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한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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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지국 | 월지국 目支國 | 月支國 |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국호 | 목지국(目支國), 월지국(月支國) |
| 존속기간 | 1세기 후반 혹은 2세기 초반 ~ 3세기 후반 혹은 4세기 중반 |
| 소속 연맹 | 마한(馬韓) |
| 위치 |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 |
| 언어 | 고대 한국어 |
| 국가원수 | 진왕(辰王), 마한왕(馬韓王) |
1. 개요
원삼국시대 마한 및 삼한의 사실상 중심지 역할을 한 맹주국이었다.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서기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에 성립했고, 자세한 경과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기 3세기 중반 이전의 시점에서는 건마국 대신 한반도 남부의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246년에 조위군과 벌인 기리영 전투에서의 패배로 쇠락기에 접어들어 신흥국인 한성백제에게 마한 연맹의 주도권을 내주고, 3세기 후반에 백제에게 함락당해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이후 목지국의 잔존세력들이 백제에 저항했으나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대부분은 4세기 중반에 거의 해체당한 것으로 드러나며, 목지국 자체도 4세기 중반에 백제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어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를 목지국으로 보고, 백제의 왕을 목지국의 진왕으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지만, 문헌적[1]·고고학적 근거와 배치되어 정설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일부 사서에 '월지국'(月支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오기일 가능성이 있으며, 실은 '목지국'(目支國) 또한 그렇다.
2. 위치
학자들이 추정하는 목지국의 주요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시ㆍ아산시 일대이다.[2]《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국의 종주국이었던 천안 목지국은 어디까지나 안성천 이남에 위치할 수밖에 없고, 그와 함께 안성천 일대의 무역로를 감제하는 위치도 만족하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있는 지역이라는 조건도 만족한다. 구체적인 위치로는 일찍이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3]한편 최근에는 아산 지역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목지국의 위치를 아산 탕정면 일대로 추측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4] 또한 천안·아산 지역의 곡교천 유역에서 출토된 원통형토기가 서기 3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한정 출현 후 사라지는 점에 주목하여 곡교천 유역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흡수 및 이동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5]
그 외에 대목악군(大木岳郡)의 '목'(木)이 '목'(目)과 한국어 독음이 비슷함을 근거로,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킨 후[6]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축조하고,[7] 탕정성(湯井城)을 쌓은 뒤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거주하게 했다고 하는데,[8] 이는 목지국 일대의 병합으로 늘어난 백제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한 것으로 여겨지며, 탕정성[9]의 근처에 천안이 위치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마한 소국들을 북에서 남으로 나열한 《삼국지》 <위지> - 동이전 -에서 목지국이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것 역시 주된 근거다.
일각에서는 목지국의 이칭 또는 원명(原名)으로 추정되는 '월지국'(月支國)이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 지명이었던 '우견'(牛見)과 상고 한어 재구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홍성군의 석택리 유적을 목지국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당시 한국에 상고 한어음이 유입되어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홍성군 석택리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10] 유적은 서기 3세기 중반에 생겨 융성하다가 4세기 중반에 완전 해체[11]되고, 4세기 후반부터 백제가 직접 지배지로 편성한 걸로 드러나는데, 서기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부터 시작해 고이왕 혹은 책계왕(3세기 후반), 비류왕(4세기 중반) 등으로 쇠락의 폭이 문헌 자료의 근거와 함께 딱딱 맞아떨어지는 천안 청당동 유적과 달리, 홍성군의 석택리 유적은 백제가 목지국의 잔여 세력을 진압하는 4세기 초반에 독자적인 기반이 해체되기에 문헌 자료에 나오는 시기와 맞지 않다.
