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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1 23:51:15

온조왕

백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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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祚王
온조왕
파일:attachment/images_26.jpg
국학원 역사 문화 공원 내에 있는 온조대왕 동상.
칭호시조(始祖)
시호 온조왕(溫祚王)
성씨해(解)[1] / 부여(扶餘)
온조(溫祚)[2] / 은조(恩祖)[3]
왕자다루(多婁)
부왕동명성왕(東明聖王) 혹은 우태(優台)
모후소서노(召西奴)
생몰년도음력? ~ 28년 2월
재위 기간음력기원전 18년 ~ 서기 28년 2월 (약 46년)
1. 개요2. 출생
2.1. 삼국사기&삼국유사2.2. 해동고승전2.3.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3. 백제 건국4. 치정
4.1. 외정4.2. 내정
5. 가계도6. 삼국사기 기록7. 기타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마한이 점점 약해지니 상하의 마음이 떠나간다.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인데 만일 타인이 취하면 순망치한의 격이라 후회해도 늦는다. 차라리 먼저 취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마한을 합병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며.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서 발췌
680년 백제 왕조의 건국 군주이자 초대 임금·건길지. 고대 삼국의 시조 중 유일하게 탄생 설화나 전설이 내려 오지 않으며, 왕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부여 혹은 고구려를 떠나 자신의 힘으로[4]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고구려 고주몽, 신라 박혁거세, 금관가야 수로왕, 반파국 뇌질주일 등의 건국 이야기와는 달리 신비적 요소도 전혀 전해지지 않는 점도 중요하다.

아래 서술된 내용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만일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건국하자마자 중앙 집권을 이루고 삼한 중 가장 강했던 마한까지 정복한 대단한 인물이겠으나, 고고학이나 삼국지 등 외국 사료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학계에선 저 내용을 모두 사실로 보는 학자는 드문 편이다.[5] 대체로 사실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마한과의 외교 관계 기사 등 소수이다.

2. 출생

2.1. 삼국사기&삼국유사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한꺼번에 전하고 있다. 그 하나는 졸본부여 왕의 차녀가 고주몽과 결혼하여 낳은 차남이며, 또 하나는 북부여해부루의 서손인 우태가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란 것이다. 이후 우태는 먼저 죽고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주몽과 재혼한다.

첫 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고구려 계통에 주몽의 3남으로, 위로는 이복 형인 유리와 친형 비류가 있다는 얘기이며, 이에 따르면 백제 왕가는 고구려 왕가의 후예가 된다. 2번째 전승은 부여 왕가와 친연 관계가 있을 뿐 고구려 왕가와 친연 관계가 없으며, 주몽은 어머니 소서노재혼으로 잠깐 온조의 새아버지였다가 곧 헤어진 사람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도 『고전기(古典記) 』라는 사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주몽의 셋째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2.2.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제의 건국이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는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2.3.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한편 외국 기록인 위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 주서, 수서, 책부원귀 등에서는 구태가 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의 우태와 음이 통하는 듯 해서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거기에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서도 모두 부여 계승의식은 확실히 하고 있지만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표방하는 사료는 없다. 다만 북사나 속일본기에서는 백제 왕가의 조상을 동명(東明=도모)이라 하고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로는 삼국시대 당대 기록에서는 연남산 묘지명의 내용처럼 고구려 주몽과 부여 동명왕이 엄격하게 구분된 별개의 인물로 보이고 주몽왕이 동명왕과 동일인물이라고 인식하는 사료는 당대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첫 번째 전승을 빨라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정부가 아닌 타자에 의한 기록이 백제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6] 한편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와의 연관성만 나타나는 두 번째 전승은 백제가 고구려와 내내 사이가 나빴던 점, 성왕이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바꾸었듯 고구려 계승의식보다는 부여 계승의식을 내세웠던 기록들과 아귀가 맞는다.

물론 이들 전승 모두가 반드시 맞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데, 애초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사람 김부식도 1천년쯤 후대 사람이고, 남아있는 기록들 중 뭐가 진짜인지 짐작이 안 되니까 여러 설을 같은 책에 한꺼번에 실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는 근초고왕 당시 고흥서기도 온조왕 이후 몇백 년 뒤다. 서기가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전엔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었다거나 체계적이지 않은 기록만 있었다는 얘긴데 이런 식이면 충분히 전승이 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백제 건국

고구려의 왕자였다는 전승을 따르자면, 고구려에서 지내던 온조왕은 후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온 이복 형인 유리가 태자가 되자, 친형 비류와 어머니를 모시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아악(負兒嶽)[7]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강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十濟)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시조 온조왕 조

하지만 위 기록에서 보이듯 친형 비류는 온조왕과 생각이 달랐다.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GG를 치고 만 비류[8]는 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로 들어가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9]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위례성에 대해서도 기록의 모순이 있다. 원년의 건국 기록에서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뒤이어 14년의 기록에는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서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하북 위례성한강 북쪽에 도읍을 정했다가 14년에 한강 남쪽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서울의 세검정 일대나 중랑천 일대, 경기도 파주시임진강 일대를 꼽는다.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시기도 고이왕 대, 비류왕 대로 보는 등 이설이 있다.

