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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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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신라 대항 국가
국호 장안(長安)
국성 강릉 김씨(江陵 金氏)
주요 군주 헌창왕(金憲昌)
수도 웅진(熊津)
군주호 국왕(國王)
역대 연호 경운(慶雲)
존속기간 822년

1. 개요2. 역사3. 평가4. 역대 장안국왕5. 관련글

[clearfix]

1. 개요

남북국시대 후기신라진골 귀족 출신 웅천주 도독 김헌창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세운 왕국이다. 정통왕조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2. 역사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태종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단절되며, 신라 중대가 끝나고 내물왕 계통의 하대가 시작된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라 화백회의 전통에 따라 차기 왕을 가리는 귀족회의가 열린다. 여기에서 태종 무열왕의 5대 손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선덕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당시 내물왕의 12대 손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38대 원성왕이다.

왕위계승싸움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서라벌 정계를 떠나 본인의 장원(莊園)과 세력이 있는 명주(현 강릉시)지방으로 물러나게 되고 원성왕 2년(786) 원성왕이 그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였다.[1]

김주원의 차남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도 중앙 정계에 남아 활동했는데 809년, 숙부 김언승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으로 즉위하자 그의 세력은 신라 중앙 정계에서 퇴조하게 되었다.

822년 3월, 김헌창은 마침내 웅천주 도독으로 재위 중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2]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칭하며 독립국을 세우고 즉위하였다. 김헌창은 자신의 관할인 웅천주와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4개 도독과 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 여러 군현수령을 협박해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그러나 반란 초기에 청주(현 경상남도 진주시)도독 향영(向營)이 배신하여 추화군(현 밀양시)으로 달아나 반란을 알렸고, 신라 북쪽의 한산주, 패강진, 수약주, 북원소경, 하서주나 수도 금성과 가장 가까운 삽량주 등은 김헌창의 반란을 미리 알았고 가담하지 않고 스스로 성을 수비했다.[3]

신라 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장안국을 토벌하기 위하여 즉시 군사를 출동시켰다. 김헌창은 장수들과 군대를 보내 주요 도로를 미리 차지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신라군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둬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진 보은군 삼년산성을 함락시켰다. [4]

신라군은 삼년산성 함락 후 속리산으로 진군해 장안군을 격파했고, 김균정성산에서 승리를 거두고 신라의 여러 군대가 장안국의 아성인 웅진성에 집결하여, 크게 싸워 이기면서 장안국의 병사를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김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해 웅진성에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신라군이 성을 포위해 10일 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자살했다.

장안국 멸망 후 웅천주에서 도망친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김헌창의 부하이자 측근인 승려 수신(壽神)의 도움으로 한산주의 산적 세력에 의탁하여 3년 후 825년(헌덕왕 17년) 고달산(현 북한산)에서 수신의 산적 무리 100여 명과 함께 재차 난을 일으켜, 남평양[5]에 도읍하기 위해 공격하였지만 한산주 도독 김총명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하고 잡혀죽었다. 이로써 장안국의 여명은 완전히 사라졌다.

3. 평가

김헌창의 난과 장안국은 후세의 후삼국시대의 전조였다. 김헌창 본인이 신라 무열왕계 왕족의 대의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전후의 신라 말 왕위쟁탈전처럼 신라왕을 폐위하고 본인이 스스로 신라의 국왕을 칭했던 것이 아니라 옛 백제 지역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건립하였고 나라 이름을 신라가 아닌 독자적인 장안국 국명을 칭하였다. 이건 80년 뒤 견훤, 궁예와 상당히 비슷했는데 견훤도 신라인으로써 옛 백제땅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건국했고, 궁예도 (자칭) 신라 왕족 출신이면서 신라 왕위가 아니라 옛 고구려 지방민의 민심을 자극해서 새로운 독립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헌창도 80년 뒤에 등장하는 궁예견훤도 그 자신은 삼국시대부터 쭉 신라였던 지역 출신이었지만 옛 삼국 유민의식이 본인들의 거병에 도움이 되니까 명분으로 이용했듯이 당시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옛 백제 백성들의 민심을 알았고 이를 역이용하여 분리주의 성격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이게 가능했던 건 삼국통일의 주체 무열왕계 왕실이 백제계 유민들의 민심을 꾸준히 회유하려 노력했고, 김헌창 자신이 그런 인연을 강조했을 개연성이 크다.

