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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6진 개척 (북방개척) 四郡六鎭開拓(北方開拓)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 4군 6진 개척 지도 | ||
시기 | 1434년 (세종 16년) ~ 1443년 (세종 25년)[1] | |
장소 | 압록강 상류 | |
두만강 유역 | ||
원인 | 세종의 고토 수복 이념 및 북방 영토 확장 의지 | |
교전국 | 조선 (공세) 승 | 여진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틀:깃발| ]][[틀:깃발| ]][[최윤덕| ]] (도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이순몽| ]] (중군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최해산 (좌군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각 (우군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징석 (조전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김효성 (도전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홍사석 (여연절제사) [[틀:깃발| ]][[틀:깃발| ]][[김종서(조선)| ]] [[틀:깃발| ]][[틀:깃발| ]][[이징옥| ]] [[틀:깃발| ]][[틀:깃발| ]][[황보인| ]] | 지휘관 [[여진족| 女眞 ]] 이만주 |
전력 | 조선군: 15,022명 | 규모 불명 |
피해 | 규모 불명 | 사상자: 259명 - 전사자: 229명 - 부상자: 30명 포로: 226명 |
결과 | 조선의 승리 | |
영향 | 조선의 압록강(4군)-두만강 국경지대(6진) 및 변경 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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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촌토(尺地寸土)[2]라도 버릴 수 없다.
세종의 발언,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년) 8월 6일 계해 3번째 기사[3]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촌토(尺地寸土)[2]라도 버릴 수 없다.
세종의 발언,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년) 8월 6일 계해 3번째 기사[3]
조선 세종 시기에 시행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
4군 6진 개척은 일종의 내전 성격이 있는 6.25 전쟁 때를 제외하면 한민족 최후의 정복전쟁이며, 이때 이후로 한국은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았다[4].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태종 시절 4군 중 하나인 여연군이 설치되어 있었고, 6진 지역은 태조 시절에 정도전이 경원에 성을 쌓는 등 조선의 땅으로 분명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세종대왕은 이 지역에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했고, 그 지방의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했다. 이후 고종 때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개편한 후 청나라가 의화단 운동으로 서구열강과 전쟁으로 혼란해 중앙권력이 만주에 안 닿는 틈을 타 두만강 북쪽 한국인들이 사는 땅에 관리와 군사를 파견해 지배력 행사를 시도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혼란기에 대부분의 방어진지가 무너져 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게 국권이 피탈당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2. 구성 지역
3. 개척 이전 역사
3.1. 후삼국시대~고려
926년 발해의 멸망 후 함경북도, 평안북도 전 지역, 그 외 함경남도, 평안남도 일부 지역이 한국계 국가의 지배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886년(헌강왕조) 기사에 따르면 신라와 발해 사이에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이란 나라가 있고 이들이 신라와 외교를 시도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함경도 지역은 기록이 부족해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을 뿐, 이미 발해 멸망 수십 년 전부터 신라의 후삼국시대마냥 사실상 발해 중앙정부의 제어를 벗어나 있던 것으로 보인다.[5]이후 고려 대에 수복하는 평안남도, 평안북도(서북면)와 함경남도(동북면)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특정 국가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야인들의 영토가 된다. 물론 발해 멸망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 및 한족이 세운 명나라까지도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 및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지배력이 미비하여 제대로 된 관리가 없는 토착 주민들만 사는 지역이었으나, 여말선초 시기의 북방 경략 이후 조선으로의 동화 정책이 빠르게 이루어짐에 따라 비로소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추진,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일부 지역을 수복했다. 이후 고려 성종 13년(994년)에는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6주(江東六州)를 설치함으로써 마침내 한반도 국가의 서북 경계 끝이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예종 시기(1108년) 윤관의 고려군이 천리장성을 넘어 함경북도 지역에 동북 9성을 개척해보려 시도했지만 여진족의 반발로 1년만에 반환해야 했고, 이후 260여 년 간 고려의 영토는 천리장성 이남으로 완전히 확정된다.
