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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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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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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삼국시대~후삼국시대3. 고려시대4. 조선시대5. 일제강점기6. 대한민국 경기도 개성시7. 북한 치하의 개성
7.1. 개성시(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7.2. 개성시(특급시) - 개성공단개성관광7.3. 개성시(특별시)
8. 관련 문서

1. 개요

개성시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개성서울, 평양, 경주와 더불어 한국사를 대표하는 4대 고도로 한국 중세사의 중심지이다.[1]

송악(송도, 송경)은 옛 개성을 지칭하는 별칭이다. 옛 고려왕조 400여년간의 수도이자 조선시대 대표적 상업도시였다. 그리고 남북분단 초기 대한민국의 실지배 영토였으나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빼앗긴 도시로, 현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비운의 도시인 곳이다.

2. 삼국시대~후삼국시대

원래 '개성'과 '송악'은 비록 가깝지만 엄연히 다른 고을이었다. 고려 이전 원래 개성은 대한민국 이북 5도 행정구역상 개풍군 서면 개성리(開城里)를 중심으로 한 개풍군 서부 지역이었고, 고려의 도읍 이래 개성시내 및 개풍군 동부 지역이 고려 이전의 송악에 해당했다.[2] 최초에는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위만조선 멸망 후 전한진번군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항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폐지되어 낙랑군 남부도위가 설치되었다가 동연대방군을 설치하면서 그 영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근초고왕대 대방군으로부터 빼앗아 주된 북방 군사 거점으로 운영한 것으로 유력하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게 되면서 처음으로 고구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아신왕이 온갖 수단을 다해 왜국과 연계해서 어떻게든 수복했었는데, 백제가 의외로 충청북도 충주 일대와 강원도 영서 지역보다 이 개성 일대를 우선 수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이미 5~6세기 백제-고구려의 쟁패 시절부터, 한성 일대 보호에서 개성 지역이 대단히 중요했음[3]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기 475년 장수왕위례성을 함락해서 개로왕을 죽인 사건 이후 백제는 두 번 다시 개성 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며, 이후 개성 일대는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나당전쟁 후반부에는 격전지였고 결국은 남북국시대 후기신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고, 690년대 초반 즈음에 신라가 군진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군관을 파견하면서 패서 지역 중에선 가장 먼저 신라의 직접 지배령이 된다. 그러나 당나라가 여전히 732년까진 이곳의 신라 영유권을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았기에, 신라는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개성 및 그 이북 지역에는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진 못하였다. 732년 이후부터는 신라가 서서히 패서 일대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개성과 송악 둘 다 신라 9주 5소경한주에 속해 있었다.[4] 둘 중 '개성'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 정책에 따라 개성군(開城郡)으로 바꿨으며, '송악'은 '부소갑(扶蘇岬)'이었다가 757년 개성과 마찬가지로 경덕왕 때 송악으로 고쳤다.[5] 694년 신라 효소왕이 송악에 성을 쌓았고, 703년에 성덕왕이 개성(開城, 개풍군 서면 개성리)을 쌓았다. 이렇게 신라 때는 두 성이 따로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로, 통일신라가 이 당시 개성을 치소로 삼아 구축했던 서북방 방어선은 옛 근초고왕 백제의 대고구려 방어선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라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는 달리,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도 군진을 설치해서 당나라와 활발하게 무역하여 경제적 이익까지 챙겼다는 점.[6]

후삼국시대 왕건 가문의 기반지역으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해상 호족으로 유명했고 아버지 왕륭궁예에 귀부하면서 궁예가 고구려계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태봉 건국 초기에 잠깐 수도로 삼았다. 이것이 개성 전성기의 미약한 시작. 이 시기 개성은 훗날의 황해도 지역과 함께 패서(浿西) 지방으로 묶였고, 궁예는 패서 지방 주민들의 고구려 유민 의식을 건국의 정당성으로 삼았기에 그 도움을 얻으려고 처음에 개성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몇 년이 지나자 왕건 가문을 비롯한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의식과 관련성이 적은 새로운 근거지 철원군으로 천도했다.[7] 그러나 이것이 패서 호족 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918년 왕건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그리고 건국 이듬해인 919년에 철원에서 왕건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다시 천도했고 동시에 왕궁과 시전(재래시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개성의 최전성기 개경 시대가 시작되었다.

