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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조선)

학봉 김성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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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성일(金誠一 )
사순(士純)
학봉(鶴峰)
본관 의성 김씨
출생 1538년(중종 32년)
조선 경상도 안동도호부
사망 1593년(선조 26년)
조선 경상도 진주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종교 유교
부모 부친 - 김진(金璡, 1500 ~ 1580)
모친 - 여흥 민씨 민세경(閔世卿)의 딸
형제자매 형 - 김극일(金克一, 1522 ~ 1585),
김수일(金守一, 1528 ~ 1583),
김명일(金明一, 1534 ~ 1570),
남동생 - 김복일(金復一, 1541 ~ 1591)
부인 안동 권씨 권덕봉(權德鳳)의 딸
자녀 장남 - 김집(金潗)
차남 - 김역(金湙)
3남 - 김굉(金汯)
1. 개요2. 생애
2.1. 통신사2.2. 임진왜란 이후
3. 기타4. 평가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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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峯), 자는 사순(士純).

퇴계 이황의 제자로 류성룡과 함께 임진왜란남인을 대표하는 인물.

2. 생애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희릉(禧陵)[1]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년)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선조에게도 직설적으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선조가 하루는 "내가 중국사로 치자면 어느 왕과 비슷할까?"라고 자화자찬을 하며 넌지시 '중국 역대 명군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암시하자 김성일은 주저없이 "학문에서는 명군인 요임금과 같사오나 정치로 보자면 폭군주왕 같사옵니다."라고 깠다.[2] 당연히 선조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다른 대신들이 "그래도 요임금과 같이 잘하시는게 있사오니 그 쪽으로 신경써 달라는 충언입니다."라고 아첨하며 분노를 잠재웠다.[3]

1579년 함경도 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 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전라도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4] 경연장에서 이이와 다투었다기보다는 이이의 발언에 분노한 적이 있는데 이이가 이황의 학문이 훌륭함을 칭찬한 후에 "다만 정신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자 분노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김성일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인 이황을 비판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었을터. 이이는 누구의 제자도 아닌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당대의 거유(巨儒)들을 비판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제는 이 시대의 흐름이었다.[5]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 소 요시토시(宗義智)[6] 등과 일본과의 통호 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황윤길(黃允吉)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려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2.1. 통신사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0년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이 1591년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1591년 음력 2월 부산으로 귀국하여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류성룡과 김성일의 이 문답은 류성룡의 저서 <징비록>에서 등장한다. 당시 류성룡 본인도 김성일의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전쟁 이후 이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대해 해명하고자 <징비록>에 넣은 것으로 추정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같은 대화가 수록되어 있는데[7], <선조수정실록>이 사초의 미비로 <징비록>을 포함한 민간의 서적을 참고 자료로 삼았다는 점에서 <징비록>이 출처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인 황윤길을 비롯해 동인인 서장관 허성[8]은 다른 입장을 취했지만, 김성일은 "정여립사건으로 혼란한 민심이 조정으로부터 떠날 것이다"라는 요지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정철 등 서인이 정여립사건을 빌미로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에는 영호남 유림 다수가 정여립을 빌미로 무고에 의해 사사되었음을 명시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호남의 정개청과 영남의 최영경을 들고 있다. 역시 실록에 실린 사실로, 사행단의 배가 부산포에 도착하는 즉시 사행단의 서장관 허성을 부산포에 내리자마자 포박하여 압송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허성이 정여립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실록 상의 기록을 고려해 볼때 조정의 주도권을 쥔 것은 정철이었고, 그의 공포정치와 무리한 정책때문에 민심이 흉흉했던 점 그리고 그러한 민심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성일은 이 발언 때문에 후대에 서인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고, 당대에는 임진왜란 초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김성일은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복명과 별개로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하던 대비책을 계속 진행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김성일 등이 시폐10조를 올리면서 이순신의 발탁과 더불어 비판했다.
그 결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는 김성일에 대해 드물지만 드문드문 발언했는데 선조는 김성일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정철에 대해서 "잔악한 정철이 내 사랑하는 충성스런 선비를 모조리 죽여 이 사단이 났구나”라고 말했다.
김성일(金誠一)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당시 조대곤(曺大坤)이 노병(老病)으로 체직되자 특지(特旨)로 김성일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성일은 항상 말하기를 ‘왜노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장계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道內)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 하였으므로, 상이 이 때문에 성일이 논한 것을 곧지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런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비변사가 ‘성일은 유신(儒臣)이라서 이러한 때에 변방 장수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3월 3일 갑자 2번째 기사>
"김성일은 당초에 웅천(熊川)을 지켰는데, 적의 예봉이 몰려와 그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무장과 군졸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발사하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이 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꼼짝 않고 앉아서 군관으로 하여금 을 쏘게 하여 한 왜졸을 죽이니, 적이 조금 물러나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성일이 있었더라면 진주(晉州)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주가 보전될 수 있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창의독전(倡義督戰)하기로는 김성일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의 초모격서(招募檄書)를 보면, 충의가 분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성일이 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자,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성일은 적정(賊情)을 분명히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윤길(黃允吉)은 매우 걱정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간웅(奸雄)이고 평행장(平行長)은 박실(朴實)한데 싸울 때마다 꼭 이기니, 가장 염려된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이다. 성일은 속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1595년) 2월 6일 기유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기사들에 따르면 경상 우병사로 부임하던 김성일이 도망치던 전임 병사를 길가에서 만나 노상에서 인수인계를 받고 우병사직을 바로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접적하여 교전을 벌이는 등 전열유지에 들어갔다. 또한 앞서 접적 시 벌인 교전으로 노획한 적장의 수급과 병장기를 장계와 함께 돌려보냈는데 이때 올려보낸 수급이 임란 시 조정에 보고된 최초의 수급이었다. 그 사이 선조는 김성일을 국문하고자 의금부도사를 내려보내는데 앞서 장계와 수급을 받아본 선조는 마음을 바꾸어 그를 초유사로 임명한다. 경상 우병사에 임명된 시점은 임진왜란이 터진 바로 직전이였으므로 당시 경상도는 일본이 점령한 상태였다. 따라서 초유사는 직권이 애매한 직책이었으며 김성일을 내려보낼 때 자금도 병사도 없는 상태로 달랑 직책만 내려서 파견했는데 김성일은 왜군의 소굴인 경상도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보급을 자체 조달하면서 왜군과 싸우게 된 것이었다.

