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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6:19:35

주필산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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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산 전투
駐蹕山 戰鬪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645년 (보장왕 4년) 음력 6월
장소 고구려, 주필산
원인 고구려 야전군의 대당(對唐) 안시성 구원전.
교전국 <rowcolor=black>
(공세)
고구려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tang_fel2.jpg 태종 (당 황제)
파일:tang_fel2.jpg 아사나사이 (좌위대장군)
파일:tang_fel2.jpg 장손무기 (사도, 능연각훈신)
파일:tang_fel2.jpg 이도종 (예부상서 강하군왕)[1]
파일:tang_fel2.jpg 이세적 (특진 병부상서, 능연각훈신)
파일:tang_fel2.jpg 울지경덕 (개부의동삼사, 능연각훈신)
파일:tang_fel2.jpg 왕군악 (좌무위장군)
파일:tang_fel2.jpg 장사귀 (우둔위 대장군)
파일:tang_fel2.jpg 우진달 (우무후 대장군)
파일:tang_fel2.jpg 설인귀
파일:tang_fel2.jpg 설계두[2]
파일:tang_fel2.jpg 양홍례 (병부시랑)
파일:tang_fel2.jpg 유홍기 (보국대장군, 능연각훈신)
파일:tang_fel2.jpg 안부국 (우령군 중랑장)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연수 (위두대형)[3]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혜진 (대형 전부 군주)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정의 (대대로)
병력 병력 규모 불명[4] 소수설 : 5 ~ 6만 명[5]
다수설 : 15 ~ 25만 명[6]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사상자: 6,500명 ~ 56,500명[7]
결과 당의 승리
영향 안시성 전투 발발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고구려의 상황: 역대 최대, 최강의 대군의 발현3.2. 당나라의 상황: 강적을 맞아 만반의 준비를 갖추다
3.2.1. 당군의 규모는 얼마였는가?
3.3. 초반의 맹공과 당나라의 위기3.4. 장손무기의 돌파, 격파당한 고연수의 고구려군3.5. 고연수의 항복3.6. 후일담 및 기타
4. 고구려군 선봉대와의 전투?
4.1.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선봉대이다4.2.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본대이다
5.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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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의 안시성 근교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라고 명명된 이유는 이 전투 당시 당군이 진을 친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였으나 결론적으론 패하였다.

2. 배경

당태종은 집권한 이래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친당 정책을 취하던 영류왕을 몰아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사실상 실권자로 집권하자, 명분을 찾은 당태종은 쿠데타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킨다.

당나라는 전쟁 발발 후 이세적, 이도종 등이 이끄는 군대가 개모성,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 당 태종이 직접 요동성, 백암성 등 4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등 여수전쟁 당시 수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성과를 거두지만[8]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인다.

3. 전개

주의: 이하의 서술은 단편적이고 모호한 사서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공백을 현대 군사사학계에서 추측으로 짜맞춘 결과물이며, 사서의 해석과 이해의 방향성에 있어 차이를 둠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대부분의 전황 추측은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하여』]에서 언급하는 주필산 전투 전황도에 입각하였다.

3.1. 고구려의 상황: 역대 최대, 최강의 대군의 발현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
{{{#!wiki style="text-align:right"
《전당문》 권7 태종황제 破高麗賜酺詔}}}

파일:4ed5r6ft7.png
영화 안시성에서 묘사한 주필산 고구려군의 진격. 저 새카맣게 몰려오는 알갱이 하나하나가 전부 다 개마기병이다.

연개소문은 15만 명의 병력을 보내어 당나라 본대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였다. 대로 또는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 남부욕살 대형 고해진 등이 지휘하였다. 욕살(耨薩)이라 함은 고구려의 지방관직이며 대성(大城)을 총괄하는 행정, 군사의 총령이었으며 중국의 도독(都督)에 대응되는 직책이었다.

이들은 병력을 안시성 전면에 포진하고 사방 40리에 뻗친 진용을 갖추었다. 총병력은 15만[9]에 이르렀고 이것은 당시까지 고구려가 단일 회전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를 동원한 것이었다.[10] 이것은 중국이 시종일관 두려워했던 만주의 잠재력과 반농경 반유목 문화권에서 뽑아낼 수 있는 군사력이 총동원된, 이전까지 없었던 가장 강력한 해동 군사력의 발현이었다.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11]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지금 고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병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고, 되돌아가려 해도 늪지에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것이 상책이다. 둘째, 성 안의 무리를 이끌고 야간도주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중책이다. 셋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반드시 하책을 가지고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대로 또는 대대로[12] 고정의는 지구전을 주장했으며 이것은 완벽히 같은 시점 당 태종이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요동은 10월만 되어도 쌀쌀해지기 시작하고, 라스푸티차를 연상시키는 범람철이 지나가면서 요하 하류 전역이 뻘밭으로 변한다. 당시 당나라군의 보급 대부분이 도로사정이 나쁘면 기동하지 못하는 수레에 의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큰 문제였고, 고구려군은 장기간 버티기만 해도 당군에게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태종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탓인지[13]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 작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지구전은 뼈가 아픈 전투 양상이었다. 남만주의 밭농사 지역은 평양 일대 다음으로 고구려에게 중요한 농경지대였으며, 10월까지 성 밖으로 나가 밭을 갈지 못하고 청야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다음 해 농사까지 파탄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고구려군의 물자 사정도 감안할 필요성이 있는데 당시 당나라군은 요동성비사성을 무너뜨린 상태였다. 예나 지금이나 보급을 대량으로 행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것은 수운이며, 이에 따라 고구려의 요동 지역 수군 기지인 비사성과 요하에 인접하여 강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천리장성 라인은 요동 지역 고구려군에게 보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 수 있다.

파일:external/blog-imgs-43.fc2.com/ryoutou030.jpg
당시 고구려 최대의 요새였던 요동성의 복원 모형.

이것은 당나라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약취한 곡량이 50만 석이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군의 요동 지역 보급 중앙기지는 최강의 요새이자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았던 요동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동성이 떨어진 이상, 대군을 요동에 주둔시키는 것은 청야전술로 이미 올해 농사는 글러먹었고 다음 해의 농사도 파탄날 상황인데 그나마 쌓여 있는 군량미도 몽땅 당군 손에 떨어진 판국에 안시성에 있는 비축미까지 모조리 먹어 없애겠다는 소리에 가까웠다.

