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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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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 No Mu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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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재임 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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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노무현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출생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2]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3]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4]
사망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양산부산대병원
묘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5]
재임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6]
서명 파일:zPX2CKE.png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성씨 광주 노씨 광주군계(파) 31대손[7]
부모 아버지 노판석[8], 어머니 이순례[9]
형제자매 3남 2녀 중 막내[10]
배우자 권양숙
자녀 노건호, 노정연
학력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병역 육군 상병 만기 제대 (제12보병사단)
종교 무종교[11]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3, 15
신체 167cm, 68kg, O형
약칭 }}}

1. 개요2. 약력3. 일생4. 평가5. 묘소6. 여담
6.1.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6.2. 이 많았던 대통령6.3. 국정원 여론 공작의 피해자6.4. 타살설6.5. 부른 노래6.6. 각종 타이틀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8. 어록9. 저서10. 가족 관계11. 선거 이력12. 소속 정당13. 대중 매체에서14. 관련 문서
14.1. 사건14.2. 발언14.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법조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최초의 고졸 인권 변호사로서 부림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입문하여,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명패사건 등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정치인으로서의 가치를 높였고,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 이듬해 2월 취임하게 된다.

선거 관련 발언 논란으로 인해 재임 중 헌정 사상 첫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 직무에 복귀하였다. 퇴임한 뒤 역대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친형 노건평 등 친인척의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그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지만[12]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루어졌으며, 국민장 기간동안 봉하마을과 전국 분향소에서 1000만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 본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기로 되어있었으나, 본인이 유서에서 화장해달라고 의사를 밝힘에 따라 5월 29일 발인 후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유골함은 정토원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7월 10일 봉하마을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되었다. 이 묘역은 2010년 국민박석설치를 시작으로 일종의 공원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의 최측근들, 그의 핵심 이념들을 공감하는 정치인들로 대표되던 친노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기 전에 형성되어 개혁국민정당과 새천년민주당에 있다가, 참여정부 출범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정권 2년차인 2004년에 있던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그에 따른 국민들의 심판으로 세력이 극대화되기도 했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지지도가 정권 후기에 크게 떨어져 '폐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로 추모 여론이 일어, 그의 사망 1주기와 선거 기간이 겹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등을 기점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빠르게 재결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친노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다, 노무현의 친구이자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을 구심점으로 뭉쳐 친문으로 재편됐고, 2017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그가 바라던 지역주의 해소가 상당부분 진척되는 등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 약력

3. 일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묘소

파일:external/www.knowhow.or.kr/600_1274438786-3-20100521195501.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wulldQXcAAMUEX.jpg
파일:故노무현 대통령 묘역.jpg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위치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 보건복지부(당시 보건복지가족부) 국가 보존 묘지 심의 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 보존 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달라”라는 부탁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25]

묘역은 봉하산에서 구해온 너럭 바위 위에 지관 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 묘판에는 故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가 적혀있다.

가끔씩 극우 사이트 회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부엉이 바위에 두부를 던지는 등 기행(奇行)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 묘소가 있는 곳에 배설물을 투척한 아주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한동안은 묘소 근처에 가는 건 불가능했으며,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 현재는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 갈 수 있다.

여담이지만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이다.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유서에는 작은 비석 하나 남기라고 했지만 가장 큰 비석을 남겨버린 셈.

6. 여담

6.1.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57294488.jpg
노무현과 함께하는 노사모.

국내 정치인 중 최초로 자발적으로 생성된 팬클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노사모 문서를 참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는 구심점이 사라진 탓에 인원이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중이다.[41]

6.2. 이 많았던 대통령

노무현은 노사모 등 그를 열렬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아군 못지 않게 적(안티)도 많았다. 우선 정치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의 사람들 및 정당(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늘 이념 공격을 받았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보수 진영은 노무현을 향해 공산주의자 따위의 이념 딱지를 붙이며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42]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재임시절 진보 진영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는 노무현과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보수 정치인이자 보수 정당이었고, 특히 한미 FTA이라크 전쟁에 한국군 첫 파병 등의 문제에 있어서 참여정부의 결정은 진보 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대통령 노무현은 ·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소위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이는 본인의 정치스타일이 문제였다. 아무나 적으로 돌리니 누구에게 환영받을수 있겠는가. 후술되지만 당장 대통령 되자마자 대북송금법을 공포하고, 1년도 안되서 민주당을 깨고 열우당을 만들었다.[43] 호남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호남이 내가 이뻐서 찍었냐 이회창 싫어서 찍었지."라는 소리를 해대고, 전남에 가서는 "전라도 정치인들과는 정치못해먹겠다."고 하고, 심지어 임기말 민주당계의 대선주자들을 저격한것 등은 노무현이 왜 적이 많았던 이유를 알수 있는 부분이다.