그러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 이르러 평안북도 일부 지역(북한이 변경한 행정지역이 아니라 조선~대한민국기준)을 회복하는데, 공민왕 10년(1361년) 압록강 하류 지역인 창성(昌城)·벽동(碧潼)·강계(江界)에 진출하여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두었다. 또한 원 간섭기 시절 몽골에게 빼앗긴 함경남도 지역을 되찾는 데에도 성공했다.
원래 화주(和州,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 이북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流移民)과 여진인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는데, 여몽전쟁 시기인 1258년(고종 45년)에 이 지역의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 사람 탁청(卓靑)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했다. 이후 몽고는 여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세우고 조휘를 총관(摠管),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고, 조휘와 탁청의 일족들이 총관과 천호를 세습하면서 이 지역을 다스렸다. 공민왕 5년(1356년)에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철령(鐵嶺)[6]을 넘어 이 지역을 공격했고, 당시 총관이었던 조소생의 숙부인 조돈(趙暾)과 해당 지역의 토착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하면서 100여 년 간 잃어버렸던 함경남도를 되찾게 되었다.[7]
이후 홍건적이 서북 지역을 침입해와 평안도가 뚫려 개경이 함락되었고 공민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으로 파천했지만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최영(崔瑩), 이성계 등의 명장들의 활약으로 회복했고,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군사를 이끌고 동북면 쌍성(永興, 영흥)에 쳐들어오지만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함흥 평야의 대회전(大會戰)을 벌인 끝에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로서 해당 지역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함경남도 일부 지역도 회복되는데 당시 고려 변방의 방위를 맡고 있던 이성계(李成桂)가 여진족·달달(達達)[8]·요심(遼瀋)[9] 등과 인접한 요해지로써 자주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는 아오(我吾)·읍초(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 등 변경에 대한 방위 대책을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3년(1391년)에 이성계에 의해 갑산군 지역이 회복되어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설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북부 지역 대부분은 500년 가까이 야인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고려를 이은 조선은 다시 고토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2. 조선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 성종 대 서희의 강동 6주 개척 이후 근 4백여 년 간 큰 소득이 없던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개척이 크게 진척되었다. 태조 2년(1393년) 동북면안무사(東北面安撫使) 이지란(李之蘭)이 갑주만호부 지역에 대규모 축성(築城)을 했고, 태조 7년(1398년)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으로 보내 주·부·군·현의 지계를 정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의 중심지인 공주(孔州)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부를 설치, 경원(慶源)이라 이름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동북방 영역은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렀으며, 이후 태조는 경원부를 '흥왕(興王)의 땅'이라 하여 동북면 경영의 본거지로 삼았다.태종 3년(1401년)에 강계만호부를 발전시켜 강계부(江界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년)에 경원부를 중심으로 여진족들의 내습이 잦아지자 잠시 부(府)를 폐지하고, 길주(吉州) 도안무찰리사(都安撫擦理使) 조연(趙涓)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하여 적장 파아손(巴兒孫)을 쳐 두만강 건너 적의 본거지까지 점거한 후, 1417년 경원부를 경원도호부로 하여 다시 설치했다. 하지만 원래 치소인 공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경성부(鏡城府) 산하의 부거(富居)[10]에 설치했다.
1413년에 갑주만호부 또한 갑산군(甲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416년에는 갑산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해 현 중강진(中江鎭) 일대에 여연군을 설치했고, 1417년에는 이를 함길도(咸吉道)로부터 평안도에 이관하는 동시에 거리가 가까운 강계도호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남안(南岸)이 모두 조선의 영역이 되었다. 북방 군사 체계도 강화하여 익군체제(翼軍體制)를 정비했다.
세종 3년(1421년) 최윤덕이 군사적 목적으로 북방 지역의 소현(小縣)들을 혁파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모든 지역을 몇 개의 도, 즉 군익도에 분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로서 서북면에 연대적인 방어 체제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 일대에 여전히 여진족의 내습이 그치지 않자 세종 7(1425년) 대에 경원도호부를 경성 남쪽의 용성(龍城)[11]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조정에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는 의지 아래 적극적인 북진을 추진하게 된다.
