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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7:42:06

의성 김씨

義城 金氏
의성 김씨
관향 경상북도 의성군
시조 김석(金錫)
집성촌 경상북도 안동시, 영주시, 의성군, 성주군, 영양군, 봉화군, 청송군
대구광역시 군위군
충청북도 괴산군, 음성군, 옥천군
충청남도 태안군
전라북도 정읍시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
경상남도 진주시 압재, 밀양시
인구 287,469명(2015년)
1. 기원2. 본관3. 특징4. 항렬(行列)5.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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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과 고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冊封)되어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김석(金錫)이 경순왕의 4남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 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5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시작된 의성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장남 용비(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차남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3남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참고로 문소(聞韶)는 의성의 옛 이름으로 문소와 의성은 동일한 본으로 같은 일족이다.

2. 본관

의성(義城)은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 조문국(召文國)이었다. 그 후 185년(신라 벌휴왕 2) 신라에 병합되어 소문군(召文郡)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문소군(聞韶郡)로 개칭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일계현(日谿縣)과 고구현(高丘縣)을 합병해 의성부(義城府)로 승격했으나,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의성현이 되었으며, 1199년(신종 2)에 강등되어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의성현(義城縣)으로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의성군(義城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이 되었다. 1940년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실제 의성 김씨 집성촌도 안동, 의성, 영양, 봉화, 영주, 군위, 성주, 구미 등 경상북도 내륙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본관과 후손들의 집성촌이나 종가의 소재지가 다른 경우가 많지만, 의성 김씨는 현재까지도 안동, 의성 중심으로 집성촌과 종가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하는 등 영남 명문가로 통한다.

3. 특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우국지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 경상북도 안동인데 그 중심에 의성김씨 가문과 그들의 친인척이 있다. 단일 성씨로는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며, 그런 연유로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도 의성김씨 집성촌이며 종가가 있는 안동 내앞마을(천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만 33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으며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일송 김동삼 선생의 생가와 협동학교가 있다.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석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 지사 또한 의성김씨이며, 한국대표 여성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남자현 지사도 일제와 싸우다 순국한 의성김씨 김영주 의병의 부인이다. 이렇듯 가문과 친인척 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이한 면을 보이는 본관이다.

이러한 면은 의를 숭상하는 기질적 특성과 퇴계에서 시작된 유학의 중심을 지켜온 가문 차원의 선비정신이 구국운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퇴계의 직계 제자인 학봉 김성일에서 시작하여 근대 최고 한학자인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온 명문 가문 차원의 책임감이 독립운동에 투신에 강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국 유림대표로 유학자를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한 심산 김창숙 선생(성균관대 설립자) 역시 의성김씨로서 그런 면모를 잘 보여 준다.

4. 항렬(行列)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사이의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이며, 항렬자(行列字)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글자로써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를 만드는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해 놓았다.
∙31世 --- 洛(강 이름 낙{락})·永(길 영)·浩(클 호)·泳(헤엄칠 영)·淵(못 연)·漢(한수 한)
∙32世 --- 模(법 모)·秉(잡을 병) 東(동녘 동)·植(심을 식)·林(수풀 임{림})·相(서로 상)
∙33世 --- 煥(불꽃 환), 炫(빛날 현), 衡(저울대 형)·大(큰 대)·燮(불꽃 섭)·昌(창성할 창)·魯(노둔할 노{로})
∙34世 --- 時(때 시)·奎(별 이름 규)·逵(한길 규)·在(있을 재)·聲(소리 성)·重(무거울 중)
∙35世 --- 種(씨 종)·鎬(호경 호)·鉉(솥귀 현)·鏞(종 용)·銖(무게 단위 수)·善(착할 선)
∙36世 --- 洙(물가 수)·源(근원 원)·澤(못 택)·泰(클 태)·淳(순박할 순)·河(강 이름 하)
∙37世 --- 權(저울추 권)·穆(화목할 목)·根(뿌리 근)·來(올 래{내})·稷(기장 직)·榮(꽃 영)
∙38世 --- 憲(법 헌)·燁(빛날 엽)·炯(빛날 형)·勳(공 훈)·熙(빛날 희)·悳(덕 덕)
∙39世 --- 圭(홀 규)·赫(붉을 혁)·珪(홀 규)·周(두루 주)·載(실을 재)·垠(끝 은)
∙40世 --- 鍵(열쇠 건)·鈺(보배 옥)·鎰(중량 일)·銓(저울질할 전)·鍊(불릴 련{연})
∙41世 --- 溶(질펀히 흐를 용)·濟(건널 제)·海(바다 해)·浚(깊을 준)·洪(큰물 홍)
∙42世 --- 柄(자루 병)·楨(광나무 정)·和(화할 화)·秀(빼어날 수)·彬(빛날 빈)
※ 항렬은 파(派)마다 각기 다르게 정할 수도 있으며 한자의 음도 옥편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다.

5. 인물

특정 인물에 대한 강조를 금지합니다.

[1] 경국대전에 ‘아들 다섯이 과거에 합격한 부모에게는 임금에게 보고해 해마다 쌀을 보내주고,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라는 조항이 있다.[2] 소문에는 그래서 인지 젖꼭지가 유독 길고 검었다고 했다. 비슷한 얘기로 조선시대 어느 소년가장도 모친을 떠나보내고 어린 동생들 젖을 물리다가 발달이 돼 남자임에도 흰 젖이 콸콸 나왔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남자들 중에도 가슴에 젖선이 있다고 하며, 영양실조로 인해 호르몬 계통에 문제가 생겨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잘록해지는 등 여체화 현상을 겪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한다.[3]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아래서 산다는 뜻[4] 150여명의 일가를 데리고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신의주 까지, 신의주에서는 걸어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5] 통쾌할 쾌(夬), 당나라 당(唐) 즉 국권을 잃은 조선에서 낳지 않고 당나라에서 낳게 되어 기쁘다는 의미로.[6] #[7]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부민들의 고혈을 짜자 부민들이 민란을 일으켰고 겁을 먹은 부사가 벌벌 떨다 서산 선생에게 부민들을 달래어 달라고 부탁했다(이때 선생이 부폐한 부사에게 "민정이란 순리로 임하면 잘 따르고, 거스르면 반발하는 것이니, 깊이 반성하라" 라고 꾸짖으셨다). 서산 선생이 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섰다는 소문이 나자 피난 갔던 읍민들이 “금계 나으리께서 나셨으니 이젠 됐다.”고 환호했을 정도이며, 저녁 무렵, 난을 일으킨 백성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자 “곧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테니, 물러나 기다리라.”고 하자 격앙했던 군중들이 서산 선생의 말씀이면 믿을 수 있다며 모두 몽둥이를 던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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