기사는 경상 우병사라는 직책이 김성일의 실언에 대한 선조의 문책성 임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선조가 김성일을 국문하는 대신 사실상 사지로 내려보내는 선택을 한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외로 김성일은 해당 임무를 달게 받고 잘 수행하는데 김성일 또한 본인의 과거 발언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이 비변사에 하교하였다.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수정실록 35권, 선조 34년(1601년) 2월 1일 경오 1번째 기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김성일은 경상 우병사에 임명되었다.

2.2.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잘못된 통신사 보고에 의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류성룡의 변호로 이후 경상도 지역을 수습하기 위해 경상도 초유사에 임명되어 곽재우 등 경상도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성일은 자신이 학문에만 능한게 아니라 빼어난 실무 관료임을 보여주는데 의병장들에 대해 물자와 병력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지 지방관과 의병장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 의병장들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대립을 중재해 의병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1592년 4월 22일 군사 50여 명으로 의병장으로의 첫 발을 뗀 곽재우는 의령초계의 관곡과 강가에 버려진 조운선에서 세곡을 군량으로 쓰려고 가져갔다 관에 찍혀서 군사들이 거진 이탈해 의병 활동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1592년 5월 8일 함양에 도착해 곽재우의 일을 전해들은 김성일은 즉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에게 통유문을 발급해 곽재우의 의병 활동을 공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삼가의 의병장 윤탁에게 명령을 내려 곽재우 군대에 합류하게 하니 50명으로 시작한 곽재우 의병대는 2천여 명 규모로 급성장한다. 경상감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에는 "곽재우의 말이 거칠기는 하나 김수의 잘못도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곽재우가 처벌받지 않도록 노력했다.[9]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전라도 의병까지 원군으로 요청하는 등 방어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김시민에게 병사한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도록 명했는데 이는 진주 대첩의 기반이 된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데도 적극적이어서 도에 징발령을 내리며 바친 곡식의 양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면천을 시켰다. 양식을 내놓지 않는 부호들은 잡아다가 볼기를 치고 일장 훈시를 한 다음 강제로 징수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덕분에 경상도는 남부 지역이 왜군에 점령되고 가장 먼저 전쟁에 휘말렸으면서도 임진년 내내 관군과 의병의 공조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전쟁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10]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후손들이 그의 글을 모은 <학봉집>이 있다.

