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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5:54:01

침미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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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단에 '침미다례'라고 기재된 부분이 침미다례의 세력권이다.
1. 개요2. 기록3. 위치4. 역사
4.1. 마한 시기4.2. 백제 시기4.3. 남북국~후삼국시대
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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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침미다례(忱彌多禮)는 초기 삼국시대마한 남부에 위치했던 소국연합체다. 그래서 침미다례'국'으로 표기되지 않으며, 침미다례와 등치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신미 제국(諸國)[1]이다.

대략적인 위치로는 주로 서남해안가의 영산강 유역에 위치했던 오늘날 전남 남서부[2] 지역이 거론된다.[3]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거수국 신미국(新彌國)이 이 연합체의 중심국이었고, 4세기 초 신미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뒤에는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 집단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집단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 일대는 기존 마한 연맹 내에서는 3세기 중후반 목지국 타도 이후 마한의 새로운 맹주로 올라선 백제국 다음으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제를 마한 맹주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 서진에 별도로 사신을 보내 마한 신미 제국을 자처했다는 점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 때인 369년 3월 무력으로 복속된 후로는 간접 지배 영역에 들어가 한성백제의 마한 영도국 위치를 인정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자치력은 잃지 않으면서 다른 마한 지역과는 달리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며 백제를 진땀 빼게 했다. 이후 잠깐 금동관이 화려해지는 475년 한성 함락 시기 직후 20여 년 동안 왜계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어 이 시기 힘이 약해진 백제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하지만 문헌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어 추정의 영역에 그친다.

그러다 결국 5세기 후반~6세기 초 웅진백제동성왕 ~ 무령왕 시기에 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백제가 갑자기 자력으로 황해도까지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당 지역의 완전 흡수가 백제의 국력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때부터는 회유와 타협을 통해 전폭적으로 협력하여 사비백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전남 남서부, 즉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훗날 후삼국시대에도 후백제태봉고려 사이에서 주된 캐스팅보드를 쥐게 되기에, 해당 지역의 역사 전체를 여기서 다룬다.

2. 기록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사서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신운신국, 신미국 및 침미다례를 같은 나라 또는 계승한 나라들로 본다. #[4] 이외에도 530년대에 제작된 〈양직공도〉 제기에 기록된 백제의 9개 부용국 중 '지미(止迷)' 또한 침미다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중국 역사서에 적힌 마한 국명들의 한자 표기는 우리말 이름을 당시 중국 한자음에 맞게 음차했을 뿐이므로 한자 자체의 뜻은 대체로 별 의미가 없으며, 발음에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3. 위치

남해안인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 및 영암군 시종면 일대가 중심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외에도 고고학적 발굴, 침미다례(忱彌多禮)의 고대 일본어 발음('토무타레', トムタレ) 등을 고려하면 전라남도 남해안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침미’의 고대 일본어 훈이 ‘토무(トム)'이므로 백제시대 도무군(道武郡)에 해당하는 강진, 해남 일대라는 것이다. 남북국시대에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침명현(浸溟縣)이 '침미'와 음이 비슷한 데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공격하기 전에 점령한 고해진과 가깝다는 점도 주된 근거이다.[6] #

2017년 화산면 안호리 일대에서 3세기에 형성된 고분군이 발견되어 침미다례의 후기 역사 파악에 도움이 될지 관심이 모였다. 해당 고분군은 3세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양상이다. 그러나 백제는 3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천안 청당동 목지국 휘하의 거수국에 불과했고, 3세기 말에 목지국을 쓰러뜨리긴 하였으나 직접 지배 영역은 목지국을 여전히 따르는 충남북 북부 일대 거수국들의 저항으로 전북은커녕 충청도 일대에서도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 시기 백제가 침미다례에게 간섭할 역량은 없었다. 따라서 안호리 고분군이 백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4. 역사

4.1. 마한 시기

기원전에는 다른 한반도 남부 일대와 마찬가지로 주로 송국리형 문화 유형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190년경 전북 익산 건마국준왕의 망명으로 개국하게 되면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고고학적으로는 이 시기 전북 서부 일대에서 침미다례 일대로 상당한 규모의 송국리형 문화 유형인들의 이주가 일어난 것으로 해석된다. 전반적으로는 준왕 집단이 상당한 인구와 무력, 선진 청동기 문화로 익산 주변에 확고한 위계체제를 관철하면서 지배력을 확립하자, 준왕 집단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싫었던 이 일대 토착 세력이 훗날 침미다례가 될 지역으로 빠져나간 걸로 추정된다. 일단은 건마국을 마한의 맹주로 존중하긴 한 것 같지만, 이런 일이 있었으니 침미다례 일대와 건마국을 비롯한 전북 서부 지역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7]

