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670000,#FFCECE>전쟁·정벌 | 전투 | 교전세력 |
<colbgcolor=#fedc89,#444444>후삼국통일전쟁 | |||
조물성 전투 | 후백제 | ||
대야성 전투 | 후백제 | ||
공산 전투 | 후백제 | ||
나주 공방전 | 후백제 | ||
삼년산성 전투 | 후백제 | ||
고창 전투 | 후백제 | ||
운주성 전투 | 후백제 | ||
일리천 전투 | 후백제 | ||
여요전쟁 | |||
봉산군 전투 | 요나라 | ||
안융진 전투 | 요나라 | ||
흥화진 전투 | 요나라 | ||
통주 전투 | 요나라 | ||
곽주 전투 | 요나라 | ||
서경 전투 | 요나라 | ||
애전 전투 | 요나라 | ||
삼교천 전투 | 요나라 | ||
금교역 전투 | 요나라 | ||
귀주 대첩 | 요나라 | ||
여진정벌 | 동북 9성 | 여진족 | |
갈라수 전투 | 여진족 | ||
길주성 전투 | 여진족 | ||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 강동성 전투 | 후요 | |
여몽전쟁 | 귀주성 전투 | 몽골 제국 | |
동선역 전투 | 몽골 제국 | ||
안북성 전투 | 몽골 제국 | ||
처인성 전투 | 몽골 제국 | ||
죽주산성 전투 | 몽골 제국 | ||
충주성 전투 | 몽골 제국 | ||
원나라의 일본원정 | 제1차 원정 | 일본 (가마쿠라 막부) | |
제2차 원정 | 일본 (가마쿠라 막부) | ||
카다안의 침입 | |||
치악성 전투 | 합단적 | ||
연기 전투 | 합단적 | ||
장사성의 난 | 장사성의 난 | 장사성 | |
홍건적의 침공 | 홍건적 | 홍건적 | |
나하추의 침공 | 함흥평야 회전 | 나하추 | |
기황후 주동의 원나라군 침입 | 수주 달천 전투 | 최유 | |
여진족 장수 호발도의 침입 | 길주 전투 | 호바투 | |
목호의 난 | 명월포 전투 | 원나라 목호 | |
왜구의 침입 | 홍산 대첩 | 왜구 | |
진포 해전 | 왜구 | ||
황산 대첩 | 왜구 | ||
관음포 전투 | 왜구 | ||
제1차 대마도 정벌 | 왜구 | ||
요동정벌 | 제1차 요동정벌 | 원나라 | |
제2차 요동정벌 (위화도 회군) | 공요군 |
후삼국통일전쟁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670000,#0a3711>전쟁 | 교전세력 승 | 교전세력 패 | |||
원종·애노의 난 ,889, | 신라 | 원종ㆍ애노 | ||||
비뇌성 전투 ,899, | 궁예 | 양길 | ||||
제1차 대야성 전투 ,901, | 신라 | 후백제 | ||||
나주 공방전 ,903~914, | 태봉 | 후백제 | ||||
제2차 대야성 전투 ,916, | 신라 | 후백제 | ||||
제3차 대야성 전투 ,920, | 후백제 | 신라 | ||||
제1차 조물성 전투 ,924, | 고려 (무승부) | 후백제 (무승부) | ||||
제2차 조물성 전투 ,925, | 고려 (무승부) | 후백제 (무승부) | ||||
제4차 대야성 전투 ,927, | 고려 | 후백제 | ||||
서라벌 기습 ,927, | 후백제 | 신라ㆍ고려 | ||||
공산전투 ,927, | 후백제 | 신라ㆍ고려 | ||||
삼년산성 전투 ,928, | 후백제 | 고려 | ||||
제5차 대야성 전투 ,928, | 후백제 | 고려 | ||||
백제의 나주 탈환 ,928, | 후백제 | 고려 | ||||
고창 전투 ,929~930, | 고려 | 후백제 | ||||
예성강 전투 ,932, | 후백제 | 고려 | ||||
사탄 전투·자도 전투 ,933, | 고려 | 후백제 | ||||
운주성 전투 ,934, | 고려 | 후백제 | ||||
고려의 나주 탈환 ,935, | 고려 | 후백제 | ||||
일리천 전투 ,936, | 고려 | 후백제 |
삼년산성 전투 三年山城 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928년 (태조 11년) 7월 | |
장소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삼년산성 | |
교전국 | <rowcolor=black> 후백제 (수세) 승 | 고려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유금필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후백제의 승리 |
[clearfix]
1. 소개
후삼국시대의 전투. 서기 928년 음력 7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삼년산성에서 맞붙은 전투로, 공산 전투 이후 8개월만에 일어난 전투이다.2. 배경
삼년산성은 고대 신라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기름진 농토와 자족 기능을 갖춘 성으로서, 왕건은 공산 전투 패배 이후, 이전부터 후백제의 영토인 삼년산성 공격을 시도했다. 여기서 왕건은 국면 전환을 하기 위하여, 해당 전투를 수행함이 추정된다. 928년 (태조 11년)이 되었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고려군은 928년 정월에 벌어진 초팔성 전투(현 경남 합천군 초계면)와 5월에 벌어진 강주 전투(현 경남 진주)에서도 후백제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어서 가을 7월이 되었다.3. 결과
