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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762년을 전후해, 일본이 통일신라를 침공하고자 했던 일련의 정황들. 그러나 이는 실제 군사적인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애매하게 종결되어 버렸는데, 만약 실현되었다면 백제 멸망 시기의 백강 전투 이후 거의 없었던[1] 대규모로 이루어진 일본의 對 한반도 파병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이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보다 약 600년 이르며, 임진왜란보다는 무려 약 800년이나 이른 것이다. 물론 실현되지 않았으니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아니다.2. 배경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가 신라의 대동강 이남 한반도 병합으로 종결된 이후, 일본은 나당연합군이 침공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규슈에 축성을 하고 수도를 옮길 정도[2]로 불안감[3]을 보였다.[4] 하지만 곧 당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마저 병탄하려 하자 신라는 당과 전쟁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개선 의지를 보였다. 서기 668년 9월(문무왕 8년)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그 예다.[5] 이후 양국은 신라에서 공식적인 사신을 파견한 마지막 해인 779년(혜공왕 15년)까지 교류했는데, 신라는 일본에 45회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은 신라에 25회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나당전쟁 무렵 신라의 주변국이 모두 적국이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을 막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으며, 신라와 일본이 연대한 정황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실제 나당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이러한 상황에서도 신라는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문무왕이 '동해를 지키는 호국룡이 되겠다'고 유언하며 자신을 대왕암에 장사지내게 했던 것은 실은 일본과의 전쟁 위험에 대비할 것을 후대 왕에게 경계한 것이었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즉위 직후에 대왕암 인근에 감은사를 창건하고, 역시 그 인근의 이견대에서 나라의 근심을 막아줄 '만파식적'이라는 신비로운 피리를 얻었다는 설화를 만들어 냈으니, 이 역시 일본에 대한 경계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유사》에는 786년(열조 원성왕 2년) 일본 국왕 문경이 신라를 침범하려다가 적병을 물리치는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금을 보내 만파식적을 요구했다는 설화가 있다. 790년 신라가 일길찬 백어를 사신으로 발해에 보낸 것은 발해와의 관계를 모색하여 발해-일본 사이에 신라가 고립되는 일을 미리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은 자존 의식을 표방하면서 국가 체제를 일신하기 위한 행동을 보였다. 670년에 국호를 '왜'에서 '태양의 근본'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으로 바꾼 것은 그 예이다.[6] 앞서 언급한 일본의 자존 의식 표방, 신라와 당의 관계 호전 등을 계기로 양국은 외교 형식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당을 본떠서 천황제 율령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일본 조정은 대외관계에서도 신라를 하위에 놓는 외교 형식을 고집했다. 일본의 자존 의식은 신라에 대한 상국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신라 사신이 가져온 선물을 제후국이나 지방에서 바치는 조공으로 간주했다. 이에 당시 신라는 한동안 일본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로서는 아니꼬왔겠지만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와 충돌하면서 국력이 소진되었는데 일본까지 적으로 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나당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자 신라의 태도는 변하는데, 이러한 신라, 일본간 외교적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성덕왕 시기인 735년에 일어난 일명 왕성국 사건이 일어났고,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표현을 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이 왕성국이란 기록은 일본측 사서에만 등장하고, 한국측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사건이 있기 3년 전인 731년 성덕왕이 신라로 쳐들어온 일본 수군 300척을 대파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시기 신라가 일본에 대해 자신감이 넘칠 시기였다. 사족으로 성덕왕 시기 신라, 일본 관계를 설명하자면, 722년 모벌군성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양국간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7] 720년대 《속일본기》 기록을 보면, 이 시기 상재상 김순정(경덕왕의 장인, 수로부인의 남편)이 예를 갖춰 친일정책을 펴 양국이 화친 무드였는데, 726년 6월 김순정이 사망하자 덴노가 슬퍼했고 이후 김사공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친당•반일정책을 펴기 시작했다고 비난하는 구절이 나온다.