게다가 3세기 중반이라는 시기는 문헌 사료로 봤을 때, 건국 시기가 백제보다 훨씬 늦고, 고고학 자료로 봐도 한성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인데, 어떻게 봐도 이민 집단인 백제국이 자리잡도록 허락해준 마한 진왕의 본거지인 목지국이 백제보다 늦게 생겼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므로, 홍성에 있었던 거수국이 목지국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목지국의 위치가 천안과 아산 일대임은, 고고학 증거로든 문헌으로든, 목지국을 도와 백제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지역이 다름 아닌 천안과 가까운 내륙 일대(청주, 충주, 보은, 진천, 괴산 등)라는 것에서 드러나는 내러티브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3. 역사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고고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마한 초기의 맹주국을 목지국이 아닌 건마국으로 추정하고 있다.《후한서》<동이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194년경에 준왕이 위만에게 고조선을 빼앗긴 뒤, 자기 수하들을 배에 태워 한반도 남부로 피난해 마한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준왕이 건국한 나라가 건마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조선계 집단이 익산을 중심으로 하여 전북 서부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기록을 보면 마한은 위만조선 이전 토착계 고조선을 직접 이은 후계국가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목지국은 언제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을까? 《삼국지》<위지> - 동이전 -에 따르면 마한에서 준왕의 대가 끊겼다는 얘기가 서술된데다가, 백제와 신라가 초창기 목지국에 조공하던 나라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서기 2세기 어느 무렵으로 추정된다.
건마국에서 목지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중요한 시사점이 두 가지 있다. 첫번째는 한나라가 위만조선의 멸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일이 흐른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마한을 견제하고자 진한 및 변한에게만 쇳덩이 및 철제품 수출을 자유로이 허용하고, 건마국이 이끄는 마한 일대는 강력하게 통제한 사실이 고고학 조사에서 드러났다. 건마국은 이 과정에서 한나라에 대항해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삼한 일대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축소되었을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두번째로 건마국 내에서 고조선인 집단이 다른 집단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현상이 고고학적으로 관찰되며, 중국 사서 또한 건마국의 준왕계 왕통이 어느 시기 이후 단절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보면 마한 초기에는 준왕 집단이 주도하던 건마국이 맹주였으나, 건마국 내부에서 준왕 직계 집단이 그전까지 피지배 혹은 하위 지배 파트너였던 토돈분구묘제 집단[12]에게 세력을 잃기도 했거니와 직계 혈통이 끊어져서 왕통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권위가 떨어졌고, 전한의 견제에 대해 제대로 된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등 현실적인 이유로 삼한 내의 위상이 추락하자 목지국이 유리한 입지를 이용하여 서기 2세기 쯤에 마한의 수장국이 된 듯하다. 물론 목지국이 중화제국의 견제를 해결했다는 정황은 문헌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없으나, 신나라나 후한은 그 이전의 전한만큼 마한을 견제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13]
3.1. 전성기
이 일대에는 본디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고고학적으로는 서기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 무렵 내려온 서북한 고조선인들이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목지국을 형성한 것으로 나온다. 이 시기는 단군조선의 준왕이 한반도 남부로 망명한 기원전 194년 및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보다 훨씬 시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목지국의 건국 세력은 준왕 집단이나 위만조선 유민 집단과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후대의 고조선인들, 즉 낙랑인 혹은 대방인으로 보는 게 논리적으론 가장 무리가 없는 편이다.문헌으로 보면 천안의 목지국은 아무리 늦어도 한성백제 건국 당시에는 건마국을 대신하는 마한의 맹주국이 된 것으로 보이며, 건마국으로부터 자리를 빼았았다.
그(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했다.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삼국지》권 제30, 23장 앞쪽, <위서> 30 - 오환선비동이전 - '변진'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삼국지》권 제30, 23장 앞쪽, <위서> 30 - 오환선비동이전 - '변진'
우두머리를 '진국(辰國)왕'이라는 뜻인 '진왕'(辰王)이라고 했다. 중국측 사서(史書)는 삼한 시대의 한강 이남 여러 부족국가를 진국으로 총칭했다. 목지국의 왕은 진국의 왕이었는데, 진왕은 여러 부족 국가들 중에 세력이 가장 큰 나라의 왕으로서 부족 국가 연맹의 맹주(盟主)를 차지했으며, 한반도 남반부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목지국 역시 그 직할 통치 지역은 오늘날의 시•군 몇개 수준으로 좁았으나, 명목상으로나마 마한, 진한, 변한 3개의 한반도 남부 지역 연맹체가 뭉친 진국이라는 국가로서의 맹주(진왕)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는 기원전 11세기~춘추시대 당시의 주나라와 비슷한 입지였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도 실상 수도와 그 근교 지역만 직할 통치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성 제후들이 통치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주나라의 왕이 중국의 천자로 인정되었는데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혁거세 거서간에게 무례하다고 따진 것을 보아 목지국의 왕, 즉 진왕은 진한과 변한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또한 진국은 연맹체였기에 진한과 변한에 속한 24개의 소국들을 신하로 취급하며 지배했다고 한다.
