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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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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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4대 국왕 봉상왕 | 烽上王 | |||
봉상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378호 전경.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f2023>271년 이후 추정[1] | ||
고구려 국내성 | |||
사망 (음력) | 300년 9월 (향년 20대 추정) | ||
고구려 국내성 별실 | |||
능묘 | 봉산원(烽山原)[2]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왕태자 | ||
연대 미상 ~ 292년 | |||
고구려 제14대 국왕 | |||
292년 ~ 300년 9월 (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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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고(高) | ||
휘 | 상부(相夫) / 삽부루(歃夫婁)[3] | ||
부모 | 부왕 서천왕 모후 왕후 우씨 | ||
형제자매 | 동생 고돌고 | ||
왕후 | 2남 왕자의 모후 | ||
자녀 | 2남 | ||
시호 | 봉상왕(烽上王) | ||
치갈왕(雉葛王) | |||
치창왕(雉菖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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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14대 왕.고구려판 연산군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고 기록해서 유년 시절부터 폭군의 기질이 보였다고 평가[4]하고 있기는 한데,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가 매우 적어서 재위 7년 이전으로는 봉상왕이 확실한 폭군이었다고 하기가 애매하다. 자기 숙부나 동생을 처형한 기록이 있기는 한데, 이건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이 있으면 하는 공통적인 행동이고, 창조리나 고노자를 등용한 것을 보면 마냥 잔인한 폭군으로 보기 힘들다.[5] 애초에 봉상왕 7년 이전에는 내정에 관한 기록이 창조리를 등용한 일 빼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치세 초기부터 막장이었다는 증거를 타당하게 판단할 근거 자체가 딱히 없다. 다만, 창조리 등의 신하들이 간언한 부분들을 보면 재위 7년 이후로 폭군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팩트이다.[6][7]
2. 생애
봉상왕 재위 초기 국상 상루가 사망하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았다.부왕 서천왕의 동생이자 본인에게는 숙부였던, 당시 고구려 명장(名將) 안국군(安國君) 달가를 숙청하였다. 달가는 당시 고구려의 큰 위협이었던 양맥과 숙신의 변란 및 침공을 막고 진압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방위의 큰 축을 담당했었던 명망 높은 인물로 백성들의 인망이 두터웠는데, 이를 통해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간이 지난 뒤, 모용부의 압박이 점차 심해지자, 국상 창조리의 추천으로 명장(名將) 고노자를 등용하면서 창조리의 건의를 수용하여 그를 신성 태수로 삼았고, 연(燕)나라(모용선비) 모용외의 침략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때 사마씨의 서진은 291년에 시작된 팔왕의 난으로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다.
293년 모용선비의 제1차 침공에서 모용외는 수도로 바로 진격하는 직도작전을 감행했고, 이에 당황하여 신성(新城)으로 몽진을 떠난 봉상왕을 곡림에서 따라잡았으나 마침 신성 태수로 부임해있었던 고노자 휘하의 500명으로 이루어진 기병에게 반격당하며 패퇴하고 말았다.
296년 모용선비의 제2차 침공때는 서천왕의 능이 위치한 고국원까지 선비군이 도달하여 서천왕의 시신 및 부장품을 도굴하려고 했으나 작업에 투입된 인부가 끊임없이 병사하고, 능에서 풍악이 울려 도주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고구려군의 반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애초에 모용선비는 고구려의 주요 방어선을 뚫지 않고, 평양이나 고국원으로 달려가는 그야말로 어택땅 전략을 사용했기에 수도 근교까지 적이 밀고 들어왔음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전의 동천왕이나 뒷날의 고국원왕의 경우를 생각하면 봉상왕이 분명 선방했다는 것이 뚜렷해지는 부분이다.
내부적으로는 반역 음모를 경계해서 고씨 왕족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던 시기인지라 할아버지인 중천왕, 아버지인 서천왕이 모두 왕위를 노린 동생들의 반란을 겪어야 했다. 더 먼 선대에는 신대왕의 아들인 고발기가 자신의 동생인 산상왕의 즉위에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8] 봉상왕은 퉁구스계 숙신족을 정벌하여 국민적인 영웅이 된 안국군 고달가를 292년 3월에 숙청했으며, 1년 뒤에는 동생인 고돌고의 목숨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래도 고돌고는 훗날 아들인 미천왕 고을불이 살아남아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해주기는 했다.
