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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6:38:37

정림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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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Five-story Stone Pagoda at Jeongnimsa Temple Site\, Buyeo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시대 백제시대 후기 7세기
소유단체 국유
관리단체 부여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충청남도 부여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976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ii)[2] }}}
파일:부여_정림사지_오층석탑_우측면_(촬영년도___2015년) 문화재청.jpg
<colbgcolor=#008080>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 개요2. 상세
2.1. 정말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의 양식인가?
2.1.1. 석탑이 절과 함께 축조되었을 경우2.1.2. 원래 목탑이 있었지만 석탑으로 교체되었을 경우2.1.3. 결론
3. 명문4. 외부 링크5. 국보 제9호6. 창작물에서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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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캡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백제 후기 수도 사비의 중심에 있었던 사찰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탑.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 상세

파일: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_정면 (촬영년도 : 2015년).jpg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700여 년의 유구한 백제 역사에 비하면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문화유산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조각이나 공예품에 비하여 건축 자료는 극히 적은데[3] 그럼에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 건축의 모든 것을 대변하려는 듯 지금까지 제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있다.[4]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러한 희소성 외에도 석탑인데도 목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독특한 양식, 그리고 660년 백제멸망전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백제를 7월 18일 멸망시킨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8월 15일에 정복 기념으로 새긴 비문이 이 탑의 탑신에 남아있어 희소성으로나, 형식상으로나, 역사적 이벤트상으로나 모두 나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단골소재다.[5]

백제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은 금당 앞뜰에 거대한 목탑을 두는 가람배치였다. 이 경우 목탑이 차지하는 평면 너비 때문에 금당 앞뜰의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사찰 안에 목탑과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나 평면 구조면에서 목탑이 위치하는 공간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에 반해 정림사는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부여 군수리 사지의 경우 탑 평면이 금당 앞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은 1:12인 데에 반해 정림사의 경우는 1:100으로 금당 앞뜰이 그만큼 넓어져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이는 백제 사찰 가운데 정림사가 유일하다. 목탑가람이 갖는 공간적인 협소함을 석탑가람으로 변모시켜 공간을 확보한 점에서 일대 변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인은 미륵사에서 시작된 석탑을 완벽한 단탑(單塔)가람으로 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간적인 장점으로 변모·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금당 앞뜰을 대각선으로 연결하였을 때 정(正) 중앙에 탑을 위치시켜 넓은 공간에서도 탑이 공간과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장악하도록 하는 건축 기법을 사용했다.

2.1. 정말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의 양식인가?

대부분의 학계에서는 정림사를 왕흥사와 비슷한 6세기경, 즉 무왕이 익산을 개발하기 이전에 창건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같은 특수한 사정이 있는게 아닌 이상에야 절만 지어놓고 탑만 나중에 따로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시 말해 탑과 절이 동시기에 지어졌다는 가정이 맞다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히려 미륵사지 석탑보다 더 이전의 양식이 된다는, 기존 학계가 주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2.1.1. 석탑이 절과 함께 축조되었을 경우

이 설이 맞다면 정말 기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의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사실을 전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설이 맞다면 백제 초창기의 석탑양식은 오히려 미륵사 석탑의 양식이 아닌 정림사 석탑이나 왕궁리 유적에 있는 석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된다.

2.1.2. 원래 목탑이 있었지만 석탑으로 교체되었을 경우

사실 사비시대 백제의 절들은 통상적으로 볼 때 가람에 거의 무조건 석탑이 아닌 목탑을 축조했다. 따라서 사비시대 한창 중에 건립된 사찰인 정림사 혼자만 석탑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래부터 석탑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한다. 우선 정림사는 금당과 중문 사이의 공간이 지나치게 넓다. 이러한 중문과 금당 사이의 공간은 비슷한 가람배치를 지닌 왕흥사와 제석사처럼 목탑을 세워야 제대로 된 공간활용이 가능해지는 수준이다. 따라서 모종의 이유로 목탑이 소실되어 목탑 대신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면 현재의 통설처럼 정림사지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의 양식일 가능성이 커진다.