노무현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3당 야합 때 김영삼의 결정에 반대하며 갈라섰다. 김영삼도 이 사건 이후로 노무현과 사이가 극도로 멀어졌다.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김대중은 호남충청연합(DJP연합), 김영삼은 3당합당으로 얻은 PK/TK/충청의 넓은 지역기반을 지지층 및 아군으로 두었고, 이명박은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배경 덕에 당시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 대부분은 물론, (이후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하게 돼는)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세가 상당히 나왔던 데다, 출신지 자체가 PK와 TK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경북 포항이기도 하고, 김영삼 문민정부 당시, 정치 1번지라고 불리우는 서울시 종로구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업적 및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있어, PK-TK-수도권에서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아군으로 두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노무현은 완전 고립무원이었다.[44][45] 이는 노무현의 정치스타일의 문제도 컸다. 간단한 예로 대통령 된 후의 행적을 보자. 아군적군 없이 아무렇게나 대하면서 모조리 적으로 돌렸다.

DJ쪽 인사, 즉 동교동계에서도 노무현을 안좋게 보던 이들은 많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당시 한나라당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제일 먼저 문제 삼은 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이었는데, 당시 여소야대였던 정치 상황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노무현은 야당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노무현은 당시 한나라당이 주도하여 발의하고, 국회를 통과한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서명한 법안이 해당 법안이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1명을 제외하고 거부권 행사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에서는 노무현에게 섭섭함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여당이었던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46]

또한 "전라도 정치인들과 정치 못 해먹겠다"(관련기사)는 발언이 논란이 될 만큼 호남인사들과 갈등이 존재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따라왔던 친노세력인데도 그랬다.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법 사태 등을 거치며 민주당 내에는 동교동계를 위시한 구주류와 신주류인 친노계가 마찰을 밎었고, 결국 민주당 내 소장파가 주축이었던 친노계는 민주당 내 쇄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교동계 2선퇴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였고, 친노계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주류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이때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하고 당적을 열린우리당[47]으로 옮겼다. 이후 민주당은 여당에서 일순간에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은 정부에 더 불리한 구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도의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결국 2004년 탄핵사태를 맞이하게 된다.[48][49]

