 숙부 뻘인 김균정이 다른 한 편이 되어 피 튀기는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김균정은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했고, 김제륭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바로 제43대 희강왕이다.

흥덕왕 대에도 선왕 헌덕왕 대부터 이어진 천재지변의 연속으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나마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형 헌덕왕보다 나았던 점이라면 흥덕왕은 음식 수를 줄이고 죄수를 사면하는 등 고난을 백성과 함께 하는 좋은 모습이라도 보여주었다는 점.[13] 또한 남쪽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직접 구휼 활동에 나서는 등 민생을 보살피기라도 했다는 점이다. 828년에는 한산주 표천현[14]에서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으로 백성들을 현혹한 자가 등장해 처벌한 기록도 있어 황금만능주의사기꾼이 활개치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828년 장보고로 하여금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여 당시 복잡했던 국제 정세에 유기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여담으로 장보고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천한 신분[15] 장보고에게 병권을 주고 벼슬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흥덕왕 역시 장보고를 크게 신뢰했다. 9세기 신라는 해안가에서의 해적 출몰, 왕권 약화, 재정 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군권을 쥔 장보고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흥덕왕 본인이 장보고를 등용한 덕분에[16] 장보고가 신라의 골칫거리던 해적을 일거에 소탕하고 청해진을 설치해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재물을 얻었고 장보고는 이를 신라 왕실에 바쳐 재정이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동북아 무역의 거점으로 급부상해 몇 년간 재정이 충당되어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나중에 청해진을 철폐하는 병크를 저질러 멸망을 가속화했다.[17]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삼국사기》 <색복지>에 실린 흥덕왕의 교지.
834년 흥덕왕 치세의 사건 중 유명하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골품제에 따라 온갖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규제하겠다는 법령을 내린 것이다. 예를 들면 의복의 재료, 수레의 크기와 끄는 동물이 몇 마리까지 가능한지, 의 크기, 장화끈의 재질, 장화의 색깔, 여자들이 사용하는 장식용 빗의 재료까지도 평민은 흰색의 뼈나 뿔, 4두품은 나무 재질까지 가능, 진골에메랄드바다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만 금지 등으로 엄중히 제한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신라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골품제를 고착화시켜 버리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흥덕왕 본인으로서는 골품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면 기강도 잡히고 신라의 혼란도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신라 사회 모순의 근본적 원인이 바로 골품제에 있었던 만큼 시대를 읽는 눈은 비교적 떨어졌다. 물론 자신이 골품제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니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18]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당시 시대상을 바라보면 흥덕왕의 이런 조치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골품별 제한을 만든 834년은 장보고청해진의 전성기로 해외 무역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골품별 제한을 만들 때 내린 위 교지를 읽어보면 흥덕왕 이전까지는 중하위 골품인 하급 귀족부터 일반 백성층까지도 외래 사치품 사용이 만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흥덕왕의 의도는 본인의 음식 수를 줄이는 것처럼 과소비를 방지하려는 목적도 컸을 것이다.[19]

즉위 3년에 당나라에 갔다온 사신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전부터 차가 재배되었을 수도 있으나, 한국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20] 이전 시대에는 주로 당나라에서 차를 수입했기에 비싼 물건으로 주로 왕이 하사한다거나 하는 사치품이었는데 흥덕왕 때부터 저렴한 국산 차가 풀렸으니 차를 마시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지금도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인근에 차나무 시배지가 있으며 2012년에는 하동 시배지의 차나무를 경주시 흥덕왕릉에 심는 행사가 있기도 했다.

흥덕왕 시기에도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즉위 2년에 승려 구덕[21]이 당나라에서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즉위 5년에는 도승 150명을 궁궐로 불러들여 왕의 쾌유를 비는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어찌보면 흥덕왕 시기는 반란이 판치고 혼란이 과중되던 신라 말기 중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시기이자 어쩌면 신라가 사실상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일단 흥덕왕 본인이 정사에 매우 열정적으로 임했고 인재를 보는 눈도 꽤 뛰어났다. 우선 김우징을 시중에 임명했는데 비록 후기에 복수귀로 전락하기는 했지만[22], 김우징은 나름 재상으로서는 훌륭했다. 하지만 흥덕왕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 골칫거리였는데 끝내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해서 어찌 보면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의 직접적 원인을 촉발시켰다는 어두운 면모도 함께 갖고 있는 왕이다.물론 아들 없다고 죄인건 아니지만... 그의 사후 신라는 다시 왕권 다툼에 휘말려 혼란이 더해졌고, 이 악영향으로 자신이 신뢰했던 신하 장보고마저 문성왕 시기에 부하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신라는 다시금 50년에 걸쳐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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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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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흥덕왕 본기〉

