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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23 21:26:30

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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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영품리왕의 시비(侍婢)
왕호 동명왕(東明王)
링크 동명왕 신화 }}}}}}}}}

1. 개요2. 분석 및 현대의 인식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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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형》(論衡) <길험>편에 전하는 부여시조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고구려의 시조 추모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나 현재 역사학에서는 추모와는 다른 인물로 여기고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한다. 이는 해석상의 차이로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주몽(추모)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주몽을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 동명으로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주몽이(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졸본부여왕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 즉 졸본 도착 이전 졸본부여라는 나라는 이미 있었으며, 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계승자이지 건국자는 아니었다. 또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온조왕으로 이 해석이 타당하다.

1세기 후한 시대의 저서인 《논형》(論衡) 권2 <길험>편에 부여 <동명왕 설화>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북이(北夷) 고리국 왕의(영품리왕 추정)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1]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紀異) -북부여조-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紀異) -주림전-[2] 인용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2. 분석 및 현대의 인식


결국 고구려, 부여의 설화가 구분되지 않았던 이유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비슷한 데다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왕명도 같아 구분하기 쉽지 않고, 고구려가 부여에서 파생되어 길게 존속했다는 점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 부여의 동명이 고구려의 주몽으로 귀속되어 두 인물이 한 명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바라보아진다. 이에 대해 '동명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당시에 '태조'를 뜻하는 부여계 고유어라서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동명' 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다.

조선 후기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품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비판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한민국에 들어서도 기존의 동일인물설에 비판이 가해지는 상황이다. 일단 부여가 고구려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건 참이기에 부여 건국설화가 고구려 건국설화보다 앞선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이 현대인의 시선이다.

3. 기타



[1] -고구려조-에서는 제(帝) 뒤에 자(子) 자가 있다.[2]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을 가리킨다.[3] 이것도 하북위례성을 서울 강동구 일대가 아니라 임진강 유역에 군집한 고구려계 적석총 유적으로 보면 성립하는 견해다. 가장 오래된 고분이 아무리 올라가도 2세기 후반이며, 2세기 중반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니 고구려인들이 정말로 삼국사기 초기 연대대로 한반도 중남부에 정착한 근거는 현재 없는 상태다.[4] 현재로서는 과연 한성백제의 창업자가 온조인지, 온조가 맞다고 해도 온조의 아버지가 정말 고구려의 동명성왕 주몽이 맞는지 자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확실한 건 온조가 고구려 계통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