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여말선초 당시에 있었던 일이라고 후대에 전해진, 사실에 기반을 둔 야사. 많은 사극이나 위인전에서 뻥튀기된 사실을 정사인 것마냥 다루어서 실제로 있었던 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몇몇 가문은 아예 족보 등에 자신들의 조상이 두문동 72현 가운데 하나라면서 자랑스러워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두문동 72현이 한꺼번에 모여있다가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이 태워죽였다거나 황희가 72현의 일원이었는데 유일하게 조선에 출사했다거나 한식의 유래가 여기서 나왔다거나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라는 등은 전부 야사이며 조선왕조실록에도 본도의 대족 50여 집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아서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다고 나온다.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선조들의 공훈을 빛내고 싶어하는 몇몇 후손들이나 여말선초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사극 작가들에게 상당히 자주 애용되는 야사.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마저도 정사인 양 적어놨었다. 이성계가 황희를 협박해서 출가했다거나 이성계가 재위 6년(1397)에 두문동 선비들을 모두 불태워 죽였다거나 참살했다는 등으로 소개했었다.
굳이 따지면 현재 두문동 72현이라고 알려진 인물 가운데 확실히 행적이 확인되는 태학생 임선미와 조의생은 두문동에 은거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1] 따라서 두문동 이야기가 처음 불거진 영조대에도 이들의 후손이 가장 먼저 혜택을 입었다. 그 외 정조와 순조 시기에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임선미, 조의생, 맹씨 성의 인물(혹은 맹호성)외에 추가로 4명이 더 배향되었다고 하는데 각각 직제학 성사제, 찬성사 박문수, 예의판서 민안부, 예의판서 김충한으로, 개성의 유생들이 두문동 72현이라고 주장한 이들이다.
2. 언제부터 이런 얘기가 나왔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문동 이야기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나온 때는 조선 건국으로부터 3백수십여 년이 지나 18세기 중엽 영조 시대부터이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72현이 아니었다. 영조실록 영조 16년(1740) 9월 1일 기사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임금이 연(輦)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詩)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
영조가 개성에 행차하여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우도록 한 것이 두문동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기선 72현 같은 얘기는 나오지 않고 과거를 치른 주체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며 그냥 해당 지역 50여 가가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고만 했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태조가 과거를 열었는데 고려 유생들이 전부가 모여서 조선의 과거를 거부했다[2]는 얘기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의 첫 과거는 태조 2년(1393)에 열었는데 최초 합격자 99명에 태조가 직접 3명을 추가로 합격시켜 최종합격자는 102명이다. 당시 급제자가 태종대의 권신 이숙번이다. 다들 새 왕조에 출사할 사람들은 다 했다는거고 과거 볼 사람들은 다 봤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점에선 분명 72명이라는 명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두문동 충신이 72명이라는 얘기는 이로부터 10년이 지나 영조 27년(1751)에 나왔다. 다음은 영조 27년 9월 27일 기사이다.
고려(高麗)의 두문동(杜門洞) 72인(人)의 충신(忠臣)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 어필(御筆)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碑)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제 단지 임(林)·조(曹) 두 성(姓)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두 성(姓) 가운데서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여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후 정조 시절에 개성유수 서유방이 두문동 고려충신들을 숭절사에 배향하자고 상소하였다. 다음은 정조 7년(1783) 7월 14일 기사이다.
충신을 포양(褒揚)하고 절의(節義)를 권장함은 그 나라의 더없이 큰 국정(國政)인 것이기에, 무릇 전조(前朝)의 사람으로서 병의(秉義)하고 입근(立慬)한 처지에게는 모두 열성조(列聖朝)의 포장(褒奬)하는 은전(恩典)을 입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사(院祠)의 향사(享祀)와 도설(棹楔)을 세우는 일이 곳곳마다 서로 바라다 보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두문동(杜門洞) 태학생(太學生) 72인들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이 성취해 놓은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曹義生)·임선미(林先味)와 성이 맹가(孟哥)인 세 사람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
3. 각 가문의 두문동 엮기
1923년에 나온 여조충렬록의 두문동 72현 명단[4]추가로 표철사에 배향된 직제학 성사제의 경우 조선 순조대에 이 사람의 후손들이 '두문동실기'(1809년에 발행된 책이다.)라고 해서 400여년전 조상이 두문동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두문동 72현이라는 이들의 이름을 몇명 적었는데 오늘날 두문동 72현 가운데 이름이 남았다고 하는 이들은 이 사람들의 이름이 남은 경우가 꽤 된다. 즉 처음 두문동 3인(보통 두문삼절이라 부른다)이 표절사에 배향된 이후 다른 가문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들이 고려말에 뭘 했는지 뒤지면서 '우리 조상님도 두문동에 계셨다'라고 쓴 글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두문동실기나 송은실기(1909년에 발간된 책이다.)에 있는 두문제현충렬록에서 언급한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 건국 이전에 죽은 전조생이나[5] 아예 조선조에 출사해서 멀쩡하게 벼슬을 한 곽추[6],김자수[7], 이양중[8], 성부[9], 윤규[10]도 있고 두문동이 아니라 다른곳에서 은거한 맹희도[11], 신덕린 같은 사람도 있다. 차원부처럼 아예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12] 사람도 있으니 과연 누가 진짜 두문동에서만 평생 절의를 지키며 살았는지는 미스테리인 셈.
