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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5 20:49:46

양길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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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梁吉 (良吉)
? ~ 899년 이후[1]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인 9세기 말의 북원경(원주)의 호족.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가지고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장악한 대호족으로서 한반도 중부세력의 패권을 가진 세력가였다.
투항해 온 궁예를 거느리고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황해도 토호 세력이었던 왕건의 항복을 받아 한 때 그의 영토는 동해와 서해를 연결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하인 궁예와 패권을 다퉜으나 비뇌성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한다.

2. 생애

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시대 왕실의 부패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 국고가 텅 비게 되자 전국에 세금을 독촉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상주에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 반란군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양길은 5소경 중 하나로 당시 큰 도시였던 북원경을 기반으로 한 호족인데 세력이 컸는지 훗날 후고구려의 왕이 되는 궁예도 892년에 양길의 부하가 된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이 무진주를 차지하고 칭왕할 무렵인 892년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892년 이후에는 견훤과 양길 간에 별다른 기록이 없는 점과 활동 지역도 달라서[2] 양길이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894년 양길은 궁예에게 큰 규모의 병력을 맡겨 지금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정벌하도록 했고 궁예는 기대에 부응해 연전연승을 거두며 급기야 명주까지 제압하고야 만다. 그 소식을 들은 왕건을 비롯해 지금의 개성시, 황해도, 평안도 쪽의 패서 호족이 잇따라 투항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자신의 힘으로 차지한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자립해 양길에 맞섰고 양길은 899년[3] 궁예와 비뇌성 전투에서 싸우나 대패하고 만다. 여기서 양길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900년 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 충주, 청주 등 양길의 본거지 일대를 일거에 정벌했고 이 때 남아있던 양길의 잔여 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영원성(鴒原城)은 치악산(雉嶽山)의 남쪽 등마루에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는 3천 7백 49척이다. 안에는 1개의 우물과 5개의 샘이 있다. (중략) 말로서 전하기를, 이 성은 양길(梁吉)이 근거하던 곳이었으며, 후에 원충갑(元冲甲)이 이 곳에 근거하여 거란의 병사(丹兵)를 격파했다.
鴒原城。在雉嶽山南脊。石築。周三千七百四十九尺。內有一井、五泉。今廢。 (중략) 諺傳此城梁吉所據,後元冲甲據此,破丹兵。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원주목 -

4. 대중매체에서


파일:양길(태조 왕건).png

[1] 899년에 비뇌성 전투 패배 이후 행적이 없다. 비뇌성 전투에서 살아 도주했더라도 곧 궁예가 잔여 세력들까지 토벌하고 태봉을 건국했기 때문에 그리 좋은 최후는 아니었을 것이다.[2] 견훤은 무진주 일대, 양길의 경우 한주와 삭주 남부[3] 삼국사기 궁예전은 897년,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89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4] 후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양길의 막내딸과 궁예가 혼인하는데 영화 <왕자 미륵>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