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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대한민국 국보 제18호 |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수량/시설 | 1동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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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몇 안 남은 고려 시대의 건축물로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서로 누가 더 오래되었나로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데, 무량수전이 언제 건립됐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중수 기록을 통해 추정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1]가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전통 건물은 보통 짓고 나서 100~150년 뒤에 수리하기 때문에 건립시기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이를 것으로 본다. 봉정사 극락전은 1363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조금 더 오래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만 하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서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2]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1962년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2.1. 상세
무량수전 | 무량수전 현판 |
부석사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목조건물로 단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현판의 서체 유형은 안진경체(顔眞卿體)로 공민왕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1361년 2차 홍건적의 침공 당시 공민왕은 순흥(영주), 안동까지 몽진했는데 그때 몇 점의 글씨들을 남겼고 그 중 하나가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이라는 것이다. 현판의 글씨를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 얘기의 근거는 현판 뒷면에 있는 글씨 때문인데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無量壽殿懸板裏書]
1690년에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와 낭원군(郞原君) 이간(李偘) 형제[4]가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태백산 사고(각화사)에 봉안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 중간에 있는 부석사에 들려 무량수전의 현판을 보고 이 글씨가 공민왕이 쓴 것이라고 일종의 인증을 하고 간 것이다. 당대의 명필로 유명했던 낭선군 이우는 1668년에는 진흥왕 순수비부터 당시까지 전해지던 갖가지 금석문의 탁본과 기록을 모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펴낼 정도로 서예에 진심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이 글씨를 공민왕이 썼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글씨의 유래를 알게 된 후 부석사의 스님 영필(瑛珌)이 현판의 테두리를 화려하게 만들어 더했다. 아주 오래 된 현판인 만큼 지금은 검은색의 바탕은 많이 벗겨졌고 원래 금칠을 했던 글씨는 금칠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 거의 탈락한 상태이다. 현판에 글씨를 쓴 사람의 낙관이 없으나 원래 왕의 글씨에는 낙관이 없는 것이 관례이고 대신 금칠을 한 것으로 보아 이 글씨를 공민왕이 썼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무량수전은 조선 시대 건물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눈에 띄는데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되어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 종이를 붙이기는 매우 사치스러웠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무량수전의 창호는 그 당시로서는 꽤 최신 유행을 따른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다.[5] 조선시대가 된 뒤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 생산되면서 일반 가정에도 창호가 보급되었고, 절의 창호에도 각종 장식이 붙었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 창호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좌우 양쪽의 창호는 창문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열리고, 가운데 두 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 가지는,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綠釉塼)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건축물들처럼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건축에도 반영됐다는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의 이유로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특히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기 때문에 새로 나무 바닥을 깐 것이다. 현재 부석사의 성보박물관(유물관)에 원래 무량수전 바닥에 깔려있던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난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었다는 구절을 형상한 것이다.
주심포 양식이란 점을 포함하여, 유난히 장식적인 부분이 적기 때문에 수수하면서도 가라앉은 느낌을 띠는 건물이다. 옛날에는 단청이나 녹유전으로 만든 화려한 바닥돌을 깔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어떤 까닭으로 인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현란한 단청을 싫어하는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한국 전통 건축물 중 한 가지 전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석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누하진입(樓下進入) '이다. 이는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무량수전 내부에는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법당과 불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은 불단을 서쪽에 치우치게 두고 불상은 동쪽을 바라보게 배치해두었다. 또한 바닥에 상술했던 녹유전을 깔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아미타여래가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으며 극락세계의 바닥은 유리라는 내용을 반영했다.
단, 이 불상이 아미타여래인지 아닌지에는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가 주존불로 봉안되는 법당인데, 이 불상의 수인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불상은 조성 양식을 봤을 때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불상이 무량수전보다 대략 200년 정도 연대가 앞서게 되는 것이라 선후관계에 있어 무량수전의 본존불을 반드시 '아미타여래'라고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6]
다만 그럼에도 이 불상이 무량수전에 있다는 점과 내부 배치 구조, 그리고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7]에 그가 아미타여래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아미타여래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아미타여래가 왜 석가모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쟁점인데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나말여초)에는 석굴암의 본존불을 모방한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 불상 역시 그런 당시의 흐름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 불상의 특이한 점 때문에 학계에 논란이 있자, 교과서에서는 쿨하게 '아미타'라는 접두사를 빼버렸다.
이와 관련해 지금은 무량수전이 부석사의 금당(절의 중심건물) 역할을 하지만 축조 당시에는 부석사의 강당[8]이었으리란 의견이 있다. 절의 중심부가 아닌 절의 끝부분에 있거니와, 불상이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특이한 점 때문에, 아마도 과거에는 금당이 아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중에 금당으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선묘 낭자가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마당에 묻혀있다는 설화를 검증하고자 1967년에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석등 밑에서부터 무량수전의 불상 아래까지 용의 꼬리 같은 형상을 한 긴 돌(암맥)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발견 당시 이 돌은 윗부분이 깨진 채였는데, 부석사의 정기를 끊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가 끊었다고도 하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끊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의 기운을 꺾어버리고자 조선의 산천에 풍수적 수작질을 부렸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01년에 역사스페셜에서 앞마당 전체와 무량수전 불상 아래까지 레이더로 탐사하여 12~13 m 남짓한, 용의 등 줄기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땅 밑에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2.2. 여담
최순우의 유명 대중미술 서적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덕분에, 무량수전에 배흘림기둥이 있다는 것은 유명하다. 배흘림기둥을 포함한 무량수전의 각 부분요소들은 전체적인 시각적 균형을 고려해서 실제 형태가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 건축에만 남은 것으로 한중일 삼국 중에서는 한국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전 세계에서 한국만의 유일한 양식은 아니다.[9] 궁금하면 배흘림기둥 문서 참조. 특히 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을 배흘림 기둥으로 만든 이유는 일자로 생긴 기둥을 멀리서 보았을 때 안쪽으로 굽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방지하여 건물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라고 한다.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부석사 무량수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한국건축사: 부석사 무량수전
- 두산백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4. 국보 제18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1] 1307~1385[2] 고려 충렬왕 34년(1308)[無量壽殿懸板裏書] 粤在新羅儀鳳元年創建浮石寺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當此庚午之時國族郞宣君到于浮石寺題于符板之意命其書鎭云到于辛未孟夏間寺晝僧瑛珌慨然傾心四雲角改造也 / 신라 의봉 원년(676년)에 부석사를 처음 지었고, 금당(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직접 쓴 글씨이다. 경오년(1690년)에 왕족인 낭선군이 부석사에 와서 이 현판을 다시 걸고자 하였으며, 신미년(1691년) 여름에 절의 화승 영필이 마음을 다하여 현판 테두리를 새로 만들었다.[4] 인흥군(1604)의 아들들[5] 창호 살이 십자로만 엮이는데 형태가 단아하다.[6] 불상과 법당의 구성이 맞지 않는 경우는 의외로 꽤 있다.[7] 964∼1053, 부석사에 1041년에 들어와 1053년에 입적.[8] 설법과 교육의 용도로 사용하는 건물[9] 고대 그리스의 건축에서도 나타나는 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