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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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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판본. 게이초 4년(1599년) 발행.

1. 개요2. 구성3. 내용4. 전승 기록 방식5. 편찬 의도
5.1. 황실에 대한 칭송5.2. 씨족 통합
6. 일본 통일의 시기에 대해7. 《고사기》와의 비교8. 언어학적 가치9. 외교 묘사10. 위서(僞書)는 아니다11. 한국사와의 관계
11.1. 한반도 관련 기사11.2. 백제삼서 인용11.3. 한국사 연구 사료로서11.4. 임나일본부설 관련11.5. 한국 사학계의 입장과 연구 관점11.6.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12. 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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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다. 일본어 독음은《니혼쇼키》(にほんしょき)이고, 훈독으로《야마토부미》(やまとぶみ) 혹은《야마토후미》(やまとふみ)라고도 읽는다. 후대작인《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일본서기》는 도네리 친왕덴무 천황의 명을 받아 편찬하기 시작하여 720년(요로 4년)에 완성한 칙찬 역사서다. 대체로 중국식 한문체로 쓰였는데, 일본식이 가미된 문체로 쓰인 부분도 있다. 편년체로 기록했고, 권수는 총 30권이다. 대다수의 고문헌들이 그러하듯 최초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사본만 현전한다. 가장 오래된 사본이 헤이안 시대 초기인 9세기 무렵의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6대 정사집인 육국사(六國史) 가운데 첫 번째 역사서다. 《고사기》(古事記)와《일본서기》를 아울러 기기(記紀)라고 부르기도 한다.

2. 구성

일본서기(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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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신대(神代) 상」 2권 「신대(神代)  하」 3권 「신무기(神武紀)」
신대 신대 언화화출견
4권 「수정, 안녕, 의덕, 효소, 효안, 효령, 효원, 개화기」 5권 「숭신기(崇神紀)」 6권 「수인기(垂仁紀)」
결사팔대 어간상존 활목존
7권 「경행, 성무기」 8권 「중애기(仲哀紀)」 9권 「신공기(神功紀)」
대족언존 · 성무천황 중애천황 기장족희 }}}}}}
{{{#!wiki style="margin: -35px -0px -10px"{{{#!wiki style="margin"
추후 추가 예정
}}} }}}}}}}}}

3. 내용

4. 전승 기록 방식

본문 외에도 다른 전승을 일서의 형태로 정리한 덕분에 여러 가지로 유용한 고대 전승을 간직했다. 하지만《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표준'으로 간주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본문이고, 그와 다른 전승을 '일서에 말하기를' 하는 형식으로 주를 달았다. 대표적으로 백제 무령왕의 출자에 대한 기록이다. 무령왕의 생물학적인 친부로 인식되는 부여곤지의 후손인 비조호조(飛鳥戶造)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신찬》과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가 남긴 기록이 상충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닐까 하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신화시대 부분에서 아마테라스니니기를 강림시키며
"천하는 너와 네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
라고 말했다는, 그 유명한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일본서기》에 기록되었는데, 그게 본문이 아니라 일서다. 본문에는 타카미무스비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니니기를 파견했으며,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없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일본서기》의 본문이 아닌, '천양무궁의 신칙'을 담은 일서의 내용을 표준판으로 가르쳤다.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으며,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5~6세기로 파악된다.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수서》 〈동이전〉 中 왜국

고로,《일본서기》에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일들 즉 5~6세기 이전의 기록은 구전에 의존한 것이며, 사전적인 정의로 봤을 때 역사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각색되고, 살이 붙어 과장 내지는 없던 사실을 신화마냥 부풀려서 전해진 것이라고 추정할수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일본서기》 항목의 서술도 《수서》의 기사를 인용하며 5~6세기 이전의 문자는 없으며 단지 口承(구전)에 의존한 기록이라고 했다. 문자가 생긴 시점은 놀랍게도,《일본서기》에서 대략 사료로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5~6세기의 일이다.

이에 한술 더떠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래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을 6세기에 집대성해서 8세기에 이르러 편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さらに、文字に残された系譜情報を「史書」として見るならば、雄略朝(倭王武、ワカタケル大王、5世紀後半)にはその種のもの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稲荷山鉄剣銘の存在によってわかる。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로 여겨지지만, 그 편찬까지는 일본에서 문자의 사용과 역사적 기록의 등장의 긴 역사가 있었다. 일본(왜)의 역사, 즉 과거 사건의 기억에 대한 기록으로 먼저 언급되는 것은「제기」(대왕가/천황가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기록)와 「구사」(그 외에 전해지는 옛 이야기)다. 이들은 쓰다 쏘우키치가 계체 흠명조(6세기 중반)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제창한 이래 여러 논의를 거치면서도 원래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승이 6세기에 정리된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되고 있다. 게다가 문자에 남겨진 계보 정보를 「사서」로 본다면 웅략조[1]에는 그런 종류의 것이 존재했음을 이나리야마 철검명의 존재로 알 수 있다.

5. 편찬 의도

5.1. 황실에 대한 칭송

이 책은 비록 8세기 당시의 역사책이지만, 초기 기록이 신화에 기대었거니와 편찬 목적 중 하나가 선대 황실의 권위를 알리고 칭송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많은 과장과 조작이 들어갔다. 사실 객관적인 실증주의가 부족했던 전근대의 다른 역사 기록들도 왜곡이나 과장, 신화적 수사가 많이 들어가지만《일본서기》처럼 기본적인 서사 구조마저 의도적으로 짜맞추는 정도는 아니었다.《일본서기》를 편찬한 8세기 당시의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점점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었으며, 서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2] 당시 성덕왕이 재위 중이었던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의 후유증을 수습한 뒤 나당전쟁 이후 사이가 멀어졌던 당나라와 화해했다. 반면 일본과는 왕성국 사건을 비롯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정황이 이 시기부터 많이 등장한다. 《일본서기》와 같이 자국 황실의 권위를 무작정 높이기 위해 타국을 무조건 낮추거나, 사신 파견을 무조건 조공 기록으로 보는 주관적인 시각은 중국 사서들에서 볼 수 있으며《일본서기》 또한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 과정에서 깊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황실이 훨씬 오래됐음을 주장하기 위해 이주갑인상으로 계보를 끌어올리거나, 실제로 있었던 전쟁 및 외교 활동이라도 그 주체를 일본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바꿔 적었으며, 한반도 왕조는 일본의 신하라는 식으로 변조했다는 의심 등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따라서《일본서기》에 실린 내용은 중국 사서와 마찬가지로 묘사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의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로 교차검증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5.2. 씨족 통합

