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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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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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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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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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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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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조위
제2차 양맥 전투
,259,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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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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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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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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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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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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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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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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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신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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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 553,
신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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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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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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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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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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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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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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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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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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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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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
,668,
신라 당나라 }}}}}}}}}


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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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왜 전쟁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삼한정벌[1])
新羅・倭戰爭([ruby(三韓征伐, ruby=さんかんせいばつ)]) | Silla–Wa War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364년 (고국원왕 34년) 음력 4월 ~ 404년[2] (광개토대왕 14년)
파일:silla-japan-war.png

전투 경과.
장소
한반도 중・남부[3]
원인 백제왜국(야마토 정권)신라 복속 시도[4][5]
교전 세력 백제-왜-가야 연합
<rowcolor=black> 고구려-신라 연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아신왕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 닌토쿠 덴노[주의]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 리추 덴노[주의]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지휘관 불명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내물 마립간 (신라 국왕)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국양왕
파일:고구려 군기.svg 광개토대왕
병력 파일:백제 군기.svg 병력 규모 불명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 병력 규모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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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병력 규모 불명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군: 50,000여 명[8]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신라 연합의 승리
-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백제-가야-왜 연합군 격퇴
영향 금관국의 쇠퇴, 신라의 대고구려 의존도 심화[9]
1. 개요2. 전개
2.1. 신라- 관계의 악화2.2. 백제-가야- 연합군과의 충돌2.3. 백제 아신왕의 연이은 패전2.4. 최후의 전투
3. 신라 측의 공격4. 관련문서

[clearfix]

1. 개요

신라-왜 전쟁,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또는 고구려ㆍ신라의 백제ㆍ가야ㆍ왜 연합군 격퇴 사건은 4세기 중엽 - 5세기 초에 연쇄적・다발적으로 일어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침공을 이른다. 외세와의 교류가 드물었던 일본에서는 이 당시의 사건이 고쿠후 문화(国風文化)[10] 시기부터 임진왜란, 제국주의기에 이르기까지 야마토 민족의 민족주의적 구심점으로 작용[11]하였기에, 《일본서기》의 내용을 반영한 '삼한정벌(三韓征伐)' 등 호칭으로 부른다. 위키백과 일본어판의 기술

다만, 일본에서 '삼한정벌'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왜군의 침공을 이야기하면서도 중간중간 《일본서기》에만 존재하는 '신화적 내용'을 가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차검증되지 않은 픽션으로 사료가 오염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삼한'이라 하면 마한, 변한, 진한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남부를 모두 일컫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이 간접적으로 협력 관계에 있던 백제를 침공했다고 보기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으며, 이 밖의 다른 지역을 복속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이에 현대 일본 학자들 가운데서는 '삼한정벌' 대신 '신라 정벌' 또는 '신라 토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12]

신라-왜 전쟁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에,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의 분포 논쟁,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해석 논쟁, 일본으로의 볼모 논란이나 칠지도 논란, 백강전투다른 많은 고대사 논쟁과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다. 심지어는 이것이 한일관계 악연의 근원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 즉 여러 가지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 전개

삼국시대 중기 이전의 역사는 많은 사료가 소실되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일본서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사료 이외에 고고학, 금석학 유물을 조사하여 4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를 유추하고 있다. 그래도 관련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1. 신라- 관계의 악화

4세기 초중반부터 신라왜국 간의 관계는 이미 악화되고 있었다. 344년(흘해 이사금 35년) 2월,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공주와의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 측에서는 공주가 이미 기혼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왕은 이듬해인 345년 2월 서신을 보내 국교를 끊었고, 346년에는 신라의 풍도(風島)로 군사를 보내 변방의 백성들을 노략질한 뒤 서라벌을 포위하였다. 흘해 이사금은 이벌찬 강세(康世)의 간언에 따라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성문을 굳게 닫아두었고, 왜군이 퇴각하려 하자 정예 기병으로 공격해 격파하였다.

본격적인 충돌의 시작은 다음 왕인 내물 마립간 시기부터였다. 364년 4월, 왜국이 군사를 대거 일으켜 신라에 이르렀다. 이를 들은 내물 마립간은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든 뒤,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병사로 위장시킨 채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었다. 무리가 많다고 착각한 왜군들이 진격하자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 1,000명이 불시에 기습하였고, 뒤늦게 달아나는 왜군들을 추격하여 죽임으로써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비록 신라가 결과적으로 승전하기는 했지만, 정면 대결이 아닌 농성 및 전술을 통해 격퇴해야 했다는 점을 통해 왜의 침략이 이전에 비해 본격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위 전투에 대해 "신라군의 왼쪽이 빈 것을 눈치챈 타지(田道)가 날랜 기병을 이끌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신라군을 무너뜨렸다"며 다소 상반되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364년경 왜군의 대규모 침략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명확해 보인다.