기원전 108년경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대규모로 유민이 발생하자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보다 90여 년 전 똑같은 지역에서 망명해 내려온 위만조선인들이 어쩐 일인지 침미다례로 건너가 이주하는 현상이다.[8] 고고학자들은 이 경우에도 말을 삼가지만, 짐작해볼 이유는 위만조선에게 여전히 원한이 있었던 준왕계의 거부 외에는 딱히 다른 것이 없다. 이후 침미다례 일대에서는 이 위만조선계 조선인들이 송국리 유형 문화인들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정치체들을 꾸리게 된다.

이후 중국 역사서 《삼국지》 동이전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한 부분에는 '신운신국(臣雲新國)'이라는 나라가 하나 보인다. 상술하였듯 신운신국의 지도자는 '견지보(遣支報) 신지'라 하여 신지 가운데에서도 특별 칭호가 붙는 4명 중 하나였기에, 3세기 전반 당시 마한 내부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3세기 중후반,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한성백제의 공격을 받으며 맹주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이에 신미국이 백제의 세력 확장에 크게 당황하여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다. 중국 역사서인 《진서》에 따르면 282년 9월 마한에 신미의 여러 나라들(新彌諸國)을 중심으로 29개국이 있었으며, 신미국은 이 소국들을 거느리고 조공한 것으로 보인다.
乃出華爲持節·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 撫納新舊, 戎夏懷之. 東夷馬韓, 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이에 장화를 지절 도독 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으로 삼아 전출했다. 신구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캐와 중국이 모두 그를 따랐다. 동이 중 마한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와의 거리가 4,000여 리였다. 지난 세월 동안 귀부해오지 않던 나라가 20여 개나 되었는데, 함께 사절을 보내서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진서장화
三年春正月 ... 甲午, 以尙書張華都督幽州諸軍事. ... 九月, 東夷二十九國歸化, 獻其方物.
(태강) 3년(282년) 봄 정월 갑오일, 상서 장화를 도독 유주제군사로 삼았다. ... 9월, 동이 29개국이 귀화하여 그들의 방물을 바쳤다.
진서무제
《진서》에 나오는 이 신미국은 고고학적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백포만 일대인 송지면 군곡리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미국은 4세기 초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을 무너뜨린 후 어수선해진 대중국 교역망으로 인한 충격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미 근초고왕의 치세가 오기도 전에 전라남도 서남부 영산강 유역 일대의 다른 두 거수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이들이 바로 영암 시종면 세력과 해남 신월리 세력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술할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남만(南蠻)', 즉 오랑캐라고 표현된 것은 침미다례 일대가 여전히 마한 연맹 내에서의 백제의 맹주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행보를 걸으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인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한성백제의 주된 두 뿌리 중 하나가 침미다례 일대의 세 문화적 뿌리 중 하나인 토돈분구묘제 집단[9]과 같기 때문에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작 마한 연맹 내부에서 백제국과 가장 이질적인 집단은 목지국, 건마국을 비롯한 경기-충남-전라 내륙 지역이었다. 이곳들은 하필이면 백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관계로 백제국에게 별 어려움 없이 일찍 병탄당해 독자적인 주권을 보다 빨리 해체당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침미다례가 다른 마한 구성 집단 중에서는 한성백제 건국 집단과 종족적, 문화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형편이었다.

그렇긴 해도 침미다례는 아예 무역 이권과 자치권마저 내놓으라는 한성백제를 그렇게 쉽게 마한 맹주국으로 승인할 수 없었으며, 승인하더라도 대가로 받을 특권에 대한 조정이 필요했기에 백제 왕실과 백 년이 넘도록 갈등과 타협을 반복하게 되었다. 옛 건마국 세력과 광주 세력은 처음부터 백제에게 협조적이었으나, 이는 이 지역들이 백제 왕실에게 충성의 대가를 받았으면 받았지 빼앗길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10]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개국을 평정했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11]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했다.[12][13]
일본서기》 9권 진구황후 섭정 49년[14] 3월
일본서기》의 위 기사에서는 문헌 특성상 다소 윤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근초고왕 대인 369년 3월 백제에 의해 침미다례가 격파되고 전북 지역의 마한 소국들이 자진 항복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백제로서는 목지국 타도 이후 100년만에 새로운 맹주국의 입장을 각인시켜 숙원을 해소한 셈이었으나, 영산강 유역 세력으로서는 수백년 누려온 한사군-가야-왜국 일대와의 무역권을 외부 세력이 별 말도 안 되는 연고권을 주장하며 날로 빼앗으려는 침략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제는 아직 다 통합하지 못한 다른 옛 마한 거수국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가야-왜국 무역권은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도륙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아주 무참히 당한 침미다례 소국은 해남 신월리 세력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 영암 시종면과 잘 번영하고 있었던 해남 신월리 세력이 갑자기 증발하기 때문이다.