하여튼 이렇게 관계가 악화되던 와중에 일본 조정은 736년 사신을 파견했으나 별 소득 없이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속일본기》 737년 기록에 보면 일본 사신이 "신라가 항례(恒禮)를 잃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라가 일본 사신을 어떻게 대접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신라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당나라와의 관계도 호전되고 국력도 쌓았기에 더이상 자기들이 상국인냥 갑질하려는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허나 이런 보고에 자존심이 상한 일본 조정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신궁에 신라의 무례함을 고하면서 이때부터 '신라를 응징하자'는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군불때기 수준이라서 성덕왕이 죽고, 그의 아들 효성왕이 즉위하자 한동안 양국은 소강 상태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8] 그러나 5년이란 짧다면 짧은 치세의 효성왕 시기를 지나 경덕왕 대에 이르자 두 나라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이때 일본은 신라 사신이 덴노에게 바치는 물건을 상국에게 바치는 진상품을 뜻하는 '공조'라고 칭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무리한 요구라며 항변하면서 이를 토산물의 의미인 '토모'나 대등한 국가 간에 교환하는 선물을 의미하는 '국신'으로 칭하고자 했다.[9]
742년,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신라는 입국을 아예 불허했고[10], 752년 신라에서 온 의문의 김태렴 일당이 도다이지를 방문했지만, 고켄 덴노가 다음해인 753년 신라 경덕왕에게 사신을 보냈을때 신라는 일본 사신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쫓아냈다.[11] 더하여 양국은 대당외교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이른바 쟁장사건을 벌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2][13] 그리고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일본은 이를 갈며 본격적인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 전개
3.1. 침공 준비
758년, 일본의 정사 오노노 다모리가 발해에 국사로 파견되었다. 보통은 발해가 먼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일본이 답사를 보내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발해와 일본은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이유인즉, 752년 발해 사신이 발해 문왕의 국서를 들고 일본을 찾았는데, 일본이 여기서도 꼬장을 부렸는지 국서에 신하를 칭하지 않아 예에 어긋난다며 화를 낸 탓이었다.당연히 이런 일본의 어이없는 태도에 발해도 격앙했고,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6년여 간 사신 교류가 없을 정도였다.[14]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일본은 사신을 보내 발해 문왕을 접견하는데, 요지는 우리가 신라를 칠 계획이니 도와달라는 것. 후술되어 있듯 문왕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일본 내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는 759년 전후로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다음은 《속일본기》에서 발췌한 당시 일본의 정황이다.
19일 배 500척을 만들게 하였는데 북륙도 여러 나라에서 89척, 산음도 여러 나라에서 145척, 산양도 여러 나라에서 161척, 남해도 여러 나라에서 105척을 모두 한가한 달에 만들되 3년 안에 마치도록 하였는데,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준닌 덴노 천평보자 3년(759) 9월.
9일 미농, 무장 두 나라의 소년들에게 명하여 나라마다 신라어를 배우게 하였다.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정월.
16일 참의 종2위 무부경 등원조신거세마려와 산위 외종5위하 토사숙녜견양을 보내어 향추묘에 재물을 바치고, 신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준닌 덴노 천평보자 6년(762) 11월.
종5위하(從5位下) 고마노아손 오야마(高麗朝臣大山)를 무사시노스케(武藏介)로 삼았다. - 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겨울 10월 임자(壬子) 초하루
무사시노스케(武藏介) 종5위하(從5位下) 고마노아손 오야마(高麗朝臣大山)를 견고려사(遣高麗使)로 삼았다. - 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겨울 10월 계사(癸酉)
3.2. 흐지부지된 침공 계획
정작 일본이 침공 목표로 한 762년, 일본은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배 500척을 만들고 신라어를 익히게 하는 등의 의욕적인 행보와는 달리 처음부터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일이 싹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사실 일본은 전쟁이 실익도 없고 명분도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라와의 경제적 교류가 필요하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762년 이후에도 신라는 수백 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수차례 일본에 파견하여 경제적 교류를 타진했고, 외교 관계의 개선을 도모했다. 일본 역시 외교 관례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라 사절단과 활발한 경제적 교류를 벌였다.일본은 발해도 이 싸움에 끌어들이고자 꼬드겼으나 발해는 동참하지 않았는데, 명분과 실리가 없을 뿐더러 발해 주변 정황상 신라와 함부로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발해는 신라와 직접적인 대립 관계가 아니었으며, 안사의 난에 의한 영향으로 발해와 당의 경계 지역인 랴오닝 성 일대가 불안정하기도 했다. 결국 남북국 시대 발해와 신라의 군사적 충돌은 성덕왕 31년(733년) 당나라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 남쪽을 공격하려 했으나 폭설로 인해 교전 없이 귀환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다.