즉, 이 시점에서 무리한 지구전을 펼친다면 당나라군은 일단 물러가겠지만, 고구려 역시 뼈아픈 경제적, 군사적 손실을 입어 재기하는 데 오랜 시간을 소모할 것이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그날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지정학적 사항을 고려한다면, 고구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나라의 주력군을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신속한 시일 내에 섬멸해야 했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당나라군과의 직접적인 일전을 주장하고 고정의의 지구전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으며 현실적인 고려가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수나라의 주력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한 전투의 이후 수나라는 산동성과 요하 이북 지역의 인구와 행정력이 파탄에 이르러 다시는 고구려의 존망을 뒤흔들 정도의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당나라를 상대로 고구려는 지휘부를 몰살시키는 수준의 전투를 치른 적은 있으나 당나라의 인구 구도와 조세 행정 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인명피해를 강요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13만 대군을 배로 실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에게도 4차 침공까지 감행하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판단은 본질적으로 건전했다. 당군을 여기서 전멸시키거나, 혹은 만약 당태종을 포로로 잡기라도 한다면 더이상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여력이 없게 될 것이었다.[14]

이 모든 것이 결국 고구려군이 승리할 수 있어야 하는 전제가 깔리지만, 군사적으로 보아도 수천리 밖에서 온 군대를 수성하는 쪽이 야전에서 요격한다는 것이 틀린 판단이 아니었으며, 특히 몇달동안 타지에서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치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군대였을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당군의 규모는 여러 이설들이 있지만, 요동에서 펼쳐진 여러 공성전과 그곳에 배치해야할 수비군 등을 고려하면 그보다 더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당 태종조차 고구려 군의 규모를 보고 두려워했으며, 이도종은 아예 저들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자신이 병력 5천을 이끌고 평양을 급습해서 항복시키겠다고 간언했을 정도였다. 즉 당나라군이 당시 고구려군보다 오히려 수적열세였거나, 혹은 많더라도 기병의 숫자 등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충분히 당군을 격멸할 수도 있다고 여겨질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이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고구려의 결전주의적 판단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했다. 고연수는 안시성 외곽에서 8리를 더 진격하여 당나라의 돌궐 기병 1,000기를 격파하였고, 당나라군이 '다루기 쉽다'고 말하며 스스로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이를 국제정치학에서는 Wishful Thinking, 즉 "자기가 답을 정해 놓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3.2. 당나라의 상황: 강적을 맞아 만반의 준비를 갖추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구려의 대군을 맞이한 당나라군은 전방에 방진을 치고 군권을 모두 당 태종에게 반납했다. 당 태종은 대대적으로 제장들의 군권을 재편하고 고구려군을 몸소 높이 올라 시찰하였는데, 그 진영이 사방 40리에 뻗치는 것을 보고 그 본인도 두려워했다. 다만, 고구려군의 진영이 사방 40리에 뻗쳤다는 것은 당나라군의 과장이거나 고구려군의 위장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고구려 군영은 횡대로 안시성 앞에 길게 늘어섰을 공산이 크다. 회전에서는 일단 양쪽으로 횡열을 길게 벌릴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도종은 저들의 수로 볼 때 고구려의 모든 군이 왔을 것이니, 자신에게 정예군 5천만 준다면 평양을 기습하여 항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모험적인 수를 당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이 밤에 문무백관을 불러, 몸소 지휘하여 이적의 욱기(勖騎) 15,000명을 적의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15]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예병 11,00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여,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등뒤를 치고, 태종은 스스로 기병(會騎) 4,000명을 이끌고, 고각(鼓角)과 기치를 숨기고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본우리 위에서 달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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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이세적, 장사귀 등은 서쪽에 진을 쳤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은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동쪽, 혹은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민 본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당시 당나라의 육화진법 체계에 입각한다면, 장손무기와 우진달이 이끈 병력은 대부분 도탕병(跳盪兵)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세민이 이끈 병력은 대부분 마군(馬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16] 이유는 밑에서 후술한다.

파일:주필산전투1.jpg

이로서 양군은 서로 마주보게 되었고, 안시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대회전이 그 포문을 열었다.

3.2.1. 당군의 규모는 얼마였는가?

당군의 규모는 사료의 해석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구, 신당서와 자치통감에 따른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당군은 3만 명이다[17]. 그러나 전당문은 당군의 규모를 40군(이세적의 14군, 장손무기의 26군)으로, 신당서에서는 양홍례의 24군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당문 등을 신뢰하여 당군의 규모를 3만 이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우선 상술한 대로 이적(이세적)은 15,000여명, 이세민은 4,0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렸는데, 이것은 당의 육진병법에서 중군과 전후좌우 및 좌우후군의 규모와 거의 비슷하게 일치한다. 정규 편제상 육화진법에서 1개 행군상 중군은 대략 4,000여명, 전후좌우군이 각각 2,600여명, 좌우후군이 각각 2,800여명으로 다 합쳐 7개 군에 20,000여명이었다. 전근대 군대가 완편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당군은 해당 시점 적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19,000여 명 이상의 이적 및 이세민의 병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행군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여기에 장손무기가 이끈 11,000여 명의 병력의 경우, 그 기동 속도나 나타나는 것에 대한 묘사에 의거하여 대부분 기병, 그 중에서도 당군의 핵심이었던 도탕대(跳盪隊)로 추정할 수 있다. 당군의 행군은 노수, 궁수, 마군, 도탕, 기병, 치중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마군의 경우 묘사상 기마보병으로 추정되며 기병은 기보혼합의 통상 근접전투대, 그리고 도탕대는 수나라의 멸망 이후 실질적으로 맥이 끊긴 중화 문명의 중장기병을 대체하는 경기병이었을 가능성이 높게 여겨진다.[18]