한편 해남 신월리 세력과 달리 영암 시종면은 일단 세력을 유지하지만, 갑자기 4세기 후반경부터 나주 반남면 세력이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이전에 백제가 목지국을 제압했을 때 근처의 성남면 용원리 세력을 키우면서 써먹었던 수법으로, 완전 해체하기 거북하면 바로 근처에 계통은 같지만 일종의 분가에 불과한 상대적 약소 세력을 후원해서 간접 견제하는 유서 깊은 방식이었다. 다만 목지국 본류인 청당동 세력은 이런 대우를 오래 참지 못하고 대놓고 반항하다가 인위적으로 완전 해체당하고 말았으나 영암 시종면은 그렇지 않았고, 여기서는 백제 부여씨 왕실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보다 많은 지원을 받았던 성남면 용원리 포지션인 나주 반남면과 꽤 오랫동안 공존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침미다례는 4세기 중반 백제에게 제압당했을지언정 백제가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완전히 편제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즉, 일종의 간접 지배 형태로 남았다는 것.
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 선왕 때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일본서기》 10권 오진 덴노 8년[15] 3월
후대 왕인 아신왕 대의 《일본서기》 기록에서 침미다례가 한번 더 언급된다. 여기서 야마토 왕권이 침미다례 등을 빼앗았다는 것은 《일본서기》 집필자들이 백제기를 개작한 내용인 것으로 여겨지나 다른 가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왜국이 설령 침미다례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해당 지역을 지속적으로 통치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16]

이후 이 일대의 고분은 나름대로 규모가 커지지만 부장품은 질이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백제영산강 유역 세력이 커지지 못하도록 공납을 꽤 무겁게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항 없이 세력은 유지되었다. 그러다 침미다례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475년 9월 장수왕한성 공함 이후 백제가 존망의 위기에 처할 정도로 휘청이고 영산강 세력을 관리할 겨를도 없어지자, 이 일대는 그간의 제한을 극복해서 약 20년 정도는 독립을 추구한 것 아니냐는 고고학적 추정이 나올 정도로 세력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고학적으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도 생겨난다. 바로 전방후원분이 이 일대에 여럿 형성되게 된 것이다. 정작 침미다례의 기존 중심지가 아닌 주변부에만 분포하는 양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어떤 형식으로든 전방후원분을 만든 주체가 침미다례 기존 소국들의 정치적 기득권이나 우위는 인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전방후원분은 방형분과 원형분이 합쳐진 주구묘(周溝墓) 형식의 묘제로, 한반도 동부, 특히 신라가야 지방에 주로 분포하는 원형분과 한반도 남서부에 있는 삼각형 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방형주구묘가 그 뿌리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전방후원분의 건립 세력은 선사시대나 기원전 역사시대에 변진(弁辰) 및 마한 지방에서 일본 열도로 넘어간 도래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며, 침미다례 토착 세력 중에는 백제보다는 왜국과 그 계통이 더 비슷한 이들이 상당수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17][18]

일각에서는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복으로 이곳 토착 세력이 일본 열도로 더 많이 건너간 것 아니냐는 추정도 하지만 이는 낭설에 가깝다. 침미다례 일대는 근초고왕 정복 이후에도 자치력이 있었고,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주민이 넘어가는 흐름은 기원전 4세기에 요동 지역에서 고조선인들이 전국연에게 패배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흐름과 거의 맞물려 있었기에 그럴 개연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위만조선에서 대규모로 내려온 유민들이 침미다례 일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주구묘제 세력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영산강 유역 특유의 옹관묘 전통은 전방후원분과 그렇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다. 그러니 무턱대고 침미다례 자체를 전방후원분하고만 동일시하는 것은 그동안 연구된 자료와 거리가 있다.

하여튼 이렇게 영산강 유역 세력은 잠깐이나마 독립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웅진백제의 동성왕~무령왕 시대를 거치면서 6세기 중반부터는 백제의 일원화된 직접 지배 체제 안에 완전히 편입되어 독자적인 운동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기부터는 '침미다례'라고 부를만한 정치적 실체조차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멸망인 셈.