한편으로는 적대적이던 발해와 신라 양국이 이 시점을 전후로 교류를 시작했다는 정황 증거들도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신라도"라는 도로의 존재인데, 《신당서》에 의하면 이 신라도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에서 시작해 남경 남해부를 거쳐 신라의 천정군[15]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상경에서 신라 천정군까지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하는데 역참까지 개설될 정도면 통행량도 생각보다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경덕왕대에 천정군에 "탄항관문"을 쌓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기존에 신라는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북쪽에 장성을 축조했으나, 경덕왕 시절에 천정군에 탄항관문을 쌓았다는 점에서 발해와의 도로 건설 및 국경 관문의 설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경덕왕은 일본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일본과 발해의 양면 공격을 우려했고, 이에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발해와 전격적으로 관계 개선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 또한 북방이 불안한 상황에서 신라와도 불안한 국면을 유지하느니 남쪽 후방을 안정시켜서 북방 방어에 더 전력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걸로 보인다.
결국 발해는 시간만 질질 끌었고, 일본에서는 신라 침공을 주도하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결국 실각하면서 일본에서도 신라 침공 계획은 없던 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계획을 주도했던 나카마로 자체가 실제로는 공격할 의지가 없었고, 자신의 입지 등을 위해 단순히 일본 내 여론의 반전을 꾀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나카마로는 자신의 줄어드는 정치적 입지에 초조함을 느껴 764년에 거병했으나 실패하고 참수당했다.
만약 당시 일본이 진짜로 신라를 공격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이 시기 신라는 전성기 성덕왕-효성왕-경덕왕 치세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으며, 당시 일본의 항해술을 검토해봤을 때 그만한 대군을 일사불란하게 상륙시키기란 한계가 명확했고, 상기된 문무왕릉 얘기처럼 딱히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헤이안 시대 전기 자체가 도호쿠의 에미시와의 대결로 점철되는 시기였고, 일본에서는 간토와 도호쿠 일대에 많은 병력들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때 신라를 침공했었으면 전선이 양면화되어 군사력 공백으로 도호쿠 일대가 일본과 별개의 정체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4. 기타 기록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신라와 일본 사이에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16]
- 《삼국사기》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16]
- 《삼국사기》
이 기록들 외에도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 전해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부여풍(扶餘豊)[17]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가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백제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했다고 한다.
당시 정가왕은 미야자키에 정착한 뒤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과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했다. 그러나 718년 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하여,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18]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의 신라의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왜국 병선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기타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도 참조.