《일본서기》는 사실상 일본이 국가적으로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사서라고 볼 수 있지만, 애시당초 편찬의 목적이 역사 정리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천황과 고대 일본 및 유력 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치계급 중심으로 원사료 수집과 서술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일본서기》 자체에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아…'라는 말이 있는데, 즉 야마토 왕권프로파간다를 퍼트리겠다는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고사기》도 마찬가지지만,《일본서기》 편찬의 가장 큰 목적은 천황가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도 유력 씨족들의 숭조사업이 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구 씨족은 누구 천황의 후손이네 하는 기록들이 초기에 집중적으로 잔뜩 등장하는 것은《일본서기》와《고사기》가 편찬된 당시 유력 씨족 및 지방 호족들을 일본 천황가의 가계 안에 편입시킴으로서 통일 의식을 형성하고, 야마토 정권이 그들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씨족 기원에 대한 전승이 풍부한 《고사기》와《일본서기》를 검토하면 소가 씨족을 비롯해 당대 유력 대씨족들의 가계는 대부분이 소위 결사팔대라 불리는 신적인 초기 천황들에게 몰려 있으며, 기타 지방 호족들은 그 밑의 천황들의 자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기기' 편찬자들이 결사팔대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역사를 늘리고 계보를 억지로 일원화한 것은 단순히 신라와의 경쟁 의식이나 신성성 강조 뿐 아니라, 군주의 재위기간을 통해 시간을 표시하던 (예를 들어 누구누구 왕 재위기간이라고 표현한다던가, 연호를 표기한다던가)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 역사로서 나타낼 수 있은 시간을 늘려 야마토 문화의 장구함을 강조시키고, 설령 가계와 재위년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 껍데기에 불과한 기록일지라도 그것을 '역사'로 인식시킴으로서 천황과 주요 호족 씨족들이 '한 집안'임을 선언하고, 따라서 중앙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일본서기》였다. 헤이안 시대에 조정의 주요 관리와 공가 일원들에게《일본서기》를 강의하는 시간까지 따로 마련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의도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6. 일본 통일의 시기에 대해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 일본은 정치적 호족 연합체였던 시기였고, 여러 지방 분국들이 병존하던 시기였다.《일본서기》는 각 지방의 국가에서 전해지는 구전을 집대성하고, 후대에 마치 통일된 단일 왕조에서 벌어진 사건들인 양 소급 적용해서 기록하여 천황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연대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대개 학자들은 일본의 정치적 통합 시기가 5~6세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마저도 호족이 연합하여 왜국을 주축으로 모인 시기이지, 지방 분국들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왜5왕 중 한 명인 무(武)가 478년 유송에 보낸 국서에서는 자신의 조녜(祖禰)가 통일을 이룩했다고 하는데, 일부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본 학자들 중에는 이를 근거로 4세기 말엽쯤에는 일본이 통일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망한 부친'을 뜻하는 조녜(祖禰)라고 기록되었으니 일본에서는 통일을 이룩한 시점을 3~4세대 정도 앞으로 당겨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으로 왜 5왕 중 한 명인 무(武)을 유랴쿠 천황에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

일부 일본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도 근거로 활용하여, 391년 즈음에 신라와 백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일본 열도가 4세기 말에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라며 전제조건을 깔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통일을 이룩한 뒤 막대한 중앙 권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는 주류 학설이 아니고, 5세기 중반에야 통일이 아닌 왜국 중심으로 정치적 단일화를 이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에서는 노중국 교수와 5세기에 일본이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인 나라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이시이 마사토시 및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토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노중국 교수는《춘추좌씨전》과 연남생 묘지석의 문장을 용례로 들어 조녜(祖禰)를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해석했고, 일본이 통일 왕조를 이룩한 시기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봤다.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에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실체를 왜국의 정규군이 아닌, 일개 지방에서 파병한 용병 내지는 해적 집단으로 보는 해석을 따랐다. 이는 광개토왕릉비를 연구한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인 왕건군의 의견과도 일치한다. 왕건군은 왜군이 북규슈 일대의 해적일 것으로 봤다.《일본서기》에서 교차검증할 수 없는 이유가 왜국의 정규군이 아닌 이합집산의 해적이나 지방국가의 소규모 군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의 주장은 일본 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최대한 빠르게 잡아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려는 취지다.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조녜(祖禰)가 조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5세기경에 규슈 일대가 통합되었다는 일본 사학계의 주장은 최근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통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는 김태식 교수의 주장이다.
그 상표문에서 더욱 중시되어야 할 것은 왜왕 무(武)의 자부심으로서, 일본 열도의 각 지역 수장을 통합한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의 연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이타마현(埼玉縣)과 구마모토현(熊本縣)에서 출토된 철검명(鐵劍銘)에 등장하는 '擭加多支大王'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로, 왜왕 무의 통치 범위가 간토(關東)부터 규슈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대왕의 아래에서 특정 직장(職掌)을 분담하는 중앙 호족과 그 직장(職掌)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지방 수장의 독립성은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즉, 상표문을 통해 5세기 혹은 그 훨씬 이전에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규슈 일대를 통일했다는 주장은 고고학적인 연구로 증명할 수 없으며, 다만 규슈 일대의 수장으로서 연합체의 정치적 지도자급 위상을 지녔다고 추정한다. 당대의 무(武)가 자신의 작위도 황제에게 요구하는 한편, 자신의 세력과 연합한 지방 호족들에게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의 관직도 하사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는데, 이는 사가제(私假制)적인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자신보다 낮은 관직을 주어 수직적인 주종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대내외적으로는 연합체의 수장으로 인정받으려는 취지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당대에 왜왕의 왕권이 몹시 불안했으며,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수립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등장하는《일본서기》의 외교 관련 기사는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왕조가 병합된 지방 국가들에서 전해오는 구전을 취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당연히 구전은 사료보다 객관성이 매우 결여될 수밖에 없다. 이주갑인상과도 아주 연관이 짙은데,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시점이 왜가 통일을 이룩한 시점(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살해된 시점)과 절묘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이주갑인상은 한반도 왕국들의 역사를 의식해 천황의 위엄을 세우고자 연도를 조작한 것 같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규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일본서기》 편찬시의 '지금', 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학자들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이 아닌,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막대하게 끼쳤다고 해석하는 학자들.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이시이 마사토시나 사토 마코토 같은 학자들이다. 반면, 하마다 고사쿠 교수 등은 통일왕조에 의해 병합된 지방국가들에서 옛부터 전해지는 구전을 후대에 취합해 마치 통일왕조의 역사처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5~6세기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 단지 전혀 거짓의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전한 구전이라는 것이다. 즉 과장은 되었지만 임나일본부설의 가치와 여지는 어느 정도 열어둔 것이다. 이렇게《일본서기》와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시기,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매우 강력하게 논리적으로 엮였다.