다만 침미다례 해체를 두고 예맥족인 백제가 남방 삼한족을 대표하는 마한[19]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복사업을 완수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애초에 '삼한족'이라는 것 자체가 실체가 없는 허상이며, 삼한의 주류 집단은 서북한 일대에서 남하해온 조선계 예맥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류온조, 개국공신인 을음해루 등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초기 한성백제 시기 고구려식 적석묘제, 토돈분구묘제 및 둘이 융합된 특이한 양상을 보이는 독특한 백제식 적석총을 비롯한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건대, 백제 초기 지배층은 고구려계 및 침미다례와 고고학적 계통이 같은 토돈분구묘 계열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즉, 위례성에서 고대 국가의 근간을 처음 이루었을 당시 백제는 고구려식 적석묘 세력이 다소 우위를 점한 가운데 토돈분구묘 세력과 연합해서 출발한 나라이며, 이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한반도 중부 및 남부에 위치한 다른 마한 소국들을 공납 → 간접 지배 → 직접 지배하는 것으로의 전환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것이다. 현 학계도 대체적으로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백제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대성팔족 중에는 해씨 같이 부여-고구려 계열로 추정되는 성씨 말고도 마한 계열로 추정되는 성씨들 역시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대에는 지역이나 집단에서 성씨를 따오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목씨/목라씨 가문이 사실 목지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20] 목씨 뿐만이 아니라 웅진사비백제 시기에 가장 큰 권력을 누렸다는 사씨/사택씨 가문도 이들이 금강 일대에서 기원했기에 천도의 영향 덕분에 급격한 위신 성장을 이룬 가문일지도 모른다는 학설 역시 존재한다.[21]

즉, 목지국 아래에서 마한 연합을 구성하던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백제국이 그 전에는 같은 자리에 섰던 동료 거수국들을 병탄하면서 고대 국가로 발전했고, 마한의 원래 수장국인 목지국을 타도하며 '마한의 새로운 수장'[22]으로 등극했으나, 침미다례처럼 '마한의 새로운 수장 백제'라는 주류에 따르지 않으려는 개별 독립집단들 역시 있었다. 그래서 백제가 무력을 통해서 복속 혹은 회유[23][24]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나주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이 천안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안성천 일대 세력, 금강 유역 세력, 전남 동남부 섬진강 유역 세력, 전라도 내륙 중부 세력 등과는 문화권이나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이 지역 토착세력은 대(對)고구려 전쟁으로 한반도 중·서남부를 규합하던 백제에 대한 협력에 소극적이었다.[25]

또한 기존 세력 기득권을 완전히 해체하고 무력화한 측면에서는 천안 목지국에 대한 처우가 침미다례보다 심했다고 여겨질 소지가 다분했음도 고려해야 한다. 침미다례의 경우, 그 중심 소국이 근초고왕 당시에 완전 토벌되어 없어져버린 뒤로는 백제 부여씨 왕실에 대한 정면 도전이 고고학적, 문헌학적으로 전혀 사례가 발견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웅진사비백제 시절 백제 부여씨 왕실로부터 일정 부분 회유와 우호적 포섭을 받았다. 반면, 천안 청당동에 소재했던 목지국은 근초고왕 시절이 되기도 전인 비류왕 때 기반이 완전 해체되어 사라지는 것이 드러난다. 처우만 놓고 보면 침미다례보다도 더 가혹하게 당한 것이다.

그나마 침미다례에 대한 처사는 《일본서기》를 통해 기록이라도 남았으나, 백제가 목지국에 압력을 가하고 무력화하는 구체적인 과정은 주근의 반란 이외에는 고고학적으로밖에 추적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에 백제국의 상전이었다는 이유로 처신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목지국과는 달리, 침미다례는 근초고왕 시절에 백제국의 강대한 힘을 체감한 이래로 나름대로 선을 지키면서 유리한 쪽으로 협상하려 했고, 백제도 강압적으로만 일관하지 않고 당근과 채찍을 통한 보다 유연한 자세로 침미다례 지역을 다루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연구와 발굴 성과는 한국사가 그간 고조선계 일원론적 견해를 피력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맹신하던 단계를 벗어나, 부여계와 송국리 문화유형계 등 다원론적 의견이 보다 유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다만 이 대목에서 삼한고조선 계열 문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삼한의 각 주도국인 건마국, 목지국, 사로국, 구야국 등은 고조선에서 내려온 집단들임이 고고학적으로 재확인되어, 삼한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고조선 일대에서 비롯되었음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은 워낙 영역이 넓었던지라 고조선과는 무관한 한강 및 임진강 유역 일대 거수국들도 휘하 소국으로 편재했지만, 어디까지나 주축은 건마국과 목지국 등을 위시한 경기·충청·전라 내륙 집단이었다. 물론 주류 세력과 무관하게 비주류 세력을 조명하는 연구 역시 충분한 의미는 있을 것이다.

