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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원 전투 五谷原 戰鬪 | ||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 529년 (안장왕 11년) 10월 | |
장소 | 오곡원 (現 황해북도 서흥군) | |
원인 | 고구려와 나제동맹의 대립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백제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안장왕 (고구려 태왕) | 지휘관 연모 (좌평) |
병력 | 피해 규모 불명 | 백제군: 30,000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2,000 명 |
결과 | 고구려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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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와 백제간의 교전. 오곡원은 현재의 황해도 서흥군이다.2. 설명
백제는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위례성 고토 회복을 위해서, 마찬가지로 강성한 국력을 가진 고구려로 인해 북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웠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끊임없이 백제를 침공했는데 성왕 7년째인 529년 10월에 안장왕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친정을 감행하여 백제 북쪽 변경에 있던 혈성(穴城)[1]을 함락시키는 등 백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백제의 변경이 함락되자 곧바로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병력 3만을 붙여주고 고구려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성왕 본기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성왕 본기
하지만 안장왕이 다시금 공격을 막아내면서 끝내 전사자만 2천명을 기록한 채 패하고 말았다.
十一年 春三月 王畋於黃城之東 冬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 克之 殺獲二千餘級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와 오곡(五谷)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기》 안장왕 본기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와 오곡(五谷)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기》 안장왕 본기
이후 안장왕은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2] 이에 백제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3]
3. 백제군은 과연 오곡까지 진출했는가?
오곡원은 현재 황해도 서흥군에 위치해 있다. 신라와 힘을 합쳐서 겨우 한강 유역을 탈환할 정도였던 백제의 국력을 감안했을 때 한강 유역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이곳까지 백제군이 진출할 수 있었을까란 의문도 가능하지만, 신라를 끌어들여야 했던 백제는 다름아닌 이 오곡원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무령왕 때 백제는 침미다례 일대 호족과의 협상을 완전히 타결하여 직접 지배화한 후, 이미 우호 관계였던 옛 건마국 세력 및 전남북 동부 대가야 세력은 물론 경남 서부 일대까지도 상당히 잠식한 국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근초고왕~아신왕 시절에는 신라와 상당한 긴장 관계 탓에 병력을 어느 정도 신라 방면에 할당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 시기엔 신라와 관계가 원할했기에 비록 역시 긴장은 어느 정도 있었을망정 근초고왕~아신왕 때와는 달리 대 고구려 전선에만 전력을 몰빵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성왕 이전 무령왕 때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수복하고 황해도에도 자주 출병했을 거란 최근 학설을 보면 백제가 오곡원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무령왕 때 수복한 영역을 죄다 뱉어낸 정황, 그리고 523년에 백제군과 고구려가 패수에서 전투를 벌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 삼국사기 지리2 한주 해구군의 기록을 통해 현재의 강화도로 비정함.[2] 한씨 미녀 설화를 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인 백제의 달을성현과 개백현까지 안장왕이 공격해 수중에 넣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안장왕의 추가적인 정벌을 암시하는 기록이라 볼 수 있는 셈.[3] 일설에 따르면 이미 백제의 동성왕 ~ 무령왕 시기에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이 안장왕의 침입으로 다시 고구려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특히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서 달을성현과 개백현을 백제가 지배하였다는 뉘앙스의 언급이 나오기도. 현재 학계에서도 이 설을 꽤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