2.2. 백제-가야- 연합군과의 충돌

신라는 당시 근초고왕의 선정으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와도 잦은 충돌을 겪었다. 366년 3월 백제의 사신을 맞이하고 2년 뒤인 368년 봄에 백제에게 좋은 말 2필을 받는 등 초반에는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369년 3월에는 근초고왕이 사백(沙白), 개로(蓋盧) 및 장군 목라근자, 사사노궤와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 7개국[13]을 평정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가 백제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굴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굴복은 일시적이었을 뿐이었다. 373년, 백제 독산성(禿山城)의 성주가 300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해 오자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이 "화친한 뜻에 어긋난다"며 도망한 백성을 돌려 보내기를 요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은 "원래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으니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너희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라 반문하며 백제 우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382년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왜국 측에서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침략하였는데, 이에 신라에서는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유혹에 넘어간 소츠히코는 도리어 백제 및 왜랑 긴밀한 관계에 있던 반파국을 공격하였고, 이 때문에 반파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를 비롯한 가야의 왕실과 백성들[14]백제로 피난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결국 가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간청하자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에 의해 반파국의 사직이 비로소 복권되었다.

이렇듯 신라는 백제, 가야, 로 구성된 동맹으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처지에 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는 북방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기 시작했다. 381년에는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사신 위두전진에 파견하였으며, 392년 1월에는 내물 마립간의 조카이자 고위 귀족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시간이 흘러 393년 5월, 왜군들은 신라를 다시금 침략하여 서라벌을 에워싼 채 닷새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내물 마립간은 깊숙이 들어온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성문을 닫았다. 왜군이 퇴각하자 내물 마립간은 먼저 기병 200명을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았고,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15]까지 추격하였다. 이윽고 왜군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2.3. 백제 아신왕의 연이은 패전

한편 392년 11월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매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좌장 진무가 이끈 393년 8월의 관미성 전투는 병력 10,000명을 동원했음에도 군량미 부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394년 7월에도 수곡성에서 광개토대왕의 정예 기병 5,000명에게 패하였으며, 진무를 다시 앞세운 395년 8월의 패수 전투에서도 7,000명의 고구려 기병에 의해 무려 8,000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기록하며 참패하고 말았다. 그해 11월에도 보복을 위해 군사 7,000명을 이끈 채 한강을 건너 청목령까지 이르렀으나, 때마침 만난 폭설로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되돌아와 한산성에서 군사들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계속되는 아신왕의 공세에 격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향해 진격하였고, 아단성미추성 등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킨 뒤 아리수를 건너 위례성까지 포위하였다. 이에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며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다. 아신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국내성으로 끌려간 것은 덤이다.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백제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갖가지 준비를 하였다. 397년 5월에는 고구려와의 맹세를 어긴 채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으며, 7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앉히며, 쌍현성을 새로 짓는 등 반격을 노렸다. 마침내 398년 8월 아신왕의 군대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군영 내에 큰 별이 떨어져 왕이 꺼리는 바람에 정벌이 중지되었다.

2.4. 최후의 전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그해 9월 도성 사람들을 모아 서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등 전쟁 준비를 그만두지 않았고, 이에 백성들의 불만은 팽배해져만 갔다. 399년 8월, 아신왕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자 지속되는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적국인 신라고구려, 전진, 말갈은 물론이고, 친선 관계인 가야, 왜국, 동진 등 주변 국가들로 대규모로 귀순하며 북벌이 취소되고 말았다.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궁월군이 무려 120현(縣)의 인구를 들고 왜국으로 망명해 왔을 정도이다.

