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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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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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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管山城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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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제 성왕 수정본.jpg

포로가 된 성왕과 칼을 든 고간 도도.
시기 554년 (진흥왕 4년) 7월~12월[1]
장소

신라, 관산성
(現의 충청북도 옥천군) 및 주변 지역[2]
원인 나제동맹의 파탄으로 유발된 한강 유역 영유권 분쟁.
교전국 <rowcolor=black> 신라
(수세)
백제-가야-왜 연합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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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무력 (대장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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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제 군기.svg 부여창 (백제 왕세자)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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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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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모노노베노 마가무[4]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5]
[[가야|
伽倻
]] 고전해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연합군: 최소 30,000여 명[6]~40,000여 명[7]
피해 포로 39,000여 명 이상[8]
군마 8,000필 상실[9]
전사자: 29,600여 명
- 좌평 4명 전사
- 연합군 29,600명 전사[10]
결과 신라의 대승
영향 백제 성왕 전사
나제동맹 파탄
백제의 침체 및 가야 멸망
1. 개요2. 배경
2.1. 나제동맹의 결성2.2.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다2.3. 신라 내부의 혼란과 백제의 기습
3. 전개
3.1. 백제의 상황: 모든 준비는 끝났다3.2. 신라의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3.3. 김무력의 역습과 성왕의 패착3.4. 성왕의 죽음, 백제ㆍ가야ㆍ왜의 연합군 전멸
4. 영향5. 창작물에서6. 기록

[clearfix]

1. 개요

백제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자세하게 기록된 전투 중 하나이다.[11]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VS 신라의 적대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2. 배경

2.1. 나제동맹의 결성

백제신라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하여 나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협력함으로써 강대국 고구려를 한동안 막아내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공세가 약해지자 서로 도울일이 많이 없어져 나제동맹도 다소 느슨해졌고, 양국이 후방에 있는 가야의 영유권에 대해 신경전을 벌이거나[12] 서로를 믿지 못해 국경에 방어 태세를 갖추는 일도 벌어졌다. 이렇듯 동맹이 위태로워지던 541년, 백제의 성왕이 먼저 동맹을 제의하여 제3차 나제동맹이 체결됐다. 하지만 그 해 성왕은 바로 제1차 사비회의를 열어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신라를 견제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547년 제2차 사비회의에서는 아예 신라와 가야의 국경 지역에 백제군을 주둔시켜 신라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외부적으로는 동맹관계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양국 간 갈등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548년 독성산성 전투 때까지만 해도 위기에 빠진 백제군을 돕기 위해 신라가 장군 주진(朱珍)을 필두로 한 3,000명의 원군을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참패시키는 등 동맹이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참패시킨 전과는 나제동맹에게 더욱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일:관산성.png
5세기 한반도 중부지방의 세력도
550년 1월, 백제 성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10,000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도살성(현 충청북도 제천시)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두 달 후 고구려가 탈환을 위해 침공하자 백제는 금현성을 함락당하고 도살성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 원군이 왔고, 고구려군이 피로해진 틈을 노린 신라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은 패퇴했다. 신라군은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도살성과 금현성에 방어병력 1,000명을 주둔시켰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증축했다.

이후 고구려가 도살성을 되찾기 위해 재침해왔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를 패퇴시킨 후 퇴각하는 고구려를 따라 북쪽 고구려 본토를 침공했다. 이어 백제 역시 한강 하류의 고구려 영토를 공격했다. 때마침 551년 고구려의 북쪽에서 돌궐이 잇따라 침입하여[13] 남쪽의 방비는 허술해졌다. 이 틈에 신라와 백제는 각각 한반도 중부의 10성과 6성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백제는 개로왕 때 상실한 고토를 회복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2.2.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다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
삼국사기성왕 31년(553년)조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을 단독으로 모두 차지했다. 이에 관해 진흥왕이 백제를 기습적으로 무력점령했다는 것으로 다큐멘터리나 교양 서적에 적혀 있는 경우가 있지만[14] 《일본서기》를 근거로 '백제가 방어나 관리를 할 능력이 없어서 한강 유역에서 일단 철수했고, 신라가 이 틈을 타서 무력충돌 없이 접수했다.'는 설이 현재는 다수설이다. 일본서기뿐 아니라 국내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직접적으로 설명되진 않지만 한강 하류 영토를 신라가 차지했다는 부분에서 가질 취() 한자를 쓰고 있는데 공격을 해서 빼앗았다면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처럼 '공취(取)', '침()' 한자를 쓰는 게 자연스럽다는 근거도 있다.

고대사 전공이 아닌 임용한이 제기한 주장이었다지만 노태돈, 송호정, 주보돈 등이 2019년 공동집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에도 '백제가 포기한 후 신라 무혈입성'설이 실려, 임용한 교수만의 주장으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성왕 문서로.

하지만 성왕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지 석 달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후의 흐름을 봤을 때 백제 성왕이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전략을 쓴 듯하다. 또한 이는 당시 급변하는 신라 왕실의 상황을 염탐하려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백제가 상부 덕솔(上部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15]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했고, 왜는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으며, 554년 초에도 왜가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가진 도래인들을 왜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일본서기》에서는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왜가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었지만, 백제 성왕도 이 시기 전쟁 준비로 연합군 편성을 진행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 조정은 정권 교체기였다. 진흥왕이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즉위했을 당시 나이는 7살에 불과했고, 지소태후와 대신들의 섭정이 있었다. 진흥왕의 유년기 동안 신라 조정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에는 지증왕대부터 활약해온 명장 이사부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일찌기 우산국(울릉도)을 정복(512)하는 성과를 올린 이사부는 529년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 합병을 이끌었다. 540년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이사부는 군부 최고의 직위인 병부령직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사부는 548년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 550년 도살성, 금현성 전투의 승리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2.3. 신라 내부의 혼란과 백제의 기습