이러한 고구려 계루부 왕실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나라의 침공을 불러왔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그런가 하면 나라가 흉년을 겪고 있음에도 궁실을 대규모로 증축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창조리가 간언했지만 오히려 욕만 실컷 얻어먹었고, 결국 봉상왕이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9] 그리하여 창조리가 일으킨 정변으로 폐위당하는데 그 후 후환이 두려웠는지 아들 두 명과 함께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다만 클레오파트라 등 다른 여러 경우처럼 자살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일각에서는 창조리 일파가 그들 부자를 시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물증에 해당할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동국통감》은[10] 봉상왕에 대해 극악무도한 폭군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봉상(峰上)은 사납고 강퍅함이 더욱 심하여, 숙부와 아우를 죽였으며, 간하는 말에 성을 내고 스스로 방자하여 궁실을 높이고 담장을 조각하였으니,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리고 마침내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쳤으며,"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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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봉상왕 본기〉
一年 봉상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안국군 달가를 죽이다
一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二年秋九月 아우 돌고를 자결하게 하다
三年秋九月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다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七年秋九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七年冬十月 궁실을 증축하다
七年冬十一月 을불을 찾아서 죽이려 하다
八年秋九月 귀신이 봉산에서 울다
八年冬十二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다
九年秋八月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오게 하다 봉상왕이 죽다
4. 대중매체에서
- 곽재식의 소설인 《모살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여기에서는 아버지 서천왕의 후궁인 소 태후가 봉상왕을 공격하고자 옛날 애인이자 봉상왕의 숙부인 달가를 찾아가 봉상왕이 자신을 고문하며 괴롭히고 있다고 사기를 치며 봉상왕을 공격하자고 충동질한다. 봉상왕 또한 달가의 명성을 질투하고 있어서 달가를 제거하기 위해 달가가 소 태후와 놀아나거나 소 태후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음모를 꾸며서 달가를 사형시키고 소 태후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 학습만화 《Why?》시리즈 <쫓겨난 임금>편에서 처음으로 다루고 있다. 첫 등장부터 연회를 여는 모습이며 선비족의 침공을 물리친 이후 궁궐이 볼품없어서 쳐들어 온 거라며 무리하게 궁궐 확장공사를 하려 드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창조리에게 폐위당하는데[11] 이후 별실에 감금되었다가 자살했다고 언급된다.
5. 관련문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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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천왕이 왕후 우씨와 혼인한 해가 271년이라 그 이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2] 마선구 2100호 또는 마선구 2378호 추정.[3] 《삼국사기》 원문에는 삽시루(歃矢婁)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부'(夫)와 달리 '시'(矢)는 한국 고대 인명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을 뿐더러 상부(相夫)라는 이표기도 있으므로 '삽부루'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식의 오탈자는 한국 고대사 기록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편이다.[4] 일반적으로 왕의 기록에 대해서는 미화하기 마련인데도 대놓고 이렇게 적힌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랬다고 보는 시각과 미천왕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폭군의 프레임을 씌우는 과정에서 조작된 기록이라는 시각이 있다.[5] 다만 전쟁은 못했던 것 같다. 서기 3세기까지 고구려 역대 왕들 중에 수도까지 공격당한 왕은 유리명왕, 대무신왕, 동천왕 그리고 봉상왕 등 4명인데,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은 극초창기의 왕이라 그럴만 하고 대무신왕의 상대는 통일제국 후한이었으며, 동천왕도 후한이 삼분할되어 생긴 조위였고, 일단 동천왕은 위나라에 반격을 가해 물리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봉상왕은 동천왕 다음으로 수도가 뚫렸으며, 심지어 고국원왕에 앞서서 아버지 서천왕의 능을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을 뻔 했다. 아래에서 선대들보다는 선방했다고 하지만 선대 왕들은 상대가 모용선비부보다 더 강력했거나 아니면 나라가 너무 약할 때 침공당했다.[6]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삼국사기》의 자연재해 부분인데, 재위 7~8년 시기에 자연재해가 집중되어 기재되어 있다.(재위 1년차에 지진이 잡혀있는 걸 빼면 1~6년차에는 자연재해 기록이 없다.) 자연재해를 왕의 부덕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 간주하던 고대 사회에서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하다.[7]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미천왕[8] 고국천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는 첫째 발기는 기록상의 모순 때문에 셋째 발기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정설이다.[9] 즉위 7년차까지는 그런데로 나라를 별탈없이 잘 다스렸던 걸 보면 자리를 위협하는 고씨 왕족들이 다 사라지고, 모용선비의 침공도 성공리에 막아내면서 긴장이 풀려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궁궐 증축은 왕권 과시의 수단 중 하나였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국상인 창조리와 충돌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왕권을 강화하려다가 밀려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완벽히 일치하는 군주가 바로 연산군이다. 즉, 왕권 강화 시도가 선을 넘어 백성들까지 힘들게 하니 폐위당한 것으로 보인다.[10]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416&cid=62135&categoryId=62281[11] 이때 왜 다들 모자에 갈대를 꽂고 있냐고 묻자 창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모임이라며 다들 봉상왕을 겨누는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