김성일이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진행 중이던 시기에 병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에 시작했고 김성일의 졸기는 <선조실록>에서는 1593년 음력 4월 29일[11], <선조수정실록>에서는 1593년 음력 4월 1일에 기록되어 있다. 시기 차이가 이상하게 많이 나기는 한데 선전관 이춘영의 장계에 따르면 1593년 음력 4월 29일에 죽은 것이 재확인되기 때문에 1593년 음력 4월 29일로 봐야할 듯하다.[12] 어느 쪽이건 진주성 전투와는 1개월 이상의 시간 차이가 난다. 김성일의 사망 시기를 제2차 진주성 전투 도중으로 보는 것은 <선조수정실록> 중 김성일 졸기 중에서
일로의 군사와 백성들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라는 내용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선조수정실록이 뒤에 편찬되면서, 사관 기준으로 시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일과 함께 연이어 죽었다는 내용이 있는 김면만 해도 음력 3월 11일에 죽었으니 김성일과 다시 1개월 차이가 난다. 즉, 1개월 정도의 시간 차이는 당대 사관들은 신경을 안 쓴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성일의 사망을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워낙에 왜군이 작정한 전투라서 김성일이 있었다고 해도 패전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배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김성일은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에 머물면서 성벽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김성일과 김면이 연이어 죽으면서 진주성 인근에 머물던 경상도 의병 병력이 대폭 감소한다.
김면과 김성일이 잇따라 죽으니 집합된 군병들이 많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다. 한효순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군정이 김성일에 미치지 못했다. 최경회가 거느린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도 굶주리고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서로 잇따랐다
선조수정실록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최경회는 원래 의병장 출신으로 관군에 포함되면서 경상 우병사라는 직책을 달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그가 이끌고 입성했다는 병력은 300명, 전사자는 4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총병력이 1만 명이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되니 병력 규모 자체가 감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지휘권 관련인데 진주성 전투 시기 조선군의 지휘권은 진주목사 서예원과 창의사 김천일의 대립 구도가 컸다. 김천일은 심지어 서예원이 제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주목사 직을 의병 부장이었던 장윤에게 임의로 주기도 했다. 그나마도 원래 무관인 충청병사 황진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를 중심으로 수성이 이뤄졌지만 황진이 1593년 6월 28일 전사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서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바로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류성룡은 진주성 전투의 패전을 지휘권의 분열로 봤기 때문에 김성일의 죽음을 아쉬워 한 것이다.[13]

3. 기타

파일:attachment/김성일/kim_sung_il_mace.jpg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373610_STD.jpg

4. 평가

대저 저들은(김성일) 우리 주(州)를 그들의 번신(藩臣)과 같이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저들을 접대할 때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저들은 “이는 저들이 교만하여 우리를 저들 아래에 두려는 것이다.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는 말을 듣게 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미 이러한 의심이 있었으니 끝끝내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와 일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떤 일에 임하여서는 특히 우리가 하는 말에 어긋나게 마음대로 해서 우리에게 위엄을 보여 교만한 기세를 굴복시키려 했다. 이후 (일본에 오는) 통신사는 모두 이러한 생각을 하기에, 우리가 이에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대저 성일의 사람됨은 지나치게 강직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으므로 사정에 어두웠다. 중봉 조헌의 사람됨과 백중(伯仲)을 이룬다.[14]