551년 마침내 성년이 된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 18세 청년 군주 진흥왕에게 노장으로 섭정 시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이사부는 걸림돌로 여겨졌을 것이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진흥왕은 곧바로 이사부를 권력에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552년 이후 사서에서 이사부의 이름이 사라짐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사부는 약 10년 후 진흥왕의 권력이 공고해진 후 다시 중용되었다. 어쨌거나 친정을 시작한 직후 진흥왕은 이사부 등 원로들을 배제한 채 군부를 재편하고 김무력 등 젊은 장수들을 중용했다. 김무력은 이사부의 부장이었지만, 사실 다소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로 원래 가야 왕자였는데,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인물이 바로 이사부였던 것. 552년 이후 김무력은 신라군의 주력을 자주 지휘하게 된다. 553년 진흥왕의 명을 받아 한강 유역을 접수하고 신주를 설치한 장수 역시 김무력이었다.

이처럼 신라군의 정국이 급변함은 백제 성왕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전장에서 거의 50년을 활동한 불패의 명장 이사부가 사라진 것은 백제로서는 놓칠 수 없는 찬스였다. 신중하고 현명한 지소태후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를 이끌게 된 것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진흥왕과 용맹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수 김무력이었다. 진흥왕은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훗날 위덕왕)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밖에서 볼 때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왕이 혈기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당대 최고의 명장을 좌천시킴은 거의 자멸에 가까운 행동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군을 이끌게 된 인물은 신라에게 반감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가야 왕자 출신 김무력이었다.[16][17]

결국 결혼 동맹 직후인 554년 1월,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규모 미상의 대가야군과 왜군 1천 명도 합세했다. 마치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4세기 후반 무렵의 구도와 비슷했지만 신라는 그때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직전인 553년 12월에는 왕자 부여창이 세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400년ㆍ404년 때처럼 광개토대왕에게 당했던 것과는 다르다.

3. 전개

삼국사기일본서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이 여러모로 차이를 보인다. 이하에서는 여러 정황상 관산성의 위치[18]를 옥천군 환산성으로 보는 견해[19]를 우선하여 전제하며, 기타 지명들에 있어서는 진성(珍城)을 충남 금산군[20]으로, 구타모라(久陀牟羅)를 청성면 굴현성[21]으로 전제한다. 이하의 기술은 모두 이 전제를 토대로 진행하며 사료의 해석과 전장의 지목을 달리함에 따라 사료는 완전히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3.1. 백제의 상황: 모든 준비는 끝났다

사비로 천도한 직후의 백제는 상대적으로 과거 웅진백제 시절보다 국력이 많이 늘어 있었다. 병력 규모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3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크게 의심할 부분이 없어 보이는데, 이 중 대부분이 백제군이겠지만 아신왕 시절처럼 왜군과 가야군도 많이 편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丙申 百濟遣中部木刕施德文次·前部 施德 曰佐分屋等於筑紫 諮內臣·佐伯連等曰 德率 次酒·杆率塞敦等 以去年閏月四日到來云 臣等 以來年正月到 如此噵而未審 來不也 又軍數幾何 願聞若干 預治營壁 別諮 方聞 奉可畏天皇之詔 來詣筑紫 看送賜軍 聞之歡喜 無能比者 此年之役 甚危於前 願遣賜軍 使逮正月 於是 內臣奉勅而答報曰 卽令遣助軍數一千·馬一百匹·船卌隻
병신(554)년에 백제가 중부 목리시덕문차[22], 전부 시덕 왈좌분옥 등을 축자에 보내 내신·좌백연 등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간솔 색돈[23] 등이 지난 해 윤달 4일에 와서 ‘신 등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24]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뿐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이와 같은 자세한 정보를)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또 따로 “이제 들으니 ‘황공하옵신 천황의 조를 받들어 축자에 나와서 보내줄 군대를 살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쁨은 이루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백제의 구원 요청[25]

즉, 당시 백제군에는 최소한 1천 명의 왜군, 1백 필의 말, 40척의 왜국 선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의 선박 40척은 1천 명에 이르는 병력을 수송하기에 다소 부족한 숫자이기에 여러 차례 왕복하면서 지속적으로 병력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략)...速遣竹斯嶋上諸軍士 來助臣國 又助任那 則事可成 又奏 臣別遣軍士萬人 助任那 幷以奏聞 今事方急 單船遣奏 但奉好錦二匹·毾㲪一領·斧三百口 及所獲城民 男二女五 輕薄追用悚懼 餘昌謀伐新羅 耆老諫曰 天未與 懼禍及...(후략)...
...(전략)...(성왕이)"죽사도[26]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27]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28]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 1영, 도끼 300口,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29]라 아뢰었다.
또한 성왕은 "병력을 따로 만 명 내어 임나를 돕겠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당시 백제군이 총동원되어 가야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1만 명의 병력을 아래로 내려보내어 가야 일대의 방비를 하겠다는 식의 작전설명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미 부여창은 3만 명의 병력을 끌고 나아가 전선에 있는 상태였으므로, 가야에 보낸다는 이 1만 명의 병력은 별도의 군세로 추정된다.

즉, 최종적으로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 동원한 병력의 총 합계는 최대 40,00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중에는 상당수의 대가야군과 왜군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당시 백합야 전투를 승리로 고구려를 패하게 한 부여창이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파일:진성 공격.png

마침내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출병, 부여창을 필두로 30,000여 명에 이르는 연합군이 554년 7월에 진성(珍城)을 공격한다.

