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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934년 (태조 17년) 9월 | |
장소 | 운주성 (現 충청남도 홍성군) | |
원인 | 시점을 알 수 없는 운주의 고려 이탈 - 왕건의 정벌, 그에 따른 견훤의 맞친정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신라 연합 (공세) 승 | 후백제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유금필 (대장군)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종훈 최필 상달 훈경 |
참가자 경순왕 (신라 국왕) | 참가자 참가자 불명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후백제군: 5,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3,000명 |
결과 | 고려-신라 연합의 대승 | |
영향 | * 후백제의 충청지역 상실 * 경순왕의 투항 및 신라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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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34년 가을-겨울 사이에 발생한 후삼국시대의 전투. 고창 전투와 더불어 후삼국시대 말기 후백제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전투이다.[1]2. 배경
고창 전투의 대승 이후 고려-신라연합은 다시금 삼한 통일 경쟁에서 우위에 서며 후백제를 조여오기 시작한다. 이에 후백제는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수군을 동원하여 예성강 전투를 개시, 고려의 수군 전력을 약화시키고 일시적으로 눌렸던 기세를 푸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지만 왕건의 제거라는 소기의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934년 7월경 쯤 멸망한 옛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잔존 왕족과 대신들의 귀부를 받아들이며 인적인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었다.[2]3. 전개
934년 9월, 왕건은 후삼국 통일 쟁탈전에서 잡은 우세의 쐐기를 박고 1년 전 신라 전선에서 있었던 전투를 되갚고자 병력을 이끌고 직접 운주성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에 질세라 견훤 역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직접 출정을 감행한다. 그러나 고려군의 위세가 상당하여 견훤은 화친을 청하기에 이르렀다.이때 유금필의 유격대가 기습을 가해 후백제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전의를 상실한 후백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병력 3,000여 명이 전사하는 한편 동시에 용장 상달과 최필, 군의 훈겸[3], 술사 종훈[4]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4. 결과
후백제 입장에서 이 전투의 패배는 뼈아팠는데, 우선 견훤이 자랑하던 경기병 5천의 절반 이상인 60%를 이 전투에서 잃고 말았다. 또한 운주성을 고스란히 내주며 웅진 이북 30여 성이 고려에 투항하여 북방의 요충 지대라 할 수 있는 충청 지역을 통으로 내줌으로써 동으로는 영남 지방을, 서로는 충청 중추지역을 송두리째 날려 먹은 셈이 되어 안보적으로 상당히 취약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5] 또한 후백제 내부에서는 견훤이 세상을 떠날 경우 후백제의 후삼국통일 승산에 대해 우려를 가지게 되어 후계 문제에 대한 내홍이 더욱 심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결국 이 전투가 있은지 6개월만에 후백제는 끝내 견신검의 모반이 일어났고 이후 신라는 경순왕의 고려 귀순으로 신라는 고려에 합병되었고, 후백제는 이 전투로 급격한 쇠락을 겪게 되어 결국 견훤의 고려 귀순과 더불어 일리천 전투를 끝으로 멸망하게 된다.
5. 창작물
5.1. 태조 왕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179회에서 183회 사이에서 진행되며 '운주 전투'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역사와 달리 본작에서는 예성강 전투에 이어 주도권을 확실히 되찾기 위해 후백제에서 먼저 출정하고 고려군이 여기에 맞출정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70세에 가까운 견훤의 무기력함이 제대로 나온다.
한 때, 서라벌까지 침공해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서라벌의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산 전투와 삼년산성 전투에서 승리해 맹위를 떨쳤던 백전노장 견훤은 이 무렵 자식들 간의 왕위 계승 문제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등에 욕창이 생기는 등 말 그대로 노쇠해진 상황이었다. 거기다, 반격을 위해 준비한 예성강 전투는 신검의 만용으로 인해 곡도에서의 쓰라린 패배로 끝이났다.
견훤은 예성강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을 못마땅해 했으나 고려의 황도를 초토화시켰다는 작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은 인정하고 여기에 병부령 최응이 죽었다는 소식에 쾌재를 부른다. 그리고 삼한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되찾기 위해 신검을 총사로 삼아 운주로 출정하게 된다. 급기야, 요양을 권하는 의원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삼한의 주도권을 되찾을 중요한 전투라며 노구의 병든 몸을 이끌고 무리한 출정을 감행한다. 이때, 등창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신료들[6]이 오자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덤.
