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pad> '''''' | ||||
{{{#!wiki style="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00467f,#005ba6 20%,#005ba6 80%,#00467f); color:#ffc224"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c224> 제1-3대 | 제4대 | 제5-9대 | 제10대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
<rowcolor=#ffc224> 제11·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
<rowcolor=#ffc224>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
<rowcolor=#ffc224> 제20대 | ||||
윤석열 | }}} }}}}}}}}}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 |||
출생 | 1919년 7월 16일[1] | ||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 (現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로 134)[2] | |||
사망 | 2006년 10월 22일 (향년 87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사저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3]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1호 | ||
재임기간 | 제10대 대통령[4] | ||
1979년 12월 6일[5] ~ 1980년 8월 16일[6]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강릉 최씨[7][8] | |
부모 | 아버지 최양오, 어머니 이응선[9] | ||
형제자매 | 8남매 중 장남[10] | ||
배우자 | 홍기(1935년 결혼, 2004년 사별) | ||
자녀 | 장남 최윤홍(1945년생) 차남 최종석(1951년생) 장녀 최종혜(1953년생) | ||
학력 | 원주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 33회) 도쿄고등사범학교[11] (영문과 / 졸업)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 / 졸업) | ||
병역 | 해당 사항 없음 | ||
종교 | 무종교[12][13] | ||
신체 | 키 182cm[14] / 체중 75kg / A형 | ||
약칭 | 崔 | ||
자 | 서옥(瑞玉) | ||
호 | 현석(玄石)[15] | }}}}}}}}} |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취임 선서 |
2. 약력
- 1932.2. 원주보통학교 졸업[16]
- 1937.2.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17]
- 1941.2.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18]
- 1943.2. 만주국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 졸업
- 1943. 만주국 길림성 통양현사무소 행정과장
- 1945.9. 경성사범대학[19] 영문과 조교수
- 1946.4.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 (서기관 상당)
- 1947.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 (서기관 상당)
- 1948.8. 농림부 양정과장 (부이사관 상당)
- 1948.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아시아지역 미곡위원회 대한민국 대표
- 1951.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부이사관 상당)
- 1951. 외무부 통상국장 (이사관 상당)
- 1951. ECAFE 무역진흥회 대한민국 수석대표
- 1952.7.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총영사 (이사관 상당)
- 1957.5.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 (이사관 상당)
- 1957.12. 재일교포체육회 회장
- 1958.4. 제4차 한일회담 대한민국 대표
- 1959.3.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관리관 상당)
- 1959.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 제11·12·13차 총회 대한민국 대표
- 1959.9. 제7대 외무부차관
- 1959.12. 외무부장관 직무대행[20]
- 1962.1. 동양화학 주식회사[21] 창립발기인
- 1962. 아시아반공연맹 민족반공연맹임시총회 의장
- 1962. 외무부장관 고문
- 1962.7. 한일회담 고문
- 1963. 외무부 본부 대사
- 1963.3.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
- 1964.11. 주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
- 1967.6.30.~1971.6.3. 제14대 외무부장관
- 1967. 제22차 UN 총회 대한민국 수석대표
- 1968. 제19차 콜롬보계획자문위원회 각료회의 의장
- 1970.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1970. 일등수교훈장 수훈
- 1971. 대통령비서실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 1971. 청조근정훈장 수훈
- 1972.10.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 1972. 대통령 특사
- 1975.12. 국무총리 서리
- 1976. 수교훈장 광화대장 수훈
- 1976.3.12.~1979.12.5. 제12대 국무총리
- 1977. 태국 백상훈장 수훈
- 1979.10.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22]
- 1979.12. 제10대 대통령 선거 후보 (무소속)
- 1979.12.6.~1980.8.16.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79.1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23]
- 1979.12.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
- 1980.5.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 수훈
- 1980.5.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 수훈
- 1980.8. 대한민국 대통령직 사퇴,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 1981.4. 국정자문회의 의장
- 1985. 강원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1988.11.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 1991. 제3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 1999.6.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3. 일생
자세한 내용은 최규하/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대중에게는 보통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께 존재감이 없는 대통령이자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이후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전락한 인물 정도로 인식된다. 실제로도 대통령직을 본인이 직접 수행하는 데 욕심이 있었던 윤보선과는 달리 최규하는 정치적인 욕심이 전혀 없었다.[24] 따라서 정치적으로 평가를 받는 일은 드물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제4공화국 유신헌법에 따라 긴급조치까지 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승화 체포 동의, 전두환 중앙정보부 서리 겸직 인정, 5.18 민주화운동에서 빚어진 유혈 사태의 묵인 등 당시 전두환을 반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어 최규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25]
그러나 최규하의 입장에서는 신군부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성공시킨 뒤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미국마저 이를 묵인하여 사실상 전두환이 실권자로 등극한 당시 정국 속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발휘해 그를 파면시키려는 순간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비민주적 행위를 사실상 묵인한 것과 다름 없는 행동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긴 하지만 실권이 없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 가혹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지기 이전 전두환의 월권 행위에 최규하 전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당신은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이라며 비판을 하기도 했고, 전두환이 건네는 돈에 대해서도 뇌물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 거부했다. 하나회가 대한민국 군대를 뒤흔드는 것도 잘 알고 있어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는 등 전두환과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웠다. 문제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단번에 정국의 주도권이 전두환으로 넘어갔다는 것에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 들어서 진실을 밝히려는 각계의 노력을 외면하면서 증언을 거부하고,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학살을 단죄하는 국면에서도 대통령이 국회에서 증언하는 전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유로 침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행적은 평가자의 관점에 따라 비판의 여지가 있다.
5. 묘소
현석(玄石) 최규하 전 대통령과 배우자 홍기의[26]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내 국가원수 묘역.[27]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5ba6><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rowbgcolor=#005ba6>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9 | 제10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465 (96.29%) | 당선 (1위) | [28] |
역대 후보 이력 | ||||||||||||
|
7.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5 - 2006 |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
8. 각종 타이틀
- 역대 최단기 재임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재임 기간이 1년 미만인 대통령(8개월간 재임)[29][30]
- 2024년 기준 역대 최장신(182cm) 대통령[31]
- 2024년 기준 두 번째로 체중이 많이 나가는(75kg) 대통령[32]
- 윤보선과 함께 재임 기간 내내 무소속이었던 둘뿐인 대통령[33]
- 유일하게 당적 보유 이력이 없는 대통령
- 유일한 관료(외교관) 출신 대통령
- 역대 두 번째 국무위원(외무부장관) 출신 대통령[34]
- 유일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35]
- 유일한 강원특별자치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36]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김일성을 만난 대통령 #[37]
- 21세기에 사망한 첫 전직 대통령[38]
- 최초로 연상 영부인을 둔 대통령[39]
- 최초의 초혼 대통령[40]
- 유일한 최(崔)씨 대통령
- 박정희와 함께 대통령 권한대행 경험이 있는 둘뿐인 대통령.
- 임기 중 국군의 날 기념식을 주관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41]
- 사망 당시 생존한 후임자가 가장 많았던 대통령(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42][43]
9. 여담
- 일제 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이다.
- 할아버지 최재민이 조선 말기에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이름 높은 한학자였기에 3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선비로서의 훈도와 한학, 예절을 배웠으며, 덕분에 한자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과 고문학에도 실력이 뛰어났다. 원주보통학교(지금의 원주초등학교) 출신이어서 이 학교에 몇 점의 휘호와 자필 서신을 남겼으며 전통적인 한문 필체로 평가받는다.