한편 마한왕을 겸하는 목지국의 거수가 진한 및 변한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위가 있었다는 대목에서 약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는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지방의 목관묘 및 목곽묘의 부장품이 동시기 목지국이 있었을 마한 지역의 분구묘 및 토광묘의 부장품과 비교해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충남 서북부의 마한 최대 무덤 유적인 아산시 탕정면 밖 지므레 유적의 주구토광묘에서 나온 부장품을 보면 철제 무기류의 부장량이 경주 덕천리의 목곽묘에 비해 많이 딸린다. 쉽게 말해 나라의 내실은 목지국보다 진·변한 소국들이 더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 기록과 반대인 이런 상황은 삼한 시기 소국들의 내부 사정을 이해하면 설명이 된다.
첫번째 설로, 당시 삼한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중국 한족과 고조선 유민들이 결합한[14] 한반도 북서쪽의 한사군과 행하는 교역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데 진·변한 소국들이 연안 항해 기술로 저기까지 올라가려면 전라남도를 돌아서 충청도의 목지국이 통제하는 아산만을 통과해야 했다. 즉, 목지국이 우위를 차지한 건 국력 자체가 강력해서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상 경제적, 외교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삼한 일대 소국들이 모여서 정한 일종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주나라처럼 목지국을 명목상의 상전 국가로 둔 것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 설은, 애초에 목지국이 상국의 위치에 있었던 시기, 진한과 변한쪽으로 상당수의 이민자들이 갔다는 것이다.[15] 기록만 봐도 타 지역에서 전란이 일어나 유이민이 많이 발생했을 경우, 이들은 목지국을 거쳐 한반도 곳곳으로 퍼졌으며 목지국의 왕이 사람이 없는 지역을 지정해줘서 그곳에 정착했다는 기록과 여행을 온 중국 사람이 대화가 통하는 마을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즉, 선진적인 문물을 가지고 남하한 이주민 집단이 목지국의 안내를 받아 당시 인구밀도가 적었던 진한 및 변한에 정착했다고 본다면 이들 지역의 질이 더 좋은 것도 이해하지 못할건 없다.
3.2. 쇠락
《삼국지》<위지> - 동이전 -이나《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수록된 기록을 보면 백제와 신라 모두 건국 초창기 소국이던 시절에는 목지국[16]을 상국으로 모시며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다. 그러나 상술한대로 진한의 실력이 만만찮았던데다가 가뜩이나 고구려의 성장을 주목하고 있었던 중국의 조위가 마한의 위험성을 인지하게 되자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되었다.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244년에 벌어진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 휘하의 고구려군을 크게 쳐부수어 강원도 동부 일대의 경로를 확보하게 된데다가 그 시점부터 한동안 고구려는 신경쓸 것 없게 된 조위가 별안간 마한왕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제 진한과 직거래를 트면서 진한을 거의 마한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이 말인즉슨 마한과 마한왕[17]이 삼한 지역에서 차지하는 권위를 조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이러한 조치로 가장 심하게 이익을 침해당하는 건 신분활국(신분고국)을 비롯한 임진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이었으나,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 지배 세력의 입장에서도 크게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기리영 전투 문서 참조.246년에 벌어진 기리영 전투의 결과 경기도 동부, 황해도, 강원도 서부에 소재한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종주국인 목지국을 등지고 조위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진한과의 직거래 루트 또한 이로 인해 완전히 뚫려 마한의 대중국 외교 및 무역 독점권은 실질적으로 부정되었다.