병력 규모가 상세한 책부원구(冊府元龜)의 기록을 여기까지로 넘기고, 이 외의 병력을 추산할 경우 『구당서』 양홍례열전에서 병부시랑[19] 양홍례가 기보(騎步) 24군을 이끌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1개 행군이 7개 군으로 이루어지는 당군의 체제상 이것은 3개 이상, 4개 이하의 행군이었다고 추산 가능하다. 즉 50,000~80,000여명 이상의 병력이 더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전당문』에서 등장하는 십수명의 행군총관(行軍摠管)의 숫자는 이 숫자에 더해질 병력을 뒷받침한다. 전당문에 따르면 이세민은 장손무기에게 26총관[20], 이세적에게 14명의 행군총관을 주었다고 하는데[21], 행군총관 1~2명은 1개의 행군을 거느리며, 1개의 행군에는 3~5명의 총관이 있으므로[22] 26총관은 대략 5~8개 행군의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서 조금 더 숫자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쪽은 이세적의 14명의 행군총관이다. 장손무기의 26총관은 그 총관들의 등급이 불명확하므로, 같은 기록 안에서의 모순에 있어 조금 더 검증하기 쉬운 이세적의 기록에 의거하여 숫자를 추산할 경우, 14명의 행군총관이 모두 각각 대총관과 부총관이라고 가정할 경우 최대 7개의 행군을 거느리게 된다. 이것은 상술한 5~8개 행군이라는 숫자에 일치하며,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장손무기의 26총관은 이 14행군총관에 여타 총관까지 합친 수치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이와 같은 기록을 총합하면 당군은 최소한 14명의 행군총관, 그리고 3~4개의 행군 이상의 병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추합한다면, 당군의 병력은 최소한 60,000여 명[23]에서 최대 170,000여명[24]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당군의 규모를 16만 명(= 40군 × 1군당 4,000명)으로 보는 견해[25], 18만 명[26]30만 명으로 보는 견해[27] 등이 있다.

그러나 구, 신당서 등에 나타난 기록을 신뢰하여 당군의 규모를 3만 명으로 추산하는 견해도 다수 존재한다.[28] 문영철은 당군의 편제를 40군으로 보되,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지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차출된 임시 편제로 보고 당군의 규모가 3만 명이라는 기록을 긍정한다. 이에 따르면 당태종이 직접 이끈 당군의 규모가 10만 명[29]에서 16만 명 내외[30]로 추산되는데, 이들 중 기존 전투의 사상자, 당군이 점령한 각 성에 배치한 주둔군, 안시성 내부의 지원군을 견제하기 위한 병력[31]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만이 주필산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구, 신당서와 책부원귀 등에서 고구려군의 규모가 당군의 규모를 압도한다는 서술이 일관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당군이 비교적 소규모라는 구, 신당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32]. 서영교도 주필산 전투 전날인 6월 20일부터 당군이 안시성을 두텁게 포위하고 공격하였다는 기사에 비추어 당태종이 이끈 군사 중 상당수의 전력이 안시성 포위에 투입되어 있었으므로, 주필산 전투에 투입된 당군 규모를 3만 명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도 전당문에 기록된 총관의 숫자에 비례하는 병력이 배치되었다고 가정하면, 고구려군의 공세를 감당할 모루 역할을 맡은 이세적의 군대보다 고구려군을 배후에서 기습하는 망치 역할을 맡은 장손무기가 그 2배에 가까운 군대를 이끌었다는 것이 된다. 고구려군의 숫자가 상당하고 그 기세가 엄청났으며, 이세적의 모루가 붕괴되면 4,000명에 불과한 당태종의 본대가 그대로 고구려군의 공세에 노출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세적의 2배 가까운 병력을 배후 기습을 담당한 장손무기에게 배치했다는 결론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구, 신당서와 책부원귀에 따른 3만 명의 병력 배치(이세적 15,000명, 장손무기 11,000명, 당태종 4,000명)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33].

3.3. 초반의 맹공과 당나라의 위기

파일:주필산전투2.jpg 파일:주필산전투3.jpg
다급히 후방으로 달려오는 장손무기와 이세적군과 6군을 제압하는 고구려군.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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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권198, 정관 19년 6월 22일 무오}}}
고연수와 고구려군의 주력부대는 이세적군과 6군을 향해 진격하였다. 사서의 기록에 의거한다면 당시 이세민의 6군과 이세적군은 서로 거리를 멀리 두고 포열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에 따라 고연수와 고구려군은 곧바로 이세적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고, 거의 비슷한 시점에 고혜진과 말갈기병들은 이세민의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대)은 고려(군)에게 제압당했고, 태종이 흑기(이세적의 대장기)를 살펴보라 명하였는데, 척후병이 흑기가 포위되었다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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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가화(隋唐嘉話)上, 中華書局 10~11쪽}}}
당나라군 역시 포위섬멸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기세는 충천했고 이세민의 6군은 순식간에 고구려군에게 제압당했다. "흑기가 포위당했다"는 사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컨대, 고구려군의 중앙이 서로 분리하여 포진한 이세민의 부대와 이세적의 부대 사이로 돌파하고, 이에 따라 이세적의 부대가 삼면으로 고구려군과 대치하여 사실상 압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말갈기병들이 황제의 진을 침범, 다시 말해 황제와 그 직할병력의 중앙을 돌파해 들어갔으며, 당나라의 횡진을 사분오열시키는 수준으로 몰아붙였다.[34] 이세민의 기병들이 전투기병들이었다면 이 때 이세적과 이세민 사이로 돌파하는 고구려군을 충분히 막아냈겠으나, 말갈기병의 돌격에 속수무책으로 황제의 진영까지 관통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세민의 기병들은 전투기병이 아닌, 이동할 때만 말을 타고 전투할 때는 내려서 방진을 치는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대로 당나라군이 밀렸다면 이세민은 살수대첩의 재림을 보았을 것이다.

3.4. 장손무기의 돌파, 격파당한 고연수의 고구려군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명하여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연수 등이 크게 놀라 장차 대처하려 했지만 그 진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번개가 쳐서 당군의 위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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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파일:주필산전투4.jpg
그러나 이세민이 동쪽으로 우회시킨 장손무기가 북상하며 고연수의 후미를 쳐 진을 무너뜨렸다. 이에 따라 고구려군의 매우 중요한 주력이었던 고연수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고구려군의 우익 전체가 송두리째 허물어졌다. 밀리는 듯하던 이세적군은 전열을 수습해서 고구려군의 측방을 지속적으로 압박해 들어갔고, 포위전 과정에서 치명타를 입은 전력은 장손무기의 대규모 기병들이 보충하였다.

파일:주필산전투5.jpg
고구려군은 속절없이 패주하며 퇴로를 찾아 달렸다. 이때 당군은 출구 쪽을 어느정도 띄워 두어 고연수군이 퇴로를 찾아 몰리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이를 따라 잔군을 거느리고 탈출한다. 고구려군의 시체와 비명과 통곡이 산골짜기를 메우고 개울이 붉게 물들었으며 뼈와 창검이 쌓였다고 한다. 고연수는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당나라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였다.