- 윤보선과 함께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하지만 윤보선은 의원 내각제 대통령으로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지만 그래도 장면 총리를 견제하는 등 힘이 어느정도 있었으며, 퇴임 후에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서 박정희와 두 번이나 붙는 등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나름대로 존재감이 있지만, 최규하는 막강한 유신헌법하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이 신군부에게 있었고, 퇴임 후에도 바로 정계를 은퇴해서 조용히 살다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보선은 의원내각제하의 대통령이긴 하지만, 장면이 도피하여 대통령이 5.16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기에 신군부에 의해 이미 취임 때부터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최규하보다 더 무능하다는 평가가 있다. 윤보선은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후에는 전두환과 친하게 지내고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지지 선언까지 하면서 최규하에 비해 존재감과는 별도로 평가가 좋지 않다.
- 대통령 중에 가장 처음으로 생전에 살던 가옥이 문화재[44]로 지정되었다. 개방 시설이므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위치는 망원역과 합정역의 딱 중간이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이다. 여담으로 그의 자택은 2015년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동룡이네 집으로 등장했다. 관련 기사
-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했고[45], 실제로도 노년까지 직접 연탄을 집게로 날라 때운 연탄 보일러로 방을 덥혔다. 냉방 기계인 선풍기 또한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옛날 물건이었고, 에어컨 역시 장남이 미국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 제작했으며 그 달력에 빽빽히 매일매일의 일정을 기입했다. 볼펜 또한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한미 회담에서 썼던 볼펜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하루는 꽃동네의 신부가 우연히 산삼을 얻어 최규하에게 선물했는데, 그 산삼을 돌려보내며 다른 불우한 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정치인 최규하를 비웃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그런 사람들조차 그의 개인적인 면모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 식단도 역대 대통령중 굉장히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재직 시절 즐기던 음식도 국수, 콩자반, 냉면, 나물 등이었으며, 술도 즐기지 않았다. 그나마 술을 마실 때에는 과일주와 나물에, 생선구이나 전골 등을 즐겼다고 한다.
- 영부인 홍기와는 무려 69년을 함께 살았으며, 부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8년 동안 직접 간호한 애처가. 홍기가 와병하던 안방에 온도계를 달고 매일마다 실내 온도를 체크했으며, 화장실 출입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안방과 통하는 곳을 화장실로 개조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반대로 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이 그를 돌봤다.
- 협박에 의해 긴급조치를 묵인한 것 외에는 특별한 악행을 하지 않았고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국민장을 치렀지만,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민장을 치렀는지 안 치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최규하가 아직도 살아 있었어? 같은 반응도 나왔다.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가량이 참여했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의 장례에 걸맞게 KBS, MBC, SBS, YTN 등 주요 언론사들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했고, 정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와 한명숙 전 총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 신장이 182cm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신이다. 2020년대 기준으로 봐도 장신이며, 대한민국 남성 평균 신장보다 훨씬 크다.
- 긍정적 수식어로 많이 붙는 표현이 '선비'. 언론에서나 다른 정치인들이 최규하를 수식하는 단어로 '선비 대통령', '선비 정신을 갖춘 대통령' 이런 식으로 간간히 쓰였고, 장례 때도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선비의 표상"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었다. 이는 사실 그가 한학을 배우기도 했었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았던 걸 가리키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에서는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한 경향이 있고, 검소함이나 절제와 함께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부분인 '절개'나 '기개'라는 부분에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표현이다.
-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늘 따라 다니는 인물평은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에 그 위를 건너는 사람'이었다. 이 인물평처럼 최규하는 대단히 꼼꼼한 성격이라서 결재할 때 영어 스펠링이나 한글의 맞춤법 사소한 것까지 모두 지적했고, 외교관이면서도 골프를 일절 치지 않았다. 실제로 '골프 안 치고도 총리, 대통령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할 때, 한번은 돈지갑을 안 가지고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가 동석한 다른 특보로부터 500원을 빌려 점심값을 냈다. 그 며칠 뒤에 500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넣어 그 특보에게 상환을 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인 최규하는 결코 인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총리 시절 경기고[46] 동창회에 초대돼도 '총리가 동문회에 참석하면 교육계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거절했었다. 그는 깨끗한 처신으로써 주위의 존경을 받기도 한 반면 지나친 조심성으로 해서 업무 처리가 늦어진다는 불평을 사기도 했다. 경성제일고보 동문인 최세황 전 국방차관은 학창 시절 최규하를 '특징이 없었던 점이 특징이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일제가 만든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로서 출세를 시작한 그는 4.19 직후를 제외하곤 자유당, 공화당 정권 아래에서 중단 없고 순탄한 관리 생활을 해왔다. 최규하는 룰이 확립된 외교관 생활에 젖어 그의 행동은 극히 규격적이었다. #
- 최규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권영민 전 주독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이나 신중함을 비꼬는 의미로 국민들이 "최 주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 본인은 당연히 매우 불쾌해했는데, 권영민 전 대사는 평소에 온화하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회고했다.[47] 사실 '주사'라는 표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6급 공무원을 지칭하는 직급명이긴 하나, 지방직 공무원들의 경우 공무원끼리 서로, 또 민원인들이 공무원을 부를 때 적당히 사용할 만한 경칭으로 'OOO 주사(님)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였다.[48] 특히 9급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할 경우, 승진 시험 없이 경력 차면 연공만으로 승진 가능한 직급이 대개 6급 주사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등에서 특별한 권한이나 재량 없이 지시와 규정대로 정해진 일이나 하는 중년, 또는 초로의 아저씨' 이고 행정의 권위주의 성향이 강하던 시절에는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도 형식적인 규정에 얽매여 민원인을 죽도록 번거롭게 만든다'거나, 사회 전반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민원인이 화나서 찾아와도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은 없고, 그저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적당히 달래 돌려보내기 급급하다'와 같이 공무원의 초라하고 무기력한, 더 나아가 무능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함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직급상으로도 주사 위에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관리관, 차관, 장관, 부총리, 국무총리, 국가원수 총 11직급 차이 나지만, 불과 한 급 차이인 5급 사무관과도 호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차이는 상당하다.[49]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최규하를 지칭하던 '최 주사'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유부단함과 신중함만을 비꼰 것이 아니라 대통령씩이나 하면서 하는 일은 말단 공무원 같다, 즉 자기 권한과 재량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는 못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서식 맞춰 서류나 써낸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 딱히 하는 일도 없다는 굉장히 심한 조롱이다. 그의 장점으로 꼽히는 검소함이나 자기절제 역시 이런 부정적인 평가와 얽혀서 '좀스럽고 쩨쩨하다'는 나쁜 의미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최규하 자신의 책임이고,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행적이긴 하지만 대놓고 이런 모욕적인 소리를 들었으면 불같이 화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 대통령 퇴임 이후 전직국가수반협의회(InterAction Council of Former Heads of State and Government)에 전두환의 추천으로 한국대표로 가입하려 했으나 헬무트 슈미트와 후쿠다 다케오가 최규하는 자격이 없다고 거절하여 전직 대통령임에도 정회원 가입이 거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IAC 측은 신현확을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신현확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정회원 자격이 없던 관계로 옵저버 회원으로 가입, 1990년 총회에서 정회원으로 승격됐다. 신현확의 자리는 노태우가 퇴임 후 6.29 선언을 이끈 공을 인정받아 물려받았으나 재판 회부 이후 제명당했다.