4.2. 백제 시기

전남 서남부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동성왕, 무령왕 시기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외교력, 행정력, 군사력 등을 모두 잃었고, 그 일대는 백제가 직접 지배하는 지역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침미다례'라는 정치체의 멸망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연맹 체제에 속하는 모든 소국이 어느 정도 자치력을 보유하는 마한 연합 체제가 수백 년 동안의 느린 과정을 거쳐 백제 부여씨 왕실이 지배하는 고대 국가 체제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중국사에 비유하자면, 봉건제 주나라가 쇠락한 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앙집권제 진나라가 들어선 것과 같은 셈이다.

침미다례를 복속하면서 백제는 개로왕 대에 수도 한성 함락 및 경기, 충북 일대를 거의 송두리째 다 잃어버린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다. 이윽고 무령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환골탈태하여 신라의 협조도 없이 혼자 힘으로 고구려를 극복하며, 경기도 일대를 넘어 아예 황해도까지 적지 않은 군대를 거느리고 치고 올라가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전까지는 간접 지배하던 침미다례 지역을 백제가 직접 지배 체제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면서 적지 않은 물자와 자원, 인력을 얻은 것이 중대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음은 분명해보인다.

침미다례의 독자적인 외교력이 크게 제한된 것은 이미 근초고왕 시대부터 이루어진 일이지만, 백제 중앙 정부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만큼 자유자재로 그 저력을 운용하게 된 것은 적어도 무령왕 시기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침미다례를 구성했던 소국 호족들은 무덤 규모는 줄었어도 출토되는 부장품의 양과 질은 오히려 그 전 시기보다도 향상되는데, 백제 중앙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상응하는 대가와 기득권을 보장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본래 영암 시종면 세력의 분가였다가 백제가 대신 파트너로 택해 키워주었던 나주 반남면 세력과, 마한 신미를 자처할 정도로 백제국의 마한 수장국 위치를 정면 부정한 바 있었던 해남 군곡리 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연구에 따르면 백제는 6세기 초중반 옛 침미다례 전체를 직접 지배지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영암 시종면, 나주 복암리 세력 및 광주[26] 세력을 주로 우대해주었고, 이전까지 융성하고 금동관까지 받을 정도로 백제와 관계가 좋았던 나주 반남면 세력은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직접 지배기에 들어가자 군에서 현으로 강등당하는 응징성 조치가 문헌 사료에서 확인되며, 고고학적인 쇠락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 옛 침미다례 일대에서 백제 왕실의 가까운 파트너 지위는 복암리 세력이 가져가게게 된다.

또한 동성왕 시기 영암 시종면 세력보다도 세력이 축소되었던 군곡리 세력은 이 시기에 아예 소멸한다. 신미국 자체인 해남 군곡리 세력이 다른 침미다례와는 달리 독자 노선 쪽으로 기울었다가, 근초고왕 당시 해남 신월리 집단이 그랬듯 백제에게서 강력한 군사적 응징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주 반남면 입장에서는 100년 넘게 충성한 대가가 이거냐며 불만을 표했겠지만, 나주 반남면이 주도하던 침미다례 일대는 백제한성 함락으로 일격을 당한 혼란기에 계 및 가야계 세력과 제휴하면서 백제로부터 이탈을 시도했었으니, 백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100년 넘게 우대해줬더니 가장 어려울 때 백제로부터 등을 돌려버린 이 반남면 세력이 대단히 괘씸했을 가능성이 있다.[27][28]

침미다례와 백제의 관계를 요약하면 한성백제가 마한 수장국인 목지국을 3세기 후반에 쓰러뜨리기 전에는 목지국 휘하의 대등한 거수국 사이 관계로 출발했고, 목지국 타도 이후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 시대 전까지는 마한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묘한 대립 관계에 있었다가 369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후 마지못해 백제의 마한 내 주도권을 인정하는 간접 지배 관계로 있었으며, 475년 한성 공함 이후 490년대 어느 시점까지는 백제의 간섭을 뿌리치고 독립성을 회복했다가 이후 520년대까지인 동성왕~무령왕 때 웅진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침미다례 일대가 이렇게 백제와의 관계에서 대립(약 100년) - 간접 지배(100년) - 독립(약 20년) - 직접 지배(약 130년)를 거듭했다고 추정할 수 있기에 21세기 들어 이들을 마지막 남은 마한 잔여 세력처럼 보는 견해도 생겼는데, 침미다례 외에도 마한 내 다른 거수국들이 충청도 및 전북, 전남 동부에 있었고 이들은 침미다례와의 이해 관계나 백제와의 관계가 제각기 달랐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원래의 수장국 세력이었던 건마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전북 서부는 침미다례와는 여러모로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침미다례를 주도했던 세력들인 해남 군곡리,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등의 세력들은 모두 백제와의 관계가 일단 부정적으로 어긋나는 순간 상당한 피해와 쇠락을 면치 못했다.