한편 한미 FTA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거치며 지지층 중 진보적 색채가 강한 사람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즉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다고 해서 중도층이나 보수층이 새로운 지지층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어서 지지율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후노무현은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였으나[50], 오히려 여당인 열린우리당[51]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노무현은 결국 여당 내에서의 탈당 요구를 받고서 결국 2007년 초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게 된다. 당시 여당 내에서 노무현에게 탈당 요구를 한 것은 2007년 말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 여당의 대선 준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된다는 인식이 여당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말기에는 언론사들도 거의 대부분 노무현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7년 1월 노무현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한다"면서 당시 청와대 기자실통폐합안을 제출하여, 진보와 보수 매체 전체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했다.(당시 진보 매체 프레시안 비판기사, 기사2), 공무원 기자접촉금지령을 내려서 취재를 원천봉쇄하려 하고, 공무원의 댓글을 독려했던 대통령의 언론관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임 대통령 이명박의 경우는 6.3 항쟁의 주역이면서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그 이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화려한 커리어로 인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김영삼에게 발탁된 것을 배경으로 한 상도동계 정치인 대부분의 지지, 연고지였던 수도권-PK-TK(PK와 TK의 접경지대였던 포항 출신인지라 양쪽에서의 지지를 모두 엄청나게 받을 수 있었다.)의 지지,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했던 한나라당 內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자들이 상당수 나와, 지지층이 엄청났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52]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여당 측[53] 대선 후보인 정동영마저도 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54][55] 정동영은 여당의 대선후보이면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편승해 노무현 대통령 심판론을 대통령 선거 의제로 설정하였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의 고질병인 이합집산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의원들마저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 강화와 권위주의를 허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국정철학은 한국 정치 특유의 경직된 권위주의를 해소하려 했으나[56][57] 반대로 시종일관 강경 일변도의 대언론 정책을 폈고, 결국 언론도, 지지층도, 국민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출입기자실을 폐지한 것은 그 예들 중 하나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2003년 한나라당(당시 야당) 당직자 회의에서 홍보위원장 박주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긴 게 개구리와 똑같다"라며 웃고 떠들었고,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자 "등신 외교"라고 하였다. 이에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은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라고 할 정도. 심지어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는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연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대놓고 욕을 해도 아무 일 없었다. 보수일간지 등은 "천격"이란 표현을 비롯해 다양한 비하 소재를 만들어 내었다. 후에 이명박정권 때 쥐박이, 박근혜정권 때 귀태나 닭근혜로서 미러링하게 된다. 대통령 노무현은 "자신을 욕하여 국민들이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욕을 하라"고 하였다.[58]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인터넷에서 댓글 한번 작성한 것만으로 경찰조사를 받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였던 것과 대조된다는 서술이 있었지만 짚고 가야할 것은 사이버모욕죄라는 것은 본래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법으로 2008년, 즉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 적용된 것으로 "단지 대통령을 욕했기에 체포되었다"며 편향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대통령을 욕했다"는 것보다, "특정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된 셈이다.참고1, 링크 참고2.물론 노무현에게 고인드립을 하는게 용서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이유는 있는 것.

6.3. 국정원 여론 공작의 피해자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2015년 2월, 국정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혐의에 대해 여론조작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일가가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을 꾸며내어[59] 언론에 흘린 주체가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라 주장한 것.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국정원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이인규는 훗날 자신이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라 밝혀 2탄을 예고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여론은 국정원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경제성과와 정책 방향성에 따른 반감에 따른 영향이 컸다고 볼 여지도 있다. 노무현에 대한 비난 분위기는 국정원이 어떻게 손을 써서 그렇다는 표현이 어려울 만큼 그의 임기 때부터 고질적었였을지도 모르기 때문.

이후에도 대형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민간 유저들과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검찰의 국정원 댓글 여론조작 수사) 그러나 공무원과 국정원 단독의 여론의 조작능력과 스케일이 여론상의 비율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규모에서 확대언급되는건 이들이 공직자였고, 그 공직자의 범주가 넓었다는 것이었다.

2013년 밝혀진 유명한 좌익효수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좌익효수의 재판결과, 모욕죄만 인정되었고 국정원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정원에서 국정원의 신뢰와 기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좌익효수 국정원 직원, 1심서 집행유예 선고...모욕죄 인정-국정원법 위반은 무죄") 이 판결은 여러 면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상당수 게시물은 증거부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10여 개의 게시물만 채택되었다. 좌익효수는 검찰에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국정원에 오래 근무했다. 국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이 끝나고 여소야대 국면이 이루어지자 국정원은 그를 해임시켰다. 2013년 사건이 밝혀지고 해임에 이르는데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디시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라는 대형커뮤니티를 사용하는 민간유저들의 반감정서는 타인을 통해 주도된 것과는 다르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기의 국정원이 저지른 범죄행각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국정원이 직접 주도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사후에도 짓밟기 위해 총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여지없이 다 드러났다.

국정원이 노무현에 대한 반감여론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냥 표현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체계적으로 이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는 대북공작금을 유용하여 소위 '연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의 음해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노 대통령을 모독하는 합성사진이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일베저장소 등에서는 'MC무현'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의 음성을 합성한다. 특히 '응디시티' 와 같은 곡들은 조회수를 1000만 정도 보여주었다.[60]

JTBC에서는 노알라 합성사진이 심리학자들의 조언과 설계에 따라 국정원이 직접 만들어 고인 비하를 주도하였다고 의혹을 게시하였다. 중앙일보 기사 - "노무현 코알라 합성 사진, 심리학자 자문받아 국정원이 제작" 다만 이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많은 공작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사망시까지가 피크였어야 하나 노알라는 2013년에 뜬금없이 일베에서 여러 합성사진 중 하나가 히트한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저 의혹제기의 출처도 한 사람의 증언에 불과하고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6.4. 타살설