에도 막부 시절 일본에 넘어간 조선 문헌은 <징비록>이 대표적이었는데 17세기 들어서 김성일의 <학봉선생문집>과 <해사록>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김성일의 여러 저작을 번역한 쓰시마 번의 가신인 마쓰라 마사타다는 1725년에 쓴 <조선통교대기> 9권에서 김성일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는데 강압적 자세를 보인 김성일에 대해서 견제하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마쓰라는 "우리 나라의 위세를 빌어 저들을 멸시하는 일없이 오로지 양국의 화호와 생민의 안도(兩國和好 生民安堵)를 꾀하여 성신으로 교섭하는 결실이 있게 함에 힘껏 마음을 다하여 양국 간을 주선하면 저들이 어찌 진실로 기뻐하며 심복하여 우리와 의논하니 무사함이 없을까 걱정하는 일이 있을 것인가. 무릇 두 나라의 일은 모두 이로써 미루어 생각할 것이다."란 말도 남김으로써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에게 위세로 압박하는 일 또한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덧붙이는 등 여러모로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린무역 이권을 지키고자했던 쓰시마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17세기의 일본 문헌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세를 무서워한 조선이 세 사람의 '내조사'를 보냈다는 식으로 언급함으로 김성일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역시 일본에서 대유행한 명나라의 제갈원성이 지은 <양조평양록>은 명나라 군대를 띄워주기 위해 조선을 깔아뭉개서 <양조평양록>을 참고했던 일본의 저작들은 김성일에 대해 "조선이 투항하기 위해 보낸 대인 중 한 사람" 정도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징비록>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징비록>의 일본 유행으로 인하여 충신 김성일 이미지의 이미지는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1705년 교토에서 나온 <조선태평기>는 5권, <고니시 유키나가와 김성일이 싸우다. 성일이 우도 초유사가 되다> 편에서 김성일을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직 국사만 걱정하여 그 충절을 잃지 않는 진정한 충신"이라는 평가를 옮김으로써 김성일에 대해 높이 평가하게 된다.
영남학파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성일은 조목, 류성룡, 정구와 함께 퇴계 문하 4고제의 한 사람으로 인식됨으로써 영남학파(퇴계학파) 내에서는 학통상의 지위가 매우 확고했다. 김성일을 퇴계학파의 적통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사림계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 김학수, 한일관계 사학회, 2012년.

위는 학계의 평가고 아래는 일부 대중의 평가라고 보면 되겠다. 학계에서도 학문적인 업적과, 전쟁이 일어난 후 영남 방면에서 이룬 성공적인 행정통제권 안정화와 군사적 공적에 대해 쳐주는 것이지, 면죄부를 준게 아니다. 이황의 애제자로 학계에서는 영남 지역의 퇴계 학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자 임진왜란 초기의 연쇄적 붕괴를 막고 군사적 성공을 이끈 명신으로 평가하지만, 대중에게 있어서는 "임진왜란 때 졸렬한 당리를 위하여 거짓 보고를 올린 간신, 소인배"로 오랫동안 매도되어 왔다. 수많은 위인전과 학습 만화에서 동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 보고를 올리는 김성일의 이미지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었고 현대에도 대중적으로 김성일의 나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희진은 <징비록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김성일을 시종일관 비겁한 인물로 묘사하며 임진왜란 발발 후 초유사로 임명되어 각오를 하는 순간도 옆에서 보는 사람이 '저걸로 후세엔 강직한 인간인 것처럼 포장하겠구나.' 생각하는 장면을 넣어 노골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리는데 이 부분에서 책이 끝나기 때문에 김성일이 전쟁 중 세운 공로는 자연스럽게 안 나온다. 서강대학교 계승범 교수가 내놓은 책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서는 김성일을 대놓고 효수감이라 비난했다.

사실 당시 선조 임금과 김성일에게도 다소 억울한 부분은 있다는 관점이 있다. 사실 조선은 임진왜란 전에 전쟁 준비를 하기는 했다. 조선니탕개의 난 이래 계속 준전시 상태로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 시기의 삼포왜란, 명종 임금 대의 을묘왜변 등 2차례의 왜군 소요를 겪어본 조정에서는 10,000명 이상의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 우도에 전선(戰船)을 집중 배치해 경상 우수사 원균의 지휘 하에 유사시 전선 80척 ~ 100척을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준비까지 갖춰놓은 상태였다. 임란 9년 전(1583년) 전국을 준전시 상태로 몰아넣은 북방 니탕개의 난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선조 임금이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도, 이런 복안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위에 적혀있듯 조정에서 전쟁준비를 하며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남의 사대부들은 집단으로 반대 움직임을 보였고 김성일 역시 이에 호응하여 "전쟁 준비는 그만두고 내치에 힘쓰라"는 상소를 올렸다.조선이 전쟁준비를 충분히 하려고 했는데도 김성일은 반대했기에, 조선의 전쟁 준비가 김성일을 옹호하는 근거로 쓰이기는 부족하다. 전쟁이 난후에는 여러모로 활약한 부분도 적잖아 있지만, 전쟁 전에는 김성일은 확실히 전쟁준비 반대 입장이었다.