한편 백제가 침미다례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나주와 광주 지역의 갈등도 심해졌다. 이는 천안 목지국을 견제하고 해체하는 데 주변의 청주 세력이 백제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주 세력이 나주를 위시한 침미다례 세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생긴 광주와 나주 일대의 악감정이 적어도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는 점 또한 특기할 사항이다.

4.3. 남북국~후삼국시대

백제의 경우 신라와는 달리 군수 및 현령 급에는 현지 유력층도 참여시켜 주었는데, 이는 신라보다 중앙집권의 밀도가 다소 약한 편이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신라와의 쟁패 과정에서 밀린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나, 반대로 지방 지배층의 기득권 보장을 통한 충성심 확보에는 상대적으로 유리했음 또한 부정할 순 없다.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서 옛 침미다례의 후예인 영산강 유역 호족들은 백제시대보다 기득권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는 통일신라가 통일 이후 더욱 짜임새 있는 지방 지배 및 행정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호족들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통일신라식 행정체제는 본인들에 대한 기득권 침해로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인사제도인 골품제는 고려나 조선처럼 지방 유력자들도 중앙관료로 기용하면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오직 신라의 중앙귀족층, 그 중에서도 1등 중앙귀족인 진골만이 관료조직의 핵심을 차지할 수 있는 제도였다. 계층 간 장벽이 공고한 제도였기에, 백제 시절의 사택씨 가문처럼 전쟁으로 공을 세우고 수도 옹립의 주체가 되어 일개 지방 호족에서 왕실의 외척이 되는 등의 번성을 아예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신라 왕실의 제어력이 약해지는 9세기에 이르러서는 2등 중앙귀족인 6두품마저도 중앙정부에 등을 돌려 반발하는 상황이 되었고, 영산강 유역 일대도 근 400년 만에 다시금 독자적인 운동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 이후 전개는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5. 기타

2010년대 후반부터 가야사와 원삼국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침미다례와 같이 6세기까지 자치력을 유지한 마한계 소국들이 대중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침미다례'라는 이름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일 감정에 도취된 일부 시민단체들이 이덕일 등의 영향을 받아 침미다례라는 용어나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선동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나 2022년 전북, 전남, 광주의 세 광역단체가 공동 제작·출판한 《전라도 천년사》에 침미다례가 기록되자, 상기한 시민단체 등이 주류사학을 식민사학이라 비방하며 수정을 요구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의 노력으로 폐기된 학설인 임나일본부설까지 물타기로 가져오며 비난하는 당황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침미다례라는 용어가 일본서기에서 나왔을지언정 고고학적으로 어떤 세력이 실존했음은 확인되고 딱히 대체할 용어도 없어보이기에, 과한 비난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굳이 쓰자면 이 문서로도 다이렉트되는 신미국, 신미제국, 신운신국이 있긴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4세기 이전에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침미다례를 전부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어렵다. 아울러 《전라도 천년사》에서 《일본서기》의 곡해성 서술을 그대로 답습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반도 남부의 왜계 세력은 영향력이 적은 객에 불과하다"고 규정짓고 있기에 해당 서적이 식민사학이라는 비난은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6. 관련 문서



