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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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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작된 자격루
2.1. 세종 당시 제작된 물시계2.2.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2.2.1. 기타2.2.2. 외부 링크2.2.3. 국보 제229호
3. 등장 매체

1. 개요

자격루(自擊漏)는 물시계의 일종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준다.

대한민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물시계 관련 기록은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누각전이라는 물시계를 관장하는 관아에 대한 기록이 있다.[1] 하지만 역사 시험에서 나오는(...) 문제에서는 주로 태조 7년(1398)에 제작된 경루(更漏). 이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해서 종을 쳐서 밤 시간을 알렸다.[2]

하지만 세종 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3]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항상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이것을 지켜보고 알려야 했으며 이 때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 세종이 장영실, 김조 등에게 지시하여 2년간 노력한 끝에 세종 16년(1434) 6월에 완성,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했다. 물을 끌어올리는 기관뿐 아니라 알아서 시간이 되면 인형이 움직이고 북이 울리는 구조라,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동 시보장치였다.

그해 7월 1일을 기해, 조선 왕조의 표준시계로 사용되었으나 자격루가 제작된 지 21년 만인 단종 3년(1455) 2월에 자동시보장치 사용을 중지했다. 장영실이 세상을 떠나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없었음이 주된 원인이었던 듯하다.[4] 그 후 14년 만인 예종 1년(1469) 10월에 다시 가동했다. 이후 연산군 11년(1505)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에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 후 중종대에 이르러 자격 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년 만인 중종 29년(1534)에 새 자격루를 만드는 작업이 착수되어 중종 31년(1536)에 장인 박세룡(朴世龍)이 완성했다. 그후 궁궐의 누국에서 관리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개보수가 되었으나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고는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단 1개밖에 없다.

수압을 조절하기 위한 물통 4개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실린더를 넣은 물통 2개를 두어 오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추가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이용하여 보정하였다.

2. 제작된 자격루

2.1. 세종 당시 제작된 물시계


세종실록에 기록된 자격루의 모습이다. 세종실록 7월 1일기사
파수호(播水壺·물통)는 4개인데 크고 작기가 차이가 있다. 수수호(受水壺·물받이통)은 2개로 물을 갈 때에 번갈아 가며 쓰는데 길이가 11척 2촌, 둘레의 지름이 1척 8촌이다. 살은 2개인데 길이가 10척 2촌이다. 그리고 면은 12시로 나누고 시마다 팔각으로 나누었는데 초정여분(初正餘分)은 합해 100각이 되며 각은 12분으로 만들었다. 밤에 쓰는 살은 전에는 24개였는데 갈아 쓰기가 번거로워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하여 주야분(晝夜分)의 오르고 내리는 비율을 2개의 절기로 묶어 한 살에 해당하게 함으로써 모두 12개의 살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맡은 목인(木人)을 만들어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도록 하였다.

그 구조법은 집 3동을 짓고 동쪽 칸에 2층으로 자리를 만들어 위층에 삼신(三神)을 세웠는데, 하나는 점명고(點鳴鼓)를 맡는다. 중층의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고 바퀴 둘레에 12신(十二神)을 배치하였는데 각각 철사로 줄기를 만들어서 상하로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신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패(時牌)를 잡고 있어서 서로 번갈아 시간을 알린다. (중략)파수호로부터 새어 나오는 물이 수수호로 흘러 들어가면 떠 있는 살대가 점차로 떠오른다.

시각에 따라 왼쪽 구리판 구멍의 장치를 튕기면 그 장치가 열리면서 큰 구슬이 떨어진다. 그것이 굴러서 자리 아래에 걸린 짧은 통으로 굴러 들어가는데 이것이 떨어지면서 장치의 숟가락을 움직이게 하면, 이 장치의 다른 끝이 통 속에서 올라와 시(時)를 맡은 신(神)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한다. (중략) 모든 기계는 모두 속에 감추어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보이는 것은 관(冠)과 대(帶)를 갖춘 목인(木人)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항아리에 물이차서 흘러내리면 살대가 점점 떠오르고 그게 구슬들을 움직이게 해서 그 구슬이 인형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밤중 3경(三更)[5]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면, 그 소리를 들은 경복궁 정문의 문지기들은 다시 문루 위에 있던 북을 세 번 쳤다. 그리고 그 소리가 종각의 북 치는 사람 귀에 들어가 다시 종각에 북을 세 번 울려주어 서울 시내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격루의 물받이통은 두 개가 있다. (이하 편의상 두 물받이통을 '수수호A'와 '수수호B'로 설명) 이 두 물받이통은 평소에는 하나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수수호A를 사용하고 나면 수수호A의 물이 다 차서 물을 빼고 새로 넣고 다시 구슬 세팅하는 데 당연히 시간이 걸리므로 수수호A의 물이 다 차면 즉시 미리 구슬을 세팅해 놓은 수수호B로 물관을 옮긴다. 그리고 구슬을 회수한 후 수수호A의 물을 빼 놓고 다시 수수호A의 구슬을 세팅한다. 즉, 수수호A의 물을 빼고 구슬을 다시 세팅하는 시간 동안에 수수호B가 작동하므로 물받이통 교체에 따른 시간 지연을 없애 정밀한 시간 측정을 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날은 다시 세팅된 수수호A로 물관을 옮긴 다음 수수호B의 물을 빼고 다시 구슬을 세팅하는 식으로 매일 번갈아가면서 물을 빼고 구슬을 세팅한다.