그 외의 몇가지 왜곡된 주장에 대한 허점들을 집어보자면

1. 도요토미의 전쟁준비는 임진왜란 문서에서 보듯이 전쟁개시 7년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오던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1590년 들어서 갑자기 개시된 전쟁이라는 것은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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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평소 호언장담하며 흘리던 언동과는 달리 실제 임진왜란의 준비는 갑자기 결정되고 준비된 것이 사실이다.
1) 먼저 동북지방의 평정이 끝나지 않았으며, 실제 통신사들이 교토에 도착했을 때도 대규모 동북원정이 진행 중이었다.
2) 조선출병 준비가 급하게 이루어진 근거로, 일본측의 기록들은 '갑작스런 출병결정에 다이묘들이 혼란에 빠졌고 급히 물자를 조달하느라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다.
3) 또한 주요 다이묘이기도 한 모리가문과 코바야카와가문 등은 전쟁준비가 아닌 조선과의 교역 유치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간만에 이루어진 통신사의 내방을 계기로 기존의 쓰시마 소씨가문의 조일간 외교/통상 독점을 가져오기 위해서, 통신사에게 다이묘의 서한과 예물을 보내어 '쓰시마를 배제한 외교/통상 루트'를 제안해왔었다.

2.통신사의 의견 여부와 상관없이 이후 일본 측에서 전쟁을 알려왔으니 김성일의 발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왜곡한 것으로, 통신사가 돌아오고나서 일본 측에서 알려주기까지는 시간차가 존재하고, 그동안 조선이 이 문제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사실에 김성일의 역할이 없었다고 보는 것 또한 무리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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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통신사가 돌아오고 나서 왜란 발발까지 시간차가 1년의 시간차가 있으나, 조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니며,
2)실제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나, 전쟁준비는 진행한다'라는 공식적 결정을 내리고 실제 시행하였다.
3)이는 선조실록과 수정실록 모두에서 명시되어있다.

3.민생을 걱정한다고 했지만, 그 민생이라는것이 백성들 자체보다는 당시 해당 지방 유생들의 반발이 더욱 컷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위에 적은것처럼 전쟁 사실을 일본에서 알려왔는데도 전쟁 준비가 과하다고 하는것은 국가 전체의 안전, 해당 지방의 안전이라는 목표보다는 특정 소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위임으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 옹호 할 일이 아니라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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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성 자체보다는 해당 지방 유생의 반발..' 등의 해석은 좀 자의적 비약으로 보인다.
2)상단 허성의 사례처럼, 정여립사건의 마녀사냥은 현재진행형이었다.
3)전쟁을 상정한다면, 민생과 민심을 고려하여 군비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최상의 대비인 것은 명백하다.

4. 황윤길이 한것 없이 술만 마셨다는 서술은 명백한 왜곡이자 폄하로, 김성일이 화를 내자 이를 달랬다는 기록또한 존재하며, 뇌물 관련 내용은 최고 담당자로서 어떻게든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낸 생각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뇌물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명백함. 또한 김성일의 깐깐한 단어 교정은 후세를 위한 것일지 몰라도, 일본측의 반발이 더욱 셌거나 전쟁 준비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국교 정상화라는 목적 자체를 파탄낼 가능성 또한 있는 행위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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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말그대로 황윤길은 술만 마시지는 않았고, 김성일 달래기도 하였다.
2)그 뇌물을 쓰겠다던 대상은 히데요시의 이복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로, 그는 당시 병으로 혼수상태였고 결국 회복 못하고 죽었다.
3)뇌물 쓸 대상이 어떤 상태이고 그 효과가 어떨지 등, 아무런 정보나 대책 없이 막연하게 허둥대던 것이었음.
4)결과적으로는 큰 망신을 살뻔 한 일을 막은 것이 되어버렸음.
5)국가간 예전/의전 문제는 21세기 현재에도 국가간의 위상과 운명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임. 실제로 구한말까지 조선의 외교교린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례로 다루어졌음.