[1] 제국주의 할 때 제국(帝國)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2] 전남 동부는 침미다례와 큰 연관이 없다고 여겨진다.[3] 여러 학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다수설이지만, 이덕일은 식민사학자들의 농간이라며 부정한다. 일각에서는 탐라와의 음운적 유사성을 근거로 제주도로 보기도 하지만 소수설이다.[4] 그 문헌 근거 중 일부는 《일본서기》에서 비롯하지만, 해당 근거는 고고학적 자료로도 뒷받침되므로 《일본서기》에 나온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자세는 옳다고 볼 수 없다.[5] 과거에는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으나, 《삼국지》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할 때 '벽비리국 - 불미국 - 지반국 - 구소국'의 순서를 따랐음을 고려한다면 읍이 5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고사읍(古四邑) 부분을 지명이 아닌 "옛 4개의 읍"으로 풀이하여 비리, 벽중, 포미, 지반의 4읍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고사주(古四州)라는 지명이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고사읍 역시 지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6] 이덕일은 '침명현'이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 바뀐 명칭이며, 이전에는 '새금현(塞琴縣)'으로 불렸기 때문에 이것을 침미다례랑 엮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디스했다. 그러나 경덕왕이 개칭한 명칭에 기존에 전래되던 지명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므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다.[7] 문헌적 기록은 없으나, 비슷한 상황에 있던 부여가 초기 고구려를 대놓고 무시했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세력을 백제와 대조되는 같은 마한이라고 묶어서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런 관점이라면 한성백제와 목지국 친위 세력도 다 같이 마한으로 묶어서 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8] 일부는 사로국 등으로도 갔다는 모양.[9] 다른 뿌리들은 위만조선계 집단과 송국리 문화 유형 집단이다.[10] 그나마 백제가 이런 협상조차 시도하지 않고 군사력으로 뭉개버린 목지국 친위 세력과 호남 동부 가야권 세력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백제는 목지국 세력으로부터 새로운 마한 맹주라는 권위를 받아내고, 침미다례에게는 무역 루트와 교역권을 받아내야 했다.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호남 동부 가야권의 경우 협력 파트너를 백제에서 가야로 바꾸는 것은 본인들의 정치적 자유라고 생각했겠지만, 백제는 이 일대에 대해 369년부터 475년까지 적어도 백 년 넘게 간접 지배해온 영토라고 봤기 때문에 아예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다.[11]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였던 구해국과 같은 지명으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조의 고적 목록에 '구계소(舊溪所)'가 있으므로, 이 '구계'를 구해국의 '구해(狗奚)' 및 고해진의 '고해(古奚)'와 연관지어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지역에 비정하기도 한다. #[12] 침미다례 정벌이 진구황후의 업적인 양 치환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의 행보를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베껴쓴 것으로 보는 편이다. 애초에 기껏 점령해놓고 백제한테 덜컥 주는 것부터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왜군이 정말 침미다례 공격에 참여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근초고왕 또는 전지왕 대에 왜국에 보낸 것으로 보이는 칠지도 문구에서 왜왕을 '후왕'으로 지칭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백제가 왜국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므로 왜국이 백제에게 침미다례를 바치면 바쳤지, 하사했다(賜)고 보기는 어렵다.[13] 한편 이 기사에서는 침미다례를 왜국 기준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이 아닌 남만(南蠻: 남쪽 오랑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백제삼서를 비롯한 백제 측의 기록이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미처 수정되지 않고 들어간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 애시당초 남만, 동이와 같은 표현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한 상태에서 자국을 기준으로 방위에 따라 이민족들을 구별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실제로 일본은 전통적으로 하야토, 구마소, 류큐 등 일본 남부의 이민족 세력을 만(蠻)이라 칭해 왔으며, 근대에는 마카오에서 유입된 서양 세력을 남만이라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4세기 당시 왜국이 서쪽에 있던 침미다례를 '남만'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으며, 남만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쪽은 침미다례의 북쪽에 있던 백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14]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연도 서술이 전부 사실이라 가정하면 진구황후 섭정 49년은 서기 249년이다. 물론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69년으로 추정된다.[15]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연도 서술이 전부 사실이라 가정하면 오진 덴노 8년은 서기 277년이다. 물론 아신왕이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97년으로 추정된다.[16] 1차 사료인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이 시기 백제는 국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할 정도로 참패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시기로, 396년 백제 정벌 이후 신하를 자처하던 백제가 399년 왜와 화통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백제와 왜는 400년 신라를 침공하지만 신라를 도우러 온 고구려군에 격파당하고 만다. 