7. 《고사기》와의 비교

고사기》가 먼저냐 《일본서기》가 먼저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고사기》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을 인정하되《일본서기》가 최초의 정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고사기》는 과거에 야마토의 중앙에서 구전이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를 문자화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전까지 제왕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제기(帝紀)와 임금의 말씀을 기록한 본사(本辭) 등이 통일되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제황의 일과 과거 있었던 사건들을 암기하는 신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681년 덴무 천황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새로이 만들어라."
라는 명을 내린 후《고사기》(712년)와 함께 완성된《일본서기》(720년)는 과거에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 역사를 통일하라는 덴무 천황의 지시로 편찬된 책이었다.《고사기》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일본서기》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순수 한문체를 사용했고,《고사기》보다는 신화적이지 않고, 사서적인 성격이 강하다.

신화성과 내용의 왜곡이 짙기 때문에 4세기, 더 나아가서는 5세기 전반과 중반까지의 기사는 대체적으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사실 3세기 즈음부터는 가뭄에 콩나듯 역사적 사실들이 중간중간 튀어나오기는 하는데, 대표적으로 근초고왕마한 정복 기록,《삼국사기》에서도 교차검증되는 석우로 관련 기록들, 대놓고 히미코를 의식한 조위에 대한 조공 기록 등이 있다. 다만, 이 시기가 하필이면 이주갑인상이 적용된 시기인 데다가 그 있는 사실들마저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해 놓아서 사실과 왜곡의 구별이 쉽지가 않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교차검증을 통한 기록만을 인정한다. 물론 5~6세기의 기사들도 문면 그대로 수용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5~6세기 이전의 기사들은 역사적, 사실적 가치를 전혀 지닌 것이 아닌 신화나 창작으로 여겨지며, 그 이후의 기사들은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윤색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특징으로,《고사기》가 '기기가요'라 불리는 와카의 원형이 되는 시들을 풍부하게 수록한 것과 달리《일본서기》는 이러한 와카들을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이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편찬 스타일 차이와도 유사한데,《일본서기》에 수록된 신화들 역시《고사기》에 수록된 신화들 중 철저하게 야마토 정권의 정당성 옹호라는 목적에 맞는 진중한 신화들만을 수록했다. 따라서《고사기》보다는 신화의 토속성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단적으로 비교되는 것이,《고사기》는 이즈모 지역의 토착 신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그 영향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반면《일본서기》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의도적으로 이즈모 신화를 제외했다. 다만 기나이 이외 지역의 다양한 전승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서가 있는《일본서기》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사기》는 의도적으로 특정 지역이나 특정 가문의 전승들만을 집중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자나미이자나기 이야기처럼《고사기》의 신화와《일본서기》의 신화 기록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도 꽤 있는데, 이는 두 사서가 서로 다른 전승을 반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8. 언어학적 가치

《일본서기》는 역사학 사료로서 뿐만이 아니라 고대 일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 자료로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언어학적 연구 결과《일본서기》는 α군β군의 두 군으로 나눌 수 있음이 밝혀졌는데 14~19권, 24~27권은 α군이며, 속수언(續守言)[3]과 살홍각(薩弘恪) 등의 중국계 인사[4]가 정통 한문으로 쓴 부분이다.

1~13권과 22~23권은 β군이며 야마다노후히토 미카타(山田史御方) 등의 일본계 인사가 한문으로 썼으되 일본식 어법, 이른바 왜습(倭習)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미카타는 통일신라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학승으로, 당대의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많아서 일본보다는 좀 더 한학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전문이 실려있는 <답설인귀서>를 봐도 7세기경의 신라인들이 흠을 잡을 수 없는 고급 한문 문장의 구사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카타 본인이 당나라에 직접 유학한 경험은 없어 한문을 완벽히 구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선 당시 일본의 노래를 기록한 대목에서 두 군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α군은 당시 한자의 중국음에 기반하여 일본 노래를 전사했고, 다른 한쪽은 한자의 일본음으로 일본 노래를 전사했다. 중국계 인사는 한자의 아음(牙音, 한국 한자음 기준 ㄱ 계열음)과 후음(喉音, 한국 한자음 기준 ㅎ 계열음)의 구별이 명확했기에 일본어의 か(ka)행 소리를 아음 한자로만 옮긴 반면, 일본음을 사용한 부분은 か(ka)행 표기 시 아음 한자와 후음 한자를 섞어서 표기하고 있다.

또한 α군 내에서도 일부 기사, 특히 다이카 개신을사의 변 관련 기사 등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되어서 이 부분이 후대에 모종의 이유로 가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이를테면 긴메이 천황 2년 4월 기사에는 "被誑新羅(피광신라)"라는 표현이 있는데, "신라에 속임당하여(=속아)"라는 의미에 맞게 쓰려면 "被新羅誑(피신라광)"으로 써야 옳다. 한반도 관계 기사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일본식 천하관에 기반하여 상당한 윤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일본서기》에는 한자를 이용한 당대 일본어 표기법인 만요가나가 일부 인명과 주석 등에서 발견되기에,[5]고사기》및《만엽집》과 더불어 만요가나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고 있다.

9. 외교 묘사

《일본서기》의 내용은 일본 내부 자료로서의 신빙성은 높지만, 외교에 관한 부분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외교적인 내용 중에서 한국과 중국의 자료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 금강 전투(일본 측 기록은 백촌강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부분은 사상자의 숫자까지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그 이외의 국제 뉴스 부분은 칙찬 사서의 편찬 동기에 따라 서술하는 관점부터 다르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은《일본서기》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역사서에도 제기되는 비판인데, 특히 외교 부문의 사료를 해석할 때는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중국측의 자료와 겹칠 경우 상당히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 중세로 넘어오면 명나라에서 무로마치 막부쇼군에게 '일본 국왕'이라고 쓴 것도 있는데 이 부분마저 왜곡하는 사례가 발생하니 비단《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사서 중 외교 부분은 주의하면서 봐야 한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우리 일본이 최고'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서술하자면《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귀화라는 의미는 '무언가를 흠모하여 자연스레 그리되다.' 라는 의미로 수당교체기와 신라의 통일사업 기간 동안 많은 중국인 및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키면서《일본서기》에서는 귀화인(歸化人)이라고 칭했었는데, 이 귀화인이 앞서 이야기한 개념의 '귀화'를 통해 일본인이 되었다는 한국 ≤ 중국 < 일본 이라는 일종의 개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이다.[6] 또한 중국측을 무시하며 열악한 족속들로 묘사하고 싶었는지, 초기 3~4세기 기록을 보면,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녀를 받아온다든지[7]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기사를 적어놨다. 6세기 성왕의 치세 이후부터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했는데, 마치 일본 호족이 전쟁에 참가해서 평양성을 불태우고, 고구려의 평원왕은 난리통에 궁궐 담을 넘어 도망갔다는 등의 구라를 쳐놓고 있다. 물론 이는 당시 전쟁에 참여한 백제 측 호족의 전승이었는데, 후에 백제가 멸망하고 도일하여 자랑스럽게 가보 마냥 부풀려 내려오던 내용이《일본서기》에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황, 일본 등의 표현과 더불어 일본을 '귀국'(貴国)이라고 표현하며, 신라나 백제의 사신이 자신의 나라를 칭할 때는 '신국'(臣國)이라고 칭한다. 여기서 귀국이라는 표현은 '귀하'처럼 상대 국가를 부르는 표현이 아니라, '귀한 국가'라는 명백한 존칭 표현이다. 신국이라는 표현이 자신을 '신'으로 칭하는 낮춤 표현임을 감안하면 명백한 윤색이다.