4. 치정

온조왕의 치정은 크게 낙랑말갈, 마한에 대한 외정과 백제 내부의 정비라는 내정으로 나뉜다.

4.1. 외정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정설은 서기 3세기 경에 이르러 백제목지국에게서 마한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4세기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마한을 공격해 경기, 충청 일대를 확보했으나 여전히 전라도 지역은 마한 지배하에 있다가 웅진 천도 이후 만경강 유역까지 백제 세력이 확대, 무령왕 대를 지나 6세기 중엽에 가서야 전남의 마한 세력이 소멸하고 마한백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것 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꺾어 버리고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후대인 고이왕이나 근초고왕 대에 일어난 사건을 온조왕 대에 갖다 붙여놓은 기사로 보인다는 것이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봐도 아무리 고구려인들이 세운 백제라지만 이제 갓 태어난 병아리가 자기들보다 더 오랫동안 이 땅에서 터 잡고 살았던 들을 두드려 팰 수 있었을까? 그 강대한 로마 제국도, 시작 때는 에트루리아인에게 휘둘렸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지휘를 받는 신흥집단이 일시적으로 보다 앞서 정착한 세력들에게 맹공을 퍼붓는 경우도 드물지 않기 때문에, 100퍼센트 사실이 아니라고 장담할수는 없다. 그리고 앞서 예로 든 로마와 에트루리아 관계만 해도, 초기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았다거나 일방적으로 에트루리아에게 휘둘렸다는 시각은 요즘 학계에서는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Cornell, 1995, Forsythe, 2005)

백제의 초기 왕대는 워낙 신비에 쌓여 있어서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개중에는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라는 한자의 고대 한국어 버전일 뿐이고, 온조는 가상 인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14] 후대의 비류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이며 온조 설화는 후발 주자인 비류왕 집단이 온조 집단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백제 초기에 낙랑, 말갈과 싸운 건 팩트에 가깝다고 보인다. 당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은 한사군인 낙랑군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마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강 유역에 터를 잡고 '마한에 귀부한' 백제라는 나라의 등장은 낙랑한테 엄청난 정치적 위협이었다. 자칫 백제 인근의 소규모 나라들까지 마한에 귀부할 수도 있으니까. 현대 중국으로 치면 홍콩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낙랑은 자기네들의 역량이나 예맥 세력을 사주하기도 해서 백제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 수백년 뒤에 분서왕처럼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한 사태까지 있었으니...

4.2. 내정

재위 10년 장남 다루를 태자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13년 행정구역을 개편했고 재위 14년에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38년째 되던 해에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연 재해가 잇달아 발생해서 농사를 말아먹은 백성들이 많았기에 나라를 돌며 백성들을 직접 돌보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했으며 부역에 동원하는 걸 자제시켰다고 한다. 또한 41년에는 위례성을 보수했다. 재위기간 내내 많은 성과 목책을 쌓아 주변세력의 침입에 대비했다.

5. 가계도

,(조부),………………………,(조모),
해모수왕──────────유화부인
…………………
………………,(부),...........................,(모),
……………동명성왕──────소서노
……………………………
…………………………1.온조왕───────────(왕후),(배우자),
........................................………………
.................................………………2.다루왕,(아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十四年春二月 백성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十四年秋七月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十五年春一月 궁궐을 새로 쌓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十七年夏四月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내다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를 낳다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二十七年秋七月 대두 산성을 쌓다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三十八年春三月 농업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무려 65줄. 백제의 모든 왕들 중 기록이 제일 많다. 백제 초기 왕들 중에서도 건국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후대 왕들의 기록이 상당히 빈약한데 비해, 가장 오래된 건국 왕의 기록이 상당히 많고 아주 세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 않아 없다.