3.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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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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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利城
길성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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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陽德
맹산孟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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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江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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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對馬[4]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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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 한성부(漢城府) 한성, 고양, 파주, 교하, 적성, 양주, 포천, 영평, 연천, 광주(廣州), 가평
인천부(仁川府) 인천, 부평, 강화, 교동, 김포, 통진, 양천, 시흥, 과천, 안산, 수원, 남양
충주부(忠州府) 충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음성, 진천, 괴산, 연풍, 청안, 여주, 이천(利川), 음죽, 용인, 양지, 죽산, 원주, 평창, 정선, 영월
홍주부(洪州府) 홍주, 결성, 예산, 덕산, 대흥, 서산, 해미, 태안, 청양, 정산, 아산, 온양, 신창, 당진, 면천,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임천, 홍산
공주부(公州府) 공주, 천안, 목천, 직산, 진위, 평택, 안성, 양성, 회덕, 진잠, 연기, 전의, 은진,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금산(錦山), 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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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南原府) 남원, 운봉, 장수, 무주, 진안, 용담, 임실, 순창, 담양, 창평, 곡성, 옥과, 구례, 순천(順天), 광양, 돌산
나주부(羅州府) 나주, 남평, 광주(光州), 능주, 화순, 동복, 낙안, 흥양,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함평, 무안, 진도, 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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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大邱府) 대구, 현풍, 경산, 하양, 자인, 인동, 칠곡, 선산, 금산(金山), 지례, 개령, 성주, 고령, 청도, 영천(永川), 신녕, 의성, 비안, 군위, 의흥, 밀양, 창녕, 영산
안동부(安東府) 안동, 예안, 청송, 진보, 영양, 청하, 영천(榮川), 순흥, 풍기,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용궁, 영덕, 영해,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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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직후에는 수도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태조 3년 신왕조의 확립 기반을 위하여 남쪽의 한양으로 이전했다. 이 때 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1391~1393, 반월성)을 쌓았다. 수도가 바뀌었으므로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시대의 경기를 폐지하고 남쪽 한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기도 행정구역을 만들었다.[8] 이 때 개성은 신설 경기도 북쪽 끝으로 들어갔다. 정종태종(조선) 초기 6년간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환도했는데 이 때 제2차 왕자의 난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발생했다.

태종 5년 한양으로 이전하며 개성과 한양의 양경 체제는 형식상으로 남게 된다.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부로 개편하면서 계기로 양경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지만 수도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의 행정을 책임지는 경기 관찰사를 개성 부윤이 겸하게 하여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주요한 배후 도시로서 무시할수 없는 위상을 유지했다. 경기도 중심도시로서 경상도경주상주, 전라도전주에 비견되는 위상이었다. 한양과 사실상 같은 권역으로 취급되며 성종~연산군 연간엔 개성에서 연줄있고 재주있는 이들은 진즉에 한양으로 건너와서 개성에 남은 사람중에는 인재가 드물다는 인식이 공공연히 돌만큼 접근성이 좋았다. 게다가 학당, 사원 같은 고려시대부터 구축된 교육, 전승 인프라가 풍부해 16세기 이전까진 상당한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개성과 타 지방에 가지는 이점은 퇴식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개발살이 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렸고 이후에 인프라가 제대로 복구되지 못해 제2도시로서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최립(崔岦), 차천로(車天輅), 마상원(馬尙遠)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도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영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은 조선 조정이 국초부터 고려수도인 개성주민들을 차별하고 소외시켰다는 개성소외론이란 대중사관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이와 별도로 태조 왕건의 선조대부터 융성했고 고려왕조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종사자가 많았던 상업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송도상인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간혹 개성인들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씨 몰살을 주도한 조선 왕조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야기 요즘 인터넷상에서 만연한 편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9] 19세기 선교사들의 증언 역시 구한말 특유의 상황과 지역감정을 타고 조선 중기부터 정설인양 여겨지게 된 개성소외론에 경도된 일부 개성 백성들의 발언이 묘하게 맞물린 것이지 500년 내내 차별당한 적도 없고 500년 내내 개성 출신들이 조선과 한양에 악감정을 품은 것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물론 수도 지위를 빼앗겼다는 데에서 오는 박탈감 등은 있었을 수 있지만 이는 왕조의 교체와 수도 이전에서 오는 자연적인 감정일 뿐이지 조선 왕실이 주도적으로 개성을 차별하고 탄압한 데에서 온게 절대 아니다. 16세기 이후 개성이 역사적 중심에서 멀어진 것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시대와 시차가 벌어지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무슨 개성에 대한 차별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비명문가를 차별하여 영호남을 비롯한 한양이 아닌 모든 지역 출신은 비명문가였기 때문에 출세가 어려운 점이 지적된 정도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지역'에 대한 차별이 아니고, 가문에 대한 차별이다. # 조선에서 대놓고 역사성이나 경제성을 두고 폄하당한 곳은 아무곳도 없었고, 오지인 함경도 마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이나 백두산 등이 중시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 들어 이러한 낭설이 퍼지게 된 이유는 왕씨 몰살, 성계탕, 두문동 72현 전설 등 일부 사실과 다량의 역사적 왜곡이 가미된 자극적인 야사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게 되었다는 점, 현대 남북분단으로 인해 개성에 대한 실상 파악이 어려워졌다는 점, 그리고 북한의 현 중심지인, 한양 위주 명문가서북 지방에 대한 비명문가라는 이유[10]의 정치적 차별을 같은 북한령이라는 이유로 개성까지 확대해 일반화해서 바라보려는 시각 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이 조선시대 교통으로도 한양에서 이틀거리인 서울과 무척 가까운 도시인데 이러한 사실이 분단으로 체감이 안되는 것 뿐이다.[11]