- 1994년에 원주시 생가 터가 원주시에 기증되어 1997년 원주시립박물관 조성 당시 원래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 형태로 복원되었고, 2016년 원주시립박물관이 10주기 추모전 '치악의 푸른 소나무', 2019년 탄생 100주년 기획전 '청렴의 지도자,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각각 열었으며 2021년 1층 기획전시실에 '현석실'을 열었다.
10. 대중매체에서
* 역대 최규하 전문 배우들 중 최다 출연자는 배우 김성겸[50]인데,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을 비롯해 1995년 MBC 특별기획 제4공화국[51], 2005년 제5공화국, 2014년 대한민국 정치비사까지 4번 연기했다. 해당 배우가 최규하와 비슷한 외모 및 체격을 갖추고 있다 보니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 2003년 신작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 개국 편에서 공양왕이 이성계 세력에게 저항하는 파트에서 '1980년의 누구와는 달랐다.'라는 대사와 함께 신군부 세력에게 덜덜 떠는 모습으로 카메오 출현했다.
11. 어록
===# 제10대 대통령 취임사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본인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에 즈음하여, 먼저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방금 본인은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선서를 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다시 한번 통감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돌연한 서거 후, 우리 정부와 국민은 경악과 충격과 애도 속에서도 국장을 엄수하고, 그 뒤의 사태들에 냉철하게 대처하여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우리 군은 철통같은 전후방 방위 태세를 유지하였으며, 미 국방부는 신속한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취하여 대한 방위 공약의 확고함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정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염원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지난 12월 6일 합헌적 절차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국내 정세의 추이와 더불어 우리 나라를 둘러싼 주변 정세와 국제 환경의 험난한 현실에는 완화나 호전의 징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갖가지의 어려움이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0.26 사태 후 계속되고 있는 대내의 문제들과 상관 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당면한 국가적 난국의 심각성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대립과 분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국제 정치 전반에 걸쳐 격동이 야기되고 있으며,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마저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 경제는 각국마다 자국의 권익 옹호를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제 정치 면의 불안을 반영하여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자의 중동 사태에 연유한 석유 파동은 잇단 원유 가격의 앙등뿐만 아니라, 공급 사정의 악화를 수반함으로써 세계 경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특히 한국과 같은 비산유 개발 도상국들에게 극심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주변 정세도 여전히 복잡하고 유동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에 편승하여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 온 북한 공산 집단은, 특히 10.26 사태 후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자 모략과 선동을 격화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모한 군사적 도발마저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민 여러분에게 우리 나라는 비상 시국에 처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내외 현실을 직시할 때, 국기를 튼튼히 다지면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해야 할 현 정부의 소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끄는 현 정부는 국난 타개를 위한 [위기 관리 정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배경과 인식에 입각하여 본인은 앞으로 국정의 기본 목표를 국가 안전 보장을 공고히 하고, 사회 안정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며, 국민 생활의 안정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착실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여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데 두고자 합니다.
먼저 국가의 안전 보장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계속 추진하면서 전국 군 장병의 사기를 진작하여 자주 국방 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우리 국군은 그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고, 정연한 통솔 지휘 체제에서 국토 방위의 초석이 될 결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안보·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한·미 간의 우호 협력 관계를 더욱 증진하고 양국 간의 상호 방위 협력 체제를 공고히 하며 한미연합군사령부의 효율적인 운영 등에 힘쓸 것입니다.
대일 관계에 있어서는 한·일 간의 우호 협력 관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긴요하다는 공동의 인식하에 양국 간의 선린 협력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정부는 기타 우방들과도 기존 우호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나라들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을 촉진해 나갈 것입니다.
비동맹 제국과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도 증진하여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지지 기반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한편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우리 측의 정책 기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앞으로도 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 의한 남북조절위원회의 재개와 남북 적십자 회담의 재개, 남북한의 경제 및 기술 교류를 위한 관계 각료 회담의 개최,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 간 회담, 그리고 남북한 및 미국의 3당국 회의의 개최 등 우리 측의 일련의 대화 제의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북한 측이 이상의 어느 방식의 대화이든 간에 조속히 응해 올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국가의 안전 보장을 굳건히 하기 위한 대내외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화된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 대립과 분열이 파생되어 무질서와 혼란이 조성된다면 국가 방위 능력을 저상시키게 될 뿐만 아니라, 북한 공산 집단의 오판을 낳게 하여 그들의 대남 도발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국법 질서의 유지와 공공의 안녕 확보 등 사회 안정 기반을 다지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 중에서도 세계적인 경제난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시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바 국제 경제의 혼미와 침체는 앞으로 각국의 경제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물가고와 저성장, 교역의 부진과 실업 증대 등의 현상을 심화할 것이 예측되며, 개방 체제인 우리나라의 경제도 이에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국제 경제의 여건은 내년도 우리 나라의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게 될 것이며, 예컨대 원자재 가격의 앙등 등으로 인한 수출 신장력 둔화, 성장률의 저하, 그리고 고용 면의 문제 등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경제는 거듭되는 석유 가격 앙등으로 추가적 부담이 가중되어 국제 수지의 불균형이 더욱 확대될 것이 우려됩니다.
최근의 원유 가격의 동향으로 보아 내년도 원유 확보에 따른 추가적인 부담이 30억 불에 달할 경우마저 상정되고 있습니다. 단언하면 이는 우리 국민의 소득이 그만큼 삭감당함을 뜻하며, 국민 생활에 큰 어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처하여 정부는 외부의 충격을 가능한 한 완화 흡수 하여 우리 경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국민 생활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하여 기술 및 과학의 진흥에 힘쓰면서 범국민적인 에너지 절약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정부의 힘만으로는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이룩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정부와 국민 전체, 그리고 노동자와 기업인이 각기 참고 견디며, 근검절약하는 가운데 혼연일체가 되어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우리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는 한편, 시대적 변천에 대응하여 점진적인 변화와 향상을 추구해 나가야 할 정치적 발전의 과제도 안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11월 10일 '시국에 관한 특별 담화'에서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정치적 발전 문제에 관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또한 본인은 이 문제가 신중하고도 진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한시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합헌적 절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 같은 본인의 소신에는 현재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우선 이 기회에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발전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는, 지금의 국가적 현실을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옳게 파악하고,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연속성을 지닌 우리의 미래를 용의주도하게 설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정치적 발전을 기함에 있어서는 당면한 위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국가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면서 신중하고 착실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8·15 해방 이후 우리의 헌정사를 잠깐 회고해 보건대, 국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의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여 시행하여 왔습니다.
1952년 7월에는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으며, 4·19 후 1960년 6월에는 내각 책임제 헌법이 채택된 바 있었습니다.
이때 개정된 헌법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불안도 있었고 우리의 적응 능력도 미흡하여 이 제도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함으로써 정국의 불안정과 혼란이 거듭되고, 1년도 못 가서 결국 헌정의 중단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16 군사 혁명 후, 1962년 12월에는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이 있었고, 1972년 12월에 현행 헌법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개헌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한번도 정부의 평화적인 이양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또 경제적·사회적 성장과 정치적 성장 간에는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양자 간에 항상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금후의 헌법 개정에 있어서는 이 같은 우리 헌정사의 과오를 깊이 자성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국가적인 견지에서 장래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또 지속성 있는 민주 발전의 기틀이 되는 그러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전제에서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의 분단으로 말미암은 남북한의 대치라는 냉엄한 상황하에서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고 국가 안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헌법이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정치권력의 남용과 부패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극단적인 국론의 분열과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소지가 있는 헌법이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회 정의와 형평의 구현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 하겠으나, 이것이 우리의 자유 경제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결과를 빚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회 균등의 원칙하에 개인의 창의와 노력을 존중하여 사회적 활력을 고무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 자유롭고 번영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인은 헌법 개정 절차에 관하여도 이것이 어떤 정당이나 단체 등의 범주 안에서만 처리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어떤 이해 관계자들 간의 편의적인 타협의 산물이 되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믿습니다.