3.2. 신라의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

承聖三年九月百濟兵來侵於珎城, 掠取人男女三万九千馬八千匹而去.
승성(承聖) 3년 9월, 백제군이 진성(珎城)을 공격하여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았다.
삼국유사 권제1 제1기이 진흥왕 두번째기사

파일:우덕탐지.png
백제군은 진성을 공격하여 남녀 39,000여 명과 말 팔천 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성으로 비정되는 금산 일대의 보루들에서는 3만 9천 명이나 되는 인구와 8,000여 필에 이르는 군마가 있을 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해당 지역 자체도 지형이 좁고 협소해 그만한 인력이 모여 살기는 무리하며, 또한 신라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최접경 지역에 전략물자인 군마를 8천 필이나 모아 둘 이유가 없다.
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잡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이로움을 잃었다.
삼국사기 권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15년 7월자기사

즉, 삼국사기 진흥왕 15년 7월의 기사에서는 "관산성을 공격해서" 군주 각간 우덕과 잡찬 탐지 등이 나아가 싸우다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표현[30]으로 미루어 보아 우덕과 탐지 등이 교전한 곳은 진성 유역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되면 진성 일대에서 포획한 39,000명의 포로와 8,000필의 말 역시 설명되는데, 각간과 잡찬이 나올 정도의 대전투였다면 전후에 그 정도 규모의 포로와 군마를 노획할 수 있었을 것이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10년 겨울에 웅천성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제19고구려본기 제7 양원왕 10년 첫번째 기사

한편, 554년 10월에는 고구려가 병력을 이끌고 힘의 공백이 생긴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다. 웅천성의 정확한 위치는 안성천 유역이라는 설도 있으나, 주로 웅진으로 비정한다[31]. 즉, 사비로 천도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수도로서의 기능 일부가 남아 있었을 웅진 일대까지 고구려군이 밀고 내려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백제는 어느 곳 하나 패하지 않았고, 싸우는 전역마다 모두 승리했다. 백제는 3만이나 되는 대병을 내어 진성, 관산성 등 신라의 최전방 전 지역을 휘몰아치고 있었고, 고구려가 남진해 내려와[32] 얼마 전까지 수도였던 대도시를 공격하는데도 그것까지 모조리 격퇴하는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무령왕과 성왕이 그동안 얼마나 충실하게 백제의 국력을 건실히 길러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략)...以十二月九日 遣攻斯羅 臣先遣東方領物部莫奇武連 領其方軍士 攻函山城 有至臣所將來民竹斯物部莫奇委沙奇 能射火箭 蒙天皇威靈 以月九日酉時 焚城拔之 故遣單使馳船奏聞
...(전략)...(성왕이)12월 9일에 사라[33]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의 영[34]인 물부 막기무연(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35]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36]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 물부 막기위사기(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유시[37]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결국 12월 9일[38], 고구려를 막아내고 전열을 재정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군은 관산성을 공격해 당일 오후 5시경에 함락시켰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백제는 일본에 관산성으로부터 약탈한 비단 2필, 탑등(毾㲪)[39]1필, 도끼 300자루와 포로 다섯 명을 보낼 정도였다.[40] 옥천 일대에는 많은 성 유적이 남아 있고, 관산성은 이 가운데 여러 가지 성으로 학자에 따라 다르게 비정되지만, 이후 백제의 움직임을 본다면 그 많은 성들도 어쨌든 별로 길지 않은 기간 안에 전부 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때에 백제의 기노(耆老)[41]가 부여창에게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두렵다"라고 하며 너무 깊숙하게 파고드는 것을 만류했지만, 부여창은 "늙었도다, 어찌 겁내는가?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42]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말한 뒤 계속 치고 들어갔다고 한다.

파일:백제의 굴기.png
이후 부여창은 현재의 청성면 굴현성으로 비정되는[43] 구타모라까지 쳐들어가 보루를 구축하고 신라 본토 깊숙하게 칼을 들이밀었다. 이 공세로 신라의 핵심 전략 요충이었던 삼년산성이 위험에 처했고, 나아가서는 추풍령만 넘으면 소백산맥이라는 방벽을 넘어 신라 본토로 침공이 가능해졌다. 이로서 신라의 서부 방어 시스템 전체가 백제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3.3. 김무력의 역습과 성왕의 패착

파일:관산성전투_백제신라전황도.png
붉은 색은 백제군 진격로
푸른 색은 김무력의 한강 점령군 진격로

이 때에 갑자기 한강 유역 신주(新州)에 있던 김무력이 병력을 끌고 남하하였다.[44] 신주의 위치는 당항성, 위례성 등 한강 하류로 추정되므로, 신주에 주둔하던 이들이 관산성까지 남하하려면 백제의 북방 방어태세[45]에게 걸리지 않으면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땅을 최대한 밟지 않고 우회해서 돌아와야 하므로, 아마 위에 있는 그림처럼 직선으로 가로지르기보다는 삼국사기에서 이사부가 확보해 놓은 도살성[46] 등 보루와 성을 전전하면서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역사저널 그날, 토크멘터리 전쟁사 등에서 이것을 매우 극적으로 언급하여 무비판적으로 인용되면서 "김무력이 급격히 남하했기 때문에 전황이 백제에게 불리해졌다"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김무력이 남하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대단한 위기에 처했다는 뉘앙스는 찾아볼 수 없다. 만약 백제군이 한강에서 내려온 김무력의 병력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놀랍다는 투로 적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백제 유민의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도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즉, 김무력의 병력은 남하하자마자 당장 물리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던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유리하던 전황을 뒤집은 것은 한창 승기를 잡고 있던 백제 성왕 본인이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歩騎五十, 夜至狗川
32년(554) 가을 7월[47]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 성왕 마지막 기사 中