3.5. 고연수의 항복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자신의 군사 36,800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의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황제는 욕살(褥薩) 이하의 지휘관 3,500명을 선발하여 당나라의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300명은 전부 땅에다가 파묻었다. 말 5만 필, 소 5만 두,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빼앗았으며, 기타의 장비도 그에 달할 만큼 빼앗았다. 황제가 올랐던 산의 이름을 고쳐서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으며[35],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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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산의 이름을 주필산으로 명하였고, 파진도를 그리고 중서시랑 허경종에게 글을 써서 돌에 새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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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고려전}}}
6월 23일에 고연수, 고혜진은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좌둔위 장군 왕군악이 도끼에 맞아 두동강이 났으며[36] 이세적과 이세민의 친위대 모두 제압당하여 위기를 맞았다. 이에 대한 응징이 필요했다.

당태종은 말갈 병력을 3,300명을 가려뽑아 땅에다가 파묻어 버렸다. 황제의 진을 공격하여 공포에 떨게 한 복수였고, 동시에 고구려에 복속된 여러 종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고구려군 가운데 장교 3,500명을 가려뽑아 포로로 삼았다. 이들은 당나라 벼슬을 받고 당군에 편입 된 후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다.

이외에 병졸들은 모두 석방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포로의 숫자는 3만에서 16만까지 고무줄처럼 제각각이다. 상식적으로 안시성 공략전 이전에 수만에 달하는 고구려군 포로들을 모두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포로의 규모가 당나라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해 숫자를 끼워맞춘 감도 없잖아 있으며 말이 장교 3,500이지 실제로는 포로 전부를 합쳐서 3,500일 가능성도 크고 말갈병을 제외한 나머지 고구려군 포로일 가능성도 크다.

3.6. 후일담 및 기타

고구려군은 살수대첩을 능가하는 전과를 꿈꾸었으나 패배를 당했다. 주필산 전투의 여파로 안시성 근처에 위치하는 후황성, 은성 등의 소규모 성에 주둔하던 고구려군이 달아났고 이 일대가 모두 산개되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당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볼 만한 정황들이 다수 존재한다. 일단 상기된 것처럼 전투 중에 황제의 6군이 고구려군에 제압되었다는 기록과 이세적 휘하의 군사들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당측이 정확한 피해 규모를 명시하지 않았을 뿐,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한 당나라 지휘관 좌무위장군 왕군악도 고연수~고혜진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지휘관의 급이었다.

또한 바로 코 앞에 있는 안시성 공략 착수에 이르기까지 50여 일간 기록의 공백이 생긴다. 주필산 전투 이후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착수하는데만 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고연수가 당군에 항복한 시점은 645년 6월 23일이지만 당군은 7월 후순에나 안시성에 접근하고 공격은 645년 8월 10일에 착수된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곳과 안시성의 거리는 10리 남짓으로 길어봤자 반나절 거리이다.

이 공백에 대해서는 주필산 전투에서의 피해 수습,[37] 대대로 고정의, 혹은 그 이외의 총사령관이 이끄는 고구려군 본진과의 후속 전투 발생,[38] 고구려의 역습 및 교두보와 물자 탈환,[39] 고구려와 설연타와의 연계[40] 등이 제기된다. 다만 자세한 사항은 사서에 기록되어있지 않아서 사료들의 교차검증을 통한 유추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후술 하듯이 당나라에서 관련 기록을 아예 조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찌되었던 공통적으로 사실상 이 회전을 끝으로 당나라군의 활동 반경은 안시성 인근에 한정되었고 더이상의 공세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서의 기록대로 고구려군을 대파했다면 금방 달성했을 목표, 즉 4방향으로 치고 들어가 파죽세세로 평양성을 꿰뚫겠다는 원래의 목표와는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전략)유공권(柳公權)의 소설[41]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다. 영공(이세적)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편
대체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다만 중국의 역사서에서, 한 번 골라 베낌으로써,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심지어는 유공권의 소설을 끌어 와서 당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마광자치통감에도 죄다 그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땅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감히 단 한 마디도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인 건 아니건 간에, 죄다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열하일기

워낙 남은 기록 자체가 뒤가 구린 전쟁이라 그런지 이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가 이긴 것으로 보는 사가들도 한반도에선 일부 제기되기도 했다. 중국 측에서도 당태종 등을 개인적으로 띄울 때나 언급되지 대체적으로는 안시성 전투와 당태종의 비참한 패전에 묻히는 경향이 많다. 단순히 명시된 기록 그대로만 읽어보자면 당태종이 중원을 평정하던 시절에도 찾아보기 힘든 신묘한 무공인데 많지 않은 언급이나 문맥을 보자면 졌잘싸 중 잘싸, 내지는 드라마틱한 위기 탈출 정도.

주필산 전투의 주인공인 당태종은 물론이고 이를 기록하라고 명한 허경종 둘 다 역사왜곡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기록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게 주필산 전투의 전공은 당대에는 고구려군 포로가 전투에 참가한 15만의 고구려군 수를 초과하는 16만까지 과장되다가 정사가 편찬되면서 3만까지 교정이 들어간다. 주필산 전투에 참가한 고구려군의 수를 25만까지 불리기도 했던 건 덤이다. 중국 사관들이 보기에도 뭔가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선 과장된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주필산 전투로 인해 고구려군이 대부분 와해되었거나, 이를 넘어 장교 인재풀이나 야전군대가 증발하는 바람에 이후 당군을 야전으로 다시는 맞설 수 없게 되었다던가, 연개소문의 무능으로 고구려의 숨통이 끊어진 전투라든가 등이다. 해당 내용은 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에게 가로막혔을 때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평양을 직공하자는 의견을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주둔했던 고구려의 10만 대군 때문이었다는 사실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42] 고구려군의 대부분이 주필산에서 와해되었다면 전혀 등장할 수가 없는 10만 대군이, 그것도 당군 수뇌부인 장손무기에 의해 언급되기 때문.[43]

여담으로 당 태종은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을 이끌고 자신을 위기에 몰아세웠던 고연수와 고혜진을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다.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병마한 추장[44]이다.
《전당문》, 태종황제, 645년

4. 고구려군 선봉대와의 전투?

주필산 전투 이후에도 말갈이 진을 침범하니 이(세)적 등이 힘써 깨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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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명신주의》}}}
양홍례는 주필산 싸움에서 기병과 보병 24군을 인솔하고, 나아가 적(고구려)이 뜻하지 않을때에 공격을 하여 깨뜨리는 바가 많았다. 이세민이 산위에서 양홍례가 무리를 인솔하는 것을 내려다 보았더니, 군대가 모두 사력을 다하고, 적을 죽이고 포로를 잡는 바가 많아서 심히 장쾌하게 여겼다. 허경종 등에게 말하기를 월공아랑(양홍례)은 과연 훌륭한 가풍을 타고 났구나라고 하였다.