그 결과 목지국의 위상과 국력은 급속하게 쇠락했으며, 그 동안 목지국을 상국으로 인정하면서 조공하던 변한의 구야국, 진한의 사로국, 마한 북부의 백제국, 마한 남부의 침미다례를 비롯한 삼한의 주요 제후국들이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만 목지국도 패배하긴 했으나, 조위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선전했으며, 큰 타격을 받았던 고구려도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동안 국력을 회복했다. 이보다 몇백 년 전 마한의 맹주였던 건마국이 전한을 상대하여 아무 것도 못해본 것과 비교해본다면, 마한 일대와 목지국의 실력이 그동안 꽤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18]
그러나 목지국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정작 기리영 전투에서 승리한 조위가 권신인 사마씨와 황실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안팎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발휘에 한계를 보이자, 백제국이 이 빈 틈을 파고 들어 경기도 및 황해도 일대의 소국들을 차례 차례 병합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며 급속하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백제국은 기리영 전투로부터 불과 30년도 지나기 전에 경기도 일대는 물론이요, 충남 서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미 그 시점에서 백제국은 여전히 목지국이 명목상의 맹주 자리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한은 물론 삼한 세계 안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지국이라고 마냥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이후 백제국과 상대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격렬한 투쟁에서 보이듯 적어도 목지국이 위치한 천안 및 그 근처의 청원, 홍성, 보은, 아산, 괴산, 옥천, 충주, 진천 등에 있었던 마한 거수국들은 모두 목지국과 한편이 되어 백제와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지국은 결국 백제에게 무릎 꿇고 말았다.
사실 전쟁 초기부터 국력 차이는 꽤 났던 걸로 보인다. 백제에게 맞서 본격적으로 개전할 당시 목지국의 친위 세력은 충청도 전역을 포괄하지도 못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산악 지대라 생산성이 떨어졌던데 반해, 목지국에게 전쟁을 건 백제는 고이왕의 치세 후반에 이미 경기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한 건 물론, 충남 서부까지 직접 지배 및 간접 지배가 완료된 상태였다. 또한 상술한 임진강 유역 및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서부의 마한 소국들은 하나하나 백제에게 쓰러져 직접 지배화되어가고 있었는데, 당시 한반도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중국의 조위가 촉한 및 동오와 한창 전쟁 중이었고, 세조 무황제 사마염이 창건한 서진이 280년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도 팔왕의 난(291년~306년)과 영가의 난(308년~316년) 등이 발발하여 대륙 전역이 난장판이 된 데다가, 장강 이남의 한족 왕조인 동진이 북방 민족들인 5호를 견제하고, 고구려가 이 틈을 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기에 이 과정에서 한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 등은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백제군을 제대로 상대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백제는 적어도 서기 3세기 중반 ~ 4세기 초반까지, 무려 반 세기 동안 북방은 거의 신경쓰지 않고, 목지국 계열 세력에게 전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반 백제 연합의 중심이었던 목지국 자체가 3세기 중후반인 책계왕 무렵, 백제의 기습으로 본거지인 청당동을 잃어버리면서 반 백제 연합은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즉 앞장서서 싸워줘야 할 수장국이 기습 한 방에 쓰러진 상황에서 싸움이 시작된 모양새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잔존 세력들이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한계는 뚜렷했고, 결국 비류왕의 치세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 중반에 충청북도 청주시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의 백제 제휴 세력이 성장하는 것과 비례해서, 천안 청당동의 목지국 잔여 세력은 완전히 쇠락하여 사라졌다.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즈음 백제의 직접 지배령 확장이 충청도 북동부에서 갑자기 멈추면서, 오히려 충청도 서부와 전라도 서부를 타며 내려가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목지국 및 목지국 추종 세력의 대백제 저항 추이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목지국이 맹주의 자격을 잃은 후에도 그 일대가 직•간접적으로 백제에 맞서 열심히 저항했음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3.3. 멸망
