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왕성국 사건(王城國 事件)은 일본사에서 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734년 12월 6일에 신라에서 파견된 김상정(金相貞)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왕성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다자이후에서 쫓겨난 사건이다.2. 역사
734년 12월 6일에 태재부에서 신라에서 파견한 김상정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고 735년 2월 17일 김상정이 디자이후로 들어왔다가 2월 27일에 타지히노 마히토 아가타모리(多治比 眞人 縣守)가 병부조사를 보내 입조한 취지를 묻고 김상정이 신라가 아닌 왕성국이라 칭하자 돌려보냈다.3. 분석
김상정이 일본 조정에 신라를 왕성국이라 한 것은 당으로부터 인정받은 제후왕의 존재를 강조한 것이며, 신라를 왕성국이라 표방하면서 자국의 우위성을 강조한 것으로 《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 따르면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고,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며 사신을 쫓아낸 것이다.일본 측의 연구에서는 왕성국이라 한 것에 대해 신라가 735년 발해와 당의 대립에서 신라가 군사를 파견해 당의 신임을 얻자 이를 배경으로 일본에 대등한 관계를 요구해온 것이라 주장했는데, 일본의 지배층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희망 사항에 불과하며, 신라는 이전부터 일본을 하위에 두려고 한 것이 보이기에 속일본기의 신라 관련 기사는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이 때 김상정이 송환되었지만 신라의 사절단의 규모가 147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며, 이전까지는 많아야 40명이었지만 이 때부터 100명을 넘었다. 742년에 김흠영의 사절단은 187명, 752년에 이르러서는 김태렴과 함께 한 인원은 700여 명에 달했다.
대규모의 사절단으로 파견된 인원이 모두 입조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외교 임무 이외에 다른 임무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4. 영향
이 사건으로 인해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입경하지 않은 채 다자이후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신라에서도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양국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일어났다.737년 2월에 견신라사가 신라국이 상례를 잃고 사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자 관인 총 45명을 불러 궁궐로 불러 의견을 개진하게 했으며, 22일에 여러 관사에서 의견을 올려 사신을 파견해 이유를 물어봐야 한다거나 군대를 보내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5. 참고자료
- 속일본기
- 8세기 일본과 신라의 공무역과사무역에 대한 고찰 - 이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