유홍기를 전군대총관으로 삼았다. 고연수를 주필산에서 치는데 따라서 공격하여 힘써 싸워 공이 있으니 태종이 거듭 노고를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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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열전 양홍례, 유홍기}}}

4.1.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선봉대이다

이 기록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입장에서는 주필산에서 고구려의 대군을 이끈 것으로 흔히 알려진 고연수와 고혜진은 각각 위두대형, 대형의 관등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두 사람에게 충고를 했다고 알려진 고정의는 대대로를 역임한 것이 확인되는데, 고연수와 고혜진의 지위가 너무 낮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들의 지위를 당나라 관제에 대입하면 종3품, 정5품으로 딱 장군, 과의도위에 대응하는데 대장군>장군>중랑장, 절충도위>낭장, 과의도위 순서다. 위두대형인 고연수 기준으로 보더라도[45] 대대로를 역임한 원로를 제치고 지휘권을 행사할 정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래에서 위덕왕과 계백의 사례를 드는데, 위덕왕은 이미 왕세자였고 계백 역시 두 번째인 달솔 정도는 되었으니 다섯 번째, 일곱 번째인 고연수, 고혜진과는 처지가 다른데다 원래 황산벌 전투는 계백이 책임자로 나간 것이고 충상과 상영은 전투 중에 소수 인원을 이끌고 온 사람이었기에 경우가 다르다. 특히 귀족만 세 자리 수를 학살하며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 아래에서 대대로를 지낸 사람이라면 연개소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하므로 권력구도를 생각해도 고정의가 실제 지휘관이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또한 위의 기록을 보면 신당서나 자치통감에서의 주필산 전투에 관한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 병부시랑 양홍례는 24군을 거느리고 주필산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한 기록이 확인되며 능연각 공신 중 하나인 유홍기 역시 전군대총관으로 등장한다. 24군의 숫자는 유동적이지만 최소한 편제상으로만 본다면 고연수와의 싸움에서 등장한 이세적, 장손무기의 당나라군의 규모와 대등하거나 더 큰 규모이며 유홍기 역시 대총관이라는 직책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 마찬가지이다.

또다른 의견으로 고연수, 고혜진은 당군과 직접 충돌했기에 특별히 기록된 것일 뿐 총지휘관이 아니라 선봉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경우 선봉을 맡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지위이므로 논쟁의 여지도 적으며, 고연수의 군대가 아사나사이의 돌궐기병 1,000여 기를 하루에 30리가 넘는 속도로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군은 대열이 40여 리나 뻗칠 정도의 대군이라는 기록과 조합해 보면 이 많은 병력이 1,000여 기를 다 따라다니고 있었다기보다는 고연수의 군대가 그런 기동이 가능할 정도로 비교적 소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고연수, 고혜진은 고구려 대군의 총사령관이 아닌 선봉대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6월 21~23일 이후의 기록의 공백 시기 동안 후속적으로 당나라군의 발목을 잡는 별도의 부대, 내지는 총사령관의 본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니면 그 둘이 실제로 야전에서 총지휘를 했지만, 공에 눈이 멀어 참모진과 선봉대만 휙 이끌고 앞서나가다 패전해 지휘부에 공백이 생겼고 추후 고정의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이 나머지 병력을 수습해서 당군을 견제했다는 주장도 있다.

4.2.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본대이다

반대로 해당 기록이 정확하며, 주필산 전투도 단순히 당군과 고구려 선봉대와의 교전이 아니었다고 보는 입장의 경우 먼저 고정의의 지위가 대대로가 아니라고 본다. 즉 신당서, 옥해는 고정의의 직위를 대대로로 기재하고 있으나, 그보다 이른 시기에 쓰인 구당서, 책부원귀는 모두 대로라고만 기재하고 있다. 신당서의 기록을 긍정하여 고정의가 대대로임을 긍정하는 의견도 있으나[46], 자치통감, 삼국사기도 모두 대로로만 기재한 점을 들어 고정의의 직위가 대로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특히 고정의라는 이름은 중국계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삼국사기에만 등장할 뿐이므로, 삼국사기는 구삼국사 등 중국계 사서가 아닌 별도의 사서를 참조한 것으로 보임에도 고정의의 직위를 대로로만 기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당서, 옥해의 기록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47]. 구당서, 책부원귀 등 신당서에 앞서 편찬되어 당 실록, 국사 등 원서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사서들이 일관되게 고정의의 직위를 대로라고만 기재하고 있는 점, 현재 학계 일반론은 대로라는 직책의 실질에 관해서는 일관된 결론이 나오지 않았으나, 대대로와 구별되는 직위임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중국계 사서에서도 대로와 대대로를 구별하는 점 등에 비추어 고정의의 직책은 대대로가 아닌 대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정의를 대대로로 본 기록은 신당서가 기존 사서들을 검토하여 정리하는 과정에서 후기 고구려의 관직체계에서 "대로"라는 관등 내지 관직이 관측되지 않자 이를 대대로의 오기로 보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48]