장영실과 김조가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장영실은 자격루를 제작해낸 공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호군으로 신분 격상되었다.

파일:attachment/자격루/42.jpg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파일:external/pds22.egloos.com/f0018015_4eb4c9f860ffc.jpg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제 크기의 복원품을 볼 수 있었으나 2022년 과학문화실개편으로 철거되었다.

이 자격루를 구성하는 부품 중 핵심 부품이라 할 수 있는 '주전(籌箭)'은 그동안 유물이 남아있지 않았으며 실록에 글로만 묘사되었기 때문에 복원품도 이 실록 기록에 따라서만 만들 수 밖에 없었는데, 2021년 6월 29일에 이 주전 부품과 더불어 한글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총통 화포가 발굴되면서# 더 원작에 가까운 자격루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2.2.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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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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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29호
창경궁 자격루 누기
昌慶宮 自擊漏 漏器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분류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85년 8월 9일
제작시기 조선 중종 31년(1536)

파일:external/www.seoultimes.net/12035_9704_1027.jpg
호(漏壺)의 법에는 파수호가 세 개 있는데 그 크기가 각각 다르다. 가장 큰 것은 허리둘레가 12척이니 즉 옛 야천지(夜天池)이고 그 다음 것은 옛 일천지(日天池)이고 가장 작은 항아리가 옛 평호(平壺)이다. 수수통(受水筒)이 두 개 있는데 지름이 모두 1척 2촌이고 높이가 모두 6척 8촌으로 밤과 낮에 번갈아 쓰며 이것이 옛 만수호(萬水壺)이다.
전이 24개 있는데 24기(氣)에 준하고 길이는 각각 6척 2촌이다. 수시력(授時曆)의 옛 법은 낮과 밤을 100각으로 하였으나 지금의 시헌신법(時憲新法)의 전분(箭分)은 9육각, 각 분(刻分)을 15분으로 하여 모두 12시로 하고 한 시를 팔각으로 하였다. 얇은 구리판을 붙여서 부구(浮龜)를 만들어 크기를 수수통의 속둘레와 같게 하였는데 등에는 장방형(長方形)의 구멍이 있으며 전을 이 구멍에 꽂아 놓고 거북을 통 속에 넣었다. 통 속에 물이 고이면 거북이 뜨고 거북이 뜨면 전이 올라온다.
- 국조력상고(國朝曆象考)

세종 때 제작된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가 수명이 다해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중종 29년(1534)에 박세룡에게 제작을 명하여 2년 만인 중종 31년(1536년)에 완성된 것이 창경궁 자격루이다.

제일 큰 그릇에는 제작시기를[6], 누기(기둥모양의 그릇) 두 개에는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아래와 같은 명문으로 새겼다.
都提調
領議政 金謹忠
右議政 金安老
提調
右贊成 柳溥
工曹參判 崔世鄭
都廳
右通禮 朴翰
司僕寺正 李公檣[7]
司憲府執義 安玹[8]
掌 金遂性[9]
監造官[10]
掌樂院主簿 蔡無敵[11]
天文學敎授 辛輔商
昭格署參奉 姜永世
天文隸習官 印光弼[12]
이 자격루는 보루각 자격루(報漏閣自擊漏)라고 불린다. 보루각 자격루 또는 창경궁 자격루는 1985년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훼손될때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져 신기전, 흥천사명 동종과 함께 전시되었다가 2018년 보존작업을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2020년 보존작업이 끝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전시 중이다.

2.2.1. 기타

특이하게 51년마다 개보수가 이루어졌다.(명종 5년(1550) → 선조 34년(1601) → 효종 3년(1652))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18년 보존작업에 들어가 2020년에 완료되었다. 이번 보존작업을 통해 항아리에 새겨진 제작자들의 이름들이 오독된 부분을 전부 바르게 확인했고,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용 문양이 밀랍을 이용한 wax casting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했다. 앞으로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

2.2.2. 외부 링크

2.2.3. 국보 제229호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3. 등장 매체


[1] 세계 역사가 아님을 유의할 것. 그리스중국은 이미 기원전에 자동물시계를 사용했다. 참고로 14세기 즈음 유럽에서는 자동시계가 발명되었다. 프라하 천문시계가 1410년(15세기) 작품이다.[2] 이 종을 치던 종루(鐘樓)가 있던 곳이 바로 종로이다.[3]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으로 했는데 각 경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긴 겨울의 밤에 있어서 각 경과 짧은 여름밤의 각 경의 시간 길이가 달랐다. 이를 부정시법이라고 한다.[4] 1454년 10월에 같이 제작에 참여했던 김실이 세상을 떠나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장영실의 생몰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문제의 가마 사건이 1442년이고 이후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14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설계도라도 있었다면 그걸 보고서라도 어찌어찌 돌아가게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5] 밤 11:00~새벽 01:00[6] 가정병신유월일조(嘉靖丙申六月日造)[7]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李雲穡으로 오독되었다.[8]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安法□으로 오독되었다.[9]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金逐里으로 오독되었다.[10]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都造官으로 오독되었다.[11]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이름 2자를 판독하지 못해 蔡□□으로만 알려졌다.[12] 이상 명문 수정내용은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