10. 위서(僞書)는 아니다

한국 국내에서는 천황 중심주의 및 일본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성격 등을 이유로《일본서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찾아볼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해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포함한 한국 사학계도《일본서기》를 연구 자료로 참조하거나, 인용하며 위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기술적으로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일본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된 서책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필사본이 존재하며,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서도 천황 계보를 확인할 수 있고, 야마토 왕권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사서이기 때문에 정사에 해당하고, 야사조차 아니다.
百濟弔使傔人等言、去年十一月、大佐平智積卒。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말하기를,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습니다."…(후략)
《일본서기》 〈고교쿠기〉 원년조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후략)
사택지적비 비문》, 충남 부여 출토
백제 인물인 사택지적은 한국 사서에는 기록된 바 없이《일본서기》에만 나타나는데, 훗날 사택지적비의 발견으로 실존성이 교차검증되었다.

다만 위서가 아니라고 해서《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은 또한 아니다. 이 책은 기록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황실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으며, 이에 사관(史官)이 중립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날짜와 부대상황을 조작하는 등 광범위한 문헌오염을 저지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 자체는 대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편찬 방향도 저자 나름대로 설정한 서술 원칙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정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일본서기》는 고대사 관련 문헌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사 연구에도 필수적인 책이라,[8] 역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책에서 사실을 적은 부분과 사관이 의도적으로 신격화하고 왜곡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또한《일본서기》가 상식적인 왜곡[9]이나 신화적인 요소[10]가 많고, 한반도 관련 기술에 있어 편향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대에 편찬된 다른 사서들 역시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한국측 사서인《삼국유사》의 경우에도 편찬자인 일연승려였던 탓에 불교적인 상징과 신화가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삼국사기》는 저자인 김부식삼국시대 관련 서술에서 유독 신라만 편애했다는 논란[11]이 있고, 김부식이 참고한 자료들부터가 심하게 윤색되어 있어 삼국시대 초기 군주들의 재위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연대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을 받는다.

중국 명나라의 《명실록》과 청나라의 《청실록》 또한 지나친 황제 중심적인 서술로 인해 역사적 가치가 희석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조선의 《조선왕조실록》 정도가 국왕조차 생전에 기록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정도로 사관이 군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 노력했기에[12]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아마추어 역사가와 증산도 등의 종교 단체, 그리고 기타 비합리적인 국뽕들은《일본서기》가 소설이라거나 반대로《환단고기》 등의 재야 사서를《일본서기》와 비교하면서 재야 사서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단순히 저술연대나 저술자 같은 서지 정보를 속이지 않아서 좁은 의미의 위서에만 부합하지 않을 뿐이며, 책의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다. 특히 이러한 책들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았다"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따라서 이러한 책들이 위서라는 말은 그 내용 자체로 "거짓 책"이라서 '거짓 위'()를 써서 위서가 되는 것이다.《일본서기》는 비록 거짓이나 과장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서술한 부분도 있으며, 무엇보다 당대의 사료 절대량이 부족하기에 엄격한 교차검증의 전제하에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모르고 출판이 넘쳐나는 20세기에 가짜 역사책을 내밀면서 이것도 진실된 부분이 있으니, 검증해봐야한다는 주장은 수많은 역사가들의 오랜 노력과 연구 성과를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11. 한국사와의 관계

11.1. 한반도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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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매우 많으며, 이때문에 한반도의 고대사 연구에도 필수적인 사서로 여겨진다. 내용을 살펴보면, 4세기 이전의 기록에는 백제가 아닌 신라에 관한 기사만이 등장하고, 이후에는 백제에 관한 기사가 주로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 놓고 내선일체의 연구관이 작용하던 시기에는 일부에서 '진무천황이 신라인'이며, 일본인이 신라에서 도래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고사기》에는 대놓고, 진구 황후가 천일창의 여식에게서 나온 모계 후손이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는 내선일체 연구가 더 이상 주류가 아니며, 동계 이론 역시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으나, 야요이인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후 삼국시대까지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 입증된다. 일본 신화에 나오는 타카마가하라가 고령이나 거창이라는 설, 아마테라스 여신의 남동생인 스사노오의 일화에 나오는 신라, 니니기의 한반도 드립,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전승이나 가야의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 등의 에피소드에서 많은 연관성을 찾고 있다. 고언어학적인 부문에서는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진한어와 고일본어를 반도 일본어로 비정하기도 했으며[13], 마르티너 로베이츠와 벡위드 등이 고구려 및 부여를 중심으로 한 예맥어와의 관계를 추정하기도 했다.

11.2. 백제삼서 인용

《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 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 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다. 그 결과 한국 국내 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 《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 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조정에서 일하던 백제 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 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 당국에 제출했다고 짐작한다.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 《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일본서기》의 백제 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 《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일본서기》는 신화시대까지도 역사적인 사실인냥 편년체로 기록한 탓에 역사서로서의 정확한 기술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지적된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 사례로는 진구 황후가 돌로 주술을 행하여 출산을 늦추고는 배를 타고 단 2개월 만에 삼한을 평정했다는 황당한 기록이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런 황당한 서술이 진구 황후를 히미코와 동일시해 히미코와 종녀(宗女)인 토요의 치세를 숨기려는 의도로 일본 역사를 2갑자(120년) 앞당긴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즉, 이후 야마토 정권 중심의 만세일계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혹은 히미코와 토요가 중국에 조공한 것이 맘에 안들어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것이다.[14]

한편, 일각에선 가뜩이나 당대에 문자가 없었던 일본은 인용할 단편적인 문헌도 압도적으로 부족했는데 천황가의 위엄은 세우려다 보니,《일본서기》가 전통성의 부각을 위해 고대사는 존재하지도 않은 계보도를 써내려갈 수 밖에 없고, 역사에 남은 기록도 억지로 120여년이나 연도를 끌어올려 뻥튀기하다 보니[15] 그 빈 자리는 당연히 외국 기록 특히 백제삼서가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해석도 한다. 물론《일본서기》가《삼국지》와《한서》 등의 중국 측 사서도 인용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차용한 것은 당연 백제삼서라는 것이다. 그래서《일본서기》에 적힌 내용들 중 상당 부분 그 주체를 일본에서 백제로 바꿔보는 쪽에선 반 우스개로《일본서기》의 본명이《백제서기》라는 말도 한다. 우스개치고는 너무 잘 맞아서 문제지만. 실제로 백제사 연구시 많이 참고하는 주요 사료들 중에《일본서기》가 있다.