세종 14년(1432년), 경원도호부의 서쪽, 야인들의 주요 통로였던 석막(石幕)[12]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했다. 영북진의 설치는 북방 영토 개척에 있어서의 세종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로부터 1년 뒤인 1433년부터 본격적인 4군 6진 개척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북방 개척은 여러 모로 고려의 북방 개척을 참조하면서, 그리고 그 반면교사로써 실행되었다. 세종은 과거 동북 9성의 공험진에 윤관이 세웠던 고려지경이라고 쓴 비석을 찾게 했으며, 동북 9성이 실패한 이유가 산을 방어선으로 삼은 데에 있었던 점을 감안해 산이 아니라 강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방침으로 갔다.[13]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4군과 6진을 설치한다는 것은 하천이라는 자연 경계를 중심으로 여진족 방어를 행하고 국경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고려의 동북 9성보다 진일보한 북방 개척 방침이기도 했다.
과거에 고구려와 발해의 국경에 천리장성이 있고 요하강이 있는 곳에 쌓았다는 점. 송화강쪽에는 장성을 쌓지 않았다. 요하강과 송화강 사이에 강이 없는데 결정적으로 여기 때문에 발해가 함락되었다. 북만주나 요동쪽의 경우는 평야 비율이 많다.# 국경을 보면 4군 6진과 비슷한 점도 있다.
4. 개척 목적
험준한 산악지역이라 통제가 어려운 개마고원 일대의 야인(주로 여진족)들의 위협을 제거, 굴복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함께 조선 남방, 북방의 경계 지역을 안정시켰다.5. 개척 과정
5.1. 4군 개척
세종 14년(1432년), 건주위(建州衛) 추장 이만주(李滿住)가 여연군을 침공하자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에, 김효성을 도진무(都鎭撫)에 임명하여 15,000명의 병력으로[14] 이만주의 여진군을 격파하게 했다. 이만주를 정벌한 후 최윤덕은 세종에게 '이 지역은 강계나 여연과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방비에 어렵다'는 장계를 올리니 세종은 두 군의 중간지점에 새로 군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세종 15년(1433년) 여연군과 강계부의 중간지점인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아 이를 자성군(慈城郡)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종 18년(1436년)에는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의 상무로보(上無路堡)에 만호를 두었다.자성군의 설치로 강계와 여연 사이의 연결이 확보되었으나 이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 19년(1437년), 세종은 평안도도절제사 이천에게 압록강 너머의 여진족을 정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천은 오미부(吾彌部)와 오녀산성 등 압록강 너머의 여진족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여진족 소탕을 성공적으로 끝내자 세종 22년(1440년) 상무로보 일대에 무창현(茂昌縣)을 신설한 후 1442년 무창군(茂昌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년)에는 여연군과 자성군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했다. 세종은 기존에 있었던 여연군과 새로 설치한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총 4군을 강계부 소속으로 두었다.
그러나 4군과 갑산군 사이의 압록강 상류 지역은 방어 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여전히 여진이 침입했다. 이에 세종 23년(1441년) 무창과 갑산의 중간 지점에 삼수보(三水保)를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년) 삼수보를 삼수군(三水郡)으로 승격시켜 무창과 갑산의 연결을 확보하고 압록강 남안의 전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5.2. 6진 개척
세종 15년(1433년), 두만강 남안의 와무허 지역에 정착 중이던 오돌리족이 경쟁 부족인 우데게족의 기습을 받아 족장인 건주좌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가 사망하고 잔존부족은 두만강 너머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기회를 틈타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해 본격적인 6진 개척을 시작했다.세종 16년(1434년),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15]로 이동시키고 부거에 있던 경원도호부를 옛 치소인 공주 근처의 회질가(會叱家)[16]로 이동시킨 후 그 자리에는 부거현(富居縣)을 설치했다. 또한 두만강 남안의 요충지인 와무허 지역에 진을 새로 설치하고 이를 회령진(會寧鎭)이라고 하고 그 해 가을에 회령진을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듬해인 세종 17년(1435년), 영북진에 군을 설치하여 종성군(鍾城郡)으로 개칭하여 영북진 절제사로 하여금 종성군 지군사를 겸하게 했고 또한 경원부의 옛 치소였던 공주를 경원부에서 분리시켜 새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하여 세종 19년(1437년)에 공성현을 경흥군(慶興郡)으로 개칭했다.