현재 국회를 위시하여 각계각층에서 헌법 문제에 관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훌륭한 구상과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하여 마지않습니다. 국가의 최고 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의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 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면한 난국의 수습과 헌법 문제의 중요성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본인으로서는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어서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제반 조치를 착실하게 취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현행 헌법의 시행에 있어 시대적 변천과 국민적 요망에 부응하는 운용의 필요성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적어도 본인은 앞으로 이러한 자세로 임할 방침임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여하간 헌법 논의에 있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론의 최대 공약수를 귀납하는 데 상호 협력해야 할 것이며, 국민 모두가 국법 질서를 확립하여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가운데 시국난과 정치적 입장에 관한 소이에 집착하지 말고 자제와 호양과 신뢰로 화합함으로써 국민적 합의 기반을 형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사회의 튼튼한 안정 기반이 곧 앞으로 닥쳐올 경제 난국을 타개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해와 인내와 협조로 정부와 국민이 다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런 때일수록 사회 각 분야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안정과 발전의 요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1980년대를 맞이하는 역사의 큰 전환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3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이미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생 공업 국가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자치 체제의 불안정이 초래됨으로써 부분적으로 마찰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우리가 희구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하의 발전 과제와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외형적인 제도의 모방만으로는 정착되기 어렵고, 먼저 국가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합리화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대한 책임, 권리에 대한 의무 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문명 국가의 불가결의 요건은 법치 국가의 국민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적응 능력을 기르면서, 제반 문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또 우리의 기약하는 바 국가 발전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본인은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위한 국민적인 참여의 영역을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와 경험을 시국 타개와 국정 운영에 동원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본인이 거듭 말한 대로 국민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듣기 위하여 그들과의 대화를 폭넓게 갖고자 하며, 또 국정의 기본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정계 원로, 중진, 그리고 인격과 덕망이 겸비된 분들로 구성되는 기구를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국난과 파경을 겪어 왔으나, 그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스스로의 생존과 문화 전통을 수호하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번의 국가적 시련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과 단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또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인내와 자제로 대동단결하여 보다 차원 높은 국가 건설에의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도도한 대하를 형성하듯 우리 국민 모두가 영광된 조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 같이 전진해 나갑시다.
1979년 12월 21일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본인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에 즈음하여, 먼저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방금 본인은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선서를 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다시 한번 통감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돌연한 서거 후, 우리 정부와 국민은 경악과 충격과 애도 속에서도 국장을 엄수하고, 그 뒤의 사태들에 냉철하게 대처하여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우리 군은 철통같은 전후방 방위 태세를 유지하였으며, 미 국방부는 신속한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취하여 대한 방위 공약의 확고함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정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염원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지난 12월 6일 합헌적 절차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국내 정세의 추이와 더불어 우리 나라를 둘러싼 주변 정세와 국제 환경의 험난한 현실에는 완화나 호전의 징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갖가지의 어려움이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0.26 사태 후 계속되고 있는 대내의 문제들과 상관 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당면한 국가적 난국의 심각성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대립과 분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국제 정치 전반에 걸쳐 격동이 야기되고 있으며,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마저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 경제는 각국마다 자국의 권익 옹호를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제 정치 면의 불안을 반영하여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자의 중동 사태에 연유한 석유 파동은 잇단 원유 가격의 앙등뿐만 아니라, 공급 사정의 악화를 수반함으로써 세계 경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특히 한국과 같은 비산유 개발 도상국들에게 극심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주변 정세도 여전히 복잡하고 유동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에 편승하여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 온 북한 공산 집단은, 특히 10.26 사태 후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자 모략과 선동을 격화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모한 군사적 도발마저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민 여러분에게 우리 나라는 비상 시국에 처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내외 현실을 직시할 때, 국기를 튼튼히 다지면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해야 할 현 정부의 소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끄는 현 정부는 국난 타개를 위한 [위기 관리 정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배경과 인식에 입각하여 본인은 앞으로 국정의 기본 목표를 국가 안전 보장을 공고히 하고, 사회 안정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며, 국민 생활의 안정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착실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여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데 두고자 합니다.
먼저 국가의 안전 보장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계속 추진하면서 전국 군 장병의 사기를 진작하여 자주 국방 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우리 국군은 그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고, 정연한 통솔 지휘 체제에서 국토 방위의 초석이 될 결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안보·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한·미 간의 우호 협력 관계를 더욱 증진하고 양국 간의 상호 방위 협력 체제를 공고히 하며 한미연합군사령부의 효율적인 운영 등에 힘쓸 것입니다.
대일 관계에 있어서는 한·일 간의 우호 협력 관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긴요하다는 공동의 인식하에 양국 간의 선린 협력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정부는 기타 우방들과도 기존 우호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나라들에 대한 문호 개방 정책을 촉진해 나갈 것입니다.
비동맹 제국과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도 증진하여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지지 기반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한편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우리 측의 정책 기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앞으로도 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 의한 남북조절위원회의 재개와 남북 적십자 회담의 재개, 남북한의 경제 및 기술 교류를 위한 관계 각료 회담의 개최,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 간 회담, 그리고 남북한 및 미국의 3당국 회의의 개최 등 우리 측의 일련의 대화 제의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북한 측이 이상의 어느 방식의 대화이든 간에 조속히 응해 올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국가의 안전 보장을 굳건히 하기 위한 대내외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화된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 대립과 분열이 파생되어 무질서와 혼란이 조성된다면 국가 방위 능력을 저상시키게 될 뿐만 아니라, 북한 공산 집단의 오판을 낳게 하여 그들의 대남 도발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국법 질서의 유지와 공공의 안녕 확보 등 사회 안정 기반을 다지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 중에서도 세계적인 경제난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시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바 국제 경제의 혼미와 침체는 앞으로 각국의 경제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물가고와 저성장, 교역의 부진과 실업 증대 등의 현상을 심화할 것이 예측되며, 개방 체제인 우리나라의 경제도 이에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국제 경제의 여건은 내년도 우리 나라의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게 될 것이며, 예컨대 원자재 가격의 앙등 등으로 인한 수출 신장력 둔화, 성장률의 저하, 그리고 고용 면의 문제 등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경제는 거듭되는 석유 가격 앙등으로 추가적 부담이 가중되어 국제 수지의 불균형이 더욱 확대될 것이 우려됩니다.
최근의 원유 가격의 동향으로 보아 내년도 원유 확보에 따른 추가적인 부담이 30억 불에 달할 경우마저 상정되고 있습니다. 단언하면 이는 우리 국민의 소득이 그만큼 삭감당함을 뜻하며, 국민 생활에 큰 어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처하여 정부는 외부의 충격을 가능한 한 완화 흡수 하여 우리 경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국민 생활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하여 기술 및 과학의 진흥에 힘쓰면서 범국민적인 에너지 절약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정부의 힘만으로는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이룩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정부와 국민 전체, 그리고 노동자와 기업인이 각기 참고 견디며, 근검절약하는 가운데 혼연일체가 되어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우리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는 한편, 시대적 변천에 대응하여 점진적인 변화와 향상을 추구해 나가야 할 정치적 발전의 과제도 안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11월 10일 '시국에 관한 특별 담화'에서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정치적 발전 문제에 관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또한 본인은 이 문제가 신중하고도 진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한시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합헌적 절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 같은 본인의 소신에는 현재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우선 이 기회에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발전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는, 지금의 국가적 현실을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옳게 파악하고,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연속성을 지닌 우리의 미래를 용의주도하게 설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정치적 발전을 기함에 있어서는 당면한 위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국가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면서 신중하고 착실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8·15 해방 이후 우리의 헌정사를 잠깐 회고해 보건대, 국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의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여 시행하여 왔습니다.
