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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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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당 시기3. 인기4. 여말선초 당시 인물5.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
5.1. 드라마5.2. 영화5.3. 소설5.4.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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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대적 격동기를 말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100년도 채 안 되지만[1], 그 사이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한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2. 해당 시기

여말선초에 대해서 대중들이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는 사람들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여말"과 "선초"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빠르게 잡는다면 고려에게 최후의 기회가 남아있던 공민왕 즉위기(1351)를 여말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공민왕이 죽어 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1374년으로 볼 수도 있다. 또 고려 왕조 시대에 사실상 사형 선고가 내려진 위화도 회군(1388)을 여말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선초의 끝으로는 정치적 혼란과 정변 끝에 간신히 후계구도가 확정된 무인정사(1398)를 선초의 끝으로 볼 수도 있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인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시점(1418)을 선초의 끝으로 볼 수도 있고, 넓게 잡으면 조선 왕조가 완전히 안정화된 시기인 세종의 승하(1450), 또는 세조의 집권 직후(1455)를 선초의 끝으로 볼 수도 있다. 최영,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등이 활약하던 위화도 회군에서부터 무인정사까지의 기간이 여말선초에 반드시 포함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사람에 따라 또는 창작물에 따라서는 꽤 범위를 다양하게 잡을 수 있는 셈이다.

보통 공민왕 즉위, 공민왕 시해(우왕 즉위), 위화도 회군 등을 여말의 시작점으로 잡고, 무인정사, 태종의 즉위, 태종의 승하(세종의 즉위), 세종의 승하 등을 선초의 끝으로 잡는 편이다. 가장 넓게 잡으면 공민왕 즉위부터 세조의 집권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2], 가장 좁게 잡으면 위화도 회군부터 무인정사까지의 10년에 걸친 역사를 여말선초라고 볼 수 있겠다.[3]

다만 한국 사극에서는 이성계, 이방원, 최영, 정도전, 정몽주, 양녕대군, 원경왕후 등 드라마와 같은 생애를 살다간 사람들이 세종 즉위 즈음에는 전부 죽거나 궁궐에서 쫓겨나기 때문에 세종 즉위 전/후로 극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 편이다. 보통은 우왕 즉위 시점부터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이후 세종 즉위까지 다루는 사극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나 권력 투쟁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반면 치세가 거의 안정되기 시작한 세종 즉위 이후로는 치열한 권력 싸움은 나오지 않는 대신 초인에 가까웠던 세종의 치세에 집중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사극 측면에서 인기가 높은 시기는 전자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세종 즉위(1418)~태종 사망(1422) 시점인 1420년 전후 정도가 여말선초의 끝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4]

3. 인기

사극의 단골소재로 쓰이고 그 덕에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시기이다.

어느 역사에서나 기존 왕조의 망국과 새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다이나믹한 사건들의 연속이였고, 거기서 펼쳐지는 정치·사상가들의 비전과 정치적 지략싸움, 영웅들의 무용담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한다. 7세기를 관통하는 삼국통일전쟁이 그러하고, 9세기 말 10세기 초반 동안 대략 40년을 관통하는 나말여초(후삼국시대)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여말선초가 이 두 시대보다 더욱 사극화가 많이 되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사료가 풍부하다. 삼국통일전쟁이나 후삼국 시대에 비해서 여말선초를 다루고 있는 사료들이 시대적으로 훨씬 잘 보존되어 있고 풍부하다. 그래서 사극을 만들 때, 사료만 잘 버무려도 작품이 나온다.

두번째로 아이러니하지만 기록의 양에 비해 기록의 신뢰성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고려사에서 우왕~공양왕으로 이어지는 부문은 가장 왜곡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고 태조실록 역시 태종 때 만들어져서 반란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향으로 조작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말선초의 주요 에피소드, 위화도 회군, 폐가입진, 정몽주 암살이나 무인정사 모두 실제 전개된 상황과 사료가 상반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기에 재해석과 창작의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세번째 여말선초만의 특징은 바로 사상의 대립이다.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만 싸우는 게 아니라 권력을 통해 관철하려는 사상이 있다. 그래서 단순히 지배계급만 바뀌고 사회구조는 그대로였던 삼국통일전쟁과 후삼국시대와는 달리, 여말선초 뒤에는 기존의 왕-귀족-평민 구조가 붕괴하고 억지로나마 왕-백성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고 볼 건덕지는 있다.[5] 그리고 이런 면모로 인해 단순한 선악 대립이 아닌,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 및 사건의 묘사, 전개가 가능하다.