세종 22년(1440년), 종성군의 치소가 두만강에서 멀어 여진족의 침입을 감시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치소를 백안수소에서 수주(愁州)[17]로 이동시켰다. 또한 경원과 종성 사이에 위치한 다온평(多溫平)에 온성부를 새로 설치하여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년)에 종성부와 온성부를 각각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세종 25년(1443년)에는 경흥군을 경흥도호부로 승격시키고 6진 개척과 동시에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종 24년(1442년)부터 건설되어 두만강을 따라 회령부터 경흥까지 이어지는 장성을 완공했다.
마지막으로 세종 31년(1449년), 부거현을 폐지하고 부거의 백성들을 석막으로 이주시킨 후 석막의 옛 경원도호부 터를 치소로 하는 부령(富寧)도호부를 설치하여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으로 이어지는 6진의 구축을 마무리했다.
6. 개척 이후
4군의 경우 4군 설치 이후에도 여진족이 계속 대규모로 침입해오면서 철폐가 논의되어 단종 3년(1455)에 여연, 무창, 우예가 폐군, 세조 5년(1459) 자성이 폐군되었다. 주민들은 모두 강계로 이주되었으며 이후 이 곳은 폐사군이라 하여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어 거주가 금지되었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4군의 철폐 조치가 영토의 포기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방어선상의 후퇴와 행정구역 상의 변동일 뿐이었다. 그 후 조선후기 때 폐사군의 군사적 중요성이 다시 주목을 받아 현종 5년(1664)에 후주진이, 숙종 9년(1683)에는 무창진과 자성진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순조 13년(1813)과 순조 22년(1822)에 각각 무창진과 후주진이 부로 승격되었다. 고종 6년(1869) 후주부와 무창부를 합쳐 후창군으로 개편되면서 옛 무창군 지역이 복군되었고, 자성진이 자성군으로 개편되면서 옛 여연, 자성, 우예 3군 지역이 복군되었다.폐사군 시절에는 일반인의 거주를 금지하고 행정기관을 파했을 뿐, 변경지대 자체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당시 폐사군 지역 등 조선의 압록강 중상류 변경지대에 사는 여진족들은 경제적 이윤 등을 위해 왕래 과정에서 조선의 의례에 어느 정도 숙여주었고, 이들을 불법적인 침입자로 간주하던 조선도 물리력의 한계에 따라 이를 따라와서 쫓은 것으로 묘사했다. 반대로 조선의 변경 백성들 중 왕조의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착취를 피해 거주가 금지된 폐사군 지역이나 여진족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 정부의 관리를 피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변민(邊民)이라 불렀다.
두만강 중상류 6진 일대의 여진 부족들은 번호(藩胡)로 불리면서 번리(藩籬, Dependent State)로 복속했다. 그중 부령을 제외한 5진의 성외에 거주한 번호들은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조선 출신의 변민(邊民)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가졌으며, 수령이나 변장(邊將)의 세력권에 있었으므로 항시 조선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고 변방 조선 관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형태를 취했다. 또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가 변방에 침입하려 할 때면 번호가 즉시 조선에 연락하거나 이들을 막거나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번호는 두만강 대안의 여진 부족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 종종 있어서 여진 각부와의 충돌이 야기되기도 했고, 번호가 변경 조선 관원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도 있었다.