1952년 7월에는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으며, 4·19 후 1960년 6월에는 내각 책임제 헌법이 채택된 바 있었습니다.
이때 개정된 헌법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불안도 있었고 우리의 적응 능력도 미흡하여 이 제도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함으로써 정국의 불안정과 혼란이 거듭되고, 1년도 못 가서 결국 헌정의 중단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16 군사 혁명 후, 1962년 12월에는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이 있었고, 1972년 12월에 현행 헌법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개헌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한번도 정부의 평화적인 이양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또 경제적·사회적 성장과 정치적 성장 간에는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양자 간에 항상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금후의 헌법 개정에 있어서는 이 같은 우리 헌정사의 과오를 깊이 자성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국가적인 견지에서 장래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또 지속성 있는 민주 발전의 기틀이 되는 그러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전제에서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의 분단으로 말미암은 남북한의 대치라는 냉엄한 상황하에서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고 국가 안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헌법이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정치권력의 남용과 부패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극단적인 국론의 분열과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소지가 있는 헌법이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회 정의와 형평의 구현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 하겠으나, 이것이 우리의 자유 경제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결과를 빚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회 균등의 원칙하에 개인의 창의와 노력을 존중하여 사회적 활력을 고무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 자유롭고 번영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인은 헌법 개정 절차에 관하여도 이것이 어떤 정당이나 단체 등의 범주 안에서만 처리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어떤 이해 관계자들 간의 편의적인 타협의 산물이 되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믿습니다.
현재 국회를 위시하여 각계각층에서 헌법 문제에 관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훌륭한 구상과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하여 마지않습니다. 국가의 최고 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의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 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면한 난국의 수습과 헌법 문제의 중요성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본인으로서는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어서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제반 조치를 착실하게 취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현행 헌법의 시행에 있어 시대적 변천과 국민적 요망에 부응하는 운용의 필요성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적어도 본인은 앞으로 이러한 자세로 임할 방침임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여하간 헌법 논의에 있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론의 최대 공약수를 귀납하는 데 상호 협력해야 할 것이며, 국민 모두가 국법 질서를 확립하여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가운데 시국난과 정치적 입장에 관한 소이에 집착하지 말고 자제와 호양과 신뢰로 화합함으로써 국민적 합의 기반을 형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사회의 튼튼한 안정 기반이 곧 앞으로 닥쳐올 경제 난국을 타개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해와 인내와 협조로 정부와 국민이 다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런 때일수록 사회 각 분야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안정과 발전의 요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1980년대를 맞이하는 역사의 큰 전환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3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이미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생 공업 국가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자치 체제의 불안정이 초래됨으로써 부분적으로 마찰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우리가 희구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하의 발전 과제와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외형적인 제도의 모방만으로는 정착되기 어렵고, 먼저 국가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합리화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대한 책임, 권리에 대한 의무 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문명 국가의 불가결의 요건은 법치 국가의 국민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적응 능력을 기르면서, 제반 문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또 우리의 기약하는 바 국가 발전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본인은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위한 국민적인 참여의 영역을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와 경험을 시국 타개와 국정 운영에 동원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본인이 거듭 말한 대로 국민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듣기 위하여 그들과의 대화를 폭넓게 갖고자 하며, 또 국정의 기본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정계 원로, 중진, 그리고 인격과 덕망이 겸비된 분들로 구성되는 기구를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국난과 파경을 겪어 왔으나, 그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스스로의 생존과 문화 전통을 수호하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번의 국가적 시련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과 단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또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인내와 자제로 대동단결하여 보다 차원 높은 국가 건설에의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도도한 대하를 형성하듯 우리 국민 모두가 영광된 조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 같이 전진해 나갑시다.
1979년 12월 21일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12. 관련 단체
13.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8080> | 최규하 관련 문서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 일생 | 일생 | ||
가족 | 아버지 최양오 · 어머니 이응선 · 아내 홍기 · 아들 최윤홍 · 아들 최종석 · 딸 최종혜 | |||
역대 선거 | 제10대 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10.26 사건 · 12.12 군사반란 · 5.17 내란 | |||
관련 단체 | 박정희 정부 · 최규하 정부 · 외무부 | |||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최규하 정부와 관련된 문서는 틀:최규하 정부 참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order-left: 10px solid #808080; border-right: 10px solid #808080" {{{#!wiki style="margin: 0 -2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color=#808080><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 인사 · 통일주체국민회의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
타임라인 | ||
1979년 | 제10대 대통령 선거 최규하 당선 · 긴급조치 9호 해제 · 12.12 군사반란 (하나회 실권 장악) | |
1980년 | 1980년 의주 지진 · 5.17 내란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 5.18 민주화운동 ·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김재규 사형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조직 · 최규하 대통령 하야 및 최규하 정부 해산 | |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최규하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최규하 참고 |
{{{#!wiki style="margin: -15px -10px -21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43%" | <tablebordercolor=#fff,#191919><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7%"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3764><tablebgcolor=#003764>외교부 제1차관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외무부차관 (1948~1998) | |||||||||
<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고창일 | 제2대 조정환 | 제3대 박암 | 제4대 갈홍기 | 제5대 조정환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nopad> 장면 내각 | ||||||||