타살설을 정리한 문서

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현재 공식 사인은 자살로 판정된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수십 미터에서 투신했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두개골이 파열되었음에도 목뼈는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 다른 신체부위의 타박상이 적고 출혈이 적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직도 노무현 타살설이 주장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10년이 지난 2019년 현재도 가끔씩 노무현 타살설이 언급되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 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은 부검도 없이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히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본래 자살 및 타살이라면 부검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유서에 쓰여 있는 '화장해라.'라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타살설이 확실할 경우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타살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당시 이명박 정부나 노무현의 정적들에게 노무현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노무현이 타살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무현은 실족사한 것인데 외부에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둔갑시켰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이 딱히 자살할 이유도 없었고, 타살당할 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위 타살근거 링크에 대해 몇가지 반박하자면,
1. 톨게이트 CCTV를 동영상으로 보면 통과하는 순간 경광봉이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분부터... 타살설에서는 이것이 피흘리는 손을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화질이며 재생퀄리티를 봤을 때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저화질 캡처가 아닌 '원조' 동영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근거라고 볼 수 없다. 경광봉은 화면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만약 원본이 피흘리는 손이었고 그 부분을 경광봉으로 덮어씌운 거라면 손의 움직임과 같아야 할텐데, 죽어가는 사람이 저렇게 날렵하게 손을 내밀 수 없다. 또한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 전까지 차체 밖으로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조작을 해야 하는데 이건 더 어렵다.
결정적으로, 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보면 차창 테두리에 기댄 게 아니라 들고 있는 것으로 명확히 확인이 되는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기절 혹은 사망한 사람의 팔이 저 각도로 튀어나오게 차 안에 눕히거나 앉히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공사장의 바람구멍. 이 의혹은 사진각도에 문제가 있다. 사진 3의 노란 점선은 위 사진 1, 2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한듯 하지만, 바람구멍이 있는 사진은 노란점선의 위치가 아니라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8을 보면 알 수 있듯 철재판넬이 같이 찍히기 위해서는 노란점선의 위치보다 상당히 내려와야 한다. 사진 1, 2를 봐도 바람구멍이 모든 칸마다 뚫려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길목 막판에 해당하는 사진7에 나오는 구멍들이 사진 1, 2에 나오는 바람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초적인 오류를 범하는 의혹에서, 몇월 몇일날 찍었다는 사진의 날짜가 확실한지도 의심스럽다.

3. 파일명을 가지고 악랄한 트집을 잡고 있다. 날짜를 착각했거나 전날 파일을 덮어서 계속 사용한 등의 일상적인 변수를 모두 제하더라도, 이 의혹은 '내일 노무현 암살'이라는 초S급 기밀이 일개 신문사 디자이너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하루 전날 로고를 미리 제작해둬야만 할 이유가 아예 없다.
또한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뉴스다. 시차발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23일은 LA에서는 아직 22일인 것이다. 의혹제기자는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군소언론의 특수성 혹은 실수를 마치 거대한 음모의 완벽한 증거인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미국 한인언론이 이 경우에만 어떤 대단한 이유로 조선일보와 동급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4. 병원 의혹에서 말하는 '1차진술'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5월 23일 당일 오전에 작성된 기사를 봐도 공식 브리핑에서 처음부터 의식불명이었다고 밝힌다. 기사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의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병원도 처음부터 다 짜고 죽어가는 사람 질긴 목숨을 끊으려 노력했다는 뜻일까? 신문사 디자이너에 이어 병원 간호사까지 공범이 확대되는 셈이다. 이정도 의혹은 그 어떤 것의 근거도 될 수 없다. 고작해야 '이상하다'고 갸우뚱거릴 수준인 것이다.

5. 각목의혹은... 각목에 맞았을 때 생기는 상처라서가 아니라 각목에 맞아서 생긴 상처라고 믿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이 세상 모든 11cm 상처는 각목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걸까. 당시 의료진은 두개골 골절 등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기사 뒤통수, 이마, 옆머리도 아니고 정수리에 11cm상처를 내려면 각목을 쓰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한다면 돌로 찍는 게 훨씬 용이하고 나중 상황과 연계하여 조작하기도 쉽지 않았을까?