다만 각 가문별로 조상의 행적을 두문동과 엮다보니 조선말에 이르면 두문동 출신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져서 72명에 맞추려다 보니 명단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고 결국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이 '어느 한 고을에 머문 고려 충신들'이 아니라 마치 '고려 충신 올스타즈'(...) 같은 느낌이 생겼다. 당장 위에 언급된 두문제현충렬록에선 아예 72명이 아니라 124명이 나온다. 이숭인, 정몽주, 길재, 원천석, 문익점, 이색 등 아무리봐도 이전 문헌에선 두문동이랑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 명단에 들어간다던지...황희 같은 경우엔 아예 구한말(1890년)에 황희의 후손들이 '황희 정승도 사실은 두문동 출신이었다'고 문집을 발간한 케이스이다.[13] 그것도 황희를 문묘에 배향해 달라면서 그렇게 썼다.
이러다보니 이제는 '다른곳에도 두문동이 있었다더라!'라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실제로 강원도 정선군에 두문동재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고려 두문동 72인이 다 불타죽었는데 그 중에서 7명만 살아서 여기서 살았다고 두문동이라 한다'라는 이야기를 써놨다. 당연히 불타 죽었다라는 건 전설이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런 지명이 붙었는지는 불명, 원래는 개성인근 지역명이었던 두문동이 명성을 얻음에 따라 다른 지역 지명으로까지 퍼져나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4. 두문동 야사의 변천 과정
우선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는 한식의 유래인 진문공과 개자추의 일화를 그대로 따온 것이며,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 건다' 는 뜻으로 조선이 건국되기 한참 이전인 고려 고종대의 문신 이규보가 편지에서 ‘두문불출’ 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당 태종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에도 나오며,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고사성어에서 동네 이름이 나온 셈이다.그러니까 '어느 고을에 고려 유신 몇 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몇몇 유생 가문들이 은거하며 태종에게 출사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그곳을 두문동이라고 불렸다더라' 는, 그런 일도 있었다더라 정도였던 일이 어느 새인가 '두문동에 누구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72인의 고려 충신이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되었고, 이것이 다시 '태조가 개국하고 과거를 열었는데 고려 유생들이 단체로 거부하여서 과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더라' 는 전설로 변질되었고, 급기야는 '두문동에 고려의 거물급 인사 72명이 조선에 항거하여 절의를 지키면서 은거하다가 조선왕조에 의해 불타죽었다' 라는 신화로 뻥튀기된 것이다.
여기에 구한 말에 추가된, '황희도 원래 두문동 72현이었는데 다른 어진 선비들이 황희만은 조선에 출사하라고 권고하여 그만이 살아 나올수 있었다' 라는 이야기까지 끼워넣으면 오늘날 알려진 두문동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 덕에 황희, 길재, 원천석, 이색, 문익점 등 잘 알려진 여말 선초의 문신들을 두문동에 끼워맞추기까지 했는데 저 사람들은 각자 고향이나 조용한곳에 은둔하거나 조선에서 벼슬을 하는 등 그 행보가 제각각인 사람들이다.
또 72명은 문신들만 거주하던 서두문동이고 동두문동이라고 해서 48인의 무인이 따로 은거했다더라라는 얘기도 있는데, 이들도 조선 조정이 불태워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
두문동 야사의 변천과정을 설명한 책. 본 문서보다 더 자세히 나와 있다.