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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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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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안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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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Kaijo_map_circa_1930.png
↑ 1930년에 분리된 개성부(구 개성군 읍내시가지역) 지도

일본어로는 카이조 카이죠(Kaijō)라고 독음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여서 그런지 일본인들도 진출하려고 애썼지만 서비스고 가격이고 뭐고 개성인들은 무조건 개성 사람의 가게만 쓰는지라서(…) 그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일한 예외는 낚시용품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그들끼리, 또는 수창동에 있는 관청에 관용물자를 납품해서 이익을 보았다.

기반 자체가 없으니 발을 못붙이자 도량기구는 일본인 가게에서만 취급하게 했다. 하지만 그마저 개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서 썼기 때문에 결국은 도량가게도 기반을 못다졌고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12] 그래서 당대의 개성은 일본인 인구비중이 2%(1944년)에 불과해, 일본인 인구비중이 가장 적었던 부(府) 도시였다.[13] 1925년 인구조사에서 개성(송도면)의 인구는 4만 6천 명으로 조선 6위의 대도시였으며, 면 중엔 단연 1위[14]로 개성보다 인구가 적은 부가 7곳이나 있었음에도 일본인이 적어서 승격이 늦었다고도 한다.

부군면 통폐합풍덕군을 흡수하여 개성군으로 바꾸었다.

1930년 개성군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했고,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은 개풍군으로 바꾸었다.

파일:bd91df46-30a9-46fd-84f7-5ead118ca3ef-1464670103042.jpg
↑ 1938년 이후의 개성부 전역 지도

1940년 당시 인구 7만2천, 1944년 당시 인구 7만6천으로 전국 10대 도시, 전국 15대 도시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개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1940년대 시작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인구가 당시 크게 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6. 대한민국 경기도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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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1=본 틀에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 12일) 이후 폐지된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2=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2=대한제국 선포부터 광복(1945년 8월 15일) 전까지 폐지된 행정구역 가운데 현재 휴전선 이남에 위치했던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3=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3=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행정구역을 원칙적으로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4=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4=단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38선 이남에 위치했으나 휴전 후 북한 치하에 들어간 경우와 일부 영역을 수복했으나 인접 시군에 편입시켜 휴전선 이남에 실효지배하는 영역이 없어진 경우에 한해 등재한다.,
토론주소5=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5=명칭 변경 사례를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6=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6=폐지된 행정구역의 소속 도(道)는 폐지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단 제주도에 소재했던 행정구역에 한해 제주특별자치도 소속으로 표기한다.,
토론주소7=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7=폐지된 행정구역이 행정구역 명칭과 단위가 같은 행정구역으로 다시 설치된 경우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8=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8=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폐지된 동명의 행정구역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9=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9=폐지된 동·읍·면은 원칙적으로 등재할 수 없다. 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0=YouthfulTangibleDryClam, 합의사항10=1995년 이전에 폐지된 읍·면이라도 2개 이상의 행정구역에 분할 편입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1=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1=1995년 후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이라도 군 전체가 시로 승격하면서 관할 읍·면이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없다.,
토론주소12=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2=1995년 이후에 군이 폐지되고 해당 지역에 동명의 새로운 시를 설치한 경우 이전의 군을 틀에 등재하지 않는다.(따라서 틀에서 경기도 광주군을 제외한다.),
)]
경기도의 폐지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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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1f2023>
파일:개성부 휘장.png
개성시
開城市
Kaesŏng city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시청 소재지 수창동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하위 행정구역 17동
면적 29.95㎢
인구 89,000명
인구밀도 2,971.61명/㎢
시장 김기홍
국회의원 김동성

1945년 해방 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는 삼팔선 이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미군정~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도시였다.[15] 서로 적대하는 체제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상 개성의 주민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사실상 줄어 들은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실제로 1948년 당시 인구는 인구 87,962명, 1949년 당시 인구는 8만9천이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인구가 더 적었던 목포시(11만)나 전주시(10만), 마산시(9만)보다도 인구가 적었다. 결국 남한에서도 7대 도시에서 남한 10대 도시로 전락한 것이다.(...)