한편, 왕건은 예성강에서의 후백제군의 기습에 고려 수군이 전멸되고, 황도 개경까지 농락당하는 타격을 받았다. 그 와중에 고려의 모든 전략을 맡았던 병부령 최응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이 악화되어 요절하는 등 견훤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운이 좋지 않았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왕건은 전선이 운주에 집중되어간다는 정보에 잠시 곡도로 귀양을 가 있던 유금필을 다시 불러온다. 유금필은 복귀하자마자 '정남대장군'을 맡아서 총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최응의 뒤를 이어 병부령을 맡은 배현경이 운주 전투에서 백제 왕의 친정이 예상된다고 하자 왕건이 "백제의 왕이 나온다?! 허....허면 나도 가야지! 백제의 왕이 나온다는데 짐이 꼭 가야 하오!"라고 반사적으로 나온다. 이에 시중 김행선이 만류하자 황도는 정윤 왕무에게 맡겨놓고서라도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군사 훈련[7] 이후에 양국의 군대가 비슷하게 늦가을에 출병을 했는데, 모두 운주까지 오는 동안 갑작스런 겨울비로 발이 묶이게 된다.
남천현에서 사흘간 발이 묶이게 된 고려군 수뇌부는 자기들보다 운주와의 거리가 가까운 후백제군이 운주성에 먼저 도착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8] 내의성령 최지몽은 두 명의 귀인이 나타나 고려군을 도울것이라 예언하며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상황이 절박했던 유금필과 박술희는 답답해하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이내 최지몽의 점괘대로 남천을 다스리던 서목이 찾아와 고려군을 얕은 물가로 인도했고 뒤이어 서목에 도움을 부탁했던 전위성주 이치가 군사를 이끌고 참전한다. 전력이 늘어난 고려군은 이치의 안내를 받고 빠르게 운주에 도착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그러나 후백제군은 견훤의 등창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강풍을 동반한 겨울비 이후의 추위으로 인해 행군이 계속 지연이 된 채 야영을 나흘 동안 했으며, 특히나, 견훤의 환후를 들은 금강이 "우리는 겨울 준비조차 안 했다."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후백제군은 매우 급하게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금강이나 최승우, 박영규, 김총 등이 물러나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지만, 그래도 진군을 해야 하는 견훤과 이번을 기회로 왕위 계승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려는 신검 형제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늦게나마 출정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이로 인해서 거리상 고려군보다 가까웠어도[9] 고려군보다 매우 늦게 도착하였다.[10]
후백제군[11]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북방의 송악에 주둔하면서 추위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히 마련한 고려군과 달리, 후백제군은 급하게 출전하면서 추위에 대비하지 못해 운주에 머무는 동안, 군사들이 동사(冬死)하거나 탈영을 하게 된다.[12] 이런 악화된 상황에서 신검은 조물성 때처럼 화친을 시도하게 되고 처음에는 왕건도 일리가 있다며 납득했으나 유금필을 비롯한 휘하 장수들이 조물성 전투때와 달리 이번에는 고려측이 유리하다며 이를 반대한다.[13] 고심 끝에 왕건은 후백제의 화친을 거절했고, 고려는 총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화친이 결렬되자 신검은 분통을 터뜨리지만[14] 이미 엎질러진 물이 었다. 결국 후백제군은 맞서 싸우면서 회군을 시도하나, 삼면을 에워싼 고려군의 파상 공세에 얼마 버티지도 못한채 참패를 당하고 이과정에서 군사 종훈이 화살을 맞으면서 생포되었다.
한편, 전투가 시작 되기 전 견훤은 낡은 수레에 몸을 숨기고, 군졸의 옷으로 갈아 입은 금강과 최승우, 박영규와 함께 도망[15]을 치게 되는데, 이미 후미에서 매복한채 기다리고 있었던 전의성주 이치의 기습에 미끼용 어차를 몰고 가던 용장 최필이 전사[16]한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치의 군대는 미끼용 어차를 뒤쫓았고 그틈을 타 간신히 도주하지만 임성군(현재의 예산군)을 가던 중에 견훤을 태운 마차 바퀴가 빠져버린다. 밤을 새우면서 수레를 고쳐 다시 이동하긴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이치와 그의 정예 기병들이 추격[17]해온다. 박영규와 남아있던 병사들이 막는 동안, 견훤과 최승우, 금강은 수레 대신 말을 타고 빠져나가는데, 이 와중에 종군을 하던 의원(전의) 훈겸이 낙마해, 수풀 속에서 피하다가 이치의 수하에게 죽었다.[18] 이후, 견훤은 임성군으로 빠져나가고 이치와 맹렬히 일기토를 벌이던 박영규 역시 장인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도주하면서 전투는 끝나게 된다.