其父明王憂慮 餘昌長苦行陣 久廢眠食 父玆多闕 子孝希成 乃自往迎慰勞
그 아버지 명왕[48]은 여창[49]이 (군대를) 움직여 나아가는 데에 오랫동안 고초를 겪고 한참 동안 잠자고 먹는 것을 폐할 것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50]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하러 나아갔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 성왕은 고작 기병과 보병 50명을 이끌고 신라를 기습하려고 나아가는, 제3자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성왕의 노련함에 비하면 이 행동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선시대의 사가들은 이를 두고 "김부식이 오천(五千)을 오십(五十)으로 잘못 적은 것 아니냐?"라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부여창이 전쟁으로 지치고 힘들 것을 염려하여, 부친으로서 다급하게 나아간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쪽이 삼국사기의 어처구니없는 기록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 합리적이긴 하다. 그러나 이 공격의 준비를 위해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비정하게 이용당한 소비 부여씨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왕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정치적 감각을 무너뜨릴 정도로 어리석고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측이다.[51]

이 때문에, 일부 학자는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가야를 지키기 위하여 1만의 군대를 더 내려보내겠다"라는 대목에서 언급된 추가적인 백제군의 기동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해당 기록에서 성왕이 이 1만의 군대를 끌고 움직였으나 성왕 일행 혹은 본대가 낙오되었거나, 혹은 이들을 남겨둔 채로 성왕만 움직였다는 것.[52] 상대적으로 더 그럴싸하다.

그러나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쨌든 명령 계통에서 굉장한 위치에 있는 왕이 갑자기 싸우고 있는 최전선에 등장한다는 것은 지휘체계의 혼동을 줄 수도 있는 일이고,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50명밖에 안 되는 병사가 아니라 기백 단위의 경호를 받고 있겠지만(...) 만약 왕이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작전이 모두 흐트러지는[53]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행동이다.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해당 시점에서 성왕이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실책을 벌여, 상당 부분 승세를 타고 있던 전투를 말아먹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신라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백제 왕이 다가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삼년산군(三年山郡)[54]의 비장, 고간(高干) 도도(都刀)를 위시한 병력이 성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裨將三年山郡 高干都刀急擊
...(전략)...이에 삼년산군의 비장 고간 도도[55]가 갑자기 공격하였다....(후략)...
삼국사기 권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15년 7월자기사

新羅伏兵發與戰
...(전략)...신라의 복병이 갑자기 일어났으므로 맞서 싸웠다.
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 성왕 마지막 기사 中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 斷道擊破 是時 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 曰 苦都賤奴也 明王名主也 今使賤奴殺名主 冀傳後世 莫忘於口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56]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의 사마노[57] 고도에게 "고도는 천한 종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종으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그리고 신라군은 성왕을 노리기 시작했다.

3.4. 성왕의 죽음, 백제ㆍ가야ㆍ왜의 연합군 전멸

파일:백제 성왕 수정본.jpg
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성)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대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넷과 사졸 29,600인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15년 7월자기사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본격적으로 이 월척을 향해 총공격을 가한 것은 분명해 보이며[58] 마침내 도도는 성왕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정확한 장소는 구천(狗川)[59] 혹은 고리산(古利山)[60]으로 되어 있는데, 고리산으로 보는 쪽은 이 장소를 삼년산과 동일시하여 도도가 있었을 삼년산으로 본다.

파일:26052_15083_5033.jpg
반면 구천으로 보는 쪽은 대부분이 관산성 바로 옆의 구진벼루를 비정한다. 이견은 꽤 많지만, 일단 이곳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지금도 구진벼루에 가면 성왕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61]【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62]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일본서기》[63]

장소가 정확히 어디던 간에, 신라군은 이렇게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의하면 이 소식이 백제 연합군 군영에 전해지자, 잘 나가던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이 틈을 타 신라군이 총반격을 시작하여 백제군을 대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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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왕이 사망했다고 해서 이미 진군 중인 군대가 와해되거나 갑자기 전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64], 성왕을 살해한 뒤에도 후속 전투는 계속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백제군이 관산성이나 구타모라에서 멈추지 않고, 성왕 사망 시점 혹은 사망 이후에도 상당 부분 진격했다는 정황은 많은 부분에서 알 수 있는데, 일례로 영동군 각계리 핏골에서는 백제군이 이곳에서 전멸했다는 전승이 내려오며, 그것을 영동군청에서 지역 소개비에 명시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성왕이 사망한 구진벼루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고, 연합군 주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산성, 진성, 구타모라 모두와 상당히 떨어진 지점이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지역과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 즉, 세 곳에 연합군이 분산하여 주둔하다가 한꺼번에 모여들기에 좋은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연합군의 이전 움직임으로 미루어 보아 연합군의 2차 목표였을 가능성이 높다.

각계리 일대는 당시에 실제로 신라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비 마립간 대에 신라가 대대적으로 축성하는 산성들[65] 가운데에 좌라성(坐羅城)이 바로 영동에 있으며, 동시에 각계리 핏골산성과 부용리산성 역시 근방에 있다.

즉, 백제군은 좌라성을 위시한 영동 일대를 타격하는 것이 처음부터 목표였고 이에 따라서 영동을 크게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성-관산성-구타모라 일대로 자신들의 전역을 확대한 것일 수 있다. 물론 구타모라로 올라가는 경로가 삼년산성을 공략하기 위한 경로와 일치하기도 하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쨌든 목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각계리 일대에서 연합군이 전멸한 것이 맞다면, 연합군이 각계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집결하였다가 성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려던 찰나에 신라군이 일시에 기습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연합군이 29,600여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4명의 좌평(佐平)이 죽었으며,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다고 되어 있다. 반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전공을 논할 때에 4명의 장수의 목을 베었고 10,000여 급을 베었다고 명시하는데, 이것은 기록의 괴리가 아니라 29,600여 명의 사망자 가운데 10,000여 급이 김무력의 휘하 부대가 세운 전공이고 나머지는 다른 부대가 세운 전공이기 때문일 수 있다.