5. 참고항목
[1] 기록 부족 등의 이유로 언급도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덕왕 시절인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왔으나 대패하고 물러간 적도 있는 등 아예 없다고 보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2] 시가현 지역으로, 비와 호를 끼고 있는 분지 지형이므로 방어에 필요한 지형지물이 충분했다. 아스카 시대의 중심지였던 야마토 국(현재의 나라 현 남부)과는 거리가 상당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아스카 시대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장 나당전쟁이 지속되었던 672년에 즉위한 덴무 덴노의 궁도 아스카 지역에 지어졌으며(아스카노 기요미하라 궁, 飛鳥淨御原宮) 외부의 위기와는 별개로 국내적인 정치 조직의 정비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나라 시대는 이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난 710년에 개막한다.[3]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 당시 일본은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던 백제를 도왔으며, 백제의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수군 함대를 파견할 정도였다.[4] 당시까지만 해도 문명들이 별로 크지 않아서 연안항해로도 문명의 성향이 섞일 정도의 무역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반도", "일본 열도", "중국"은 딱 잘라 분리할 수 있는 문화권이 아니었으며, 일본은 백제와 가야 등 한반도 국가와 비슷한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5] 가을 9월 12일 신라가 사록 급찬 김동엄 등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6일 중신내신이 승려 법변과 진필을 사신으로 삼아 신라의 상신 대각간 유신에게 배 한 척을 주어, 동엄 등에게 딸려 보냈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7년.[6]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이라 했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670).[7] 다만 720년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해동제국기》 기록을 사실이라고 전제하면 이 역시 애매한 부분이 있다.[8] 740년 일본에서 신라에 사절을 파견해 마찰없이 귀국했다는 기사가 있어 전과 같이 악화일로만 걷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효성왕도 2차례 사절을 보냈는데, 두 번 모두 거절당했지만 이 사절의 공식적인 귀국 이유는 지도층까지 피해를 입은 천연두와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일본 국내에서 사신을 접대할 수 없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때문에 효성왕 시기 양국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9] 25일 신라 사신들을 조사하는 다치비진인토작 등이 "신라 사신이 조를 '토모'라고 개칭하고 서에는 물건의 숫자만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옛 예를 살펴보니 상례를 크게 벗어났습니다."라 하였다. 태정관이 처분하기를 "마땅히 수수 이상을 불러서 예를 잃은 상황을 알리고 곧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속일본기》 권15, 쇼무 덴노 승평 15년.[10]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삼국사기》 <경덕왕> 조.[11] 경덕왕(景德王)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삼국사기》 <경덕왕> 조.[12] 30일 부사 오오토모노 스쿠네 코마로(大伴宿禰古麻呂)가 당나라로부터 도착하였다. 코마로가 아뢰기를 “대당 천보 12년(753) 계사 정월 초하루 계묘에 백관과 여러 번국이 신년을 축하하였는데 천자는 봉래궁 함원전에서 조하를 받았습니다. 이 날 우리는 서반의 제2 토번 밑에 있었고, 신라 사신은 동반의 제1 대식국(아바스 칼리파조) 위에 있었습니다. 코마로가 따지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신라가 대일본국에 조공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동반의 위에 있고 우리는 오히려 그 밑에 있으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장군 오희실이 코마로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신라 사신을 서반 제2 토번 밑에 두고 일본 사신을 동반 제1 대식국 위에 서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속일본기》 권19, 고켄 덴노 천평승보 6년(754) 정월.[13] 다만 이 사건은 《속일본기》 이외 중국이나 한국 측 사료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이 해에 신라 사신은 조하식전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식국과 토번도 입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로 이 기사는 왜곡 혹은 윤색이 가미된 것으로 추정된다.[14] 다만 발해의 대일 사절 파견은 원래 6년은 기본이고 길면 12년씩도 걸렸다. 동해 횡단 항로의 난이도가 신라에 대한 근해 항해의 난이도보다 훨씬 높았고, 일본에서도 후대에는 12년에 한 번씩만 오라고 할 정도였다. 유일하게 연 단위로 외교가 진행된 시기가 750년대 후반부터 760년대 초반 시기였다.[15] 오늘날의 함경남도 덕원 지역이다.[16] 다만 《속일본기》 등 일본 측의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상기한 해동제국기 관련 기록도 한반도엔 딱히 남아있는게 없는데, 이게 기록의 미비나 소실 탓으로 누락된건지 아니면 실제 사건이 있었지만 일부러 왜곡, 축소한건지는 오늘날엔 관련 자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17]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18] 다만 이에 대해서 나당연합군이나 신라군이 아니라 일본 야마토 조정의 반란군에게 습격을 당한 것일 거라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사실 일본 미카도 신사의 《마카도 신사 연기》(神門神社縁起)에 따르면 정가왕(禎嘉王)이 일본으로 피난을 간 시기는 756년이라고 한다. 심지어 장남 복지왕(福智王)에게 양위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내전(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일어나 그 난을 피해 일본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실제 역사와는 시기적으로 괴리감이 큰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