이후, 나레이션에서는 이 전투가 견훤의 생애 마지막 전투라고 하면서 부상을 당한 채 돌아가는 병사들과 군졸 차림의 최승우, 박영규, 금강이 뒤에 있으면서 가마에 탄 채로 추위에 떠는 견훤을 데리고 쓸쓸히 회군하는 후백제군과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도로 당당히 개선하는 왕건과 고려군의 상반된 행보를 비춰주면서 이 전투가 후백제가 멸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학계의 분석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운주(지금의 홍성군)와 웅주(지금의 공주시) 일대의 고을들이 다시 고려에 투항[19]하였다고 전해준다. 또한, 고려에서는 이 전투의 공신인 이치에게 전의를 본관으로 하면서 이름을 '도(悼)'라고 내렸으며, 관작과 시호까지[20] 주면서 공신들을 치하하는 장면과, 태자들을 부르면서 승계에 있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견훤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마무리지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견훤이 참여한 마지막 전투는 일리천 전투이나 후백제의 왕으로서의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면 아주 틀린 나레이션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드라마에서 이 전투는 견훤이 금강에게 후계를 전할 결심을 굳히는 계기로 묘사가 되었다. 사실 견훤은 등창이 악화되면서 혼절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나, 전세 역전에 필사적이었던 견훤은 전의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며 억지로 전장에 나선다. 하지만, 견훤의 상태에 우려를 표하거나 친정을 반대하던 금강, 최승우, 박영규 등과는 달리 신검, 양검, 용검 세 아들들은 친정을 반대하기는커녕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검이 견훤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닌 것이, 극도로 쇠약해진 견훤이 결국 고집을 꺾고 회군을 명령하자, 이번엔 신검이 고집을 부리며 회군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결국 맹추위가 몰아치고 고려군은 어찌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백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야영지에서 나흘씩이나 머물었고, 운주에 들어서는 사기가 떨어져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운주 전투의 참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겨우 살아 돌아온 견훤은 황제이기 이전에 아버지인 자신의 안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황위에 욕심만 가득한 신검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결심을 굳히게 된다. 운주 전투 이후 이 드라마의 회차(184회~190회)는 상당수 장면이 고려쪽보다는 후백제 신검의 왕위 쟁탈전, 신검에게 붙는 신료들, 장수들 쪽으로 많이 보여주게 되었다.
[1] 엄밀히 말하자면 '운주성 전투' 자체는 본 문서의 전투 이전인 927년 1월에 한 번 더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구분해 927년의 전투를 1차 운주 전투, 그리고 이 전투를 2차 운주 전투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운주성 전투'라 함은 본문의 2차 운주전투를 가리키는데, 그만큼 이 전투가 후삼국의 정세에 가져온 파장이 어마어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 이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고위 인사들의 귀부에 대해 고려사는 934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이라 말하고 있으며 동국통감에는 926년 1월의 일로 적혀 있다. 학계에서는 이 동국통감의 기록 쪽을 더 신뢰하여 926년 1월 이후 고려 쪽에 편입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 931년 이후의 신라는 보호국 이런 수준이 아니라 그냥 고려의 신하국이었다. 이 시기로부터 500년 전 고구려 군주 장수왕과 신라 군주 실성, 눌지 마립간 등이 맺었던 관계가 완벽히 똑같은 형태로 부활하고 만 것.[3] 전공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통해 볼 때 의술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살해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4] 기본적으로는 점쟁이를 칭하는 말이고, 전근대에는 점쟁이도 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전장에 따라간 걸 봐서는 책략을 담당하는 책사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백제 소속으로서 후에 통일된 고려 측에 의해 폄하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도 이 설을 따랐는지 종훈을 능환과 최승우와 더불어 후백제의 참모 역할로 소개하면서 신검 측의 인물로 표현한다.[5] 그러나 충청 해안지역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교류는 끊기지 않았다.《책부원구》에 신검이 후당에 방물을 바친 기록이 남아있다.[6] 특히, 이찬 능환을 가장 신경쓰였다.[7] 다만, 고려군의 군사 훈련은 과거 태봉 시절 군사 훈련의 영상들을 짜집기 하였다.