게다가 개성 바로 북쪽에 있는 송악산은 38선 이북이었다. 이 때문에 38선 이남의 방어진지와 개성 시가지가 다 내려다 보이므로 대한민국이 방어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였을 지경이었다. 참고로 개성 외에도 연백 평야옹진반도 일대도 전면전시 일단 철수하는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당시 이 지역을 지키던 제1보병사단의 건의에 따른 것이며, 그 전에는 현실을 망각한 채 병력과 장비도 안주고 1개 사단에게 적이 고지대에서 빤히 쳐다볼 수 있고 38선 후방에 평야와 바다가 펼쳐진 총합 100km의 전선을 담당하라는 어이없는 명령만 있던 상태였다.

당장 한국전쟁 이전에도 개성은 북한의 대남 도발송악산에 있는 북한야포 때문에 엄청난 포격을 맞는 준전시 도시였다(…). 게다가 1949년에는 북한군이 개성 시가지를 포위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국지전에서는 보기 힘든 사단급 전투인 개성 송악산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육탄10용사 사건도 이때 벌어진 것.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황해도소련군정에, 경기도미군정에 이양하자는 것이다.[16] 이것이 성사됐다면 개성·개풍·장단은 남한으로, 그리고 당시 남한 영역이었던 황해도 옹진군(서해 5도 포함)·연백군은 북으로 넘어가는 셈인데, 실익을 따지기는 어려운 문제이나 개성시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살아날 타이밍을 놓친 셈이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 곳 출신의 이성득 의원이 당선되었다. 민선 개성시장을 지냈으나, 임기를 마친 직후 한국전쟁이 벌어져 전쟁 중에는 전라북도지사(1951~52)를 지냈다. 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 유학으로 유명한 신문 만화가, 삽화가였고[17]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 화백이 2대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선 직후 피난가야했고 이후로 1954년까지 명목상의 임기만을 지냈다.

여담으로 해방 이후에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박물관이 전국에 몇 개가 있었다. 본관은 서울, 분관은 경주, 부여, 공주, 대구, 평양, 개성에 있었다. 그런데 38선이 그인 후에 북한은 평양 쪽만 소유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해인 1949년 5월 18일, 개성 지역이 북한에 너무 가까워 불안한 나머지 개성 박물관에 있던 상당량의 문화재를 열차에 실어 서울로 옮겼다. 빈 자리는 잠시 서울의 박물관에서 몇몇 전시물을 대여해서 전시했다가, 결국 무기한 휴관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조선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했을 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옮기는 도중에도 북한의 도발은 수시로 벌어졌다. 유물들을 기차에 싣고 있는데 역 앞 광장에 야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을 정도.[18]

현재 남한 지역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들이 (간송미술관의 매병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때 옮긴 것이다. 고려 수도는 북한령인데 정작 질 높은 고려청자와 고려시대 유물들은 현재 죄다 남한에 있고 북한에는 비교적 후진 고려청자들만 남았다. 이는 개성이 5년 동안[19]이라도 남한에 속해준 덕분이다. 이거와 비슷한데?

1949년 9월에 수도권을 중심으로 남한 각지에서 감염자 5,700명, 사망자 2,200명을 낸[20]# 뇌염 대유행의 진원지였는데, 개성·개풍 일대에서는 환자가 수백 명에 달해 임시 휴교령과 집회 금지 등 방역조치까지 이뤄졌다가# 9월 28일에서야 해제되었다.#

6.1. 6.25 전쟁

결국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 제6사단이 비밀리에 철도를 수선한 후 열차에 탑승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함락당했다(…)는 설이 있어 논쟁 중이다.[21]

그 후에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복하였으나 1.4 후퇴 때 다시 북한에게 넘어간 후 1951년 3월 UN군의 커레이저스 작전(Operation Courageous)의 결과 UN군이 잠시 수복하였으나 곧바로 개시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춘계공세로 다시 빼앗겼다.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다시 반격을 가하여 전선을 개성 근방까지 올려놓았으나 개성은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황 속에 말로는 중립지대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간 1951년 6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했고[22],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개성을 놓고 협상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개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산군은 거절하였다. 공산군은 후술하는대로 오히려 38선 시절의 원상 복귀를 주장했다. 유엔군사령부는 끝내 개성을 북한에 양보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휴전선이 개성 남쪽을 지나는 바람에 현재는 북한 영토가 되었다.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현재 기준으로 보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도시규모상으로만은 이 전쟁에서 남한이 손해를 봤다.[23]

