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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9:45

삼남


1.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함께 묶어서 부르는 말
1.1. 정치 면에서1.2. 군사 면에서
2. 셋째 아들, 3남3.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읍

1.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함께 묶어서 부르는 말

三南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세 개의 도를 묶어 이르는 말. 옛날에는 많이 사용되던 말이었지만, 남북분단 이후에는 삼남 지방이 실질적 국토의 70%[1]을 차지하게 돼버리다보니 너무 비중이 커져서 현재는 잘 쓰이지 않고, 대신 각 도를 따로따로 부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비슷한 개념으로 조선시대에도 이 세 개 도를 '하삼도(下三道)'라고 불렀다. 한편 그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묶어 "양남(兩南)[2]"이라 부르거나, 충청도와 전라도를 함께 묶어 "양호(兩湖)[3]", 충청도와 경상도를 묶어 "호령"(湖嶺)[4]이라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를 묶어 '북삼도(北三道)'라고 불렀다.[5] 다만, 충청도의 경우엔 전통적으로 남부 지방으로 분류됐던 반면, 황해도의 경우엔 중부 지방으로 분류되었다. 정보가 부족한 황해도에 대해 설명하자면, 연안 이씨처럼 관향은 황해도인 가문이 많기도 하고 통일신라 이래로 황해도 지역은 그 남쪽과 같은 나라에 계속 속했기 때문이다. 그 북쪽은 고려시대~조선시대 초기에 남쪽과 같은 나라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생산력 기준으로 북부와 중부에서 하삼도에 견줄만한 지역은 조선시대 기준 택리지에서 평안도 해안 지역 정도가 언급되는 것이 다다. 임진왜란은 전라도가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반격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한양만을 우선적으로 노리던 일본군의 오판과, 너무 북쪽으로 가서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피해도 반격의 기반이기도 했다.

매우 자세히 구분하면 삼남 산간지대 정도는 생산력이 중부나 북부 일부 지역에 밀리는 곳이 있는 정도다. 전라도였던 제주도도 전통적으로도 강원도보다 인구밀도가 높으나 벼농사를 이유로 땅이 척박하다는 인식이 있다. 패서에 해당하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우[6] 하삼도 못지 않게 평야도 넓고 땅이 비옥하며, 평양 기준 강원도 철원 수준의 기온을 기록하는 곳이나 평양마저 쑥대밭이나 무인 지경이 되는 등 너무 전란으로 파괴당하기 쉬운 환경이었다. 조선 후기 정도가 되어서야 평안도가 팔도 중 인구 2위를 달성한 것이다. 그렇게 조선 후기가 되면 삼남 51%, 삼북 32%, 중부 17% 정도였다. #

1.1. 정치 면에서

현대 정치적으로는 가끔 언급되기도 하는데, 한국이 서울을 비롯한 중앙 집권이라고는 하지만 그 권력자와 정치 세력들이 대부분 삼남 출신이어서 그렇다. 당장 대통령도 초대~3대 대통령 이승만[7], 4대 대통령 윤보선[8], 10대 대통령 최규하[9], 15대 대통령 김대중[10], 20대 대통령 윤석열[11]을 제외하면 대통령 중 과반인 7명이 전부 경상도[경상도]출신이고, 김대중이 이끈 전라도김종필이 이끈 충청도 역시 경상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할 뿐 절대적인 힘은 강했다. 이를 두고 권력의 장소는 한가운데 세워놓고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실제로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하고[13] 충성스러운 정치 세력은 거의 삼남 지역이었다. 과거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전두환, 노태우)의 경상북도, 김영삼경상남도[14], 김대중전라남도, 이철승전라북도, 김종필충청도는 정치계에서 가장 유명한 5세력이었다.[15] 후에 경북이 김영삼, 이회창 세력으로 들어가고 충청이 김대중 세력으로 들어가며 예전보단 덜해졌지만, 여전히 TK와 전라도는 선거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지역이다.