결과적으로 요약하면 서기 3세기 중반부터 목지국은 낙랑군과의 교역권을 한성백제에게 상당 부분 침해당하다가 3세기 후반에 백제군의 일격을 당하면서 마한의 맹주 자리를 빼앗겼고, 이후에도 4세기 중반 쯤까지 저항했지만 이후엔 마지막 저항 세력마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격렬한 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충청도 내륙부의 각 거수국들 내부에서는 일종의 언더독에 해당하는 세력들을 백제가 후원하며 열심히 국정을 흔들어댔던 정황이 드러난다.[19] 당시 충청도 내 각 마한 소국들의 적지 않은 주도 집단들의 주요 분묘 분포 지역들이 꽤 바뀌는 양상을 보여주는데,[20] 이는 백제가 말을 듣지 않는 마한 거수국의 주류 세력을 어떤 수단을 써서든 무력화하거나 해체하고, 상대적으로 고분고분한 비주류 세력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것으로 풀이된다.[21] 이는 상황에 따라 화해와 배신, 전쟁과 응징 등을 약 100년 단위로 반복했던 침미다례나, 서기 6세기 초 대가야(반파국)와 연합해 백제와 10여년 동안 전면전을 불사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비교적 빨리 정리된 무령왕 시대 전라도 동부 지역과는 양상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목지국과 백제국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렬했던 건, 백제국의 엄연한 상전이었고 삼한 전체의 명목상 우두머리였던 목지국 및 그 직계 잔여 세력들이 당연히 백제를 순순히 따를 수 없었던 상황과, 목지국을 먼저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으면 침미다례를 비롯한 다른 마한 내부 세력들과의 서열 정리가 대단히 어려워지는 백제측 사정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제국에게도 할 말이 있었던 게, 백제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옛 건마국 세력을 우대하고, 그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준왕계로 추정되는 옛 단군조선계 세력들을 우선적으로 후원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나는 걸 보면 백제국 또한 어차피 목지국도 본디부터 마한 맹주국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백제 건국 세력의 정착과 마한 편입을 허용해줬던 목지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납득될 논리는 아니었으나, 백제국이 이미 마한 내부에서 맹주국 교체가 한 번은 있었던 이상, 두 번은 안되겠냐고 생각할 개연성은 충분했다.
그래도 목지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백제는 항복한 세력들은 나름대로 대우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산 일대의 연씨 세력이다. 이들은 훗날 백제의 최상위 귀족인 대성팔족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또한 천안 청당동 세력의 분가인 천안 용원리 세력에게는 그 일대의 자치를 허용해주었고, 이에 따라 용원리 세력은 토호로서, 해당 지역 내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475년 한성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패배하여 목이 베이고, 위례성이 함락당하자,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위례성 함락 이후 고구려가 남진을 지속하여 경기도와 충북 일대에까지 세력을 뻗치자, 천안은 삽시간에 안전한 후방에서 오히려 고구려군에 대항하는 웅진백제의 최북단 국경지대 겸 전장이 되어버렸고, 결국 용원리 세력들은 지역 기반을 포기하며 중앙귀족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옛 목지국 청당동 세력의 치소는 백제 중앙정부가 직할하는 출장사무소 내지는 군사령부 자리로 개편되어 목지국의 잔재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용원리 세력 또한 묘제가 갑자기 전부 석실묘제로 바뀌어버리고, 부장 유물 자체도 쇠락했다. [22]
4. 《삼국사기》초기 기록 문제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부터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였다는 식의 기록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나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전쟁들이 벌어졌다는 현장이 실제로는 목지국과 백제국의 분쟁 현장이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주된 전장은 낭자곡성(청원), 와산성(보은), 구양성(괴산, 옥천), 모산성(진천) 등인데, 진한과 마한의 소국들이 다툰 기록이 백제와 신라가 싸운 기록으로 훗날 옮겨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일대는 진한에 속한 지역이 아닌 실제로는 목지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지역들이었기에, 백제가 목지국 잔여 세력들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반드시 함락시켜야 했던 입지가 중요한 군사 요충지들이었다.
이는 사로국으로 망명하기 전 충주 금릉동에 소재한 마한 거수국이었던 김씨 족단이, 목지국 편에서 목지국 친위 세력들과 함께 백제와 싸운 경험의 기록이었을 개연성이 현재로선 높아 보인다.[23]
훗날 젊은 정복군주인 진흥왕의 치세때 신라가 청주, 천안, 청원 외 옛 목지국 직계 세력 지역을 모두 장악하는 것도 특기해볼 사항이다.