당시 휴전회담 대표였던 이형근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을 탈환할 것을 적극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빠른 종전을 원했던 UN군 측의 압박으로 인해 이러한 소망은 좌절된 채 개성은 결국 북한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도 개성, 연백, 옹진의 영유권을 휴전 이후 꽤 오랫동안 주장했다.[24] 정부차원에서 1957년정도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궐기대회를 조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25] 함락 이후에도 경기도청에서도 임시로 개성시청을 두기까지 했던 듯 하다.[26] 참고로 한국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 연백군의 국회의원들은 1953년 휴전 이후 자신들의 지역구를 상실하였음에도 그 임기와 직책, 지역구를 다음 총선이 있는 1954년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한 원래 개성 시내에 있었던 서울지방법원 개성지원, 서울지방검찰청 개성지청은 휴전 이후 파주군 아동면(현 파주시 금촌동)으로 이전해와 '개성지원', '개성지청'이란 이름을 1962년 8월까지 그대로 유지하다가, 1962년 9월 1일 각각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현 의정부지방법원),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현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신설하면서 이에 통합해 폐지했다. 의정부지방법원 연혁 의정부지방검찰청 연혁[27]

이후 1976년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을 정리하기 위하여, 현재도 간간히 언급되는 대북 선제 타격, 즉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령의 회복, 그리고 개성의 탈환을 충분히 고려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끝내 개성은 북한 치하로 넘어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7. 북한 치하의 개성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개성은 38선 이남 한정으로 경성(서울), 부산, 인천, 대구, 광주에 이어 6위였다. 북한 지역까지 합하면 평양, 흥남, 청진, 신의주, 원산, 함흥, 해주에 이어 13위의 인구 규모를 자랑했다. 대체로 남포, 광주, 해주(셋 다 82,000여명)보다 약간 적고 대전(76,202명)과 비슷했다. 6.25 이후 북한에 편입되고도 사실상 도청소재지급 도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함흥, 청진, 남포)에 비해 인구 성장이 정체했고, 개성시로 장풍군 등을 분리시킨 이후로는 단천시, 개천시, 사리원시[28] 등의 도시에 밀려 2008년 기준으로 북한에서도 8~9위권이 되었다. 남한으로 치면 순위 외일 것이다.[29]

1944년 인구 통계를 보면 개성부 76,360명, 개풍군 91,697명으로 총합 168,057명이 살았는데, 2008년 북한 통계에서는 308,440명이 거주한다. 64년동안 한반도의 인구는 2500만명에서 7400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는데, 개성의 경우 고작 184% 늘어났다. 결국 북한 치하에서 개성의 인구는 한반도의 평균 인구증가율(60년간 2.5배)에도 못 미치게 증가한 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동네로 이사 간 개성 사람들이 타지에서 전입온 사람보다 더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순위가 떨어진 이유로는 북한 도시들이 죄다 30만명 선에서 고만고만 해서 순위가 밀리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30] 단, 장풍군의 인구를 더하면 개성권역의 인구는 37.7만명 선인데, 이렇게 되면 역시 인구가 북한심시티 행정구역 개편으로 반토막난 남포(36.7만명)보다 많아 북한 제4의 도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남포가 특별시로 승격하면서 주변 지역을 합병해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증가가 더딘 것은 분명하므로 현 상태가 유지된다면 향후에는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7.1. 개성시(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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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하면서 경기도도 강원도처럼 남북으로 갈라졌다. 북쪽으로 상당 부분을 수복해서 절반 가량이 갈라진 미수복 강원도에 비해 경기도는 거진 대부분을 남한이 차지하고 있었고 북한은 단지 개성만을 강점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북한 경기도의 대부분은 개성 근처인데 북한의 김씨 왕조는 북한 경기도를 아예 개성으로 싹 묶어버렸다. 그래서 북한 경기도는 그냥 개성 하나였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던 일부 지역은 강원도 철원군으로 편입시켰다. 다만 지금은 황해북도 소속으로 치는 듯.