북한 때문에 혼동이 되는 경우가 흔하나[16] 고려 시대에는 서경이 중시되고 아예 나라 이름이 고구려에서 따온 고려가 되고, '부여'라는 이름을 남쪽에서 '남부여'로 따라할 정도로 그나마 중부 이북의 영향력도 있기는 했다. 아예 고구려 같은 국가는 실제로 강성하던 시절이 있었고, 한민족의 첫 국가는 고조선처럼 중부 이북에 자리잡은 국가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가 지나면서 몽골, 홍건적 등에게 피해를 입고 국경 북쪽이 폐쇄적으로 변한 조선시대에는 삼남에 양반이 많았고 지금의 이남지역이 정치의 중심이였다. 역사학계에서 유교 철학에 따라 영남학파와 기호(경기도, 충청도)학파로 나누기도 하고 붕당정치의 시작인 동인 서인에도 영남학파, 기호학파가 관련있다. 전라도 또한 기호나 영남만큼 두드러진 카르텔을 형성하진 못했지만 17세기까지는 정승을 비롯한 당상관급 관료를 배출한 적은 있다. 다만 이렇게 국정이 운영된 건 평양 출신인 조준까지 영의정이 된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100년 가량이라 나중에는 한양 출신만 등용하는 행태에 영남 만인소 등의 반발이 있던 것이다. 물론 이 삼남 출신이라도 송시열과 같은 인물은 평안도 출신인 선우협 같은 인물도 인정하는 등[17] 다른 지방 출신이라도 학식이 높으면 그 성과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구한말에 들어서면 이북에서도, 한양이 아닌 경기권과 강원도[18]에서도 인사 등용이 활발히 이루어지긴 한다. 자세한 사항은 대한민국/지역감정 참조.

과거 조선시대에는 삼남 지방 양반들의 나쁜 행태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치하포 사건으로 삼남지방에서 도망을 다니며 여행한 김구는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황해도)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라고 탄식하였다.[19] 다만 권세가를 자처하는 양반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좀 낮은 신분으로 보이면 차별을 하고는 했다. 북쪽은 원 간섭기 이후 새로 개척된 곳이고 그나마 황해도에 조상이 있는 권세가도 가까운 한양에서 양반 행세를 했기 때문에 저런 말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1.2. 군사 면에서

군사적으로는 제2작전사령부 관할이다.

2. 셋째 아들, 3남

三男. 해당 문서 참조.

3.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읍

三南邑. 해당 문서 참조.


[1] 삼남 지방의 면적 비중 70,000㎢/100,000㎢로 약 70%. 분단 전에는 약 30%.[2] 영남과 호남[3] 호서와 호남[4] 호서와 영남[5] 이 중 상삼도가 쓰이지 않은 건 당연한 것이, 하삼도의 "하"는 남쪽이 아니라 수도 한양에 비해 아랫 지역이기 때문이다.[6] 신의주-포항 이남 지방은 인구밀도가 높았는데, 평안도는 평양 일대와 그 근처 해안 지역만 차지하여 3분의 1 정도만 여기에 해당한다. 황해도의 평야는 강화도 건너편 연백 평야가 아닌 평양 근처 재령 평야는 임꺽정의 시대에 들어서야 생긴 곳이다.[7] 황해도 평산군 출신[8] 충청남도 아산시 출신[9] 강원도 원주시 출신[10] 전라남도 무안군 출신.[11] 서울특별시 출신. 그마저도 아버지는 논산이 고향이다.[경상도] 박정희(5~9대), 전두환(11~12대), 노태우(13대), 김영삼(14대), 노무현(16대), 이명박(17대)(일본 오사카부 출생이나, 광복 후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성장하여 본인은 포항시를 고향으로 여긴다.), 박근혜(18대), 문재인(19대)[13] 보스 중심 정치적 관점.[14] 이후 경남 지방의 판도는 노무현친노 성향의 대두로 인해 변곡점을 맞게 된다.[15] 말 그대로 이 5명이 당을 이리저리 어디로 옮기든 이 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따라 그 당에 표를 몰아줄 정도였다.[16] 북한은 20세기에 외세에 의해 생겼다. 그 이전에는 이북의 사투리를 쓰고 다니던 손기정, 윤동주 같은 인물이 민족 영웅 취급을 받기도 했다. 분단 이후에도 북한 정권과 무관한 사람들은 청죽회 같은 서울+이북 출신 파벌을 이루기도 했다. 정작 조선시대에 차별이 문제가 된 것은 한양의 양반들이 다른 지방의 나머지를 차별한 것이었다. 이북만 특별히 차별한 것이 아니고 삼남, 심지어 한양도 남촌 출신을 차별하는 모습이 있었다. 이런 이너 서클과 무관한 대다수의 평범한 경우에는 이효석 같이 함경도 출신 아버지, 충청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강원도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강원도 배경의 소설을 쓴 사람도 있었다. 조선은 유럽 같은 지역의 역사성까지 결부되는 지역 갈등이 없었다. 가루지기도 경상도 출신 남자 변강쇠와 평안도 출신 여자 옹녀가 청석골이라는 중부 지방에서 만나는 내용이다.[17] 송시열은 선우협의 시문집인 돈암전서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18] 황해도보다 높은 관직에 나간 사람이 드문 경우도 있었다.[19] 우리는 지난 백년을 어떻게 살았을까3 -한국역사 연구회 p219~222 부분을 인용한 한국대중매체사-강준만 p.49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