제6대 김동조 | 제7대 최규하 | 제8대 이수영 | 제9대(정무) 우희창 | 제9대(사무) 김용식 | ||||||
<nopad> 장면 내각 | <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송요찬 내각 | <nopad> 박정희 내각 | |||||||
제10대(정무) 김재순 | 제10대(사무) 이수영 | 제11대 박동진 | 제12대 이원경 | |||||||
<nopad> 김현철 내각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13대 최문경 | 제14대 정일영 | 제15대 문덕주 | 제16대 김영주 | 제17대 진필식 |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
제18대 윤석헌 | 제19대 노신영 | 제20대 윤하정 | 제21대 이민용 |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22대 김동휘 | 제23대 노재원 | 제24대 이상옥 | 제25대 오재희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nopad>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
제26대 박쌍용 | 제27대 신동원 | 제28대 유종하 | 제29대 노창희 | |||||||
<nopad> 문민정부 | ||||||||||
제30대 홍순영 | 제31대 박건우 | 제32대 이시영 | 제33대 이기주 | |||||||
외교통상부차관 (1998~2005) | ||||||||||
<nopad> 국민의 정부 | ||||||||||
초대 선준영 | 제2대 반기문 | 제3대 최성홍 | 제4대 김항경 |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 <nopad> 참여정부 | |||||
제5대 김재섭 | 제6대 최영진 | 제7대 이태식 | ||||||||
외교통상부 제1차관 (2005~2013) | ||||||||||
<nopad> 참여정부 | ||||||||||
제8대 이태식 | 제9대 유명환 | 제10대 조중표 | }}} {{{#!wiki style="margin: -33px -1px -11px" | <nopad> 이명박 정부 | ||||||
제11대 권종락 | 제12대 신각수 | 제13대 박석환 | 제14대 안호영 | |||||||
외교부 제1차관 (2013~현재) |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
초대 김규현 | 제2대 조태용 | 제3대 임성남 |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4대 조현 | 제5대 조세영 | 제6대 최종건 | 제7대 조현동 |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8대 장호진 | 제9대 김홍균 | |||||||||
외교부장관 · 외교부 제2차관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외무부장관 (1948~1998)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
초대 장택상 | 제2대 임병직 | 제3대 변영태 | 제4대 조정환 | 제5대 허정 | |
<nopad> 장면 내각 | <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송요찬 내각 | <nopad> 김현철 내각 | ||
제6대 정일형 | 제7대 김홍일 | 제8대 송요찬 | 제9대 최덕신 | 제10대 김용식 |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11대 정일권 | 제12대 이동원 | 제13대 정일권 | 제14대 최규하 | 제15대 김용식 |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16대 김동조 | 제17대 박동진 | 제18대 노신영 | 제19대 이범석 | 제20대 이원경 | |
<nopad>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nopad> 문민정부 | |||
제21대 최광수 | 제22대 최호중 | 제23대 이상옥 | 제24대 한승주 | ||
<nopad> 문민정부 | |||||
제25대 공로명 | 제26대 유종하 | ||||
외교통상부장관 (1998~2013) | |||||
<nopad> 국민의 정부 | |||||
제27대 박정수 | 제28대 홍순영 | 제29대 이정빈 | 제30대 한승수 | 제31대 최성홍 | |
<nopad> 참여정부 | <nopad> 이명박 정부 | ||||
제32대 윤영관 | 제33대 반기문 | 제34대 송민순 | 제35대 유명환 | 제36대 김성환 | |
외교부장관 (2013~현재) |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37대 윤병세 | 제38대 강경화 | 제39대 정의용 | 제40대 박진 | 제41대 조태열 | |
조선 예조판서 · 대한제국 외부대신 · 임시정부 외무부장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24f 0%, #003478 20%, #003478 80%, #00224f); color:#C39335"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국무총리 서리 (1948~2004) | ||||
<nopad> 이승만 정부 | |||||
이윤영 | 신성모 | 백낙준 | 이윤영 | 백두진 | |
<nopad> 허정 내각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김도연 | 최규하 | 박충훈 | 남덕우 | 유창순 | |
<nopad> 전두환 정부 | |||||
김상협 | 진의종 | 노신영 | 이한기 | 김정렬 | |
<nopad> 노태우 정부 | <nopad> 국민의 정부 | ||||
이현재 | 강영훈 | 노재봉 | 정원식 | 김종필 | |
<nopad> 국민의 정부 | |||||
이한동 | 장상 | 장대환 | 김석수 | ||
국무총리 직무대행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허정 | 이갑성 | 백한성 | 이한빈 | 신병현 | |
<nopad> 문민정부 | <nopad> 국민의 정부 | <nopad> 참여정부 | |||
정재석 | 이헌재 | 정윤철 | 이상주 | 이헌재 | |
<nopad> 참여정부 | <nopad> 이명박 정부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
한덕수 | 권오규 | 윤증현 | 최경환 | 유일호 |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홍남기 | 추경호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24f 0%, #003478 20%, #003478 80%, #00224f); color:#C39335" {{{#!wiki style="margin: 0 -10px -5px;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rowcolor=#003478,#C3933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이범석 | 장면 | 장택상 | 백두진 | 변영태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허정 | 장면 | 최두선 | 정일권 | 백두진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김종필 | 최규하 | 신현확 | 남덕우 | 유창순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김상협 | 진의종 | 노신영 | 김정렬 | 이현재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강영훈 | 노재봉 | 정원식 | 현승종 | 황인성 |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이회창 | 이영덕 | 이홍구 | 이수성 | 고건 | |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김종필 | 박태준 | 이한동 | 김석수 | 고건 | |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이해찬 | 한명숙 | 한덕수 | 한승수 | 정운찬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김황식 | 정홍원 | 이완구 | 황교안 | 이낙연 |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정세균 | 김부겸 | 한덕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color:#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허정 | 곽상훈 | 허정 | 백낙준 | 박정희 | |
최규하 | 박충훈 | 고건 | 황교안 | 한덕수 | |
}}}}}}}}}}}} |
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949 이승만 | 1949 이시영 |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 1953 장제스 | ||
1955 하일레 셀라시에 | 1957 응오딘지엠 | 1958 아드난 멘데레스 | 1962 허위 | ||
1962 김좌진 | 1962 오동진 | 1962 조병세 | 1962 안중근 | ||
1962 윤봉길 | 1962 이준 | 1962 강우규 | 1962 김구 | ||
1962 안창호 | 1962 신익희 | 1962 김창숙 | 1962 손병희 | ||
1962 이승훈 | 1962 한용운 | 1962 최익현 | 1962 이강년 | ||
1962 민영환 | 1964 더글러스 맥아더 | 1964 해리 S. 트루먼 |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 1965 다비드 다코 | 1965 수루-미강 아피디 |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 1965 레옹 음바 |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 1965 하마니 디오리 | ||
1965 조모 케냐타 | 1965 무테사 2세 |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 1965 툰쿠 압둘 라만 | ||
1966 타놈 키티카초른 | 1966 쑹메이링 | 1966 천궈푸 | 1968 쑨원 | ||
1968 천치메이 |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 1970 조만식 | 1976 임병직 | ||
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 1979 박정희 | 1980 최규하 | 1981 시리낏 끼띠야꼰 | ||
1981 푸미폰 아둔야뎃 | 1983 | 1989 김규식 | 1989 조소앙 | ||
1999 장면 | 2008 여운형 | 2019 유관순 | 2021 홍범도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
대한민국 보수 진영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
권성동(대행) | 허은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정치인 | 대통령 |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이명박 · 박근혜 · 윤석열 | |
부통령 | 이시영 · 함태영 | |||||
대통령 후보 | 김구 · 김종필 · 이회창 · 이인제 · 홍준표 · 안철수 · 유승민 | |||||
국무총리 | 이범석 ·장택상 · 백두진 · 정일권 · 허정 · 김종필 · 최규하 · 신현확 · 박충훈 · 남덕우 · 김상협 · 노신영 · 이현재 · 강영훈 · 정원식 · 황인성 · 이회창 · 이수성 · 고건 · 한승수 · 김황식 · 정홍원 · 황교안 · 한덕수 | |||||
국무위원 | 1공 · 3공 · 4공 · 5공 · 노태우 · 문민 · 이명박 · 박근혜 · 윤석열 | |||||
소속 정치인 | 부통령 · 국무총리 · 국회의원 · 광역자치단체장 · 기초자치단체장 · 지방의회의원 | |||||
기타 | 국회의장 · 국회부의장 · 감사원장 · 교육감 | |||||
계파 | 친윤 · 친홍 · 친안 · 친유 · 한동훈계 · 오세훈계 · 이준석계 · 역사 | |||||
집권 정부 | 이승만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문민 · 이명박 · 박근혜 · 윤석열 | |||||
역사 | 1공-4공 · 5공-문민 · 국민 · 참여 · 이명박 · 박근혜-현재 | |||||
현존 원외정당 | 공화당 · 국민통합연대 · 내일로미래로 · 대한국민당 · 한국국민당 | |||||
정당연대 | 국제민주연합 · 선진과 창조의 모임 · 민주통합의원모임 | |||||
