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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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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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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조식 이황 허엽 신중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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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조식 최영경 정인홍 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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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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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徐敬德
1489년(성종 20) ~ 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주기론 유학자.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

2. 생애

1489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아버지 수의부위(修義副尉) 서호번(徐好蕃)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13세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8세에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이를 탐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1519년 현량과에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후 어머니의 요청으로 1531년(중종 26) 식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2등 7위로 입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했다. 그의 호 화담은 그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의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후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追贈) 되었다.

그의 철학은 철저한 주기론이며 태허설(太虛說)이라고도 한다. 그는 기가 모이면 물질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태허가 된다고 보았다. 이 때 태허(太虛)라는 것은 기가 띄엄띄엄 흩어져 지각되지 않는 상태이며 소멸한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은 지극히 현세 지향적인 성격을 띠며 그가 불교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과 태허로 돌아가는 것은 음양의 원리에 따라 순행하는데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理)이다. 하지만 그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칠 뿐이며, 그 이외의 부분은 대개 기에 대한 설명으로 전개된다. 종달새를 하루 종일 탐구했다든가 하는 일화들 또한 기를 탐구해 그 속에 숨은 이를 찾으려 하는 서경덕 철학을 잘 반영한 일화인 것이다.[1][2]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정작 성리학의 중심이 되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때문에 성리학에서 제시한 방대한 이에 대한 설명을 그의 철학 체계 안에 넣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기의 순환을 통해 우주론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륜에 적용시켜야 하는 유학의 기본 입장상 이가 단순히 자연 이치로 머문다면 이는 바람직한 철학이라고 볼 수 없었다.[3] 때문에 생전의 서경덕은 이황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와 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주기론자 이이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조선 주기론은 이이 철학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제자가 "지금 심정은 어떠신지요?"라 물어보니 "살고 죽는 이치는 깨달은지 오래니 편안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原理氣)」 · 「이기설(理氣說)」 · 「태허설」 ·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4]

3. 기타

4. 대중매체



[1] 이러한 서경덕 철학에 대해 원자설, 경험론과 유사하다는 평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서경덕을 유물론의 시초로까지 끌어올린다. 당연히 사회주의적인 정치색이 섞여 있고 남한이 아닌 북한 출신이니만큼 띄워주는 면도 있겠지만...[2] 그러나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 편찬하여 현재도 간행 중인 <세계철학사>에서도 서경덕의 기일원론 철학을 유교 계통의 유물론으로 분류하며 그 시초로 북송의 성리학자 장재를 꼽는 만큼 이와 같은 억측은 적당히 걸러봐야 한다. 이후 임성주, 최한기 등이 조선의 기철학을 계승한다.[3] 사실 서경덕은 태허에서 하늘의 뜻(이)에 따라 실체가 이루어지므로 항상 고요한 마음을 가지라는 수양론을 제시했고 그가 평소에 중시하던 자연 과학적인 관찰 또한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정치 혼란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과 서경덕 철학은 어울리지 못했다.[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문하에서 가장 명성이 있었던 인물. 이황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 서경덕 학파 특유의 독자 연구도 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서인 강경파[6] 스승의 영향인지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까인다. 동인 강경파[7] 서얼 출신[8] 이항복, 정경세의 친구로 조선 주역 연구의 1인자.[9] 화담학파의 학문을 조선 중기 이후까지 계승시킨 장본인으로, 책을 읽음에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자득)과 핵심을 파악하는 것(대요)을 중요시했으며 감정을 중시하는 주정설을 주장했다.[10] 물론 서경덕의 후학은 이 평도 마음에 안 들어했다. 이건 조식이나 이황 후학들도 마찬가지.[11] 근데 송도 삼절은 황진이 자칭이라 실제로 저 셋이 세트로 묶여 칭송받았는지는 애매하다.[12] 여기서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이 있다.[13] 조선 최강이자 최악의 도인인 흑우를 서경덕이 해치웠다면 전우치는 명나라 최강의 도인인 노헌을 해치우는 업적을 달성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전우치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구미호가 전우치를 돕다 살해당하면서 멘탈 붕괴로 방황하게 된 것.[14] 작 중 설정상 용으로 변하는 것은 도술의 극한까지 달한 최고의 도인만이 가능하다고 한다.[15] 죽은 인물이었는데 전우치가 망나니짓을 벌이고 다니자 참다못해 이승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