성종 시기 땐 더 나아가 세종 이래로 개척된 4군 6진의 압록강-두만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는데, 압록강 쪽의 방위는 수월했지만 두만강 쪽은 방어도, 자급자족도 힘들었다. 조선은 당시 국경선을 넘어 경계선을 산악 지대가 둘러싸고 있으며 농경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연변, 혼춘 일대로 끌어올리려 했으나 조선의 국내 사정상 실행이 무산되고 만다. 이 연변, 혼춘 개척이 성공했다면 세종에 이어 또 다른 북진 정책이 전개되었을 것이고, 후에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청나라가 새롭게 일어서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다.[18] 실제로 두만강 건너편 하산 지역의 산성 유적에서 조선시대 양식의 기와와 옹기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이미 많은 조선인과 여진인이 함께 살던 지역으로, 북진 시도 자체는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연산군 이후 초피 무역으로 철물과 우마가 유출되면서 여진 각부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하고, 조선 변장들의 횡포로 여진 각부와 번호들을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특히 연산군 ~ 중종 전후로 변경의 백성들은 소가 없어서 직접 밭을 갈거나 성저야인들의 집으로 찾아가 품팔이를 하며 끼니를 겨우 해결하기 일쑤였다. 중종 ~ 명종 연간에는 북방 변방의 방어에 손을 놓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압록강 대안에 대한 조선의 정책은 건주삼위에서 온하위로 축소되었으며, 두만강 대안에서도 선조 시기 여진족들의 대공세가 있었으나 막아내었다. 이후 종성도호부 근방에 송화강 유역의 홀라운(忽刺溫)의 부잔타이(Bujantai)[19]가 두만강 대안으로 팽창하고 조선에게 직첩을 요구하는 등 기승을 부렸으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부잔타이를 격파한 후 두만강 이북의 여진 번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했고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이를 저지하지 못 하면서 조선은 두만강 연안의 여진 번호들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7. 의의
4군 6진이 개척되면서 조선의 국경지대는 압록강-두만강 이남으로 팽창했으며, 현대 한반도의 북방 국경선[20]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 큰 의미가 있다.8. 기타
- 조선은 여진족에게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교린 정책을 실시했다. 그 중 강경책이 이 4군 6진의 개척이다. 회유책으로는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반농반수렵 생활을 하던 여진족들이 자급자족할 수 없던 종이, 면포 등의 여러 물품을 모피 등과 교환토록 했고, 여진인들의 조공과 귀화를 장려했으며, 여진 추장들에게 천호, 만호 등 조선 정부의 명예직을 주었고, 서울 흥인지문 근처에 북평관이란 객관을 만들어 조공을 온 여진 사신들의 진상품을 받고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런 회유책들은 명나라가 크게 성장한 건주여진을 매우 경계하여 여진과의 정식 교류를 끊으면서 조선에서도 더 이상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조선은 명나라의 바람과는 달리 여진과 완전히 적대하지는 않고 만포진에서 약간의 식료품을 교류하는 등의 최소한의 우호 활동은 계속했다.
-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전가사변, 사민정책(徙民政策)의 경우 이 4군 6진 개척 때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졌고 실제로 이 때의 이주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 전에도 시행된 적은 여러번 있었다. 기록상 가장 처음은 고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때로 이때 주변 많은 사람들을 9성 지역에 이주시켰지만 1년만에 땅을 반환하면서 많은 이가 해를 입었다고 한다. 덕종 때에도 정주(靜州)에 1,000호를 이주시켰다. 조선의 경우 1398년(태조 7년) 경원부 지역을 얻은 후 관내 지역에 사는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켰고, 1410년(태종 10년) 두만강 주변 부거참에 1,000여 호를 이주시켰다.