一年冬十月 흥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왕비가 죽자 신하들이 재취를 청하나 왕이 거절하다
二年春一月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문종헌덕왕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흥덕왕을 책봉하다
二年春三月 고구려 승려 구덕이 오다
二年夏五月 서리가 내리다
二年秋八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二年秋八月 서울에 큰 가뭄이 들다
二年秋八月 시중 영공이 물러나다
三年春一月 김우징이 시중이 되다
三年春二月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三年春三月 눈이 3척이나 내리다
三年夏四月 장보고청해진을 세우다
三年夏四月 요사스러운 인물이 군중을 현혹하여 먼 귀양보내다
三年冬十二月 사신을 당에 보냈는데, 돌아오는 사신이 씨앗을 가져와 가 성행하게 되다
四年春二月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바꾸고 극진을 파견하다
五年夏四月 왕이 편찮아 기도하고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허락하다
五年冬十二月 사신을 당에 보내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春一月 우징이 시중에서 물러나 윤분이 시중이 되다
六年春二月 김능유와 승려 9명을 보내 당에 조공하다
六年秋七月 당에 파견된 사신 능유와 그 일행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지다
六年冬十一月 사신을 당에 보내다
七年 가뭄이 들어 왕이 정전을 피하고 감선하였으며 옥수를 사면하니 7월에 비가 왔다
七年秋八月 기근으로 도처에서 도적이 일어나다
七年冬十月 사자에게 명하여 백성을 안무하다
八年 큰 기근이 들다
八年夏四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八年冬十月 복숭아자두나무에 다시 꽃이 피다
八年冬十月 역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다
八年冬十一月 윤분이 시중에서 물러나다
九年春一月 우징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秋九月 왕이 열병하고 활쏘기를 관람하다
九年冬十月 왕이 남쪽 주군을 순행하여 환과고독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十年春二月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명을 시중으로 삼다
十一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春一月 왕자 김의종을 보내 당에 사은하고 숙위케 하다
十一年夏六月 혜성이 동쪽에서 보이다
十一年秋七月 태백이 달을 범하다
十一年冬十二月 왕이 붕어하다

4. 기타

도의 선사가 지난번에 돌아오고 상인이 이어서 오니 〈우리나라에〉 두 보살이 〈있게〉 되었다. 옛날에 〈두 명의〉 검은 옷을 입은 호걸에 대해 들었는데, 이제 〈두 명의〉 베옷을 걸친 영웅을 보게 되었다. 하늘까지 미치는 자애와 위엄에 온 나라가 기뻐하고 의지한다. 과인은 앞으로 마땅히 동쪽 계림 땅을 행복하고 상서로운 집으로 만들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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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0px"[왕조 보기]
[朴] 밀양 박씨 왕조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昔] 경주 석씨 왕조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삼국사기》 <녹진 열전> 기록과 <헌덕왕 본기> 기록.[2]삼국사기기록.[3]삼국사기》에 의하면 처음 이름은 수종이었으나, 후에 경휘로 개명했다고 한다(諱秀宗 後改爲景徽).[4] 제39대 소성왕의 딸, 제42대 흥덕왕의 조카.[5]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기록.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821년, 《삼국사절요》에 따르면 822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진짜 흥덕왕의 태자였는지 다소 불확실하다.[6] 《삼국사기》 기록.[7] 《삼국사기》 기록.[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기록. 참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해석[9]삼국사기》 기록엔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두었다고 한다.[10] 또 다른 학설로는 후에 제43대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이 아니냐는 것도 있다.[11] 시호는 정목왕후(定穆王后).[12]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형인 헌덕왕의 찬탈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흥덕왕은 간접적으로 처남 애장왕이 시해당하는 것을 방조 혹은 묵인했다고 볼 수 있는 셈. 다만 이는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 것으로 당대에는 동복형제라도 장성한 후에는 얼마든지 잠재적인 정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조선과 달리 여계 계승권이 존재했으므로 남매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특히 흥덕왕 사후 서로 동족상잔을 자행한 희강왕김균정의 아내들은 모조리 민애왕의 누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남편들의 싸움을 막으려는 시도를 했다든가 남동생과 남편 사이에서 갈등한다든가 하는 면모는 전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13]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헌덕왕은 전형적인 암군으로 평가받는 임금이다. 행적만 보면 신라 말의 대표적 암군으로 불리다가 최근에 와서야 그나마 재평가받고 있는 경애왕보다 더 심할 정도.[14] 현재의 어느 지역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지만 경기도 파주시 지역으로 비정하는 편이다.[15] 장보고의 출신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후 장보고의 딸과 왕의 혼인을 논할 때 반대파의 주장으로 섬 사람으로 비하하는 등 서라벌 중앙 정계 기준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6] 몇몇 연구사극에서는 이 과정에 훗날 제45대 신무왕이 될 김우징을 끼워넣기도 한다. 김우징이 장보고의 청해진 건설을 도와줬고, 이후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장보고가 도와 보답했다는 식이다.[17] 다만, 청해진과 병력을 신라 조정에서 장보고에게 주었다기보다는 장보고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세력을 공인하였다라는 의견도 있는 만큼 고민을 해봐야 할 문제이다.[18] 골품제는 제36대 혜공왕 시절부터 당나라 사람들에게 이상한 제도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미 7세기에 골품제의 모순을 논하며 당나라로 건너간 설계두의 사례처럼 골품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신라인들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19] 조선 시대중흥 군주로 꼽히는 영조정조 시기에도 성리학을 고취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나름대로 의도가 좋았고 그 때 당장은 긍정적인 효과도 약간 있었지만 사실 당시 정세를 생각하면 이러한 모습도 흥덕왕이 한 것과 동일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었다. 참고로 조선유교적 사고 방식에 따라서 작은정부를 추구하고 중농억상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당시 국제 정세는 상업을 진흥시키고 정부의 구조를 확대해야 할 때였다. 물론 이러한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고려해도 경장(更張)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었음에도 이러한 방책보다는 체제 정비적인 모습이 많았다.[20] 차를 마시는 것 자체는 제27대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기록에 있으며 <화왕계>에서 “차와 로 정신을 맑게 하고(茶酒以淸神)”라는 구절이 나오는 등 여러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차를 마셨다는 것은 알 수 있다.[21] 고구려 승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고구려 지역 출신인 것으로 추정된다.[22] 그래도 신무왕이 민애왕 김명을 시해하며 혼란을 잠재우는 공을 세우기는 했다.[23]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명주성주 김순식 역, 광개토태왕에서는 진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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