과거 한때 일본 사학계는《일본서기》의 주장만을 굳게 믿고, 내부의 반론을 무시한 채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가 현재는 축소했다. 축소되었다는 의미는 임나일본부설도 세부적인 내용을 파고 보면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은 출선기관설로 이미 1980년대에 사실상 폐기된 학설이고, 현재는 임나일본부가 외교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는 외교사신설이 대세다. 여기서 찌그러졌다고 표현한 설은 출선기관설이다. 황당한 진구 황후 이야기도 일본의 민속학계에서는 타계(他界) 귀환 신화와 태양신 재생신화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일본서기》외에, 진구 황후를 다룬 다른 기록을 보면 진구 황후가 배와 군사들을 붉게 칠하고 삼한을 정벌했다고 하는데, 붉은색이 영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구 황후의 기록을 이주갑인상 문제와 결부시키면 근초고왕 시기가 되는데, 이때문에 근초고왕이 삼한을 정벌한 것을《일본서기》가 왜곡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실《일본서기》 내에서도 웃긴 것이 있다.《일본서기》 내 기록에서 신라구의 피해를 입은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 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인 위안용으로라도 진구 황후에 대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고 있었던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되어 있으면서 신화시대의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또한 백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백제를 아랫나라로 봐서,《일본서기》곳곳에서의[16] 출병과 전투시, 일단 쓰기는 일본이 상국이고 시키는 식으로 쓰는데 모든 면에서 백제가 주력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게이타이 덴노대의《일본서기》기록을 보면,《백제본기》를 인용하여 일본의 천황 및 황태자,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일본 국내의 사서나 문헌에는 없는 내용을 백제의 사서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신화시대를 벗어나면 사실적이지만, 그러한 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일본서기》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부분은 긴메이 덴노에 관한 기록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긴메이 덴노의 분량에서는 주인공인 긴메이 덴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80% 정도가 백제 관련 기록들이며 대놓고《백제기》를 인용했다고 쓰여 있다. 특히 백제 성왕에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그냥 백제 사서다.《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 덴노의 신하라서 마치 아바타처럼 긴메이 덴노는 계속 지시를 내리고, 성왕은 행동하는 식으로 쓰였다.

즉《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이리저리 짜맞춰서 왜국에 유리한 식으로 재구성했다고 추정된다.[17] 따라서 한국 관련 기록들은 조공인질 같은 일본이 상국이라는 뉘앙스를 발라내고 주체를 백제로 바꾸거나, 관계를 역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올린 것은 사실 선물이고, 백제가 가야 땅 어디를 하사해 달라고 왜국에 요청하는 건 실제론 백제가 그 가야 땅을 점령했다는 뜻이며, 왜국이 고구려를 친 기록은 사실 백제가 고구려를 친 것을 바꿔 써놓은 기록이었다는 식이다. 애초에 항해기술이 백제와 신라보다 낙후되어 4~8월경에만 도해가 가능했고, 항해에 소요되는 세월도 상당했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게 도움을 청하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일본의 군사력이 실제로 강대했다해도, 유사시 긴급 지원이나 지원군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말이 안 된다.[18][19] 예를 들자면,
三月甲申朔戊子, 遣大伴連囓于高麗, 遺坂本臣糠手于百濟, 以詔之曰, 急救任那.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대반련설(大伴連囓: 오도모노무라지쿠이)를 고구려에 파견하고,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 사카모토노오미누카테)를 백제에 각각 파견하여 고하기를 "급히 임나를 구하라."고 말했다.
《일본서기》 추고 9년(601년) 3월 5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명령을 하는데, 왜왕의 조칙을 보낸 발송지는 가까운 임나가 아니라 일본 본국이다. 차라리 그렇게 조칙을 보낼 정도라면 일본 본국에 있는 정규군을 파병하는 게 나을 뻔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직할령인데 왜 백제와 고구려에게 부탁하며,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탁할 바에야 자신들이 직접 구원병을 파견함이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인데, 역사에 무관심한 일반인조차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윤색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부여곤지가 도왜에 소요된 기간은 1~2개월이다.《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곤지는 461년 4월에 파견되었으며, 무령왕이 태어난 시기는 같은 해 6월 1일이었다. 물론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지만, 무령왕 또한 왜국으로 항해하는 중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는 사가현 인근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히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601년 기사에 따라 급박하게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면, 백제의 경우에는 한두 달,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실제로 관산성 전투 전후로 파견된 백제의 사신들은 한 달이 넘어서야 나라 지방에 도착했다. 백제는 당시 급박한 상황하에서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에 사신들이 돌아오기 전에 계속 다른 사신들을 보냈다.

처음에 신라가 임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면, 한반도 내의 왜국 사신이나 임나에서 구원 요청을 왜국에 했을 것이고, 1~2달이 걸려 도해하여 왜왕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여기서 또 2~3달이 걸려서 그런 긴박한 상황에 다시 도해하여 백제나 고구려에게 조칙을 전달했다면, 벌써 6개월 가량이 허비되는 셈이다.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이리저리 왜국에 유리한 대로 《백제기》등의 기록물을 짜맞췄지만, 근본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 판별하면 실제 사건에 대해 추론이 가능해진다.[20] 이런 점 때문에 삼국시대, 특히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일본서기》를 적절히 인용한다. 위에 나타난 점 때문에《일본서기》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록이라도 써놓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11.3. 한국사 연구 사료로서

《일본서기》에서는 유랴쿠 덴노(웅략천황)의 기록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직접 충돌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의 역사책이지만 주로 백제 측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한국사 관련 정보도 들어 있는 덕분에 사료의 절대량이 절실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도 참고가 되는 귀중한 사료다.[2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웃나라의 역사서라고 하더라도 《일본서기》는 편찬 연대가 《삼국사기》보다 4세기나 이르다.[22] 백제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채 안 지난 시점에서 편찬된 사서인 만큼 아무래도 백제 측 기록이나 전승이 풍부하게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23] 한국 측의 고대사 주요기록인《삼국사기》는 신라가 남긴 기록 위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당연히 신라가 삼국시대의 최종 승리자이고, 그에 따라 수백 년 동안 나라가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제와 관련해선 같은 사건도《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자세한 경우가 제법 많다. 대표적으로 관산성 전투의 경우,《삼국사기》에선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지만 《일본서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배경 설명 및 성왕이 죽기 전 상황부터 도도와 한 대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까지 세세하게 적었다.

백제뿐 아니라 많은 가야계 소국 등 당시 일본이나 백제와 관련이 있었던 나라들에 대한 기록도 한국 측 사서들보다 훨씬 풍부한 편인데, 예를 들면 안라회의사비회의 같은 주요 사건이나, 탁순국아리사등 같은 인물들이 그것이다.