6. 최하단 경호원을 의심하는 장문은 너무나 주관적인 의도가 드러난 소설이라 반박할 가치는 없다. 하지만 경호원을 1명만 데리고 산에 오른 것은 노무현 본인이고, 그렇게 수상한 경호원 데리고 가면서 길에 난 풀까지 뽑는 여유를 부린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경호원을 의심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넌센스지만...

6.5. 부른 노래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은 공식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 노래뿐만 아니라 기타를 직접 연주해보이기도 했다.

6.6. 각종 타이틀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7.1. 친노

파일:/news/200909/10/yonhap/20090910171612395.jpg

왼쪽에서부터, 정세균, 이해찬, 한명숙, 문재인[63]이 보이며 그 뒤로 또 다른 참모진들이 앉아있다.

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노무현이 초선의원이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계파이며, 2002년 노픙을 필두로 한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2004년 탄핵 사건등으로 인한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차지 등 2000년대 초~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6년부터 참여정부 심판론이 시작되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바닥을 쳤고, 결국 2007년 12월 정권재창출에 실패하며 친노는 정치계파에서 완전히 비주류로 전락하고 만다. 한 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사망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64]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띈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집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과 참여정부 시기의 문희상,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친문이나 안희정계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항목 참고.

7.2.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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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를 정치에 입문할 것을 제안했다.[65] 노무현은 김영삼의 제안을 받아들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66]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아직 앙심이 남아 있었는지,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7.3.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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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세력들은 서로 계파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 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 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 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 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중이었는데, 그 날 새벽 노무현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가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 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지 3개월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7.4.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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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이 간신히 이겼지만,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2002년 제16대 대선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민주 정부 2기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폄훼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최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MB 때문”이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실제로는 열린우리당이 통과시킨 뉴타운법을 이행했을 뿐인 이명박에게 뒤집어씌운것이다. 애초에 버블세븐에 뉴타운이 있었던가?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자본주의하에는 열배남는 장사도 있다.”고 일축, 탄핵 역풍으로 80% 이상이었던 지지율이 순식간에 40%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그 후 다시는 40% 지지율 근처에도 못가게 된다. 임기 내내 온갖 구설수와 정책실패, 대연정 등의 헛발질만 거듭한 끝에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7%의 득표율을 기록, 26.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67]

노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MB)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노 대통령은 그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인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점점 MB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더니, 2018년 들어 검찰의 칼끝이 MB 턱 밑까지 왔으며, 3월 14일에 검찰 출석을 하고 급기야 23일에는 구속되었다.

8. 어록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ㅡ2007.6.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재임 중 자신에게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말(시사저널 링크)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 2008년 4월 25일 방명록에서.[68]
"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 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ㅡ2006.8.28.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中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 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 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 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ㅡ2006.4.25.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69]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ㅡ2006.4.3.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ㅡ2002.4.27.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70]"
ㅡ2002.4.6. 새천년민주당 인천지역 국민경선 연설문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ㅡ2001.12.10. 제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출마 연설문(#)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열겠다."
ㅡ2000.4.1. 16대 총선 거리유세 中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연설 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ㅡ1988.7.8. 제 142회 임시국회 대정부질의 中
"대통령이 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렿게 하다가는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그 위기감이 생깁니다."
ㅡ 2003년 5월 21일 5.18 행사추진위 간부 접견 中 영상[71]
노무현: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유시민: 아, 오지요. 100% 오지요.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노무현: 아,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중략)
유시민: 근데 가시고 싶은 데까지 못 가실 수도 있죠. 그런데 언젠가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 거예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야 뭐 후보님이 거기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있나요?
노무현: 하긴 그래요.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2002년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이 유시민과 나눈 대화

9. 저서

10. 가족 관계

11.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통일민주당 53,075 (50.6%) 당선 (1위) [73]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민주당 30,397 (32.3%)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민주당 647,297 (37.6%)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통합민주당 17,330 (17.7%) 낙선 (3위)
1998 7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서울 종로) 새정치국민회의 26,251 (54.4%) 당선 (1위) [74]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새천년민주당 27,136 (35.7%) 낙선 (2위)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12,014,277 (48.9%) 당선 (1위) [75]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80414813.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15736454.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49839162.jpg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84896764.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18220471.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51290748.jpg[7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8년 7월 재보궐선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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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선거