5. 두문동 설화가 이렇게 알려진 이유
두문동 72현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당시 국왕인 영조의 의도가 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때부터 경종독살설에 시달렸고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등 영조에 반발하는 무리가 즉위 초부터 만만치 않았다. 또 이 이야기가 알려진 영조 16년은 경종 시해 음모죄로 처형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무죄이며 영조의 충신임을 선언한 경신처분이 있었다. 즉 영조에게는 일편단심 왕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과 그의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매우 절실했던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능행길에 두문동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정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72현까지 배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도 모두 영조대에 이르러 시행된 정책이다. 당장 정몽주를 때려죽인 이방원이 직접 그 정몽주를 신원하고 각별히 대접한 것을 보면 그렇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결국 영조가 두문동비를 세운 건 맞으나, 고려 유신 72명이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 새 왕조에 저항을 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의 윤색이다. 조선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들이 섬겼던 왕이 제거한 정몽주나 사육신을 추숭하면서 그들의 충성을 본받으라는 예시로 내세우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실제로 두문동 72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게 되면서 행적이 실제와 전혀 다르게 알려진 인물이 있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동생이기도 한 조견(趙狷)이 바로 그인데, 정조실록에 따르면 조준이 태조를 왕위에 올릴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면서 반대했다고 하며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청계산에 은둔한 절의를 높게 사서 불렀는데 백이, 숙제의 고사를 따라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새왕조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면서 평생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태조가 직접 형 조준과 함께 은둔한 곳을 찾았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 덕에 사당[14] 세워지고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숭앙받았다.
그런데 정작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에 따르면 은둔은커녕 멀쩡하게 출사해서 개국 2등공신 작위를 받았으며, 여러 중책을 역임하며 평성부원군에 오르고 세종에게 궤장까지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두문동은 그만두고 은거한 사실 자체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성계에게 국새를 들고 왕위에 오르라고 한 신료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정조 대에 가면 고려조의 충신이라면서 왕한테 화액을 원하니 시행케 하고 절의를 기리는 사당[15]까지 세웠다. 당대에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개국공신이 후대에는 고려의 충신이라고 숭앙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16]
간단히 요약하면, 충성을 바라는 국왕의 의도와 조상을 높여서 자신이 이득을 보려고 했던 가문의 욕심이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중 국왕의 욕심은 몇대 지나지 않아서 약해졌지만, 가문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는 일제강점기와 현대까지 남아서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는 고려 충신들이 '민담'과 '족보'를 근거로 탄생하곤 한다. 출처표기가 팍팍한 위키백과 같은 곳에도 저런 내용들이 사실인 양 실림은 오랜 역사와 전통에 의거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두문동 전설의 형성 근거이다.
6. 매체에서
용의 눈물 : 여말선초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중 가장 대표적이고 세밀한만큼 두문동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나오는데 조선 건국 후에 첫 과거를 시작할 때,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에 반감을 가지고 고려에 충성하던 인물이 계획을 짜놓고는 과거를 시작하기 전 주제가 나오자 과거 주제에 대한 반감과[17] 비아냥을 내뱉으면서 종이를 찢고 그냥 나왔는데, 이에 다른 신하들은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이성계는 이런 이들마저도 포섭해야 고려의 반감이 줄어들 것이라 여겨서 내버려뒀다.그러나,멀지 않은 곳에 두문동을 만들고 그곳에서 고려 왕조를 섬기는 이들로서 살기 시작하자, 신하들은 다른 반발하는 인물들도 저것을 보고 더 반발하거나 모이지 않을까 싶어서 염려하며, 몇몇 신하를 보내어 설득해봤지만 가는 이들이 모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해서 돌아오자, 이방원, 이숙번 등의 강경책을 고수하는 이들이 그것에 대해서 해결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그들을 죽이기 시작해버렸고, 두문동은 사라져버린다.[18] 그 덕에 이성계는 분노가 폭발해서 그곳에 갔던 담당자를 모조리 죽이려들었고, 그곳에 같이 갔던 정도전이 진정시켜 그나마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19] 이런 일이 벌어지자 이성계는 당시 천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에 천도 계획에 더 열을 올리게 된다.
여담으로 후기에 추가된 내용들까지 더해져, 그들이 병사에게 전부 죽은 것은 아니며 일부가 그 참변에서도 살아남았었고, 황희가 그런 생존자들 중 하나였다고 나레이션으로 언급한다.