다만《일본서기》의 가야 기록이 한국 국내 계통 기록보다 자세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백제계 사서를 통해 전해진 것이고 '백제의 입장'을 거쳐서 남은 기록이므로[24] 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또《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주성과 천황 가문, 일본 조정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대 역사서 특유의 서술 태도 때문에 일본의 신화시대와 한국 관련 서술 등은 이 책에 쓰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비록 그 바탕에는 귀중한 사료가 가득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일본을 상위에 놓는 방향으로 왜곡 혹은 과장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파일: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당부.jpg
六月辛酉朔壬戌, 遣使詔于百濟曰, 德率宣文, 取歸以後, 當復何如. 消息何如. 朕聞, 汝國爲狛賊所害. 宜共任那, 策勵同謀, 如前防距.
6월 신유삭 임술(2일)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덕솔 선문(德率宣文)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박적(狛賊)[26]의 침해를 받았다고 한다. 임나와 함께 잘 논의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명했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당부함
시기상, 다음으로 등장하는 기사는 冬十月, 遣三百七十人於百濟, 助築城於得爾辛로써 왜국이 인부 370명을 파견해 백제의 득이신(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다.

또한 백제에 가려 부각되지 않을 뿐,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도《일본서기》는 생각보다 중요한 사료다. 예를 들어《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이 '이리카스미'로 나오는데, 실제 고구려인들의 음차를 적었기 때문에 고구려어 발음 연구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또한 장수왕대나 안원왕대에 발생한 고구려의 내부 반란에 대해서도《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에 없는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어[27] 고구려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다. 이는 왜국의 동맹인 백제가 고구려와 육로로 접해 있어 백제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들을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왜국 역시 고구려와 사신을 자주 주고 받아 비교적 고구려 내부의 상황에 대해 왜국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역사서도 다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일본서기》는 위와 같이 '무조건 일본이 짱이다'라는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다. 19~20세기 초중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신뢰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일본의 역사학자들조차도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일본서기》의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과장들은 당연히 거르고 본다. 즉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하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과 교차검증연구를 필요로 하는 신중함이 필요한 역사서다.

11.4. 임나일본부설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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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일본서기》에서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김현구,《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하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는커녕 오히려 반박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수하'였거나, 제국과 제후국의 관계로 한반도 남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상국이 하국에게 종속되어 있는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실제로는 백제가 상국이고 일본이 백제 아래에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 김현구는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 保和)[28]와 임나일본부설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자《일본서기》를 근거로 들어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반박했다.《일본서기》를 근거로 든 주장이었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현구의 주장과 같이 왜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백제왕에게 부탁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자면,
548년 긴메이 덴노(흠명천황)가 백제왕에게 서신을 보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임나와 힘을 합쳐 방어해 달라고 당부함
544년 흠명천황이 백제의 성명왕(성왕)에게 임나를 세워달라고 요청함
543년 11월 왜왕이 임나에 있는 백제의 군령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함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김현구 교수가 직접 예시를 들었던 기사는 한반도 관련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각각 541년 4월, 543년 11월, 544년 2월, 544년 11월 기사다.

파일:543년11월.jpg

요약하면,《일본서기》에는 소위 '삼한정벌'이나 '임나 4현을 주었다'는 내용 등 당시 일본이 한반도 국가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위에 있었다는 뉘앙스로 서술하려 시도한 흔적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왜왕 자신의 힘이 한반도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에게 외교적으로 부탁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일본부' 같은 식민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적인 증거가 된다.

11.5. 한국 사학계의 입장과 연구 관점

《일본서기》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태도는 한마디로 "뭐지 이건?"이다. 일본이 고대 시절 한반도의 삼국 모두를 복속시키고, 종주국으로 행세했다는 주장이 실려 있는데, 문제는 한국 측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전혀 들어맞지 않으며, 중국 측 자료까지 갖다놓고 비교해보면 혼자 삼천포로 빠지는《일본서기》의 내용에 막막해진다. 사실《일본서기》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서로 모순되는 구절이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사서도 오류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29]《일본서기》에 있는 한반도 기록은 당대 한국과 중국에 남은 어떤 사료보다도 자세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예컨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아직기왕인, 고구려에서 양원왕 즉위시에 왕위 계승을 놓고 도성에서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 외에《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의 목을 베었다고만 기술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그 전후의 상황을 주고받은 대화까지 자세히 서술하는 등[30] 백제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을 제법 실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나마《삼국사기》에서 다뤄주지만 가야에 대해 제대로 다뤄주는 건 현존하는 동양 역사서 중에《일본서기》가 거의 유일하다.[31] 이러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대략 난감한 것이다.

물론《삼국사기》나 고고학적 자료들과 대조해서 평가해봐야 되겠지만,《삼국사기》보다, 특히 백제 및 가야와 관련해선 내용적으로 풍부하다 보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한•일 역사학계는《일본서기》의 내용 중 신뢰할 만한 부분을 추출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는 풍납토성의 발굴과 신라의 나정 발굴, 고구려사의 연구 발전으로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간 지금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다.[32]

이런 '복어' 같은 책으로까지 불리던《일본서기》를 그나마 '교차검증이 가능한' 정도로 끌어올리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 1970년대 천관우가《가야사연구》를 내놓으면서였다. 천관우가 낸 결론은 임나일본부가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였다는 이른바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이었는데, 천관우의 주장은《일본서기》안에서 임나일본부가 백제군의 사령부라면 왜 임나일본부 소속의 인사들이 백제 본국의 명령을 듣지 않고 버티는지, 그리고 임나일본부 소속의 왜계 인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어째서 왜왕이 쥐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천관우가 해당 주장을 발표하면서 제시한《일본서기》의 해석 방법, 즉 《일본서기》의 기록 속 한반도 관련 사건[33]의 주체를 일본 천황이 아니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한다[34]는 관점이《일본서기》의 왜곡을 걷어내고, 교차검증을 통해 사서로써 써 먹을 수 있는, 나아가 식민사학이 제공해 오던 한•일 고대사 해석의 구도를 깰 수 있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이다.《일본서기》의 한반도, 특히 백제 관련 기록들을 볼 때 그 주어를 왜국이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한다는 논리 자체는 100%까지는 아니라도, 사용하면 한국 측 사료나 고고학과 들어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김현구노중국, 이도학, 이희진 같은 한국 사학계의 연구자 대부분이 받아들여 사용하게 되었으며, 과거와 달리《일본서기》를 재해석해 백제사 및 가야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유튜브에 2018년부터 올라온《일본서기》강의가 있다. 전문단체가 하는건 아니고, 개인이 취미로 삼아 올리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구글 지도를 활용해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표시해둔 지도를 띄워놓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판본을 읽으며 내용을 해설하는 방식이라 일반인들이 참고할 만하다.(링크).