전쟁 중인 1951년부터 개풍군을 폐지하고 "개성지구"로 만들었으며, 1955년에는 북한이 점령한 경기도의 나머지 지역인 장풍군, 판문군을 편입시켜 직할시인 개성시(1957년 6월)로 만들었고, 1960년에는 북한 강원도황해북도에서 추가로 삥뜯어 확장하였다.

이후로는 부침이 있었다. 예컨데 개성시의 리즈 시절인 1972년에는 인구 32만으로 당시 북한 4대 도시(평양, 함흥, 청진 다음)였던 적도 있었다. 함흥은 1960년에 직할시로 승격받았으나 다시 1970년에 강등당했으므로, 진정 리즈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잠깐 개성시로 격하당했으며, 이때 인구가 1/3토막(10~11만 명)이 났다. 다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귀하여 1993년 당시 33.4만 명으로 그래도 이 때만 해도 북한 5위권이었으니 북한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7.2. 개성시(특급시) - 개성공단개성관광

파일:external/nk.joins.com/i031ml.gif
2002년 11월 개성시의 판문군(1개읍, 16개리)을 폐지했다. 폐지된 판문군은 판문읍이 봉동리로 바뀌어 봉동리, 진봉리, 평화리, 동창리, 판문점리와 삼봉리 일부, 전재리 일부를 개성시에 합쳤다. 그리고 개풍군의 해선리 일부를 개성시 송악동에, 판문군의 전재리 일부를 선적리에 합쳤고 선적리를 장풍군에, 판문근의 삼봉리 일부를 상도리에 합쳤다. 또한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를 개풍군에 편입시켰다.

2003년 6월 개성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을 황해북도로 편입시켰다. 2003년 9월 황해북도의 특급시로 격하하면서 개성시를 폐지했고 구 개성시를 개성공업지구로 변경했다.[31] 장풍군을 개성시에서 분리한 이유가 바로 개성공업지구 때문이었다. 장풍군은 개성공업지구에 포함되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

2003년 10월에는 개풍군 해선리 전역과 연릉리, 고남리, 오산리, 상도리 일부가 개성시에 편입되었다. 이어 2004년 2월에는 개풍군으로 편입되었던 구 판문군 영역의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 등 10개 리, 그리고 장풍군으로 편입되었던 선적리가 개성시로 편입되었다. 2005년 9월에는 개풍군 개풍읍을 개풍동으로 승격하는 대신 개풍군을 완전히 폐지해 개성시로 편입시켰다. 돌고 돌아 장풍군을 제외하고는 다시 개성으로 환원된 셈이다.[32]

이 때문에 2008년 UN이 시행한 인구 센서스에서도 개풍군은 찾아볼 수 없다.[33]

격하당한 후에도 개성공단 덕분에 개성 주민들은 평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잘사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상당한 특혜를 누렸기도 했지만.) 2003년 당시 개성시 일부와 구 판문군 일부를 합쳐, 개성공업지구를 신설했다. 바로 여기에 개성공단이 있다. 문서 참조. 2000년 김정일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현대아산)의 합의로 짓기로 하여 2003년 6월 기공, 2006년 완공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와 개성은 새로운 전기를 맞은했다. 또한 현대아산편으로 개성시내관광(물론 제한된 장소만)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된 북한의 대남 도발과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이후로 금강산 관광과 함께 중단되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2010년대 들어 남북관계 악화와 함께 실질적으로 정체되었다.

2013년에 이곳에 존재하는 개성의 성곽과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등 고려 왕릉들이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7.3. 개성시(특별시)

2019년 상반기에 다시 북한의 광역자치단체광역행정구역특별시(개성특별시)로 승격했다.

2020년 4월 경에는 구 개풍군 지역과 구 판문군 지역을 개풍구역판문구역으로 복구했다.

2023년 2월에는 장풍군이 개성시로 편입되면서 2003년 이전의 위상과 규모를 모두 되찾게 되었다.