- 다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엔 무작정 끌고 간 건 아니었고, 법적으로 이주 혜택이 있었다. 사민정책에 호응하여 북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양반이면 자품(資品)을 높여 주거나 토관직을 주었고, 향리나 역리(驛吏)일 경우 부역을 면제(免役)해 주고 관직 진출의 길을 열어 양반으로 높여 주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천인은 면천(免賤)되어 양인이 되었고, 역시 부역이 면제되었다. 지금은 잘 와닿지 않지만, 신분제 사회에 부역의 강도도 높았던 당시엔 큰 혜택이었기 때문에, 함길도(함경도)보다는 살만했던 평안도 지방의 경우 자발적인 이주가 많이 이루어져 강제적 이민의 필요성이 많이 없었다. 때문에 세종 19년 ~ 20년에 세종대왕이 평안도 일대에서 천여 호를 뽑아 국경 연변에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는 다시 황해도, 하삼도의 주민을 뽑아 이주시키려는 이중 사민 꼼수를 부리려 했으나, 당연히 관리들과 백성들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 하지만 큰 혜택을 준다곤 해도 개척하는 과정에서의 고통까지 경감되는 것은 아닌지라, 많은 이들이 개척 과정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아 자리를 완전히 잡으면 한 단계 위의 신분을 누리고 부역 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지만, 그 살아남아 자리잡는 과정 자체가 힘들었다. 당시 동북방 지역은 미개척 지역이었고,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하던 때와는 기온부터가 달랐다. 삼국시대-고려 초기까지는 전체적으로 지구의 기온이 높고 온습하여 한반도 북방지역도 땅이 기름지고 풍족했지만, 천 년이 지난 조선시대부터는 기후가 가혹해지면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한 땅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북방 유목민들이 휘젓고 다니면서 농업 관개시설 인프라가 완전히 박살났다. 무엇보다 동북 지방은 척박해서 당시 조선에서 주로 하던 벼농사를 짓기가 어렵다. 특히 개마고원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난한 함경도 해안지역도 연강수량이 600 mm ~ 700 mm에 불과하고, 여름에 안개가 자주 끼고 흐리기 때문인데, 벼농사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름에도 냉해를 입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지방을 막 개척하던 세종대왕 시절에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21]도 없었다. 키울 수 있는 작물은 오직 콩,[22] 메밀, 귀리밖에 없었다. 더욱이 개마고원은 메밀조차 못 자라는 극한지다. 그나마 연변 지방은 지대가 낮고 땅이 기름진 편이라 당대에도 벼농사가 가능했던 땅이었고, 더 북쪽으로 가면 삼강평원이라는 비옥한 흑토지대가 있기는 했지만, 4군 6진 개척만으로 버거웠던 조선은 더이상의 영토 확장이 힘들다고 느껴서 결국 개척을 포기하고 한민족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확정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 이 당시에도 범죄자는 큰 혜택 없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훗날 동북방 지역이 일종의 유배지 같은 기피 지역 이미지가 된 이후에는 자발적인 이주 같은 건 어림도 없었다. 가기 싫은 사람들은 자해하면서까지 안 가려고 버텼지만 얄짤없이 보내졌고, 돈 있는 사람이나 매를 바친 사람은 자동으로 빠졌다.
- 누르하치가 여진 통일전쟁 당시 초창기의 적수였던 홀라운 우디거를 격파한 곳이 이 육진의 종성도호부 근교였다.
고구려의 국경도 4군 6진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만 보더라도 요하강이 있는 곳에 쌓았다는 점이다. 반면 송화강 쪽에는 장성을 쌓지 않았다. 요하강과 송화강 사이에 강이 없는데 결정적으로 거란이 이쪽으로 우회해 쳐들어와 발해가 함락되었다. 4군 6진의 압록강과 두만강처럼 방어하기는 좋지만 고구려와 발해 처럼 국경이 넓어지면 여러 문제도 생겼다.[23] 현대에도 낙동강 방어선 전투만 보더라도 강을 국경으로 하면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 현재 국경으로 굳어진 4군 6진의 압록강 바로 위에 위치하기에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비,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환도산성이 중국 땅인건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이다.[24] 환도성은 고구려가 멸망 직전까지 간 관구검과 싸울때도 버티던 성이었고, 앞에 제1 방어선 하나 더 설치해 세계 국경이 자리 잡던 청나라 까지 버텼다면 현재 북한 땅일 가능성도 있다.