대왕 세종 : 대왕 세종에서는 황희가 나오고 고려 왕실 부흥 세력이 나오는만큼 초반부에 회상쪽으로 많이 나온다. 다만 젊은 선비들이 아니고 노구를 이끄는 고려의 신하들이 대거 나온다. 나오기 전에 불을 태우고 죽이려고 하기 직전으로 나오며 황희가 이들을 설득하지만, 황희를 응원하며 그들은 불타 죽는 것을 택해서, 황희의 마음에 큰 트라우마를 일으키기도 했다.
육룡이 나르샤 : 여말선초의 이야기를 다루는지라 이 두문동 설화도 극중에 나오게 되는데 육룡이 나르샤에선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관직과 벼슬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시위하는 유생들이 모여있는 두문동의 유생들을 이방원이 설득을 하겠다며 불지르는 장면이 나온다.[20]
7. 여담
2015년 7월 2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1] 사실 한 명이 더 있기는 한데 성이 맹씨라는 것밖에 알려지지 않아서 누구인지를 모른다. 정조실록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기록되다가 '맹호성' 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순조실록에는 다시 성이 맹씨인 사람(孟姓人)으로 나온다. 맹사성의 할아버지나 친척 일가라는 얘기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2] 사극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드라마)등에 나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3] 이들도 나중에 72명 가운데 포함된다.[4] 명단 가운데 실제로 두문동에 들어갔다고 나오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72명이 아니라 74명이다. 정몽주나 이색 등은 말 안해도 입 아플 지경이고. 게다가 이존오나 정몽주는 조선 개국 전 이미 죽었으며, 김진양같은 이는 조선 개국 후 숨기는커녕 정도전에게 밉보여 살해된다.[5] 이 사람은 공민왕 5년에 죽었다[6] 조선조에 예문관 태학사,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다.[7]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절명사를 읊고 자결했다는데 고려사 열전에 대놓고 본조(조선)에 벼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8] 조선시기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9] 조선 초기 문신인 성희안의 증조부로 이방원과 동방이라하여 세종시절에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10] 두문동은 커녕 이방원하고 과거급제 동기라고 해서 우대받았다.[11]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의 아버지로 이 사람은 조선조에 들어서 은거한것도 아니고 공양왕 때 정치가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온양에 은거했다고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지역의 효자로 나오는데 당연히 두문동 얘기는 없다.[12] 차원부설원기라는 책에 나오는 인물인데 이 책은 위서라는 의견이 있다. 오죽했으면 일성록에 정조가 못 믿겠다고 세번이나 증시를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데 설령 이 책이 맞다고 해도 설명 자체가 위화도 회군을 돕고 조선을 건국한 공이 있다고 하니 실존인물이어도 고려 충신 소리가 나올 인물은 아니다.[13] 여기서부터 '두문동 어진선비들이 황희더러 출사하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14] 숙종대에 건립되었고, 정조대에는 화액이 내려졌다.[15] 사당은 이미 숙종조때 세워지고 왕에게 정식으로 화액을 요청한 것은 정조 때다, 즉 '조견 고려 충신설'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단 얘기.[16] 각종 야사를 버무린 용의 눈물에도 조견은 은거한 고려의 충신으로 나와 이성계 앞에서 개흉내를 내며 조롱한다.[17] 당시 민제가 써서 내놓은 과거 주제가 이성계를 요순시대의 왕들과 비교해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고려 유학자들이기에 사람들은 그 주제를 약점삼아 폭언을 퍼부었고, 신하들도 과거에 벌어진 사태에 "왜 주제를 그런걸 쓰셔서 걔네 속을 뒤집어 놓으셨지?" 라고 하고 민제 역시 "내가 생각이 짧아 그렇게 주제를 내놔서 사단을 더 크게 만들었다."라고 하며 미안해했다. 아무래도 개국이 시작된 만큼 이성계를 추켜 세우고자 정한 주제였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아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18] 이방원이 주도적으로 제거를 하자고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두문동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병사들을 공격했고, 수도 더 많아서 (병사가 50명, 선비는 72명) 이러다간 죄 없는 병사들이 죽어나가겠다고 여겨 진압을 시킨 것이다.[19] 정도전도 이방원과 같이 이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파였기에 이건 폐하 잘못이라고 옹호해줬던 덕분.[20] 게다가 탈출한 이들을 모조리 붙잡아 3일간 굶기고 3일째 되는 날 밥을 주고 풀어주었는데 이들 모두 이방원에 대항하기 위해 벼슬을 얻는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