관산성 전투에서 김무력이 세운 공이 큰 것은 맞지만 그의 부대가 신라군의 양적 주력을 맡지는 않았다는 전황은 상당히 분명하다. 일본서기에서는 "온 나라의 군대를 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아찬[66]과 각간[67]이라는 높은 장수가 군대를 끌고 나왔다가 패전했는데 후속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다소 어색하므로 신라군이 상당한 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부여창의 전력을 총공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에서 태자 부여창도 포위당했다가[68] 왜 지원군의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69]이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태자가 이 샛길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부여창이 신라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그 포위를 강제로 풀고 탈출하였다는 정황을 말한다. 바꿔 말한다면 신라군은 성왕에 이어 위덕왕까지 이 자리에서 죽일 뻔했다는 것이다.[70] 이후 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이후 연합군이 철수한 뒤 다시 최전선이 관산성 일대로 밀려나는 양상이 보이므로[71], 신라군은 이후 단기간에 관산성, 진성, 구타모라 및 신라군이 점거한 지역 대부분을 모조리 탈환해 버린 듯하다. 다만 신라군에게도 호락호락한 싸움은 아니었는지, 이후 신라 내에서는 이 승세를 몰아 백제를 더 공격하자는 여론이 일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72].

여기서 백제가 큰 패배를 당한 건 맞지만 연합군 전사자의 숫자가 일정 부분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여럿 있다. 부여창이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서, 백제의 동맹이던 대가야를 돕기 위해서 계속 병력을 동원한 것이 그 근거. 그러나 이런 후속 공격은 한국과 일본 기록을 종합해 봐도 관산성 전투 때만큼 매섭지는 못했는데, 신라가 한강 유역을 영토로 굳히는 것을 막지 못했고, 대가야아라가야 같이 수백년을 이어온 가야 국가들이 관산성 이후 10년도 안 지나서 모조리 신라한테 흡수되었다. 이 말은 관산성 이후에 위덕왕이 동원한 병력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며, 귀족들이 협조를 했을 리도 만무하니 국왕 직속의 중앙군이 관산성에서 적잖은 손실을 입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부여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받들기 위해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어 아버지의 명복을 빌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듣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일본서기에만 있는 내용으로, 일본서기는 연합군의 주체를 태자 부여창으로 보고 있으니 부여창이 반대하는 신하들을 비난하면서 출전을 강행했다가 아버지가 죽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자 신하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말을 들었다면 성왕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이번에는 제발 말 좀 들으라고 부여창을 압박한다.[73]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백제 왕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결국 부여창은 귀족들의 뜻을 물리지 못한 채 즉위하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

4. 영향

말하자면 삼국시대판 이릉대전. 나제동맹의 결렬과 백제-신라 관계의 파탄을 상징하는 대전이자, 백제 몰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관산성 전투와 후속 전투를 통해 신라는 한반도 중부 지방, 특히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했고, 이후 삼국 구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74]

반대로 백제는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때 입은 피해는 임진왜란 당시의 칠천량 해전에 비견될 정도.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남은 역량을 쥐어짜 왜, 가야와 연합하여 계속 신라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이후 백제는 무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단 한번도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나제동맹은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파탄났으며 이후 약 100여년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백제와 신라는 다시는 우호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75]

또한 태자 부여창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출가 해프닝이 일어나는 등 왕가의 권위 또한 크게 떨어졌다. 이 권위 하락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위례성을 빼앗긴 뒤 한동안 위태롭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을 성왕이 다시 세워 놨으나, 이 패배로 인해 왕권 강화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가와 귀족들의 대립은 계속되었으며, 이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하며 간접적으로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거기다 성왕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진행했던 가야에 대한 포섭도 이 전투 한방으로 물거품 되었다. 2차례의 사비회의안라회의가야백제의 영향력에 완벽히 들어오게 할 뻔 했으나, 성왕이 죽고 백제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가야를 지켜줄수 있는 역량 자체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주도권을 잡아서 백제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던 가야를 562년에 완전히 합병했다.[76] 곧이어 북쪽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함경도까지 북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황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런 구도가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 568년설이 대립한다.[77] 관련 논쟁은 해당 문서로.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 만에 3관등 승진라고 쳐도 상당히 빠른 승진임은 분명하다.

관산성 전투의 여파로 동아시아 각국의 외교 관계도 변하게 되는데 수나라·당나라·신라 VS 고구려·백제·돌궐·말갈·왜국으로 형세가 명확하게 갈린다.

5. 창작물에서

6. 기록

6.1. 삼국사기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성왕 본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6.2. 일본서기

15년[79]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간솔(下部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80]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81]과 아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미마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82]들은 아룁니다. 시라(斯羅)가 무도(無道)하여 덴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코마(狛)[83]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야케(彌移居)[84]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우치노오미(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시라(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께서 우치노오미(有至臣)를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시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85]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物部 莫哥武連)[86]를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카무무레노사시(函山城)[87]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백성 츠쿠시노모노노베노 마가와사카(竹斯物部 莫奇委沙奇)[88]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시라(斯羅)뿐이라면 우치노오미(有至臣)가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마(狛)가 시라(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89]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츠쿠시노시마(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국(臣國)을 돕고 또 미마나(任那)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미마나(任那)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90] 1영, 도끼 300부,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91]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92]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쿠다무라노소코(久陀牟羅塞)라는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新羅)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新羅)에서 사치스키(佐知村)[93]의 우마카이얏코(飼馬奴)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94]에게 "고도(苦都)는 천한 노비고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쿠니노코키시(國王)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서는 "명왕(明王)이 호상(胡床)[95]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서는 "신라(新羅)가 명왕(明王)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明王)의 뼈(두개골)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96]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餘昌)이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쿠라지노키미(鞍橋君)라는 이름을 주었다.【안교(鞍橋)는 우리말로 쿠라지(矩羅膩)라 한다】[97]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모두 멸하려 했으나 (신라의) 한 장수가 "안된다. 야마토(日本) 덴노가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왕자 (惠)【왕자 혜(惠)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다】를 보내어 "성명왕(聖明王)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新羅)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권제19 긴메이 덴노 15년(554년) 12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고 추가 구원병을 요청함, 백제의 명왕은 죽고 여창은 퇴각함