5.황윤길의 전쟁 발언은 단순히 얻어 걸린 것이고, 이런내용에 대해 책을 써서 자랑하거나 하지 않았단 점으로 증명된다는 주장또한 왜곡임. 황윤길은 당시 조총 2자루를 일본에서 사오는등 전쟁 가능성을 명확히 인지한 행위를 하였음. 또한, 황윤길은 전쟁 발발 직후 숨졌는데[15], 이는 해당 발언과 관련해 책을 쓸 기회 자체가 없는 상황-전쟁 전에 해당 발언을 가지고 책을 쓰기엔,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기에 너무 이르며, 전쟁 이후엔 상황상 책을 쓰고 있을 시간 자채가 없음.-이었음을 간과한 주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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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황윤길이 조총을 바친 사실 자체가 와전임.'무진년(1591)에 통신사 수역(首譯)[16]이었던 박상순이 일본에 갔을 때, 은5백 냥을 주고 화총 두 자루를 사들여 바친 것'이 와전된 것이었음.

6.위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조선의 전쟁 준비를 김성일은 지속적으로 반대하였기에, 조선의 전쟁 준비가 김성일을 옹호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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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조선의 전쟁준비는 사신 전부터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므로 김성일의 복명 문제에 치우치는 것은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나마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의병들을 도우며 열심히 싸워서 만회를 한 정도로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7. 참고 문헌


[1] 인종의 어머니이자 중종의 2번째 왕비장경왕후의 능.[2] 넌지시 까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왕이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너는 주왕같으니 왕 때려쳐라. 학문만 잘하면 학자가 되어야지. 왕 노릇은 뭐하러 하냐?"라고 엄청나게 깐 말이다. 충성심 어린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면 "전하께서는 요임금처럼 많이 배우셨는데 주왕처럼 실천하십니다."(=배운대로 하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전자의 의미였다면 거의 역모에 준하는 행위였던지라 선조가 처벌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전자의 의미는 양위선양을 요구하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3] 류성룡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한번은 선조가 "내가 요순 같은가, 걸주 같은가?"라고 하자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문제는 요순은 좋은 의미인데 걸주는 나쁜 의미인지라 선조의 표정이 일그러졌는데 류성룡이 "둘 다 맞다"면서 "요순이라 함은 '전하께서 요순처럼 잘 하고 계신다'고 하는 말이고 걸주라고 함은 '걸주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해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둘러댔다.[4] 김여물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밑에 있던 인물이자(신립의 아들 신경진인조반정의 1등공신이 된다.) 인조반정의 1등공신 중 투톱인 김류이귀 중에서 김류의 아버지다.[5] 이이첨의 스승은 정인홍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이첨은 독학 출신이다. 그런데 학맥이 없으면 안 되다 보니 정인홍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해 제자가 된 것이며 다행히도 정인홍은 곁다리로 들어온 셈인 이이첨을 마음에 들어했고 광해군이 이이첨을 총애하고 본인도 광해군 비위를 맞춰서 이이첨의 입지가 커졌는데 인조반정으로 몰락 크리.[6] 혹은 '平義智'라고도 불림.[7] <선조수정실록> 권25, 선조 24년 3월 1일(정유) 3번째 기사[8] 허균의 형으로써 허성은 동인이었음에도 황윤길과 같은 주장을 했다.[9] 쉽게 말해 김성일의 시기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없었다.[10] 조카 류복립에게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었다고 한다.[11] 그외에 1593년 음력 5월 15일에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졸기가 2번 등장하는 기괴한 사례.[12] <선조수정실록>은 기록이 애매하면 그 달 1일에 몰아서 기록을 적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제2차 진주성 전투 경과 보고도 1593년 음력 6월 1일자로 적혀 있다.[13] 사실 이런 문제는 전라도 의병 관련해서는 자주 벌어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왜군이 너무 많았다는 것 때문에 그냥 김천일을 비판하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느냐는 비판도 존재한다.[14] 여담으로 조선통교대기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반응을 보인 조헌에 대해서 "망령된 자"라고 비판하고 있다.[15] 다만 황윤길이 정확하게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아려져 있지 않다.[16] 관아 또는 사신에 딸린 역관의 우두머리[17] 2003년작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보당 역.[18] 가토 기요마사가 일부러 조선 사신단을 조롱하고 위협할 겸 칼춤을 추어 대부분의 사신단 일원이 질색이 되었으나 김성일 홀로 이에 격분해 "이게 무슨 짓이냐"며 크게 호통을 쳤다.[19] <징비록> 및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류성룡과의 대화를 잘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