다른 진영 관련 문서 (진보 · 민주당계)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835B38; border-right: 10px solid #835B38; text-align: center; margin: -0px -11px; margin-top: -12.5px; margin-bottom: -6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17px;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display: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bgcolor=#ffffff,#1f2024> |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f2024> |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835B38; border-right: 10px solid #835B38;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181818,#e5e5e5 | 직위 | 명단 | ||
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835B38> 김유택 → 장기영 → 박충훈 → 김학렬 → 태완선 | |||
국토통일원장관 | 신태환 → 김영선 | |||
외무부장관 | 정일권 → 이동원 → 정일권 → 최규하 → 김용식 | |||
내무부장관 | 엄민영 → 양찬우 → 엄민영 → 이호 → 박경원 → 오치성 → 김현옥 | |||
재무부장관 | 박동규 → 이정환 → 홍승희 → 서봉균 → 김정렴 → 김학렬 → 서봉균 → 황종률 → 남덕우 | |||
법무부장관 | 민복기 → 권오병 → 이호 → 배영호 → 신직수 | |||
국방부장관 | 김성은 → 최영희 → 임충식 → 정래혁 → 유재흥 | |||
문교부장관 | 고광만 → 윤천주 → 권오병 → 문홍주 → 권오병 → 홍종철 → 민관식 | |||
농림부장관 | 원용석 → 차균희 → 박동묘 → 김영준 → 이계순 → 조시형 → 김보현 | |||
상공부장관 | 이병호 → 박충훈 → 김정렴 → 이낙선 | |||
건설부장관 | 정낙은 → 전예용 → 김윤기 → 주원 → 이한림 → 태완선 → 장예준 | |||
보건사회부장관 | 박주병 → 오원선 → 정희섭 → 김태동 → 이경호 | |||
교통부장관 | 김윤기 → 안경모 → 박경원 → 강서룡 → 백선엽 → 장성환 → 김신 | |||
체신부장관 | 홍헌표 → 김홍식 → 김병삼 → 박경원 → 황종률 → 김태동 → 김보현 → 신상철 | |||
공보부장관 → 문화공보부장관 | 김동성 → 이수영 → 홍종철 홍종철 → 신범식 → 윤주영 | |||
총무처장관 | 이석제 → 서일교 | |||
과학기술처장관 | 김기형 → 최형섭 | }}}}}} }}}}}}}}} |
[1] 음력 1919년 6월 19일[2] 지번: 봉산동 836-1.[3] 서교동 467-5.[4] 취임 전까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2월 6일)[5] 재보궐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당선 확정과 동시에 임기 시작. 관보. 1984년 12월 26일로 예정된 박정희의 잔여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6] 신군부 압박으로 사임[7] 경주계-낭장공파 35세손 ○하(○夏) 항렬이다.
(족보(1)족보(2)족보(3)족보(4))[8] #[9]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1983년 84세로 사망.[10] 족보상으로는 차남이며, 남동생으로 최명하, 최중하 등이 있다.[11] 현 쓰쿠바대학.[12] #[13] 다만 여러 언론에서는 종교가 유교로 표기되기도 한다.[14]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장신이다. 대통령 임기 중엔 노화로 키가 줄어 178cm였다. 출처[15] 하늘 아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란 의미이다.[16] 現 원주초등학교, 3학년 월반 입학.[17] 現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18] 現 쓰쿠바대학.[19] 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20] 조정환 전 장관 사퇴 후 해가 넘어가도록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아 꽤 오랫동안 직무대행을 했다. 이때문에 외무부장관이 1순위로 겸직하던 수석국무위원(국무총리의 대체 직책)도 차순위자인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이 겸직했으며, 후임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직전인 1960년 4월에야 임명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이었다. 본인의 직속 상사도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본인도 훗날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가 진짜 대통령까지 되는 상당히 기묘한 인연이라 볼 수도 있다.[21]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 위장 조직.[22] 전임자 박정희 피살.[23] 헌법상 당연직.[24] 대표적으로 윤보선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압박 등으로 사퇴한 후에도 이후 제3공화국 체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한 반면 최규하는 취임 시부터 새 헌법이 마련되면 자신은 후임자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퇴임하겠다고 발표했고, 사퇴를 발표한 후에도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25] 계엄령도 실제로는 전국이 아니라 부분 계엄령으로 관리를 군에게 넘겼다. 실권이 없었다고 해도 형식적이라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그의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26] 2004년 영면하여 선영에 묻혀있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되었다.[27] 사진 블로그 발췌[28]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
1980.8.16. 대통령 사임.[29] 대통령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도 10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30] 실권 행사 자체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12일까지.[31] 대통령기록관엔 178cm로 적혀있으나 이는 말년에 줄어든 키로 보이며 실제로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최규하가 지팡이를 짚고 있음에도 173cm인 김대중은 물론 178cm인 노태우와도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10년대생의 평균 키가 162cm였으니 평균보다 무려 20cm나 큰, 평균 키가 174cm인 요즘으로 치면 195cm가 되는 엄청난 장신이다.[32] 90kg인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33] 윤보선 전 대통령은 제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이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다.[34]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노태우가 세 번째,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노무현이 네 번째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이 된다.[35] 김종필, 이회창 등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까지 나갔거나 박충훈 서리, 허정, 고건, 황교안처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한 적은 있어도 실제로 된 것은 최규하가 유일하다.[36] 현재까지 13명의 대통령 중 최규하 포함 9명이 사망했고 3명이 생존해 있는데, 사망한 9명 중 4명은 서울현충원 안장, 윤보선, 노무현, 전두환, 노태우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았다.[37] 다만 만난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1972년 11월 3일 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위원장과 보좌단이 김일성 등 북한 요인들과 기념 촬영. 왼쪽부터(당시 직함) 최규하 청와대 특별보좌관, 김일 북한 내각 제1부상,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성 북한 내각수상, 장기영 부총리.[38] 1991년~2005년까지는 전직 대통령 사망 등으로 속보가 나오지 않았다.[39] 최규하가 1919년생이고 영부인인 홍기가 1916년생으로 3살이 더 많다. 이 타이틀은 2살 연상의 영부인을 둔 김대중의 취임 전까지 최규하만 갖고 있었으나 김대중의 취임으로 유이한 타이틀 홀더가 됐다.[40] 이승만은 중혼, 윤보선과 박정희는 재혼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김대중이 재혼 대통령이 되었으며 박근혜는 미혼이었다.[41] 1979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전임 대통령인 박정희가 주관했고 1980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후임 대통령인 전두환이 주관했다. 그래서 영상 기록이 남아있는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부대 열중쉬어" 구령을 하는 장면이 없다.[42] 먼저 사망한 후임자를 포함할 경우 전두환이 7명으로 가장 많으나, 전두환은 이후 4명이 모두 사망한 후에 사망하여 생존 후임자는 세 명뿐이었다.[43] 이는 최규하가 퇴임 후 무려 26년간 생존했기 때문인데, 현재에도 타이 기록을 달성하려면 퇴임 후 최소 20년 이상 생존해야 하므로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참고로 퇴임 후 가장 오래 생존한 기록은 33년간 생존한 전두환이다.[44]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13호[45] 이 부분이 살짝 와전되어서 훗날 사북 사건으로 유명한 탄광을 방문한 뒤 저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규하가 총리 시절 탄광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사북 사건의 배경인 정선 탄광이 아닌 삼척군 장성읍(현재의 태백시) 장성광업소 탄광이다.[46] 최규하가 졸업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이다.[47] 권영민, <자네 출세했네>에서.[48] 2010년대 이후에는 9~6급 공무원(서기보, 서기, 주사보, 주사)을 통칭하는 호칭으로 '주무관'을 사용할 것이 권장되어 많이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사실 2020년대 이후에도 특히 노인 인구가 많은 시골 지자체 등에서는 '주사(님)'이라는 호칭을 흔히 쓰는 곳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사라는 호칭은 흔히 쓰이던 것이다. 하물며 최규하가 현역 대통령질 하던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이, '주사'가 바로 현장에서 일하는 말단 현역 공무원의 대명사였다.[49] '주사'에 대한 저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나이 지긋한 세대의 경우, 5급인 '사무관'에 대해서는 공무원 사회에서 슬슬 관리직의 초입에 들어서기 시작한 만만찮은 직급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경우가 많다.[50]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 역, 무인시대에선 경진 역.[51] 박정희에게 수시로 까이는 경우가 많아서 의도하지 않은 코믹함을 자아내었다. 이후 속편 제5공화국에서는 약간 코믹함을 가미해서 연기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건에 대해서 최규하에게 재가를 받으러 간 장면에서 나온 "국방장관을 찾아오세요."라는 대사의 톤이 상당히 다르다.[52] 야인시대에서 최동열 기자 역할을 맡은 그 사람이다.