11.6.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신라 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했다.
《일본서기》(신공 즉위전기) 200년 10월 3일
어떤 책(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 신라 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 마중을 나와 무릎을 꿇고 황후의 배를 잡은채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이고, “신은 앞으로 내관가가 되어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끊이지 않고 조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신공 즉위전기) 200년 12월 14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허구성을 이야기할때 주로 드는 논거는《삼국사기》의 교차검증되는 신라측 인물들의 연대가 맞지 않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삼국사기》<신라본기>상 파사 이사금(파사매금)은 2세기의 인물, 미사흔(미질기지 파진간기)은 4~5세기의 인물, 석우로(우류조부리지간)는 3세기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21세기에 들어선 오히려 이주갑인상을 한《일본서기》 기년(200 + 120 = 320년)이 더 정확할 때가 있으며, 실제 미사흔과 석우로 등은 해당《일본서기》기사의 이주갑인상 시기인 4세기대의 인물이 아니냐는 설도 힘을 얻고 있다. 즉,《일본서기》와 비슷한 방식으로,《삼국사기》<신라본기>의 저본이 되는 신라인들의 기록 역시 초기 기록이 구전으로 전래되다가 후대의 신라인들이 연대를 짜맞춘 것이기 때문에《삼국사기》역시《일본서기》의 연대와 교차검증이 필요한 사서라는 것이다.

사실 신라가 고고학적으로 제대로 된 고대 국가 형태를 구축한 건 빨리 잡아도 4세기 초며, 굳이 고대 국가가 아니고 하나의 어떤 결집된 정치체로 기준을 꽤 완화한다한들 서기 2세기 후반 경이 아직은 한계다. 이런 고고학 조사를 통해《삼국사기》의 초기 연대가 잘못된 것이 밝혀진 예시인,《삼국사기》<신라본기> - 파사 이사금 - 조의 기사를 주목해 보자.
22년(서기 101) 봄 2월,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임금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삼국사기》에는 파사 이사금의 시대인 2세기에 월성을 축조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월성의 축조 시기를 아무리 최대로 올려잡아도, 2021년 월성의 서성벽 조사 결과 4세기 초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다.《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자체는 사실이되 기년에는 오류가 있음이 고고학으로도 증명되는 것이다.[35]

한편, 백제는 결집된 고분군, 성곽과 도시 유적, 일원화된 귀족 문화 등의 존재로 인해 늦어도 3세기 중후반에는 고대 국가 체제를 이룬 것이 분명해보이지만, 신라는 그러한 단계에 이른 것이 4세기 초로 추정된다. 고로 백제에는 4세기 이전의 기록들도 있었을 개연성이 높아보이지만, 신라보다 빨리 멸망했기에 남은 자료가 적었고, 그나마 자료는 많이 남은 신라마저 이런 문제로 4세기 이전의 기사들은 확실히 그 기년을 영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있다. 그러니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일 공산이 큰데, 중국의 기록인 <양직공도>에선 6세기 초까지 신라가 제대로 한자를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나와있으며 실제로 신라측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금석문도 6세기 이후의 물건들이다. 고로《일본서기》의 기록이 단순히 연대를 조작했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할 것은 아니고, 오히려《삼국사기》 역시 연대 조작이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일본서기》와 교차검증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2. 한국어 번역

1987년에 성은구가 발췌번역본을, 1997년에 심리학자인 전용신이 완역본을 내놓았다. 전용신의 번역본이 널리 읽혔는데 그러다가 2013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사학계에서 제대로 된 번역본을 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사학자들이 모여 번역한 것이니 사실상의 오피셜이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은 각 30,000원 정도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자료실에서 pdf로 볼 수 있다. 링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운영 중인 동북아역사넷에서 온라인 열람도 가능하다.

다만 주석을 달 때 참고한 자료가 너무 오래되어 본문의 지명과 주석에 달린 현재 지명이 전혀 맞지 않고, 학설 또한 오래되어 폐기된 학설이 버젓이 실려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심심하면 이합집산하니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주석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예를 들어,
  1. 1921년에 폐지된[36] 이래 행정구역으로서 기능하지 않는 '군'을 행정구역으로 실어두었다. 현재 일본에서 '군' 단위는 옛날부터 불러왔으니 그냥 존치 중인 지리적 구분에 불과하다. 주석에 실린 무수한 군(郡)은 지금 거진 다 시(市)로 승격되거나 정(町), 촌(村)으로 갈라진 지 오래다.
  2. 동북아재단의 역주서가 나온 2013년 당시 대구광역시 현풍면이었던 현풍읍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도 아닌 '경상북도 현풍군'으로 게재했다. 현풍군달성군으로 편입된 것이 1914년인데 1번의 군 행정구역과 같이 생각해보면 주석을 달 때 참고한 문헌이 보통 구닥다리가 아니다.
  3. 大字雷[37]를 大宇雷로 적지를 않나, 大和郡山市(야마토코오리야마 시)를 군(郡)이 들어갔다고 大和郡 山市라고 띄어 써버리는 등 오기도 수두룩하다.

이렇게 지명 주석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류 투성이니, 인물 주석이나 관련 학설 주석의 내용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도 재단 측에서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일본서기》 관련 연구서가 몇 권 출간되어 있다. 읽어볼 만한 책들은,
《일본서기》적인 관점을 정리한 책을 보고자 한다면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일본역사》를 읽으면 그 개략이나마 알 수 있으니 관심이 있는 역사 지망생들은 참고하도록 하자. 단, 한·중 측의 사료도 같이 보는 NPOV적 입장은 필수다.