8. 관련 문서


[1] 공주부여, 전주, 강화, 철원, 김해 등도 역사적 고도이기는 하나 김해를 제외하면 수도로서의 존속기간이 앞의 넷에 비하면 매우 짧고 강화도의 강도승천부를 제외하면 한반도 통일국가의 수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후순위로 밀린다. 국내성 등이 위 네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지만 한반도 영역 밖이라서 자주 거론되진 않는다. 다만 이 네 도시 중에서는 개성의 역사 출발이 가장 늦다. 단순히 선사시대의 주거 흔적 따위를 제외하고 민족사의 고도로서의 출발점을 놓고 보면 이미 고대 시대에 그 역사가 시작된 평양(고조선 혹은 한사군), 경주(신라), 서울(백제)에 비해 개성은 중세 시대인 10세기에 들어서야 고려의 수도로서 민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영향력과 그 위상, Korea라는 국명의 어원 등을 살펴볼 때 출발이 늦다고 해서 그 역사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중국사중국 7대 고도와 비교하면 서울이 베이징(고대의 수도이자 근세 이후 역사의 중심), 평양이 뤄양(최초의 고도), 경주가 시안(최장기간 수도이자 10세기 이전 역사의 중심)과 매칭된다면 개성은 카이펑(중세사의 중심)에 견줄 만 하다. 단순히 위상 뿐 아니라 실제 연대 자체도 대략적으로나마 이렇게 들어 맞는다.[2] 여기서의 개풍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의 풍덕군 지역(개풍군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을 일컫는다.[3] 현대 대한민국은 개성 없이도 서울을 잘만 방어하고 있으나, 그건 현대 대한민국이 아신왕-개로왕 당시 한성백제와는 달리 영서 일대 방어력은 철통 같이 견고한 데 이유가 있다. 반면 한성백제는 영서 일대를 다 잃고 고구려의 충북 진출까지 허용한 상황에서도 개성 일대를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으면서 그럭저럭 한성을 한 세기 가까이 지켜냈다고 볼 수 있다.[4] 일단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상으로는 신라 9주 5소경한주에 속했는데, 신라 후기에 한주와 구분되는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을 신라 서북면에 설치했다는 설을 긍정한다면, 신라 말에 패서지방으로 주로 황해도 지역과 묶어 분류했던 개성 역시 위치상 패강진 관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진흥왕 이후 줄곧 신라령이었던 임진강 이남의 파주 지역과 달리 이북의 개성부터는 고구려령이었기 때문이다. 6~7세기 신라와 고구려는 현 남북한처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5] 그러나 경덕왕이 한 번에 개성, 송악이란 이름을 새로 만들어낸 건 아니고 694년, 703년 기사 등을 근거로 효소왕, 성덕왕 때도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6] 근초고왕 시대에 황해도 서해안은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물론 이 때문에 근초고왕의 백제는 고구려가 황해도를 통해 중국과 소통하는 걸 막지 못했다.[7] 참고로 궁예의 친위세력은 궁예가 성장기를 보냈다고 추정되는 청주의 백제계 호족들이었다. 철원으로 천도할 때도 청주의 주민들을 거기까지 옮겨서 기반으로 삼았다.[8] 다만 조선 개창 직후 변경된 것은 아니고, 태종 대에 행정구역 조정을 하면서 변경되었다.[9] 왕씨 몰살의 경우에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무슨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것마냥 홀로코스트난징대학살,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비슷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 규모 역시 인터넷상에서 와전된 것마냥 크지도 않았다.[10] 북한의 대한 혐오로 이곳에 대한 차별의 과장도 심하다. 아무도 평안도의 역사성을 폄하하지는 않았고, 함석헌 같은 이곳 출신은 오히려 신분을 따지지 않아 이 고장이 근대적이라고 주장했다. 문벌차로 인한 갈등은 북한에 속해있느냐가 아니라 낮은 가문인가에 결정된 것이다. 한양 내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었다. 홍경래의 난에 자극받아 채수영의 난처럼 충청도나 전라도 출신이, 다른 곳은 제주도민이 동조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11] 또한 임진왜란 및 일제강점기 등으로 인하여 조선이 지나치게 쇄국적 및 비자주적 이미지로 비추어진데 비해, 그 반대급부로 고려가 지나치게 자주적이고 상무적으로 미화되는 점도 이러한 낭설이 퍼지는 것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12] 참고로 당시 개성의 경제력은 웬만한 일본 도시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13] 참고로 1944년 당시 타 도시의 일본인 인구비중은 예를 들어보면 경성 16%, 부산 19%, 광주 11%, 대구 10%, 진주 6%, 평양 9%, 나진 26%였다.[14] 참고로 개성군 송도면 다음은 제주군 제주면(3만 9천)과 고양군 용강면(3만 2천) 순. 다만 제주면은 행정구역 자체가 매우 넓었고, 용강면은 사실상 서울의 연장이었다.[15] 구역 상으로는 송악산의 남쪽 사면의 북쪽 일부가 북측에 속했지만 북측의 행정상 개성시를 설치하지는 않았다. 후술하지만 그곳에는 북한군이 주둔하여 남한을 무진장 괴롭혔다.