[1] 전개 참조..[2] 장소에 대한 비정은 전개 참조.[3]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라고 기록되어 있다.[4] 物部 麻奇牟. 왜계 백제 관료로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관등은 시덕(施德).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를 통솔하는 동방령(東方領)의 관직을 맡았다. 《일본서기》에는 모노노베노 마가무노 무라지(物部 莫哥武連)라는 이름으로 이름 뒤에 '카바네(姓)'가 덧대어 기록되어 있다. 왜인 남성과 한인 여성이 결혼해 낳은 아이들을 한복(韓腹)이라 하는데 백제관료이자 한복(韓腹)인 미마사(彌麻沙) 또한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 인명에 오미(臣)의 카바네를 덧 붙이고 있다. 마가무 또한 한복(韓腹)일 가능성이 있다.[5] 筑紫國造. '우지(氏)'와 '카바네(姓)'이며(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이 사람보다 먼저 등장한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가 있었는데 이름은 이와이(磐井)였으며, 가야를 도우러 신라를 공격하려던 일본에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6] 숫자 불명의 대가야군과 1천 명 이상의 왜군을 포함. 현재 학계 정설.[7]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를 지키기 위하여 1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겠다"는 성왕의 제안이 관산성 전투와 연계되어 별도의 병력으로 수행되었다고 가정할 경우.[8] 병사를 포함한 기록인지, 아니면 백성이 잡혀간 것만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후속 전투의 전개로 미루어 보아 구출된 포로도 다수 있을 것이다.[9] 기병 8천 기가 사로잡혀 말 8천 기를 빼앗긴 것인지, 군마를 기르던 곳을 공격당해 빼앗겼는지 등은 불확실하다. 상술한 포로의 문제와 동일하게 이 군마들 역시 신라군에 의해 다수가 전투 전개에서 구출되었거나 수습되었을 수 있다.[10] 장수 4명과 병력 10,000명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혹은 학자에 따라 김유신 열전에 있는 기록은 김무력 본인의 전공이므로, 장수 4인과 병력 10,000명이라는 기록은 좌평 4명과 연합군 29,6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의 부분집합으로 보기도 한다. 즉 장수 4인과 병력 1만 명을 포함한 29,600명이 죽었고, 여기에 좌평까지 넷이나 죽었다는 것.[11] 한국사에 등장하는 전투 가운데 야전 병력의 포열과 배치까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주필산 전투가 최초이며, 병력의 기동로와 전술거점들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은 비류수 전투가 최초이다. 따라서 일부 착각과 달리 관산성 전투는 가장 상세히 기록된 전투는 아니다.[12] 백제는 512년부터 513년까지 가야 소국 6개를 병합하고, 신라는 529년부터 538년까지 탁기탄, 금관국, 탁순국을 차례로 병합하는 등 각자 가야 내부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함으로써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13] 고구려는 북방 초원의 유연과 동맹관계였는데, 한창 돌궐유연을 무너트리고 초원을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돌궐은 유연과 한편인 고구려도 공격했던 것이다.[14] 심지어 국사책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전투기록 자체가 없다.[15] 성씨가 "시나노"라고 읽히는 일본계인데 일본계 백제인으로 보인다.[16] 참으로 얄궂게도 김무력은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 및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손자 김유신도 실권자 김춘추가 그에게 군 지휘권을 쥐어준 채로 중국과 일본을 다녀올 정도로 무한 신뢰하는 관계였다.[17] 사실 국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자국의 고인물인 귀족 출신보다 타국에서 온 유능한 신진기예를 등용하는 경우는 역사상 자주 있었던 일이다. 대표적으로 백기와 범수, 신성로마제국의 발렌슈타인같은 경우.[18]삼국사기》 <잡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서는 옥천군 삼성산에 있는 산성을 일반적으로 관산성으로 보지만, 근처 삼양리 토성 등 일부 성들도 관산성으로 불렀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어느 하나의 산성이 아니라 전체 산성을 통합하여 관산성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세부적인 위치에 논쟁이 있는 것이고 당시 전장이 현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옥천군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19] 梁起錫, 2009,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中原文化論叢』 21, 12쪽[20] 백제에서는 금산군을 "진동현(珍洞縣)"이라 불렀는데, 진성과 발음과 한자표기의 유사성이 보인다. 출처는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21] 상고한어로 "구하골"과 유사하게 읽혀, 구타모라와의 음가 유사성에 따른 견해이다. 이전에도 발음이 거의 유사한 구사모라(久斯牟羅)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만 이곳은 창원이기 때문에 대륙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를 제외하면 이 둘을 같은 지역으로 보지 않는다.[22] “시덕 목리문차”를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23] 상술한 기록에서 언급된 과야차주와 예색돈을 의미한다.[24] 정황상 ”왜군이 정월에 도착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보이며, 상술한 대로 과야차주가 일본계 백제인이라면 아마 과야차주는 병력을 내어 올 때까지 일본에 계류하였을 것이다.[25] 해당 병력은 5월에 무자 내신(戊子 內臣)의 지휘 아래 출병한다. 늦어도 6월에는 도착했을 것이다.[26] 竹斯嶋으로 "츠쿠시도"로 읽히는데, 이와이의 난이 벌어졌던 규슈의 츠쿠시국(筑紫國)을 말하는 듯하다.[27] 백제를 말하는데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다.[28] 성왕을 말한다.[29] 아마 "하사하는 물건이 적어 미안하다"는 투의 표현을 상하관계가 역전된 것처럼 윤색하였을 것이다.[30] 삼국사기에서는 보통 패전할 경우 "패했다", 혹은 "이기지 못했다"라고 기록하지, "잃었다"라고 기록하진 않는다.[31] 예식진의 묘비명에서 "웅천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와 당대에 웅진을 웅천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밝혀져 해당 기록의 "웅천성"은 "웅진"을 가리킨다는 학설에 힘이 실렸다.