비정상적으로 큰 강역을 이유로, 온조왕의 기록이 훗날 백제의 전성시대를 여는 근초고왕의 기록과 섞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 참조. 대체로 백제 기록이 고구려, 신라보다 부실한 편인데 유독 온조왕만큼은 비슷한 시대의 고구려, 신라 왕들과 비교해 봐도 아주 세세하고 사소한 내용이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 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신라문무왕이다. 보장왕과 문무왕은 책이 각각 2권씩이나 되는 유이한 왕들이며 삼국사기엔 문무왕, 보장왕 순으로 기록이 많은 TOP 1, 2위.

7. 기타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사극에서 2번 등장했다. 한 번은 주몽[17]에서, 다른 한 번은 근초고왕에서. 물론 둘 다 병풍이나 엑스트라 수준을 면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주인공도 아니었으니…


[1] 삼국유사에서 온조왕을 소개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사를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이중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는 것을 해씨로 삼았다고 바꿔놓았다. 삼국사기와는 다른 기록을 참고한 것인지 알수는 없다. 또한 동사강목에서는 본래의 성씨는 해씨였으나, 백제를 건국한 후 자신이 부여의 핏줄임에 의미를 두어 부여씨로 바꾸었다고 기록했다.[2] 삼국사기.[3] 해동고승전.[4] 백제 건국 당시 온조 본인이 앞장서서 주도한 것은 맞으나, 한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배세력과 함께 힘을 합쳤다는 것이 현재로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의 초기 무덤 양식과 백제의 초기 무덤 양식이 서로 흡사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5] 원래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 학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신라도 마찬가지로, 백제는 고이왕, 고구려태조왕, 신라내물왕 때의 기사부터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과 교차검증이 가능해 비로소 100% 인정받는 상황이다. 다만 고이왕 앞은 전부 거짓이라 쓸모없다라고 보는 시각은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사실이거나 사실이 오랜 세월 변형되었다고 보고 최대한 초기 기사도 활용해내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6]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에서는 이 전승이 통일신라 시기 김대문한산기 계통의 자료가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7] 부아악(負兒嶽)은 현재의 북한산 인수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북한산 인수봉은 전문 산악인급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고난도 코스에 해당해서 정말 인수봉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현대 한국에 전해지는 지명 중에 負兒嶽이라는 이름이 있는 곳은 북한산 인수봉이 맞긴 하다. 또한 지형은 조금씩 바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무려 2,000여년 전에도 지형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역사시대와 현재 지형이 바뀐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예시가 원래 바다에 접해 있다가 내륙으로 들어간 감은사김해시 가야 유적들이 있다.[8]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과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해양 세력이 농업 세력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즉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밖에' 였을 뿐. 실제로 이보다 더 안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9] 십제가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병합한 것은 온조왕 당대의 일로 보기도 하고, 더 후대인 초고왕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0] 단 신라의 경우 현재는 신라라기 보다는 진한계 국가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백제와 국경을 맞닿을만큼 거대하지도 않았다.[11]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빈 땅에 정착한 게 아니라 마한왕의 협조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위만고조선에 왔을 때 방패로 삼기 위해 받아주었던 것과 비슷하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백제가 마한의 여러 구성국 중 하나로 나오는 기록과도 합치한다.[12] 처음 마한 왕의 질책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었다고 한 기록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다.[13] 참고로 두 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나오는데 무령왕 때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성왕때 고구려가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14] '온'이 100이고, '조'가 '제'와 통한다는 것. 다만 음운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다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15] 전설에 따르면, 정조의 꿈에서 나타난 온조왕이 정조의 업적을 칭송하다가 문득 "혼자 있는 게 외로우니 괜찮은 신하와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이서와 같이 모시는 사당을 세운 게 숭렬전이라고 한다.[16] 물론 현재의 강남박정희 정부 시기 수도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로왕 이후 거의 잊혀진 위례성과의 연속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땅이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그때의 중심지가 현재의 중심지가 된 사례이기도 하고 또한 수도로서 서울의 정통성에 조선 왕조 말고도 또 하나의 가점을 주는 역사이기 때문에 서울 역사에서 한성백제시대를 매우 강조하고 서울시 홈페이지에서도 백제와 조선의 500여년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1994년만 해도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했을 정도로 조선 수도로서의 역사성만을 강조했는데 이후 풍납토성을 비롯한 한성백제기 유물, 유적의 활발한 발굴 성과로 위례성이 현재의 서울로 거의 확정되면서 현재는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 또한 향토사에서 강조되고 있다.강남의 백제, 강북의 조선...[17] 아역 배우 김석이 역할을 맡았다. 김석은 이전에 SBS의 서동요에서 무왕의 아역으로 나온 적도 있으니 어린 나이에 2번이나 백제 왕을 해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