9. 관련 문서
[1] 국사편찬위원회 기재 년도 기준.[2] 한 자 땅과 한 뼘의 흙. 매우 작은 땅이라는 의미.[3] 실록에 따르면 당시 조정에서는 경원(慶源)을 용성(현 청진시 수성 일대)으로 물리면 북방의 방어 계책이 편리하고, 백성의 폐단이 다 없어지리라고 했는데, 이때 세종이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북방 개척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한다.[4]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 시기 간도 침공도 있긴 한데, 청나라를 상대로 제대로 된 정복전을 치렀다기 보다는 청말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행정력 공백이 생긴 곳을 재빨리 점거한 것에 가깝다. 물론 그때도 소규모의 전투는 있었지만.[5] 이미 발해 멸망 이전부터 여진의 남하가 확인되었다.[6]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에서 양도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고개.[7] 다만 이후 명나라가 중국 땅을 멋대로 빼앗았다며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나게 된다.[8] 타타르의 음차 표기로 북원 잔당들을 가리킨다.[9] 요양 및 심양의 준말로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일대를 가리킨다.[10] 지금의 부령군 부거면.[11] 지금의 경성군 주남면, 주북면 일대.[12] 지금의 부령군 석막면.[13] 천연하천은 지형극복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고난도의 장애물이며, 동시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강력한 방어선 역할을 한다. 현대에도 한국전쟁 초반기에 있었던 낙동강 방어선이 그 예다. 실제로 산맥보다는 강이 더 방어에 용이한데, 산은 험하긴 하지만 어쨌든 땅이기에 두 발만 있으면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고, 민둥산이 아닌 이상 나무 등 엄폐물이 가득해 간첩이 넘나들기 편한 곳이며, 맹수들도 산다. 반면 강은 배가 없으면 건널 수 없고, 탁 트여 있으며, 아무리 강 속에 맹수가 있어도 웬만해서는 맹수 때문에 배가 침몰하지는 않는다. 현대에 상륙작전만 해도 엄청나게 죽는 현실이다.[14] 당시 이 병력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선발한 정예 병력이었다.[15] 지금의 종성군 행영면.[16] 지금의 경원군 경원면.[17] 지금의 종성군 종성면.[18] 다만, 청은 압록강 이북에서 성장했고, 두만강 이북의 야인여진은 제대로 만주족 대우를 안 해줬기 때문에 실제로 큰 의미는 없었을 수도 있다.[19] 하질귀(何叱貴) 혹은 하질이(何叱耳)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하스후 버일러(hashū beile)라는 그의 칭호에 따른 것이다.[20] 다만 이후 백두산 인근 지역의 부분적인 조정과 협의는 있었다. 현재는 조중변계조약으로 북한과 중국 사이에 확정된 국경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나,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아직은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21]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 상륙한다. 육진 지방과 환경이 비슷한 곳에서 잘 자라는 호밀은 1920년대에나 한반도에 상륙했다.[22] 현재도 두만강 유역은 콩의 원산지이다.[23] 이 때 적이 매우 많았는데, 진시황 때부터 쌓아온 만리장성조차도 매번 북방 유목 민족에게 침략을 당했으니. 여진족들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당, 거란의 지배를 받다가 이들도 부족 간 전쟁으로 융합되어가면서 규모가 점점 커져가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져 한족, 한민족, 몽골계들 입장에서도 상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여진족이 융합되어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와 연합해 거란을 멸망시키고, 이후 송나라를 남쪽까지 후퇴시켰으니. 중국 대륙이 요동을 차지하려는 이유가 있다. 산해관만 넘으면 산둥반도는 평야라 그냥 점령 당한다. 또한 중국 대륙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교도 안될만큼 매우 높은 산지거나 나머지 조차도 사막이다. 국경이 넓으면 방어에 불리한 점도 있었다. 6.25 전쟁때도 중공군이 내려오니 청천강-영흥만으로 유엔군이 처음 방어선으로 설정 했다.[24] 광개토대왕릉비의 한자를 해석할 정도의 지식인 계층들이 북방까지 올 일도 적었고 북방에서 근무하는 지식인들도 업무 때문에 한가하게 여진족이 있는 국경 밖에 나가서 뭔지도 모르는 대형 비석을 읽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인근 사람들은 최전방에서 여진족과 대치 상황이라 금나라에서 세운 비석 정도로 인식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내성이라는 것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