또한 백제는 일본서기에 백합야 전투에 관하여 위덕왕이 '온 나라의 군대를 끌어 모은' 백제군을 이끌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당시 위덕왕의 관등은 5등위인 간솔에 불과했고, 삼국사기에는 황산벌 전투에서 참전한 백제군 중 1등위 좌평인 충상, 상영이 존재함에도 2등위 달솔인 계백이 지휘관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기벌포 전투에서는 아예 8등위 사찬에 불과한 시득이 지휘관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타국의 사례이긴 하나 관등 순위와 지휘권의 순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며, 고연수와 고혜진은 관등과는 별개로 고구려 5부의 지방을 통솔하고 군정을 책임지는 욕살로 기록되어 있는데, 고연수와 고혜진을 고구려 중앙정권이 지방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파견된 방계 왕족으로 파악하는 견해[49]든, 주필산 전투에 파견된 고구려군은 북부의 국내성, 남부의 한성이 통제하는 병력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50]든 관등보다 직책에서 비롯된 권위로 지휘권을 행사했을 수 있다. 위덕왕이 5등위 간솔이라는 관등보다 백제의 왕세자라는 지위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고연수 고혜진 역시 5등위, 7등위라는 관등보다 욕살이라는 지위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연수, 고혜진의 북부, 남부욕살은 평양 내부의 욕살로 추정되는데, 욕살은 중앙군과 지방군을 이끌고 가서 전투지역의 지방군과 합동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오늘날 군단장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직책으로[51] 고연수, 고혜진이 15만 명의 대군을 통솔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직위에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52]. 그 밖에 책부원귀에서 고연수, 고혜진를 군주(軍主)[53], 유인원기공비는 고연수, 고혜진을 대장(大將)으로 지칭하고 있는 점[54]을 들어 욕살은 평상시에는 임지에서 중앙군으로 구성된 병력을 통솔하고 있다가 유사시에는 야전군의 장수로서 출정하는 무장 혹은 군관적 성격이 강한 관으로 고연수, 고혜진이 욕살의 권한을 넘는 것이나 임시적 조치로서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한 최고 사령관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하며[55], 구당서에서 고연수, 고혜진을 별장(別將)으로 지칭한 것을 들어 고연수, 고혜진이 15만 대군 전부를 지휘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이러한 의견도 고연수, 고혜진이 군주, 대장으로 지칭된 것을 들어 상급 제대의 지휘관으로서 독립 군세를 이끌고 주필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56]

더욱이 고정의를 "연로하다"고 기재하고 있는 점, 주필산 전투 후 고연수, 고혜진이 오골성의 욕살이 "늙어" 군사를 지휘하기 어려울 것이니 평양으로 직공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점을 더하여 보면 실질적인 군사 지휘권을 가진 주체는 고연수, 고혜진이고, 고정의는 고연수, 고혜진에게 조언하거나 감시하는 역할(예컨대 황산벌 전투에서의 충상과 같은 지위) 내지 부대가 아닌 국가차원의 대전략, 후방지원, 보급 등을 수행했다고 보는 견해[57] [58], 고정의는 연개소문, 고연수, 고혜진과 함께 고구려 최고사령부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59] 등도 제기된다. 이와 같이 학계에서는 욕살의 지위나 이에 따른 고구려 야전군 지휘권, 고연수, 고혜진이 실제 이끈 병력 규모나 그들의 역할, 고정의의 역할 등 관하여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나,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군세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임은 대체로 부정하지 않는다.[60]

또한 고연수, 고혜진이 이끈 군대가 이동한 거리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멀다는 의견도 분명하지 않다. 사서에 따르면 고연수, 고혜진은 아사나사이와 교전하면서 당군을 얕보고 교전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고구려군 전군이 아사나사이의 기병을 따라 추격했다는 취지가 아니다. 또한 신당서 원문은 고구려군이 이동한 거리를 1사(一舍), 즉 군대가 하루를 걷는 거리로 기재하고 있으므로, 고연수, 고혜진의 군대가 대군이었다 하여 하루에 30리를 이동하지 못할 정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수당가화, 책부원귀와 자치통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군의 포진이 40리에 달했다. 수당가화에서는 고구려군의 숫자가 당군보다 많다(彼衆我寡)고 기재하고 있으며[61], 전당문도 '고구려군의 무리 15만이 있어 깃발(旗)이 30리를 연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연기가 하늘에 머무름이 마치 누른 뱀이 안개를 토해 내는 것과 같았다. 기마궁수가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붉은 개미가 떼로 밀려오는 것과 같았다' [62]고 하여 고구려군의 숫자가 기세가 상당했다고 기재하고 있고, 삼국사기도 당태종이 고구려군의 군세를 보고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사서들은 일관되게 고구려군의 숫자가 당군보다 많거나, 적어도 당군을 위압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63] 전투 후 후왕성, 은성의 고구려군의 병력이 도주하고, 당군이 단기로 군량을 운송해도 고구려군이 공격하지 않는 등 고구려군에게 심리적 공황상태가 관측되기도 한다[64]. 주필산 전투 직후 당군의 작계 논의에 따르면 당태종은 건안성에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안시성을 내버려두고 건안성을 공격 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이세적도 이러한 작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건안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고연수는 더 나아가 오골성을 직공하면 틀림없이 오골성을 점령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논의는 안시성에서 건안, 오골성에 이르는 경로에서, 야전을 통해 당군의 이동을 직접 저지할만한 고구려의 야전 전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65]

또한 선봉설 긍정론에서 지적하는 양홍례의 24군도 주필산 전투에서 이끈 병력으로, 이들과 장손무기의 26군과의 관계에 상관 없이 이들이 후속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사료적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전당문에 따르면 양홍례의 24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배후를 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문영철은 전게 논문에서 장손무기의 26군과 양홍례의 24군이 모두 고구려의 측, 후방을 공격하는 동일한 역할을 맡았음을 근거로[66] 26군 중에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양홍례가 소속된 24군이고 나머지 2군은 지휘부 보호와 후술할 교량 철거에 투입된 병력이었으나, 다만 양홍례가 장손무기의 부대에 배속되어 가장 선두에서 선봉 부대를 이끌었기 때문에 신당서에서는 마치 전투에 투입된 24군을 이끌었던 것처럼 기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서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15만 대군이 모두 주필산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즉 15만 대군 중 일부 전력을 이끌었던 고연수, 고혜진의 위상이 마치 전군 총사령관과 같이 과장되었을 수는 있다), 적어도 고연수, 고혜진은 독립된 군권을 가지고 주필산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고연수, 고혜진의 지휘 하에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의 숫자나 전력은 당군을 위압할 수 있고, 그 궤멸이 고구려군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져다 줄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었다고 보인다. 나아가 주필산 전투 후 일부 병력이 수습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적어도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병력 중 선봉대만을 고연수, 고혜진이 이끌었다거나, 고연수, 고혜진이 아니라 고정의(내지는 제3자)가 지휘권자로서 안시성-주필산 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후속 전투를 치렀다는 것은 마땅한 사료적 근거가 없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창작물