[32] 정황상 신라와의 불가침조약을 믿고 급격하게 남하하여 웅천성을 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웅진보다 남쪽인 대전에 월평산성을 쌓아 전선을 전진배치하는 등 웅진 일대를 들쑤시고 다녔던 고구려이니,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33] 신라[34] 백제의 지역 군관을 말하는 “방령”을 뜻한다. 후술할 물부 막기무연은 일본인으로 추정되므로, 아마도 일본에서 역임한 관직이 따로 있겠지만, 백제에서 자기들 표현으로 영(방령)이라고 필터링해서 적었는데 이후 일본서기에서 재추산 없이 그냥 받아 적은 듯.[35] 관산성[36] 상술한 일본의 수군을 끌고 온 인물이다.[37] 오후 5시경을 말한다. 12월 9일에 공격을 개시했다고 했고, 당일 오후 5시에 성이 떨어졌으므로, 길어야 한나절만에 관산성이 함락된 것이다.[38] 날짜와 시간까지 명확하게 기록된 몇 안 되는 삼국시대 전투 기록이다.[39] 양모로 짠 베를 고풍스럽게 일컫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탑등보다는 계담(罽毯)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이 영향으로 사학 계통의 문헌에서는 모직물을 표기할 때는 주로 계담이라고 한다.[40] 별로 많지 않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급하게 일본에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배 1척을 띄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성왕 본인은 이보다 더 후하게 보내면서 승리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41] 늙은 대신으로 해석하지만,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42] 일본서기의 기록이므로 이 "대국"은 일본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윤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실제 발언은 "왜와 가야를 비롯한 동맹들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43] 학자에 따라 금산의 마전리 철마산보루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44] 정확한 병력의 규모는 알 수 없다.[45] 상술했듯 고구려군이 웅진을 쳐들어갔다가 패퇴했을 정도였으므로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6]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다. 도살성은 충북 증평으로 비정된다.[47] 상술했듯 해당 전역 전반이 7월에 개시되었으나, 관산성 함락은 12월이므로, 해당 기록은 시간대를 약간 혼동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10~12월 이후, 최소한 부여창이 구타모라를 확보한 이후의 일일 것이다.[48] 성왕을 뜻한다.[49] 부여창[50] 뉘앙스로 미루어 보아, 이 "효도"는 부여창의 신라 토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51] 물론, 엄연히 국본인 태자와 일개 작은딸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위치가 많이 다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일본서기의 기록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긴 하다.[52]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상술한 김무력의 남진을 막기 위해 급격히 병력을 나눠서 올려 보냈다든지, 고구려가 재침했다던지, 혹은 가야 일대의 치안이 불안정해서 군대를 다 남겨두고 본인은 백제 본영에 합류하러 왔을 수도 있다. 하술하겠지만, 해당 병력이 전멸하여 잔존부대를 수습해서 달아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53]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벌어졌다.[54] 주로 보은으로 비정된다. 소수설이지만 삼년산성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55] 같은 삼국사기이지만 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고우도도(高于都刀)"로 되어 있어 통째로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하술.[56] 해당 문장 때문에 상술한 가야 일대 수비군 설이 등장하였다. 성왕이 대군을 끌고 왔으나 김무력을 위시한 신라군이 그걸 모조리 소탕하였고, 이에 따라 성왕은 50여 명의 잔존부대를 끌고 다급히 태자에게 도망치고 있었다는 말이다.[57] 말을 다루는 노비라는 뜻인데, 이 때문에 말만 노비고 실제로는 상당한 위치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문장에서 대놓고 천한 노비라고 나오므로 이렇게 보는 것도 단정짓기는 어렵다. 자세한 것은 도도 문서 참조.[58] 상술한 일본서기에서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했다"는 기록을 보면, 단순하게 지나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잡은 것은 아니어 보인다. 길목을 틀어막고 기동하면서 전후좌우에서 대대적인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59] 삼국사기 백제본기[60] 삼국사기 김유신열전[61] 주보돈에 따르면 이때 고도가 "맹세한 바를 어기면 왕이라고 해도 종놈한테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라의 국법" 운운한 부분에서 맹세한 바를 어긴다는 것에 대해,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한 율령 도입 이전부터 국가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뭔가 중대한 사안(강역 문제라던지)에 대해서 한 번 결정난 결과에 대해 '결정된 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시키는 모종의 의식을 치렀는데, 그 근거로 봉평 신라비나 냉수리 신라비, 남산 신성비(새로 쌓은 성이 3년 안에 무너질 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 임신서기석(3년 안에 유교 경전을 통달하겠다는) 등을 근거로 그 '맹세'의 유효기간은 관습적으로 3년으로 통용되었을 거라고 해석했다(3년 안에 맹세를 어기면 죄를 받는다는 것). 관산성 공격 1년 전인 553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백제야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앞서서 우호를 지속하려는 척 신라를 방심시키려는 책략이었겠지만 신라는 이걸 신라가 백제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한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백제에서 더는 따지지 않을 것이고 우호도 지속하겠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해석했고, '어느 한 가지 맹세는 맹세한 시점으로부터 3년 동안 유효하다.'