고갈되는 병력과 떠나가는 민심을 뒤늦게 알아챈 아신왕은 별 수 없이 고구려 정벌을 잠시나마 포기하고 가야, 왜국과 힘을 합쳐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라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정황을 파악한 내물 마립간사신을 보내 "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해자를 부수었습니다. 노객은 백성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며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내물 마립간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사신에게 고구려군의 계책을 알려준 뒤 돌려보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영락 10년 경자년(서기 400년), (왕이) 보병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고, 그 뒤를 급히 쫓아가 임나가라의 종발성[16]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하였다.[17]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성(城)[18]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하였다. 과거 신라매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제2~3면[19]
마침내 400년, 백제가야, 왜국의 군사와 함께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구원을 위해 보병과 기병 도합 50,000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에 보냈는데, 남거성(男居城)[20]에서부터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몰아내며 서라벌에 다다르니 왜군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연합군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이르니 왜군이 곧 크게 무너져 항복하였다. 이후 전황은 글자 훼손으로 인해 잘 파악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잔존하던 연합군 세력을 마저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호우명 그릇.png
경주 호우총 출토 그릇. 광개토대왕(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전까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내물 마립간이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했을 정도로 고구려는 신라의 국가적 위기를 타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후 고구려눌지 마립간 이전까지 수십 년 간 신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일본, 독일 등에 미군이 주둔하는 거랑 똑같다. 전쟁으로부터 2년 후인 402년 2월 내물 마립간이 병으로 사망하자, 당시 눌지, 복호, 미사흔 등 수많은 계승 후보가 있었음에도 1년 전 신라로 귀국한 친고구려계 인사 실성 마립간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당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증거로는 광개토대왕의 왕호가 새겨진 〈호우명 그릇〉이 있다.

아울러 이 전쟁을 계기로 근초고왕 시기에 이룩되었던 백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패권은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으며, 가야와의 연합 또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그동안 가야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김해금관국은 큰 타격을 받아 주도권을 상실한 채 532년 멸망할 때까지 작은 성읍 국가로 전락하였고, 반파국에게 맹주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에도 백제는 403년 7월에 왜, 가야와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404년에는 셋이서 또다시 고구려의 대방(帶方) 땅(오늘날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번에는 수군육군으로 황해도의 석성(石城)을 짓밟은 후 평양성까지 이르는 등 나름대로 선전하였으나, 이윽고 연합군의 길을 막은 뒤 좌우로 공격을 개시한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의해 다시금 궤멸하고 만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참살된 연합군이 무수히 많았다고 하니 피해가 상당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3. 신라 측의 공격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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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신라가 왜군들한테 시달렸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일본역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도 꽤나 많이 나오는 편이다.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는 일본 측의 기록들은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지만, 일본 측 사서들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을 무턱대고 부정만 할 수는 없으므로 아직까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21]

만약 일본 측 사서들에서 나오는 신라의 왜 침공 기록들이 전부 다 사실이라면 신라와 왜는 서로 간의 무수한 침공을 주고받는 치열한 전쟁을 무려 수백 년 동안 계속 이어온 셈이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4. 관련문서


[1]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키워드. 일본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에는 '신라정토'로 기술하기도 함.[2] 407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3]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왜군이 고구려의 옛 대방군(현 황해도) 지역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하여 섬멸했다고 기술되어 있다.[4] 일본서기 주해, 村井(1999).[5] 사실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진구 황후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신라에 물난리를 일으켜 항복시켰다는 신화가 나온다. 이는 당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싶었던 일본인들의 욕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주의] 이주갑인상에 따른 일본서기의 창・변작으로 사료되고 있음.[주의] [8]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9] "내물 마립간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권.[10] 국풍 문화. 당나라가 쇠퇴하자 일본이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하고 일본 내부의 독자적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한 10세기-12세기 경의 문화를 의미한다.[11] 「八幡愚童訓」『日本大百科全書』小学館。[12] 다만 신라의 정벌에도 실패했다는 것이 함정.[13] 비자발(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14] 왕의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을 포함한다.[15] 오늘날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로 추정된다.[16] 금관가야 지역의 성이다.[17] 이 '안라인수병'이라는 문구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안라를 명사로 해석하여 '안라국 사람 수비병'으로 풀이하기도 하며, 안(安)을 동사로 해석하여 '나인(羅人)을 수비병으로 두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후자의 설을 따를 경우, '라(羅)'로 끝나는 고대 한반도의 국명이 한둘이 아닌지라 나인(羅人)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18] 이후의 71자는 글자 훼손으로 인해 판독 불명.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의 왜-가야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19] 삼국사기에는 해당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같은 내물 마립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400년(혹은 399년) 고구려 군대가 지원을 한 전쟁에 대한 기록은 없다.[20] 오늘날의 경기도 여주시 일대로 비정된다.[21] 삼국사기고려시대 편찬된 역사서이고 김부식이 유학자의 입장에서 썼으므로 신라의 기록이 있었더라도 이를 무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견훤경애왕을 죽였던 '서라벌 침공' 당시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군이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다수 손실되었는데 이 때에 신라측이 보관하던 사서들도 상당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