[8] 사실 드라마에서 남천현이나 이후 등장하는 금강을 경유한 것은 현재 이천 지역이나 이천 서씨, 전의 이씨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왕건의 남정 관련 설화를 여기에 갖다 붙인 것인데, 경로상으로 보면 운주성 전투가 아니라 캐삭빵 대원정으로 진행되어 일정에 다소 여유가 있던 일리천 전투에 붙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지금은 북한에 있어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개경(현재의 개성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로 가려면, 일부러 남천현(현재의 이천시)을 거치지 않고,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파주와 서울을 통해 한강을 건너고, 이후 수원, 평택, 천안, 아산(온양), 예산을 거치면 된다. 이 길이 어쩌면 고려군이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이긴 하다. 물론 181회에서 고려군이 남천현에서 묶였을 때, 홍유의 말처럼 거리로 보면, 상술된 후백제군의 경로가 고려군보다 더 짧다. 실제로는 저런 최단거리를 경유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전근대에 기병까지 다수 포함한 연대급 병력이 도강하기에는 서울 한강은 너무 넓고, 보다 후대의 조선시대에도 강변의 도시들은 넓은 하구 평야보다는 도강이 용이한 중류쯤에 자리잡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시 한강 인근에 도시다운 도시는 중랑천 동쪽에 있던 양주나 현 하남 지역으로 추정되는 한주 정도였고, 이 두 지역 사이는 잠실도가 육교 역할을 해 기병 정도는 갈수기에 직접 도섭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기록상으로는 드라마의 묘사처럼 다급한 타이밍 러시가 아니라 오히려 왕건이 먼저 운주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니 견훤도 뒤따라 나선 쪽이었으니, 먼저 출정한 왕건 쪽이 잠실을 통해 한주를 경유한 뒤 옛 양길의 핵심 영지였던 남한강 일대를 위무하며 진군했을수도 있다.[9] 후백제의 왕도인 완산주(현재의 전주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까지는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익산과 군산을 지나 금강을 건너고, 서천, 보령(대천)을 지나면, 홍성이다.[10] 아직 후백제군이 당도하지 못했다는 전의성주 이치의 말을 듣고, 왕건이나 유금필마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11] 182회 초반에 후백제군이 운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온 전령의 보고를 들은 왕건은 "견훤 왕이 마차를 타고 올 위인인가? 그것도 이 산악전에?"라면서 놀란 반응을 보인다.[12] 방영분을 보면 후백제 병사들이 추위에 픽픽 쓰러지고, 탈영 장면을 보면 어디론가 정처없이 좀비처럼 도망가는 장면이 소름돋을 정도로 추위에 지친 병사들을 표현 하였다. 오죽 열이 간절하면 보초병들이 조명용으로 들던 횃불이라도 쬐려 안간힘을 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까 싶겠지만 실제로 충청권에서 전라/경상권만 내려가도 체감온도가 확 올라간다.[13] 조물성 전투때는 양측 다 역병이 돌았기에 열세였던 고려는 물론 그나마 우세였던 후백제도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했기에 화친을 맺는 형식으로나마 끝낼수 있었지만 운주 전투는 겨울 날씨에 철저히 준비된데다 지리적 이점을 차지한 고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14]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화친 시도부터가 신검의 실책이었다. 적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안일하게 화친을 시도하다 역으로 자기들의 상황이 악화되었다는걸 보여준 꼴이 된 것.[15] 이는 공산 전투 당시 왕건이 당했던 그 굴욕을 그대로 닮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16] 사실, 그는 이미 스스로 자청해서 미끼용 어차를 끌고 싸우던 중에 이치(다만, 영상을 자세히 보면, 이치의 수하가 벤 것이다.)에 의해 전사하면서, 본인의 무력 밸런스가 상당히 묘해졌다. 드라마 중반인 97회(2차 나주 공방전의 와중)에서 난전 중이긴 하였지만, 유금필과 호각세로 싸우고 그의 팔이라도 베어본 적이 있던 최필이 이치에게 베였던 것이다. 사실상 드라마에서 무력 밸런스의 배려가 부족한 것도 있으며, 또는 후백제군의 몇몇 장수들이 일찌감치 하차하고 안 나온데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력에 있어서는 최필보다 아래로 여겨지는 박영규는 이치와 호각으로 싸운 탓에 박영규가 유금필 급이 아니냐는 뉘앙스가 나왔었다.[17] 182회 막판에 최필이 죽기 전에 미끼용 어차를 보내버린 바람에 이치가 추격했는데, 얼마 못 가서(183회 초반) 어차는 넘어졌고, 그 어차가 비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방향이 자신들이 아는 금강 쪽인 것을 안 이치가 견훤이 탔던 낡은 수레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즉시 뒤쫓게 되었다.[18] 사료에서는 최필과 훈겸, 두 사람은 포로로 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종훈도 대충 잡히고 안 나왔는데,제작비 절감을 위한 눈물겨운 고육지책[19] 이들 지역은 과거 웅주성에 있던 이흔암이 모반을 하려고 성을 비우고 나가면서, 후백제로 붙은 지역들이다.[20]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까지 내린 건 고인 취급을 한 꼴이니만큼 고증에 어긋난다. 다른 사람들도 장화왕후 오씨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장화왕후 시호를 받는 등 여러모로 시호 관련 고증은 좀 이상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