[1] 왜왕 무(武), 와카타케루 대왕, 5세기 후반[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p8[3]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당시 왜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4] 두 사람은 당나라의 한자음(북방음)에 정통하여, 일본 최초로 대학료(大学寮, 율령제 시대 일본의 최고 교육 기관) 소속의 음박사(音博士, 온하카세)에 임명되었다.[5] 이 한자는 이렇게 읽는다는 식의 주석이 상당히 많이 달려있다.[6] 이때문에 한·중 사학계에서는 귀화인 대신 '바다를 건너 넘어온 사람'이라는 의미의 도래인을 쓰도록 권장한다. 물론 일본 측에서도 이 도래인을 쓰기는 하는데, 귀화인도 병용하는 형편이다.[7] 그마저도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오나라와 통교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오나라는 중국의 남쪽 지방인데 고구려를 통해서 육로로 교류했다는 것 자체가 억지다.[8]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한국의 경우,《삼국유사》와《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삼국시대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국내 사서가 아예 없다. 비석 등의 금석문이나 지방의 향토 사료, 몇 가지 종이(민정문서 등)나 목간 유물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으로, 나머지는 당대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을 참조하여 추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당대 삼국에서도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지만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9] 이주갑인상의 경우, 왜곡이 규칙적이기에 이를 역으로 추적하여 실제 연도를 추정하기도 한다.[10] 일본 신화는 신화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진구 황후는 아예 허구의 인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11] 신채호견해, 다만 이 의견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봐도 좋다.[12] 다만《조선왕조실록》 또한 완벽한 것은 아니다. 특히 1차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태종을 중심으로 왜곡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고,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세조를 중심으로 왜곡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며, 일본 제국이 개입하여 서술한《고종실록》과《순종실록》은 정도가 심해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빠져 있다.[13] 물론 학계의 정설까진 아니고, 흥미로운 가설의 수준이다. 다만 알렉산더 보빈이 사망해서 후속 연구는 다른 사람들이 이어야 될 판국이다.[14] 반대로 말하면 히미코 일가는 야마토 정권의 직계는 아니었다는 소리가 되며, 그렇다면 천황이 중심이 된 야마토 정권 세력은 히미코 여왕 시절 그녀를 따르던 주변 소국들 중 하나였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지역에 있었던 정치 세력이었는지 등의 의문이 남는다.[15] 다만 의도적으로 2갑자를 당긴건 아니라고 보는 의견도 있는데,《일본서기》가 여러 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뒤섞이며 혼돈이 생긴 것 아니겠냐는 시각이다.[16] 심지어 진구 황후 시절 일본이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있었던 소국인 침미다례는 일본 입장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지, 남쪽이라고 볼 여지는 하나도 없는데도 남쪽 오랑캐라 '남만(南蠻)'이라 적었다.[17] 물론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신화시대는 말 그대로 그냥 신화다.[18] 당시 일본의 항해기술 수준은 임나일본부설을 참고.[19] 백강 전투만 보더라도 일본은 준비에 긴 세월과 항해기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모든 것을 파악한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과 일본 정규군을 철저히 농락하여 궤멸시켰다.[20] 이렇게 누가 봐도 어설픈 마무리 때문에《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라는 상부의 지시에 무언의 저항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있지만,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21] 여담으로 오늘날엔 고대사 특히 백제 연구자라면 거의 필수적으로 한번쯤은 건드려보는 서적이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임나일본부설 등 한국 사학자들 입장에선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주장이 있다보니 취급을 잘 안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천관우가 주장한 주체교체설(요약하자면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바꿔서 읽으면 말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관련 연구들이 지속되면서 21세기에 들어선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사실 한자나 일본어를 모르면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책이라 매니아 수준에서도《일본서기》를 못보는 경우는 많았다. 서투르나마 완역본이 나온 것이 1997년이었다. 실제로《일본서기》는 지금도 한국의 일반인들에겐 그렇게 알려진 역사서가 아니다.[22] 《일본서기》 720년,《삼국사기》 1145년[39][23] 반대로 보면 이미 멸망한 나라이기에, 일본 입장에서도 설령 왜곡한다치더라도 시기적으로 큰 문제는 없겠지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24] 당연히 가야를 낮추고, 백제를 띄우는 서술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25] 다만 이는《일본서기》의 왜곡이 아니라, 일본어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질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일본에서 당대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26] 狛은 글자의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곰이라는 뜻의 貊과 일맥상통한다. 이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웅진이라는 지명을 당대의 백제인들이 어떻게 불렀는지를 알 수 있는데, '고마나리'라고《일본서기》에 기록 되어 있다. 고마는 웅진의 웅(熊)=곰에 대응되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Kuma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서는 고려=고구려를 Koma라고 부른다. 백제와 고구려 모두 맥족이라는 의식이 당대에도 투철했던 것 같다. 또한 狛의 일본어 훈독 또한 koma다. 안장왕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그들의 성씨가 狛이며, 실제로 koma라고 읽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고구려의 일본어인 koma는 박적=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것은 백제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일본어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27]신집》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삼국사기》의 고구려 관련 내용은 미천왕 혹은 광개토대왕 대까진 그래도 제법 내용이 풍부한 반면, 장수왕 이후부턴 거의 중국 측 사서 기록에 의존하고 있어 고구려 의 내부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다.[28] 김현구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S씨라고 칭했다.[29]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수정론)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고이왕 이전의 백제 왕들이 당대 인간으로서 달성하기 어려운 수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나(이는《일본서기》의 초기 천황들의 연령대에서도 많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연대를 끌어올리려다보니 비인간적인 연령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삼국의 건국 연도를 두고 이견이 있다.[30] 《일본서기》에는 말을 먹이는 종 고도(苦都) 또는 곡지(谷智)라고 기록했다.(《삼국사기》에는 김무력의 비장이라고 서술됨.) 이름이 비슷하기에 본래 말 먹이는 종이었으나 왕을 참하여 비장으로 인생 역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31] 《일본서기》가 가야를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가야와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한다. 한국 측 사서엔《삼국유사》가 그나마《가락국기》를 인용해 가야 관련 내용을 일부 남긴 정도다.[32] 다만《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실질적인 국가로서 삼국이 정립된 때는 훨씬 후대라고 보는데, 백제의 국가 성립과 관련된 풍납토성이 3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한다. 한때 방사선탄소연대치로《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신뢰도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고, 이후에는 실제 측정을 했던 기관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게다가 상대편년에서는 풍납토성의 아래에서 발견된 전문도기(錢文陶器: 동전 문양을 새긴 도기) 때문에 3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에서는 대세다.[33] 대표적으로 근초고왕 때의 가야 7국 평정 기사.[34] 즉 원래는 해당 사건들이 백제가 주도한 정벌인데, 훗날《일본서기》가 편찬되면서 천황의 권위를 높여 주기 위해 주어를 백제에서 왜로 바꾸었다는 것이다.[35] 물론 파사 이사금의 재위 연대를 4세기로 추정하는 건 너무 내려잡은 것이다.《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23년 조에 금관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등장하는데, 금관국의 왕릉군으로 추정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초축 시기가 서기 3세기이기 때문이다.[36] 일본은 한국처럼 시와 군을 두었고, 군 산하에는 정과 촌을 두었다. 그러나 도도부현-군-정촌의 구조가 옥상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군장(군수), 군청, 군회(의회)를 폐지했다. 하지만 군 자체를 폐지한건 아니라서 가끔 주소를 쓸 때 사용한다고 한다.[37] 오아자 이카즈치. 오아자(大字)는 한국의 동 정도 되는 행정구역이다.[38] 이 책에서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기기신화를 지토 천황후지와라 후히토, 특히 후히토가 주도적으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기기신화의 성립에 있어서 덴무 천황, 지토 천황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었으리란 설은 이미 기기신화에 관한 학자들간 논의가 있으나, 이 책의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이러한 논의를 좀 더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기기신화와 관련된 다른 연구 성과를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기기신화 성립 이전 일본의 종교적 토양과, 지토 천황 무렵의 정치적 상황이 기기신화에 반영된 바를 정리, 연구한 책으로는 김후련 교수의《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 일본의 종교사상》(2006, 제이엔씨)을 추천한다.


[39] 현존 기준. 당연히《삼국사기》에 인용된 이전 역사서들도 당시엔 있었다.《해동고기》 등의 몇몇 책들은 조선 후기까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실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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