[1] 직접 참전 기록은 보이지 않고 안시성을 포위하는 역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구당서, 신당서에는 나오지 않으나 삼국사기 설계두 열전에 주필산 전투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교과서나 기타 현대에 기록된 서적에 있는 북부 욕살이나 남부 욕살은 알기 쉽게 풀어 쓴 것에 가깝다. 고구려는 3경에 5부와 욕살을 두었고 지방에도 5부를 두고 욕살들을 두었기 때문. 다만 3경의 욕살들은 군주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으며 또한 동서남북중의 방위가 아니라 전후좌우중의 5방으로 불렀다. 즉 고연수와 고혜진은 현대로 치면 서울이면 자치구 여러개를 묶은 연합자치구청장이고 일반 광역시라면 자치구청장이거나 군수겸 해당지역 군사령관인 셈.[4] 이하의 "당군의 규모는 얼마였는가?" 문단 참조.[5] 고연수와 고혜진의 직위를 감안하면 최고사령관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대체로 이 직위가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이 2 ~ 3만 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5 ~ 6만 명 정도 나온다.[6] 거의 대부분의 기록은 15만, 《양당서》 설인귀 열전에는 20, 25만으로 나와있다. 포로가 된 고연수의 "저희들은 고구려의 10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보았을 때 15만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7] 《구당서》(945) 고려전: 포로 156,800명, 사망자 10,000명. 《당회요》(961) 고구려전: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신당서》(1060) 고려전: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자치통감》(1084) 645년 6월 기미일조: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8] 수 양제가 넘지 못했던 여러 성들을 넘겨보았다는 명예를 제외하고는 사실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곧 다시 모조리 탈환되기 때문이다.[9] 설에 따라 25만.[10] 살수 대첩에서 몇 명을 동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아 제외한다.[11] 대대로 고정의의 주장을 기술한 것이다.[12] 이에 대하여는 후술한다[13]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14] 소설 삼한지에서 김정산 작가는 여기에 더해, 그러한 공을 세운다면 현재 쿠데타를 통해 집권중인 연개소문을 견제하거나, 몰아낼 수 있는 위상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아무리 집권중인 연개소문이라도 만약 당군을 전멸시키거나, 당태종을 포로로 잡는 수준의 대공을 세운다면 정치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을 것이다.[15] 책부원귀에는 전원 기병, 기타 기록에는 보병, 기병 혼합이라 기록되어있다. 이는 당시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일시 전환하는 전술이 동아시아에서 유행하고 당에 수입된 것에 주목하여 주필산 전투에서도 같은 전술을 구사하였으리라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세적도 이를 구사하여 기병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16] 마군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이지 않으나, 도탕병을 기록할 때 이미 "마군"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도탕대라 한다"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도탕병이 통상적으로 거론되는 기병이고 마군은 이동할 때만 말을 타는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7] 이세적군 15,000명, 당태종 4,000명, 장손무기 11,000명. 이는 책부원귀도 동일하다[18] 국내에서는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세환이 도탕대를 두고 섬멸전을 위한 기병, 마군이 통상적인 기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고 이것이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어 확산되었는데, 실제 당군의 전투 사례로 미루어 보아 마군은 드라군과 유사한 기마보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9] 국방부차관. 현재의 국방부장관급은 병부상서(兵部尙書)이며 해당 시점에 이세적이었다. 하술할 내용에 따르면 해당 인물은 이세적의 지휘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0] 김용만의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는 이들도 모두 행군총관으로 보아 총 40명의 행군총관이라고 추측했지만, 원문에서는 "행군총관"이 아니라 "총관"이다.[21] 다만, 이세적이 실질적으로 당군을 총지휘하는 병부상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하의 14명에 이르는 행군총관은 이세적 바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당군의 행군총관 총수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22] 대총관, 부총관, 총관으로 나뉘며 대총관과 부총관이 일반적으로 행군총관에 해당한다.[23] 책부원구에서 언급하는 30,000명의 병력 + 3개의 행군. 여기서는 예비 장교 내지 행정관일 수도 있어 실제보다 부풀려지기 쉬운 행군총관의 숫자를 무시하고, 확실하게 언급된 행군의 숫자에서 모든 행군이 편제될 수 있는 최소단위인 10,000여 명이라고 가정하였다.[24] 책부원구에서 언급하는 30,000명의 병력 + 7개의 행군. 최댓값의 추산에서는 행군총관이 모두 대총관과 부총관으로 완편된 1개의 행군을 거느린다고 가정하여, 14명의 행군총관을 7개 행군에 대한 지휘관으로 가정하였다.[25]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26] 나동욱 2008 「고구려의 대당 군사전략 변화-645년~659년을 중심으로」[27]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28] 임용한, 2012 『한국고대전쟁사2권』, 혜안, p.179. 劉矩·姜維東, 2006 『唐征高句麗史』, 吉林人民出版社, pp.111~112. 서영교, 2015 「駐蹕山 전투와 安市城」『동국사학』 58, 문영철. 2021. 645년 고구려군과 당군의 주필산 전투 고찰. 한국고대사연구,(102), pp. 312~323.[29] 신당서에 언급된 요하방면 육군 10만 명[30] 구당서에 따른 요동도행군 6만 + 육군(六軍) 중 책부원귀에 따라 마수산에서 확인되는 6만, 요동성 공략 때 확인되는 1만 도합 7만 합계 13만 명 또는 위 신당서의 요하 방면 10만을 육군(六軍)의 규모로 파악할 경우, 육군 10만 + 요동도행군 6만으로 총 16만 명[31] 특히 강하왕 도종은 주필산 전투와 관련해서 아무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데, 문영철은 도종이 안시성 내부의 지원군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으리라 추정한다[32] 다만 문영철은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의 규모도 15만 명이 아니라 5~7만 명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주필산 전투는 당군 3만과 고구려군 5~7만이 맞붙은 전투라는 것[33] 문영철, 전게논문도 정공법으로 고구려와 대적해야 했던 이세적 부대는 총관 1명당 1,000명을 배속시킨 반면, 기습공격을 전개해야 했던 장손무기 부대는 병력을 최소한으로 하여 총관 1명 당 420여 명을 배속시켜 각각 전술적 역할에 따라 부대 규모도 다르게 편제했다고 추정하고 있다[34] 자치통감 호삼성 주에 따르면, 전투 후에 말갈병들이 갱살당한 것은 이때 '진영을 범했기 때문(以靺鞨犯陣也)'이다.