김헌창의 난과 장안국을 백제부흥운동의 변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후의 후백제와 같은 백제부흥운동과 연관될 만한 직접적 근거는 정황상 공주에서 시작했다는 지역적 근거 외에도 여럿 있어 단순 가설로 치부될 견해가 아니다. 신라사에서 최초로 아예 분리된 국가를 세우려 한 시도는 이 김헌창의 난에서의 장안국이 최초이며, 판도와 돌아가는 판세가 훗날 후삼국 시대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6]

장안국의 규모를 보자면 훗날의 후백제에 맞먹거나 더 크고 아름다운 규모[7]였는데도 신라 중앙군이 이를 단기간에 평정하고, 한산주 등 수도에서 거리가 먼 지방의 관리들도 중앙군에 협조할 정도로 9세기 초반의 신라는 9세기 후반과 달리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가진 건실한 체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사회 모순을 개혁하지 못하였고 진골 귀족 스스로 폐쇄적인 태도로 중앙 권력을 강화해 나갔지만, 그에 대항하려는 지방 호족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약 반 세기 정도가 지난 후에 후기 신라의 모순이 격화되어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초래하고 신라는 나말여초의 혼란 속에서 원신라 영역으로 축소된 끝에 결국 멸망했다.

4. 역대 장안국왕

대수 시호 별호 연호 재위기간
1 - 장안국왕(長安國王) 김헌창(金憲昌) 경운(慶雲)  822년
- - - 김범문(金梵文) - 825년

5. 관련글


[1] 김주원은 이후 강릉 김씨시조가 된다.[2] 사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김주원이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지 무려 37년 후로 원성왕 이후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이 세 번이나 왕이 바뀐 후였던데다가 내물왕계로 왕위가 넘어간 뒤에도 그 치하에서 한동안 시중 등 중앙 요직에서 정치를 했다. 그리고 어차피 김헌창 본인 또한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으므로 김주원이 설사 왕으로 즉위했다 하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영 좋지 않은 상태여서 부친의 왕위계승의 명분을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에 덧씌워 김주원계 세력을 주도하려고 치장한 걸로 보여진다. 정작 김헌창이 규합시킬려던 명주 김주원 세력(김주원 본인 및 김헌창의 형)은 정작 이 명분의 당사자인데도 김헌창의 난에 참여하지 않아 계속해서 신라 정계에서 활동했다.[3] 대체로 삼국통일 전 기준으로 옛 백제, 가야 지역 주들이 김헌창에 가담했다가 가야 지역 주는 재빨리 먼저 이탈해버렸고, 옛 고구려 지역 주들은 김헌창에게 가담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신라 조정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도 않으며 대체로 관망하는 중도적 자세를 취했었다.[4] 삼년산성의 전적이 150전 149승 1패라는 소리는 완전한 거짓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전투는 단 2차례이며 1승 1패를 하였다.[5] 한산주 북한산군의 별칭으로 후의 한양군.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6] 황선영 저 나말여초제도사(국학자료원 발간), 충남연사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백제 유민편 참조.[7] 신라 9주 5소경5주(웅천, 무진, 완산, 청주, 사벌)의 도독, 3경(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들,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김헌창의 포섭 시도에 호응해 일시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여 장안국을 구성했다. 장안국의 강역은 80여 년 뒤 등장할 후백제 전성기 때와 비슷하거나 약간 대소동이하다. 후백제는 최전성기 기준으로 무진주, 완산주는 당연히 점거한 상태였고, 청주와 웅천주는 확고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사벌주는 고려와 약 절반씩 나눠가진 상태였다. 장안국의 아성인 웅천주의 치소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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