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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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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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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述 / 洪術
? ~ 929년 7월 14일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1]에 있던 진보성의 호족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청송 옆에 있는 의성부 태수라는 기록도 전하는데, 이는 고려에 항복한 후 의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설과 세력이 커서 청송과 옆동네 의성까지 모두 아우르는 호족이었다는 설이 있다.

청송 진보 지역에는 또다른 호족 최선필도 자리잡고 있었지만, 홍술은 진보면 안에서 최선필과 다른 곳에 거점을 둔 호족으로 여겨진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최선필의 거성 재암성이 보성부(甫城府)라고 하는데, 보성부는 후기신라 시절 상주 문소군의 진보현(眞寶縣)과 명주 야성군의 진안현(眞安縣)을 합쳐 만든 행정구역이다. 이 중 홍술이 진보현에 있었고 세력이 옆동네 의성에 걸칠 정도로 꽤 컸기 때문에 최선필은 진안현 부분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사에는 성씨가 따로 나오지 않지만 더 후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씨로, 김홍술로도 알려져 있다. 의성 김씨 족보에서는 그가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했지만 족보자료는 후대 조선 시대에 숭조사업으로 편찬된 것이 많아 정사보다 신뢰성이 떨어지고, 후삼국시대가 끝나고도 40년 이상을 더 살았던 경순왕의 생몰년을 감안하면 홍술은 오히려 경순왕보다 윗 세대일 가능성이 높아 가계도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2. 생애

고려 항복 이전의 기록은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의성부의 리(吏), 즉 아전 출신이었다가 성주·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영지인 진보성이 있는 청송군의 위치가 고려후백제의 주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922년 11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항복할 뜻을 전했다. 왕건은 왕유와 함필(含弼) 등을 보내 그를 회유했다. 다만 고려의 직할세력이 됐다기보다는 명목상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영지를 계속 지키는 종속세력화된 것으로 보인다.

923년 11월 아들 왕립(王立)[2]을 고려로 보내 갑옷 30벌을 바쳤다. 고려에서는 왕립을 원윤(元尹) 관직에 임명하였다. 똑같이 922년에 고려에 항복한 하지성(안동시) 호족 원봉은 본인이 원윤 관직을 받았는데 홍술은 아들이 원윤이 된 것을 보아 본인은 더 높은 대우를 받은 듯 하다.

그는 고려를 택했지만 927년 견훤의 기습 공격으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약탈당하고(서라벌 기습) 곧이어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크게 패배하면서 한때 후삼국의 대세가 후백제에 넘어가는 듯 했다. 견훤은 고려군이 제대로 지원하지 못 하는 틈을 타 경북 북부 지역을 맹공격했고, 929년 7월 견훤이 직접 5천 군대를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할 때 성주 홍술이 항전했으나 패해 전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건은 통곡하며 내가 양 손을 잃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는 고려 현종 시대에 의성 지방의 성황신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인 1706년에는 지역 유림에 의해 충렬사에 모셔졌고 1804년에는 의성에 홍술장군순절비가 건립되었다.

3. 기타

삼국사기고려사에는 성씨 기록 없이 홍술이라고 나오는데, 참고로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개국공신 홍유(洪儒)의 젊은 시절 이름인 홍술과 한글은 물론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 게다가 이 홍유의 고향이 하필 호족 홍술이 지배하던 의성군이다(...) 초한지한신한왕 신이 같이 존재한 것과 비슷한 상황.

그러나 홍유는 918년 고려 건국 이전부터 궁예 치하 태봉에서 일하고 있었던 반면, 의성부 태수 홍술은 계속 자기 영지에서 버티다 922년에 고려에 투항하는데다, 이 홍술이 죽은 뒤에도 고려의 홍유는 계속 살아서 활동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적으로 동명이인이 맞다.

고려사에서는 왕건이 그의 전사 소식에 '양 팔을 잃은 것 같다.'고 절규할만큼 이름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작 후삼국시대를 다룬 대표적인 사극인 태조 왕건에서는 전혀 등장이 없다. 그나마 신검이 문소성을 평정하러 갈 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홍술이 죽었다는 언급이 다다.

[1] 청송에서 가장 유명한 경북북부교도소(...)가 있는 곳이다.[2] 앞글자가 왕(王)인데, 왕씨를 사성받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