(족보(1)족보(2)족보(3)족보(4))[8] #[9]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1983년 84세로 사망.[10] 족보상으로는 차남이며, 남동생으로 최명하, 최중하 등이 있다.[11] 현 쓰쿠바대학.[12] #[13] 다만 여러 언론에서는 종교가 유교로 표기되기도 한다.[14]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장신이다. 대통령 임기 중엔 노화로 키가 줄어 178cm였다. 출처[15] 하늘 아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란 의미이다.[16] 現 원주초등학교, 3학년 월반 입학.[17] 現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18] 現 쓰쿠바대학.[19] 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20] 조정환 전 장관 사퇴 후 해가 넘어가도록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아 꽤 오랫동안 직무대행을 했다. 이때문에 외무부장관이 1순위로 겸직하던 수석국무위원(국무총리의 대체 직책)도 차순위자인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이 겸직했으며, 후임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직전인 1960년 4월에야 임명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이었다. 본인의 직속 상사도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본인도 훗날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가 진짜 대통령까지 되는 상당히 기묘한 인연이라 볼 수도 있다.[21]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 위장 조직.[22] 전임자 박정희 피살.[23] 헌법상 당연직.[24] 대표적으로 윤보선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압박 등으로 사퇴한 후에도 이후 제3공화국 체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한 반면 최규하는 취임 시부터 새 헌법이 마련되면 자신은 후임자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퇴임하겠다고 발표했고, 사퇴를 발표한 후에도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25] 계엄령도 실제로는 전국이 아니라 부분 계엄령으로 관리를 군에게 넘겼다. 실권이 없었다고 해도 형식적이라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그의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26] 2004년 영면하여 선영에 묻혀있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되었다.[27] 사진 블로그 발췌[28]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
1980.8.16. 대통령 사임.[29] 대통령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도 10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30] 실권 행사 자체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12일까지.[31] 대통령기록관엔 178cm로 적혀있으나 이는 말년에 줄어든 키로 보이며 실제로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최규하가 지팡이를 짚고 있음에도 173cm인 김대중은 물론 178cm인 노태우와도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10년대생의 평균 키가 162cm였으니 평균보다 무려 20cm나 큰, 평균 키가 174cm인 요즘으로 치면 195cm가 되는 엄청난 장신이다.[32] 90kg인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33] 윤보선 전 대통령은 제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이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다.[34]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노태우가 세 번째,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노무현이 네 번째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이 된다.[35] 김종필, 이회창 등 유력한 대통령 선거 후보까지 나갔거나 박충훈 서리, 허정, 고건, 황교안처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한 적은 있어도 실제로 된 것은 최규하가 유일하다.[36] 현재까지 13명의 대통령 중 최규하 포함 9명이 사망했고 3명이 생존해 있는데, 사망한 9명 중 4명은 서울현충원 안장, 윤보선, 노무현, 전두환, 노태우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았다.[37] 다만 만난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1972년 11월 3일 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위원장과 보좌단이 김일성 등 북한 요인들과 기념 촬영. 왼쪽부터(당시 직함) 최규하 청와대 특별보좌관, 김일 북한 내각 제1부상,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성 북한 내각수상, 장기영 부총리.[38] 1991년~2005년까지는 전직 대통령 사망 등으로 속보가 나오지 않았다.[39] 최규하가 1919년생이고 영부인인 홍기가 1916년생으로 3살이 더 많다. 이 타이틀은 2살 연상의 영부인을 둔 김대중의 취임 전까지 최규하만 갖고 있었으나 김대중의 취임으로 유이한 타이틀 홀더가 됐다.[40] 이승만은 중혼, 윤보선과 박정희는 재혼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김대중이 재혼 대통령이 되었으며 박근혜는 미혼이었다.[41] 1979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전임 대통령인 박정희가 주관했고 1980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후임 대통령인 전두환이 주관했다. 그래서 영상 기록이 남아있는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부대 열중쉬어" 구령을 하는 장면이 없다.[42] 먼저 사망한 후임자를 포함할 경우 전두환이 7명으로 가장 많으나, 전두환은 이후 4명이 모두 사망한 후에 사망하여 생존 후임자는 세 명뿐이었다.[43] 이는 최규하가 퇴임 후 무려 26년간 생존했기 때문인데, 현재에도 타이 기록을 달성하려면 퇴임 후 최소 20년 이상 생존해야 하므로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참고로 퇴임 후 가장 오래 생존한 기록은 33년간 생존한 전두환이다.[44]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13호[45] 이 부분이 살짝 와전되어서 훗날 사북 사건으로 유명한 탄광을 방문한 뒤 저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규하가 총리 시절 탄광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사북 사건의 배경인 정선 탄광이 아닌 삼척군 장성읍(현재의 태백시) 장성광업소 탄광이다.[46] 최규하가 졸업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이다.[47] 권영민, <자네 출세했네>에서.[48] 2010년대 이후에는 9~6급 공무원(서기보, 서기, 주사보, 주사)을 통칭하는 호칭으로 '주무관'을 사용할 것이 권장되어 많이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사실 2020년대 이후에도 특히 노인 인구가 많은 시골 지자체 등에서는 '주사(님)'이라는 호칭을 흔히 쓰는 곳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사라는 호칭은 흔히 쓰이던 것이다. 하물며 최규하가 현역 대통령질 하던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이, '주사'가 바로 현장에서 일하는 말단 현역 공무원의 대명사였다.[49] '주사'에 대한 저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나이 지긋한 세대의 경우, 5급인 '사무관'에 대해서는 공무원 사회에서 슬슬 관리직의 초입에 들어서기 시작한 만만찮은 직급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경우가 많다.[50]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 역, 무인시대에선 경진 역.[51] 박정희에게 수시로 까이는 경우가 많아서 의도하지 않은 코믹함을 자아내었다. 이후 속편 제5공화국에서는 약간 코믹함을 가미해서 연기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건에 대해서 최규하에게 재가를 받으러 간 장면에서 나온 "국방장관을 찾아오세요."라는 대사의 톤이 상당히 다르다.[52] 야인시대에서 최동열 기자 역할을 맡은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