2.1.3. 결론

사실 이러한 논란은 석탑을 해체하고 석탑 아래쪽의 지표조사를 하면 해결될 일이다. 석탑을 해체하면 내부에 사리기가 존재할테고 사리기에는 탑 혹은 절이 축조된 시기와 사리를 언제 봉안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또한 지표조사를 통해 원래 이 자리에 석탑이 아닌 목탑이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석탑이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정림사지 석탑을 해체하거나 따로 발굴조사할 계획은 없는 듯하다.

3. 명문

파일:정림사지 대당평일백제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jpg
<colbgcolor=#315288> 대당평백제국비명

이 탑이 평제탑, 평제비라 불리는 이유는 탑의 초층 탑신 전체 면(4면)에 소정방이 전승기공문을 새겼기 때문이다. 명문의 정확한 이름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며 전체적인 형식은 1면 24행, 2면 29행, 3면 28행, 4면 36행으로 총 117행에 각 행은 16, 18자로 이루어져 총 2126자나 된다. 제작 연도와 제작자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록해두었는데 현경 5년(660년, 고구려 보장왕 19년, 신라 무열왕 7년) 8월 15일,[6] 당나라의 권회소(權懷素)가 글을 썼다.

내용은 당나라가 백제 정벌에 나선 이유, 출정한 당군의 편성, 정벌에 참여한 장수들의 공적과 그 칭송, 황제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사비성을 함락시켜 의자왕, 태자 부여융, 왕자 부여효 외 13명과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등 7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내용 등을 기록했다. 또한 백제를 접수한 후 행정 구역 정리를 한 내용도 있는데 5도독부,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 인구 620만을 편호로 정리하고 오랑캐(백제)의 풍속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번역 전문은 이곳을 참조. #

왜 굳이 불탑에다가 이런 글을 새겼냐면 의자왕을 붙잡은 것이 660년 7월 18일이고 이 명문을 새긴 것이 8월 15일, 당군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한 것이 9월 3일이었다. 비석을 새로 만들 큰 돌을 캐서 연마하고 글씨를 새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백제의 수도 사비 시가지 한복판에 이미 크게 서 있고 여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이 탑에 글씨만 새긴 것이다. 실제로 명문을 보면 처음엔 글씨체가 반듯하다가 뒤로 갈수록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명문 글씨에 붉은색 물감칠을 했지만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물감이 바래서 붉은색은 아주 미세하게만 남아 있다.

정약용청양의 관리로 부임했을 때 가까운 부여에 탐방을 갔다가 이 비문을 보고 그 내용을 깐 시를 남기기도 했다.

4. 외부 링크

5.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6. 창작물에서

7. 여담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백제시대 건축물 중 무덤 빼고 남아 있는 것은 석탑 뿐이며 석탑에서도 온전하거나 형체가 있는 건 3기(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및 왕궁리 오층석탑 뿐이다.#[4] 한국 고대, 중세 건축물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석재는 주로 화강암질이라 가공이 매우 힘들어 전근대에는 목재 건축이 주류였고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거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돌이나 흙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산성(고대 유적의 대다수를 점한다)이나 성곽, 고분, 건물의 기단부 유적 위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5] 비교적 가까운 역사이고, 한국 문화권의 통일국가라서 당연히 해당 시대의 한국사를 대표할 수밖에 없던 조선이 당한 굴욕이 새겨진 삼전도비에 비해, 아무래도 워낙 먼 역사인데다가, 백제는 한국 문화권 내에서 고구려, 신라와 함께 동시대에 분립하여 병존하던 왕조라, 아무래도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는 굴욕 내지는 국치(國恥)로서 체감이 덜 된다. (신라인 입장에서는 이 백제 정복 기념 문구가 반갑기도 할 것이니 만큼)[6] 현경오년세재경신팔월기사삭십오일계미건(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 탁본 우측 하단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