네번째, 대규모 전쟁을 묘사할 필요가 없다. 삼국통일시대와 후삼국시대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나 대규모 전쟁이 많았으며 치열한 무력 다툼을 통해 승자가 가려진 형태였다. 후삼국시대도 그렇지만 전쟁의 빈도도 여말선초보다 훨씬 잦다. 따라서 이 시기를 다룰 경우 필연적으로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한 공성전을 촬영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러면 크고 작은 전쟁이 너무 많아서 제작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를 빼고 실내 정극으로만 전개하면 실제 역사와 다르게 맥빠진 전개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위의 두 시대는 여러 전쟁들이 메인 스토리를 관통하고 있어서, 전쟁을 생략하면 극중 진행 자체가 어려워진다.[6] 반면 여말선초는 비슷한 격동의 시기였으나 무력다툼이라기 보다는 사상의 대립과 정치적 암투가 주된 시기였다. 물론 여말선초에도 큰 전쟁은 몇 번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왜구 소탕전 등이라서 중국의 수십만~백만 대군 등을 등장시켜야 하는 삼국통일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다.[7] 따라서 극중 장면 대부분을 실내에서 인물 위주로 촬영해도 문제가 없으며 전투씬이라고 해봤자 위화도 회군과 뒤이은 개경 공방전, 1차 왕자의 난 정도에만 역량을 집중해서 묘사하면 큰 문제가 없다. 사실상 2차 왕자의 난도 그렇게 비중이 높지 않으며 조사의의 난은 그 시점에 들어설 경우 대부분의 여말선초 인물들이 갈등을 마치고 태종 이방원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로 조사의의 난이 그려진 작품이 용의 눈물, 태종 이방원 같이 이방원이 주인공인 사극이었으니 말이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즐비한 것도 한몫한다. 격동기 속에서 창작물에서나 나올 법한 입체적인 인물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저마다 인물들의 면모가 복잡하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또 사료의 발굴과 해석에 따라 같은 시기 같은 인물들을 등장시켜도 이야기의 방향성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당장 이성계의 야심이 어느정도인지, 정치인과 군주로서의 리더십이 어느정도였는지에 대한 해석만으로도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확확 바뀐다. 정종 이방과는 96년작 용의 눈물에서만 해도 통념대로 아버지 이성계와 동생 이방원 사이에서 쩔쩔매는 유약남으로 그려졌으나 25년이 지나 나온 2021년작 태종 이방원에서는 칼 든 이방원을 맨손으로 제압하는 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권력에는 욕심이 없는 다면적인 면모를 훌륭히 그려내 대중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작가들에게 도전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만한 소재가 없다.

여담이지만 여말선초 4대 전설이라고 전해지는

이 넷은 매우 유명하고 오래된 이야기지만 전부 거짓말이다[10]. 이런 식으로 한국사에서 어느 정도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찾아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대가 여말선초라는 점도 극화가 많이 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4. 여말선초 당시 인물

5.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

5.1. 드라마

5.2. 영화

5.3. 소설

5.4. 만화


[1] 고려 공민왕 치세부터 조선 세종의 치세까지가 100년이 조금 안 된다. 사학가들에 따라서 전기 조선의 체계를 확립한 세조까지의 시기를 여말선초의 범위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100년이 넘어가게 된다.[2] 세종, 문종의 잇단 승하와 머지않아 터진 계유정난은 여말선초의 테마인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라는 허니문의 온전한 마침표로 여겨지며,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조선사의 헤드라인에 등장하고부터의 여러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조선 초'의 사건으로 간주되지, '여말선초'의 사건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다. 세종부터가 조선 건국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세종의 승하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배경은 '여말'이 될 수 없다.[3] 보통 여말선초를 다룬다는 사극들은 저 기간은 반드시 다루고 넘어간다. 저 10년에다가 포커스의 차이에 따라 공민왕 치세를 다룰 수도 있고 세종의 치세를 다룰 수도 있는게 대부분.[4] 실제로 태종은 여말선초에 반드시 포함되는 위화도 회군 ~ 무인정사 시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던 반면, 세종은 할아버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도 5년이 지난 후에야 태어났다.[5] 다만 조선에서 양천제를 도입한 것을 "고려의 귀족 제도를 일순간에 소멸시킨 사회의 충격적인 진보"라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고려의 신분 제도는 수백년간 변화해와서 고려 말에는 이미 조선 초와 비슷한 형태의 구조에 도달해 있었고 조선 사대부들은 그 제도를 그저 재정리한 것에 가깝다. 더욱이 양민도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받으면 양반이 되는 원칙은 확실했고 그런 사례도 조선 역사 전체로 보면 상당해도,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부를 가진 것이 기득권 양반 출신들이었기에 양반 사대부의 자식들이 양반이 되었고, 후대로 갈수록 사실상의 세습 귀족 신분으로 돌아갔다. 일례로 조선 말기에는, 그것도 소위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는 갑오개혁 이후에, 포수 출신 의병장 김백선이 양반 의병장 안승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걸 항의했다가, 평민 주제에 양반에게 칼을 뽑고 소리치며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했을 정도로 반상의 차이는 조선시대 내내 엄연히 신분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그래도 양민이 합법적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제도를 구축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6] 반면 상대적으로 전쟁 구현이 쉽고, 그게 메인인 게임 분야에서는 여말선초 배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 외적 상대는 임진왜란, 내전은 후삼국시대가 훨씬 임팩트가 크기 때문이다.[7] 간단히 말해서 여말선초의 메인 줄기는 새로운 사상과 개혁 등을 바탕으로 조선을 건국하는 이야기라면 삼국통일전쟁은 동북아의 여러 국가들이 각자 자국의 명운을 걸고 총력전으로 싸운 스토리라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전자는 정치쪽이 좀 더 중심인 사극이라면 후자는 전쟁이 메인인 것이다.[8] 정세운까지 붙으면 4원수이나 숭의전에 없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9] 정말로 고려의 충신으로서 죽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일단 조선 후기에 이방우가 고려의 충신이었다는 게 널리 알려지고 지금까지 여러 사극에서 차용되는 설정이지만 아직 학계의 정설은 없다.[10] 다만, 함흥차사 이야기는 아예 거짓말이라 하긴 뭣하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차사들을 파견한 시기가 하필 조사의의 난 시기라서, 차사들 대부분이 부자관계를 이간질할 목적으로 중도에 의문사하거나 강제로 되돌려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사의의 난 자체가 명목상의 주모자인 조사의바지사장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이성계가 직접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성계 본인이 휘하 병력들을 시켜서 차사들을 돌려보내놓고는 이방원에게 '아들이란 놈이 문안인사를 드릴 차사 한 명 안 보낸다'며 오리발을 내밀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전설과도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