는 신라의 관습상 성왕이 계획대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한 것을 '먼저 맹세한 바를 어긴 것은 너희 백제다!'고 선언하면서 천한 노비인 고도가 한 나라의 군주인 성왕을 죽이는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신라 입장에서 내세운 법적 근거인 셈이다.(출처: 주보돈 《백제 성왕의 죽음과 신라의 '국법'》).[62] 임용한은 저서 《전쟁과 역사》에서 여러 정황을 볼 때 이 말은 실제 성왕의 유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63]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가 성왕의 머리를 잘라 신라 궁궐 북청(北廳) 계단 밑에 묻고 머리 없는 몸만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일본서기》에서도 그냥 그런 소문을 기록한 책이 당시 일본에 있다는 정도로만 기록되었으므로 신빙성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많다. 고대 사회에서 한 나라의 국왕은 매우 고귀한 사람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는다면 최대한 대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일본서기》에서도 도도가 사로잡은 성왕에게 일단 절부터 했다. 죽이기 직전까지는 신라 측도 최대한 예우를 했던 사람의 시체를 죽인 이후에 모욕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64] 지휘체계가 흐트러진다면 또 모르지만, 해당 시점에는 이미 부여창이 최전선에 나와 있었고 오히려 성왕이 전선에 나오는 것이 지휘체계의 혼란이었다.[65] 471년 모로성(芼老城, 군위군 효령면), 474년 일모성(一牟城, 청원군 문의면)ㆍ사시성(沙尸城, 옥천군)ㆍ광석성(廣石城, 영동군?)ㆍ답달성(沓達城, 상주시 화서면)ㆍ구례성(仇禮城, 옥천군?)ㆍ좌라성(坐羅城, 영동군 황간면)[66] 17관등 중 6번째 등급.[67] 17관등 중 1등급으로, 상설직 가운데에는 만인지상이다.[68] 정확히 포위된 지점이 어디인지는 알기 어려운데, "마침내 포위당하였다(遂見圍繞)"라는 문맥을 통하여, 가만히 있다가 포위당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더 진군하다가 끝끝내 포위당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69] 이 이름은 '우지(氏)'와 '카바네(姓)'이고(츠쿠시+쿠니노미야츠코) 이름은 안 써있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한 명의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인 이와이(磐井)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신라와 내통해 일본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즉 위덕왕을 살린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70] 만약 그랬다면 성왕의 차남이자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물려받아 백제의 대가 끊기진 않았겠지만, 왕과 태자를 한꺼번에 잃은 백제의 혼란은 훨씬 심했을 것이다.[71] 백제 연합군이 관산성을 계속 잡고 있었다면 이후 아막성, 가잠성, 대야성 등의 일대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관산성에서 출발하면 도보로도 추풍령을 넘기까지 1~2일이면 충분하다.[72] 일본서기에서는 이와 같은 여론에 대하여 "어떤 신라 장수"가 백제를 더 공격하면 덴노가 노여워할 것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는데, 보통 승세를 탄 군대가 더 밀고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더 쫒아가면서 승세를 타자는 여론이 있었지만 논의 끝에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 맞는 것 같다. 전술했듯이 초반에는 백제군에게 신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혔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73] 비슷한 맥락으로 조선시대 왕들이 정치적 돌파 목적으로 하던 양위 선언과도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74] 그런 이유로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죽음을 삼국통일전쟁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75] 왕을 포함한 고위귀족들이 상당수 전사함으로 백제의 지배층은 신라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원한을 주고 받는게 반복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후대에도 뿌리박혀 후삼국시대에 백제를 자처한 견훤은 서라벌을 점령했을 때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서라벌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76] 섬진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였다.[77]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78] 단, 개임 내용과 별개로 규슈 곳곳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도래인)의 영향을 짙게 받은 유적들이 적잖게 있다.[79] 554년[80] 음은 '몬시칸누'.[81] 명은 성왕의 이름인 명농의 축약.[82] 가야 소국들의 왕을 뜻하는 칭호. '칸키'라는 음이 달려있다.[83] 백제 측에서 부르던 고구려의 멸칭.[84] 가야의 왕실.[85] 백제의 지방 구분이던 5방을 통솔하던 방령 중 동방령. 치소는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해 있던 득안성(得安城)이다. 모노노베노 마가무(物部 麻奇牟)의 관직.[86] 백제에 귀화한 일본계 백제인으로 추정하는 인물.[87] 함산성. 일본서기에서는 관산성(管山城)이 함산성으로 기록되었다. '카무무레노사시'라는 훈은 고대 일본어가 아니고 현지어를 옮긴 것이다.[88] 츠쿠시(筑紫, 竹斯)는 규슈의 지명으로 현 후쿠오카현(福岡県)의 일부에 해당한다. 모노노베(物部)씨의 츠쿠시 분파 출신인 듯 하다.[89]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 것을 의미.[90] 직물의 일종.[91] 원문에는 '오키나도모(耆老)'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60세 이상의 신하를 뜻한다.[92] 일본서기의 윤색이다.[93] 현재의 충청남도 보은군.[94] 고도(苦都)에는 '코츠', 곡지(谷智)에는 '코쿠치'라는 음이 달려있다. 우마카이얏코는 말 키우는 하인이라는 뜻.[95] 걸상처럼 되어 있는 간단한 접의자.[96] 우지(氏), 카바네(姓)만 나와있고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97] 쿠라지는 존칭 접미사인 지가 붙은 어형이나 일본 측에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부연설명이 달려있는 걸로 볼 때 고대 한국어로 보인다. 쿠라지에는 '이로움을 얻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