5. 훗날 반복된 지정학적 패턴
후삼국시대에는 목지국 지지 세력 강역 중 부여, 괴산, 보은을 제외한 다수가 견훤의 후백제가 아닌 궁예의 태봉을 선택했는데, 이는 궁예가 백제계를 친위 세력으로 두고 고구려계를 견제한다는 정책을 쓴 탓이었으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패서 호족이 918년 궁예를 타도한 후 왕건의 만류도 뿌리치면서 백제계 호족에게 복수를 단행하자 옛 목지국 지지 세력 강역 중 천안을 비롯한 충청 북부 일대는 그래도 고려에 남았으나, 나머지는 견훤에게 달려간 것 또한 눈여겨볼 사항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군사적 충돌 상황은 태봉 - 고려가 한성백제 포지션인 반면 백제를 계승했다는 후백제는 한성백제에게 저항하던 목지국 친위 세력과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음이 중요하다.시대와 명분은 달라졌으나 태봉 - 고려가 경기도와 천안을 확고하게 장악하여 흡사 목지국을 막 무너뜨린 서기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의 한성백제와 입장이 비슷해진 반면, 남쪽의 후백제는 충북의 남부를 장악해서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목지국 잔여 세력과 입장이 비슷해진 것이다. 다만 한성백제는 부여와 대전 일대를 일찌감치 손에 넣은 반면 후백제는 백제부흥의식으로 부여와 대전을 장악한 것, 직•간접적으로 천안은 4세기 중반까지 백제에게 저항했던 반면 10세기경의 천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태봉 - 고려가 확고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약간 달라진 점이다.
6. 목지국 이동설
1990년 최몽룡 교수가 한성백제에 밀린 목지국이 천안→익산→나주 반남면 순으로 남하했다는 소위 '목지국 이동설'을 제기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현재 거의 폐기된 이론이다. 일단 천안과 익산, 나주에 있었던 각 마한 거수국은 묘제와 유물에서부터 전혀 계승 관계가 없다.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주장은 세 부분에서 크게 반박되었다. 마한 수장국의 자리는 오히려 익산에서 천안으로 이동했고, 목지국 세력이 완전히 무력화된 서기 4세기 중반에 익산 일대는 백제의 간접 지배 지역이 되어 있었으니 목지국이 천안에서 익산으로 가는 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나주 반남면은 백제가 침미다례의 주도 세력인 영암과 해남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해서 키운 세력이었던 만큼, 익산에서 나주 반남면으로 가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건 둘째치고, 천안에서 나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마한과 백제의 교체 관계는, 마한이 어떤 고대 국가로서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영토를 잃어가면서 저항하다가 멸망하는 과정이 아니라, 마한 연맹체 소속인 백제국이 우선 임진강 및 한강 유역 일대를 통합한 다음에 맹주국인 목지국을 제압한 후 마한 영도국 자격으로 마한 전체를 영역 국가로 통합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상술했듯이 여러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목지국 이동설'은 현재 완전히 부정된 옛날 학설이라고 보면 된다.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의견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목지국 이동설'은 문헌학으로든, 고고학으로든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1] 가령《삼국지》에서 진왕은 목지국만을 다스린다고 기록한 것과는 달리《삼국사기》에서의 백제는 북으로는 패하, 남으로는 웅천, 동으로는 주양(走壤: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 서로는 대해에 닿는 영토국가로 묘사된다.[2] 목지국의 위치는 천안으로 보는 견해,[24] 아산으로 보는 견해,[25] 아산만 일대로 보는 견해[26] 등이 있다.[3] 백제사 시리즈,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시리즈 한성백제박물관; 성주탁,《백제와 주변세계》, 진인진; 송호정,《고조선사 연구》[4] 최욱진, 2018 <아산 지역 2~5세기 고대 유적의 현황과 의미>《선사와 고대》55, p.149.[5] 이상호, 2018 <원통형토기를 통해 본 3세기 중반 이후 곡교천 유역의 사회상 검토>《선사와 고대》55, pp.191~192.[6]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27년, 27년 4월 마한을 멸망시키다.[7] 《삼국사기》권 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27년, 27년 7월 대두산성을 쌓다.[8]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36년, 36년 7월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9] 현 아산시 읍내동 일대[10] 거수(渠帥)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보통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며(비슷한 의미의 단어로는 수장 혹은 수괴 등이 있다.) 