일각에서는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한강 이북 지역을 점령했으니 이듬해인 397년에는 침미다례, 곡나 등 남부 지역까지 빼앗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거론하며, 《일본서기》의 397년 8월 기사 역시 이 사건에서 주체를 왜국으로 바꿔 기록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의 최남단인 침미다례와 곡나까지 침탈했다면 백제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게 될뿐더러 고고학적인 근거도 없기에, 이 해석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17] 그러나 이들을 두고 '마한'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한의 주류 집단은 분명 고조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건마국, 목지국 등의 경기-충청-전라 내륙 집단 예맥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일본 규슈 북부와 더불어 Cis-AB형 혈액형이 유일하게 관찰되는 곳이 전라남도 서해안 및 남해안 일대인데, 이는 전방후원분 집단이라기보다는 주로 토돈분구묘제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8] 토돈분구묘제는 백제 건국 세력 일부만이 아니라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에서도 등장하는 묘제다. 한편 야요이 세력, 즉 전방후원분의 전신집단인 주구묘 집단에서 돌연변이 혈액형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도 옳지 않다. 한반도 야요이인들의 터전은 예맥인들이 내려오기 전에는 오늘날 남한 일대 전체였고, 진국 시대가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경상북도에서는 훨씬 일찍 밀려나 없어져 있었으나 그 나머지 삼남 일대에 여전히 온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돌연변이가 야요이계에게서 발생했다면 오늘날 일본인 전체에게 널리 분포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토돈분구묘제 세력의 분포 지역 중 전남 서해안 및 큐슈 일대에만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침미다례로 세력이 형성된 시기에 이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봐야 이치에 맞다.[19] 진한, 변한까지 셋을 합친 삼한.[20] 자세한 내용은 대성팔족 문서 참조.[21] 사씨/사택씨 가문은 근초고왕 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 때 활약은 다름 아닌 한반도 서남부 일대 침미다례 공략이었다.[22]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서는 성왕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 제왕이라 기록하고 있다.[23] 고고학적 자료인 금동관이 이를 증명하는 지표 중 하나다. 다만 금동관이 하사되었다면 이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왕과 신하와 같은 수직적 관계에서는 주로 이 하사품으로 등장하지, 금동관이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금동관을 하사했다면 이는 곧 공존과 협력, 동맹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들은 한반도 서남부의 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한 일대 및 한성백제의 주요 육지 거점에서 발굴되고 있다. 멀리는 바다 건너 일본 규슈에도 그 유물이 출토된 바가 있는데, 주로 침미다례와 관련이 있는 일본 지방 세력들로 추론된다. 예외적으로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5세기 무렵 마한소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점쳐지는데, 기존 백제 하사품으로 알려진 금동관들 보다 화려한 왕관 형태라 하사품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침미다례 일대가 475년 한성 공함 사태 이후 적어도 최소한 20년 동안에는 백제에게서 독립한 상태였던 상황과 맞아떨어진다.[24]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은 어디까지나 매우 예외적인 사례다. 훗날 웅진백제가 성립되는 지역의 토착 호족인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 수여받은 금동관, 백제국이 목지국 이전 마한 최초 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건마국 내 비주류 세력인 준왕 계열 잔여 세력인 입점리 및 웅포리 세력들에게 사여한 금동관에서 드러나듯 금동관은 일본 규슈 세력에 관련된 사례 외에는 상하 관계를 입증하는 지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25]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 계승과 같은 국가적 정통성과 한강 일대를 둘러싼 이해 관계를 가지고 서로의 왕이 죽고 죽는 싸움을 끊임없이 이어갔다.[26] 이쪽은 침미다례에 속하지 않았지만, 침미다례와 위치가 가까워서 나주를 제압하기 위해 백제가 육성했었다. 동성왕이 탐라국 정벌을 이유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광주)에 주둔할 정도였다. 고대 시기에 왕이 수도 외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지역이라는 건 그 일대가 왕이 신뢰하는 측근들의 세력권이자 왕을 부용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이 뒷받침 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이로 인한 나주광주 지역 간의 악감정은 통일신라를 거쳐 후삼국시대로까지 번지게 된다.[27]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백제 입장에서 하는 얘기다. 반남면 세력 입장에서는 옛 의리니 뭐니 해도 오랜만에 백제로부터 독립성을 되찾아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호기가 열렸으니 그것을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성백제는 그냥 어려운 시기를 겪는 수준이 아니었다. 왕이 참수되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문자 그대로 나라가 멸망했다고 기록될 정도로 몰락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백제가 야마토 왕권의 지원,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통해 빠르게 국력을 회복한 것이 기적에 가깝다.[28] 단, 백제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어서 스스로 존속하기 위해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굳이 백제 왕실측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좀 무리에 가깝다. 전북 서부 건마국 잔여 세력, 본디 침미다례의 일부였으나 백제의 고의적인 차별적 호혜 정책으로 백제에게 포섭되어 나머지 침미다례 세력과 직접 충돌을 불사한 광주 세력도, 입장은 마찬가지였음에도 백제 왕실에게 한결 같이 충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말하면 광주와 익산-전주 일대는 이미 개로왕 이전에 준직접 지배까지 완료된 상태였기에 백제에 대한 귀속감은 침미다례와 다를 수밖에 없었던 사항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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