[16]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개. 171~174페이지[17] comic을 (아마도 일본을 거쳐서였겠지만) '만화'라고 번역한 게 1923년 이 분이 최초라고 한다![18] 이 사건이 세간이 알려진 후 개성 민심이 정부의 개성포기 괴담으로 흉흉해지자, 구자옥 경기도지사가 기자회견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개성시민은 안심하라. 현재 38선경비는 철통같은 상태이니 도민은 군경의 경비를 신뢰해 주기 바란다. 개성 시민들은 절대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 강진일보 <그때 그사건> 고려청자를 피난시키라.[19]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20] 치사율 38.5%[21] 철도 수송설은 한국 전쟁 서적중 가장 유명한 데이비드 햄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소개되었다. 또한 저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톨랜드의 서적에서는 거의 정설로 쓰여져 있다.[22] 회담장소를 개성에서 약간 남쪽으로 떨어진 판문점으로 옮긴 것은 고도(古都) 개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산군 측에서 의도했다는 설이 있다. 휴전 협상 지역은 유엔군의 작전 지역에서 제외되었기에 북한 측은 개성 지역을 확실히 점령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던 것.(출처: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공산군은 협상차 개성에 입성하는 유엔군을 정권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휴전회담을 상징하는 백기를 단 유엔군 차량으로 의도적으로 항복에 구걸하는 모양새로 선전했고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협상장에서 유엔군 의자 높이를 낮추기도 했으며 비무장 중립지대로 선포된 개성시내에서 군사행진까지 감행하는 무력시위까지 벌였는데 이 때문에 유엔군은 공산군 영향권에서 먼 판문점으로 회담장을 옮겼다. 만약 개성이 진짜 중립지역이였으면 애초에 이와같은 공산군의 일방적인 도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당시 중립지대라 일컬어진 개성시의 전황을 보면 개성시 자체는 비무장 중립지대인데 그 개성시를 빙 둘러싼 개풍군과 장단군 서부는 공산권에 수중에 들어간 일종의 서베를린의 형세에 가까웠다.[23] 반면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원산시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삼팔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24] 그건 이북 5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했다. 그러나 개성, 개풍, 연백, 옹진의 시민들은 지난 5년간 미군정과 남한의 관리를 받았고 특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차례의 대선과 2차례의 총선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이였기에 신해방지구라 불리는 이들 지역의 상실은 대한민국에 특히 뼈아팠다. 특히 개성은 상술했다시피 고려 왕조의 고도로서 서울, 경주, 평양과 더불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도시였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따라서 이북 5도 가운데에서도 북한의 소위 신해방지구, 신해방지구 가운데에서도 개성은 남한에겐 아픈 손가락이였던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국군 장성들과 참전용사들의 인터뷰를 보더라도 특히 개성의 상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25] 휴전 직후 신문기사에서 개성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런 기사이다.[26] 물론 현재도 이북 5도 위원회에서는 북한 치하의 모든 ·····(長)을 계속 임명하고 있다.[27] 만약 625 전쟁때 북진통일에 성공하거나 휴전선이 한참 이북으로 올라가 개성시를 온전히 대한민국령으로 만들었다면 서울지방법원 개성지원과 서울지방검찰청 개성지청은 각각 개성지방법원 또는 개성지방검찰청으로 승격되고 산하에 개성지방법원 파주지원 또는 개성지방법원 고양지원 등을 두거나 경기남부를 관할하는 수원고등법원이 출범할때 동시에 경기북부를 관할하는 개성고등법원이 생겼을 수도 있다.[28] 황해북도 도청소재지. 2008년 인구가 거의 동일하다.[29] 도시권 전체를 합쳐 37만 명이라고 치더라도 2010년 남한의 인구 별 도시 순서에 대입하면 당시 기준 39만 명의 평택시나 34만 명의 진주시와 맞먹는 인구이다. 그러면 대략 27~28위. 개성 하나만 두고 보면 원주시, 익산시랑 비슷한 수준으로, 31~32위 정도다. 두 도시는 이런저런 지원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데 개성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다.[30] 평양, 함흥, 청진을 제외하고는 10여개 도시가 모두 27~36만명선.[31] 승전동(옛 사목동, 社穆洞), 내성동(옛 태평리, 太平里), 성남동(옛 손하동, 孫河洞), 박연리(옛 산성리, 山城里) 일대[32] 남성욱·황주희, 『북한 행정구역 개편의 함의와 행정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정책연구 제27권 1호, 2018, p.127.[33] 북한 《조선중앙년감》을 참고하여 연합뉴스가 매년 만드는 《북한연감》에 따르면 개풍군은 2016년판부터 사라졌다.# 하지만 연합뉴스 《북한연감》은 업데이트가 다소 늦는 경우도 있고,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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