중국측 사서에서는 고대 주변 민족들의 '군장'(君長)을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거수 대신 장수(長帥)로 쓰이기도 했는데, 거수국은 군장국 또는 추장국 정도로 해석될 듯 싶다.[11]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 제20권《백제 도성》편 참조.[12] 한성백제의 고고학적 양대 지배 세력 중 하나이자, 침미다례의 구성 세력 중 하나였던, 해양 민족 계열로 추정된다.[13] 사실이라면 중국 대륙이 왕조 교체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마한에 대한 견제가 느슨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애초에 신나라는 새로 일어난 고구려에 대한 견제에 더 신경을 썼다), 아니면 애초에 예방 견제격으로 자신들과 과거 대립했던 고조선의 후예인 건마국의 국력 약화를 주 타깃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전한과 대립한건 준왕을 쫓아내고 들어선 위만조선이었지만, 그 윗대인 기원전 3세기경 전국연과의 충돌 등까지 감안하면 토착계 고조선과도 연결된다.[14] 삼한보다 선진적이었을 법한[15] 신라도 건국 초에 많은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는건 기록상으로 확인된다. 변한의 금관가야도 허황옥의 예가 있었고...[16] 마한이라고 적혀 있다.[17] =목지국 거수=삼한의 명목상 맹주[18] 다만 조위가 전한에 비해선 국력이 약했던데다가 그마저도 일부는 동오, 촉한, 북방의 유목민족 등에게 늘 할애해야 했던 것도 고려할 부분이다.[19] 침미다례 지역을 백제가 접수할 때도 비슷한 정황(영암 시종면 vs 나주 반남면)이 있었다. 공주시 바로 옆인 세종시 대평동에 소재했던 세력의 경우, 한성백제가 그전까진 세종시 내 언더독 집안들에 불과했던 새롬동 및 나성동 세력을 후원하며 통치 파트너로 삼는 시기에 급격하게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20] 특정 집안이나 가문의 분묘가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 경우 쉽게 요약하자면, 후손들이 딴 곳으로 강제이주당하거나 망해버려서 제대로 된 분묘 축성에 신경을 쓸 수조차 없었는 얘기다. 즉 백제에게 비협조적인 집안들은 다 망해버린 결과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바로 천안 청당동의 목지국 직계가 당한 일이었다.[21] 물론 백제가 모든 충청도 마한 거수국에게 이랬던 건 아니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협상을 잘해서 위치를 유지한 소국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나라의 위치가 백제와 가장 가까워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목지국 직계 세력들 중 청주에 소재한 거수국은 가장 먼저 목지국을 등지며, 백제에게 항복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한성백제에게 협력한 공주 수촌리 세력도 마찬가지였다.[22]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리씨(木刕氏)(일본측 기록에서는 '목라'(木羅)라고도 표기했으며, 표기와 상관없이 모두 '모쿠라'라는 훈을 달았기에 원래 발음에 가까운 건 '목라'였을 가능성이 높다.)와 목소씨(木素氏)가 용원리 지배층 출신으로 유력시된다. 목지국이 소재한 천안 청당동 근처인 목천읍의 '목'(木)이 목지국의 '목'(目)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력시되기 때문에, 국명을 씨로 쓰는 경우가 흔했던 시대적 특성에 따라 목지국에서 목리씨를 따왔다는 것이다. 목리씨가 '목'(木)씨로 축약 표기되는 경우가 흔했다는 점에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목리씨는 백제의 마한과 가야 정복전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상당수는 왜국으로 이주했고,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임(林)씨로 변성해 현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왜국으로 이주한 목리씨도 하야시{林}씨를 사용했다)[23] 신라사를 전공한 강종훈 교수의《신라 상고사 연구》참조. 다만 강종훈 교수는 여러 지정학적 측면에서 충주에 소재한 진한 거수국이 충북에 있던 세력들 및 경북 영주, 상주에 있던 진한 서북부 세력들과 연계해 백제와 싸웠을 것으로 여러 문헌 사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입증했으나, 이 저서가 나오던 시기에는 충주의 고고학적 성과가 발굴되기 전이었기에, 충주에 있었을 유력한 삼한 거수국은 진한 소속 거수국이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발굴 결과, 충주에 있었던 거수국은 (고고학적으로는 한성백제와 거의 같은 시기인 서기 3세기 중반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 및 홍성과 거의 계통이 같은 전형적인 목지국 계열 마한 거수국이었던 걸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