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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3:27:23

봉산군 전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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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군 전투
蓬山郡戰鬪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993년(성종 12년) 윤 10월
장소 고려 패서도
원인 소손녕의 고려 침공
교전국 고려
(수비)
<rowcolor=black>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윤서안 (급사중)
지휘관

[[요나라|
]] 소손녕(동경유수)
병력 규모 불명 60,000명 미만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거란의 승리 및 고려의 선봉군 패배
선봉 윤서안이 포로로 붙잡힘
영향 고려 조정에서 항복론, 할지론을 논의함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거란을 막을 군사를 보내다3.2. 봉산군의 함락
4. 결과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여요전쟁 시기, 고려군과 거란군이 고려의 행정구역인 10도(道) 중 패서도봉산군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2. 배경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했고, 발해 유민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고 송(북송)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이 송과 화친해 거란에 대항하면서 거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거란은 고려 조정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려를 침공하기로 한다.

3. 전개

3.1. 거란을 막을 군사를 보내다

여름 5월에 서북계의 여진에서 거란이 군사를 동원해 침략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이 속이는 것으로 여겨 무시했으나, 8월에 거란의 군대가 침략한 것을 다시 알리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제서야 위급한 것을 알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를 나누어 보냈다.

고려 조정에서 겨울 10월에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북계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란을 막게 했으며, 성종은 친히 방어하기 위해 서경으로 행차해 안북부까지 머물렀다.

3.2. 봉산군의 함락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구주를 거쳐 봉산 근처까지 진출했는데, 봉산은 구주에서 정주에 이르는 길과 구주에서 태주, 박주에 이르는 교통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소손녕이 봉산군을 공격해 격파하자 윤서안은 포로가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서경으로 돌아갔다.

4. 결과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하자 소손녕이 우리가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해 너희 나라가 국경지대를 침탈하므로 내가 와서 토벌한다고 외쳤으며, 편지를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서희가 조정에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성종이 이몽전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고 소손녕이 80만의 군사가 왔으니 임금과 신하가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라고 협박했으며, 고려 조정에서는 중신들을 보내 항복을 요청하는 항복론, 서경 이북의 땅을 분할해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 국경으로 하자는 할지론이 나왔고, 성종은 할지론을 채용하면서 서경의 창고에 있는 쌀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나머지 군량은 대동강에 던지라고 했다.

그러자 서희는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전투에도 이길 수 있다고 만류하자 성종은 중지시켰으며, 서희가 생여진에게서 빼앗은 가주, 송성을 차지하려는 것일 뿐이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다고 떠벌리는 것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영토를 내어주면 저들이 끝없는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며 소손녕에게 금은과 보물을 뇌물로 주어 뜻을 살펴보라고 했다. 성종은 서희의 의견으로 옳은 말이라 여겼다.

5. 대중매체

5.1. <천추태후>


제1차 여요전쟁을 다룬 드라마인 <천추태후>에서 1화,23화에서 이 전투를 잠시 다루고 있다.

거란군의 군사가 봉산에 진군하자 고려군의 본진이 세워질 때까지 진격을 늦추기 위해 전면전을 피해서 싸우라는 군령을 받고 윤서안이 4, 5천 정도의 고려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공격하기로 하며, 소손녕은 고려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발대를 보내서 들판으로 유인해 물리치기로 한다.

윤서안이 거란의 선봉대가 적은 것을 보고 즉시 섬멸해야 한다며 쫓기로 하자 부장이 적의 총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과 군령을 언급하며 만류하지만, 윤서안은 서희의 지시를 무시하고 거란군의 기세만 꺾기 위해 추격했다가 들판에서 거란의 군사들에게 포위된다. 거란군이 공격을 개시해 곰들을 풀면서 쇠뇌를 발사한 후 직접 기병을 보내 공격하며, 거란의 기병이 투창을 던져 군사들을 무너뜨리고 윤서안을 낙마시켜 붙잡는 등 고려군을 대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