[35] 다만, 위에 있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필산은 막판에 고연수와 고혜진이 물러나 최종 방어진을 쳤다가 항복한 그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가 고구려군을 시찰하기 위해 올랐던 산은 주필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가 잘못 기록했거나, 혹은 황제가 전투를 마친 뒤에 고구려군의 해산된 진영을 시찰한 뒤 주필산으로 이름을 고쳤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전에 이세민이 대단한 배짱을 발휘하여 고구려군의 진영을 우회하여 고구려군 진영 바로 뒤에서 고구려군을 살핀 뒤 돌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36] 신라 출신의 용병인 설계두도 전사하여 둘 다 나란히 대장군으로 추증된다.[37] 구당서에 따르면 7월 13일, 당군은 전사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고 별도의 부대가 귀환할 시기에 같이 수송한 기록이 있다.[38] 후술되는 병부시랑 양홍례와 고구려군과의 전투, 역대명신주의에서 언급되는 말갈군과 당군의 추가 전투가 그것이다. 고연수의 항복 이후 이세민은 말갈족에 대해 경고하는 차원에서 생포한 말갈군 포로들을 생매장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고구려와 말갈은 끈끈한 연계 관계가 이어졌음이 이처럼 기록들을 통해 확인된다.[39] 실제로 이즈음부터 당나라의 보급이 끊기고 나타날 리가 없는 식량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40] 설연타는 돌궐의 한 갈래로, 당시 연개소문이 말갈인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 즈음 설연타는 당나라를 침공했으며, 주필산 전투 이후 당나라 군의 공세가 주춤해지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60일간 토산을 쌓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이 주력군의 손실을 막고 관망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68] 그리고 고구려에서 철군한 당나라군은 설연타와 전쟁을 벌여 다음해에 멸망시킨다.[41] 삼국사기에는 유공권의 소설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당 현종 때 사람인 유속이 쓴 수당가화이다. 남북조 말기에서 수나라를 거쳐 당 현종 때까지의 여러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42] 일부 사서에는 안시성에 주둔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43] 사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게, 저 "무능한" 연개소문은 이후 고구려 역사상 손에 꼽힐 대회전에서 살수대첩에 맞먹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멸망전 당시 금산 전투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당군을 저지했다가 또 똑같이 별동대에 측방을 얻어맞고 궤멸했다.[44] 변한+마한을 가리킨 건지 마한 전체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쓴 건지 확실하지 않다. '모두(둘 다) 마한 추장이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45] 다만 당의 관제상 3성6부의 총장인 중서령과 문하시중의 품계도 당 태종 이후에 하나 올라서 종2품이고 장관급인 상서들조차 정3품이었고 종2품부터는 왕이나 공 정도가 아니면 오르기 힘든 품계였으므로 종3품이면 일반적인 신하로서는 올라갈 만큼 올라간 것이다.[46] 김용만, 2003, 『새로 쓰는 연개소문傳』p.154~155[47]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pp.192~194; 문영철, 2020, 「645년 高句麗軍과 唐軍의 駐蹕山 전투 考察」,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p.26[48] 이러한 신당서의 태도와 달리, 노태돈을 비롯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대로가 대대로의 오기 내지 대대로와 같은 직책이 아니라, 대대로와 구별되는 별도의 관등 내지 직책임을 긍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49] 윤상열, 고구려 중후기 통치체제의 분봉적 요소, 25쪽[50]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22쪽[51] 김현숙, 2005, 『고구려의영역지배방식연구』, 모시는사람들, pp.356~367[52] 문영철, 2020, 「645년 高句麗軍과 唐軍의 駐蹕山 전투 考察」,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p.26[53]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 高延壽, 大兄·前部軍主 高惠眞等”[54] “虜其大將延壽ᆞ惠眞 俘其甲卒一十六萬”[55] 이성제. (2018). 褥薩의 大城·王都 5部 駐在와 그 職任. 한국고대사연구,(92). 즉 욕살은 본직이고, 욕살이 야전군 지휘관 직위를 겸직하며, 책부원귀나 유인원기공비의 군주, 대장은 이러한 야전군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56] 이정빈. (2022). 6~7세기 고구려의 욕살과 군사 운용. 고구려발해연구, 72. 위 논문에 따르면 고구려가 동원한 15만 대군의 총지휘권자는 고정의가 아니라 연개소문이고, 고연수, 고혜진은 그 중 일부 군대의 지휘권을 위임받아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전당문에서는 "고구려국의 조정(政本)은 고연수, 고혜진에게 지금 僞軍을 모두 위임하였다"고 하여 고연수, 고혜진의 군권이 고정의가 아니라 조정에서 직접 위임 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만 대군은 연개소문이 동원한 총병력이고 이 병력이 전부 주필산 전투에 투입된 것은 아니지만,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군대의 지휘권은 (고정의가 아닌) 고연수, 고혜진에게 있었으므로 이들이 군주 또는 대장으로 기재되었다는 취지이다.[57] 이문기, 2000, 「高句麗 莫離支의 官制的 性格과 機能」, 『白山學報』55, p.72 ; 정원주, 2018, 「安原王代의 政局 運營과 大對盧 爭鬪」, 『高句麗渤海硏究』 第60輯, 고구려발해학회, p.206 ; 이규호, 2017, 「고구려 對盧의 성격과 역할」, 『사학연구』127, 한국사학회, pp.149~166[58] 문영철, 전게 논문, p.29[59] 이정빈, 전게 논문[60] 이정빈의 논문(이정빈, 2016,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將軍과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 한국고대사탐구, 22, 77-116)은 고연수, 고혜진이 별장으로 지칭된 점을 들어, 중국계 사서가 당 태종의 전과를 과장하기 위하여 고연수, 고혜진의 실제 권한보다 과장하여 15만 야전군의 사령관이라 적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는 하나, 이러한 의심을 뒷받침하여 고연수, 고혜진이 사령관임을 부정할만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고 보고 있다.[61] 서영교, 2015, 駐蹕山 전투와 安市城, 동국사학 58집[62] 全唐文 卷7, 太宗皇帝 破高麗賜酺詔, “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63] 문영철의 전게 논문도 사료에 나타난 제반 정황을 봤을 때 당군 병력이 고구려군보다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64]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 출판부[65] 즉 신성, 건안성, 안시성 일대의 고구려군이 당군이 진출한 이후 후방에서 보급로를 타격하거나, 당군의 퇴로를 막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당군과 고연수는 그 당시에는 직접 당군의 진격 자체를 요격하여 돈좌시킬만한 고구려의 전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보고 있었다.[66] 전당문은 장손무기의 고구려군의 배후를 치고 급소를 눌렀다(抵背扼喉)고 기재하고 있고, 당서 열전에서는 양홍례가 고구려군의 배후로 나아가 공격하였다(跳出賊背)고 하여 장손무기의 26군과 양홍례의 24군이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재하고 있다[67] 초반에는 돌격으로 당군 보병대를 관통했지만 뒤에 있던 본진 보병대를 상대로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