공산 전투의 패배 이후 초팔성 전투와 강주 전투를 연달아 패배하였고, 해당 삼년산성 전투까지 고려가 패배하게 된다. 이후 후백제는 승기를 잡아 퇴각하는 왕건의 부대를 청주까지 추격하지만 고려의 장수 유금필이 후백제 장군 김훤, 애식, 한장의 3천 군마에 쫓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신속하게 후백제군을 물리쳐 왕건을 구출해 냈다. 이후에 삼년산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932년에 왕건은 고려가 930년 고창 전투 승리 이후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공직을 앞세워 삼년산성의 일부인 일모산성을 함락시키지만 삼년산성 본거지는 아무리 빨라도 공직이 고려에 항복할 때 고려의 땅이 되었거나 936년에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려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의의
후백제는 해당 전투로 인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며, 승기를 모아 이듬해 929년 후방의 최대 골칫 거리였던 나주를 다시 탈환하며 6년동안 재점령하였고 929년 연말과 930년 초반까지 벌어진 고창 전투로 인해 국면이 바뀔 때까지, 삼한 통일 전쟁의 패권을 쥐게 된다.5. 대중매체에서
성문을 닫아라! 저건 괴물이다. 사람이 아니야!! 괴물이다!!! 성문을 닫아라!!!! (중략) 태자마마! 소장이 전투에 나선 이래 저런 괴물은 처음 보옵니다!!
태조 왕건 삼년산성 전투 中 애술
태조 왕건 삼년산성 전투 中 애술
<태조 왕건> 작중에서 163회부터 164회까지 다루었다. 삼년산성 전투에서 왕건과 그의 군대는 호족과 변방 장수들과 협력으로 삼년산성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호족들의 배신으로 위기를 맞아 왕건의 군대는 신검의 군대에게 복멸당했고 왕건은 자신의 무쌍을 통해 신검의 군대의 포위를 뚫고 겨우 빠져나온다. 한편 유금필의 군대는 성의 외곽에서 호족들의 협력을 통해 성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호족들의 배신으로 신검의 부대가 성을 차지한 상황이었다. 신검을 포함한 후백제 군대는 왕건은 이미 죽었으며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유금필을 조롱하지만 유금필은 항복을 거부한다. 이에 애술은 유금필을 상대하려 성 밖으로 나오지만 유금필은 애술을 무찌르고 혼자서 무쌍을 찍으며 후백제 군사들을 상당수를 도륙내었으며 결국 고려군이 삼년산성을 차지한다.[1] 유금필의 맹활약으로 삼년산성을 빼앗는데 성공했지만 유금필 부대는 왕건의 행방을 찾기 위해 금방 성을 다시 비워야 했고 이때 행방이 묘연했던 왕건은 극적으로 유금필의 군대와 만나게 된다. 왕건은 목숨을 건졌지만 연이은 패전에 대한 좌절감, 무력감, 자괴감에 괴로워하다가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삼년산성 전투에서 돌아온 뒤 일체 밖에 나오지 않으며 홀로 분을 삭이다가 그 분노가 배신한 호족들과 장수들에게 이르렀고, 사서의 기록대로 삼년산성 전투에서 고려를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들을 철퇴로 죽이라고[2] 명령하고 이들을 까마귀 밥이 되도록 하여 배신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
6. 참고 문헌
- 『고려 태조 왕건의 삼년산성전투, 그 배경과 전개과정 검토』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1] 여기서 애술은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라는 대사를 치고 후퇴하고 신검에게 위의 대사를 치며 저런 괴물은 처음 상대해본다면서 겁을 먹는다.[2] 165화 처형 명령을 내릴 때 칼로 죽이려는 병사들을 중지시키며 칼은 시체를 온전히 남겨주는 처형법이라고 하며 배신자에게 그러면 안된다며 철퇴를 쓰라고 한다. 시중 김행선의 작중 대사를 통해 이 모습이 예전의 폐주를 떠올린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분명 왕건이 분노한 것은 맞지만 사람을 마구 때려 죽이던 궁예처럼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실성한 모습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왕건도 맘이 편치 않은 듯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마지막 남은 어린 아이가 울고 불고 빌 때 망설이기까지 하지만 박술희가 부장을 갈궈 처형마저 집행되어졌다. 엄밀히 따지면 궁예는 미쳐버린 이후 조회에서 관심법을 쓰다가 도중에 신하가 기침해서 그 자리에서 철퇴로 죽이거나, 열병식에서 웃은 아녀자를 모조리 끌어내서 역시 철퇴로 때려죽인 반면 왕건은 참다참다 임계점을 넘어서 결국 폭발한 것이다.[3] 심지어 이 때 옛날 폐주의 마음을 알 것 같다라는 말까지 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이는 정말 궁예처럼 폭정을 저지르겠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다시는 배신을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에둘러 표현한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