12. 소속 정당

13. 대중 매체에서

대통령 집권 당시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주인공 프란체스카에게 표창장을 주는 영상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물론 직접 출연한 것은 아니고 다른 영상에 배우 심혜진이 연기한 영상을 합성하여 사용하였다.
파일:노무현변호인.jpg파일:노무현변호인2.jpg
송강호가 연기한 노무현 (영화 변호인)
2013년 그의 부림사건 시절 활약상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인 변호인이 개봉되었다. 송우석(노무현 모티브 캐릭터) 역할은 송강호가 연기했으며, 100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모으기도 했다.[77] 임시완이 연기한 진우는 부림사건 당시 고문받은 피해자 고모씨와 송모씨의 일화를 합쳐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몇몇 장면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참조)

위의 두 영화는 노무현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박근혜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상영관 축소 등 각종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각 영화 문서 내용을 참고할 것.

격동 50년에서는 최석필이상훈이 맡았다.[78]

파일:bikeroh_silhouette.png
노무현 다큐멘터리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노무현입니다
노무현과 바보들 물의 기억 시민 노무현

2016년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6년 더 킹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과 죽음은 영화의 전환점으로 작용하였으며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2017년 노무현입니다의 주역이 되었다.

2017년 오디오 드라마 그 사람 노무현에선 성우 홍진욱이 노무현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옛날에 이름 좀 날렸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등장하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청와대에 초청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상황이었는데, 하이킥 방영 당시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다. 1회성 출연에 배우 얼굴도 안 나오긴 했지만 해당 화 마지막 부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순재, 박해미가 찍은 사진까지 나왔으니 극 중 순재와 해미가 만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 맞다.[79]#

2019년 노무현과 바보들이 개봉하였고, 잇달아 봉하마을에서의 귀향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 물의 기억시민 노무현이 개봉했다. 2019년 상반기에만 노무현 관련 영화가 세 편 개봉한 셈.

14. 관련 문서

'참여정부'가 아닌, '노무현' 개인과 관련된 문서만 추가할 것.

14.1. 사건

14.2. 발언

14.3. 기타



[1] 전임자 이명박 자진사퇴[2] 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3] 생전 거주지.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이사온 집이다. 1997년부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선 후 청와대로 가면서 "꼭 6년 전 이사와 15대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짧은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라며 소회를 밝혔다고.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9길 24 현대하이츠빌라 302호. 해당 집은 전직 중소기업인에게 팔렸다고 한다.[4] 생전 거주지. 퇴임 후 이곳에서 지냈다. 정확한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출생지 건너편이다.[5]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생가 동쪽에 위치해있다.[6] 2004헌나1에 의한 직무 정지 기간: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7] 본관의 현재 위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8] 1900년 생. 1976년 타계.[9] 1914년 생. 1998년 타계. 아들이 정치인 되는 것은 보았지만, 대통령이 되는 것은 보지 못 하고 타계했다.[10] 노명자(이복누나), 김선밀(이부누나), 노영현, 노영옥, 노건평(친형제)[11] 공식적으로 무종교이나, 종교 이력은 다소 특이하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 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 커녕 성당에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 근처에 있던 사시를 공부했던 사찰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12] 처음에는 인근 김해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13] 학교에서 주선해준 회사로, 어망을 만드는 회사였다고 한다. 한달 반만에 퇴사한다. 이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고시공부를 시작한다.[14] 원래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가 전방 차출을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파월장병들 위주로 진급시켜주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복무 중이던 장병들은 병장을 못 달고 제대한 경우가 많았다고.[15] 두 사람의 합동법률사무소 내에 무료로 상담해주는 노동법률상담소도 있었다. 결국, 이 법률사무소는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다.[16] 이른바 5공 청문회 활동이다.[17] 안희정이 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18] 해마루 홈페이지. 국회의원 임기 만료 후 할 일이 없자, 천정배에 의해 스카웃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같이 일한 사람이 천정배, 전해철, 임종인이었다. 1998년까지 근무.[19] 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 전임자는 바로 이명박(이명박은 자진사퇴)이다.[20] 비학위과정[21] 비학위과정[22] 과거 자신이 일하던 법률사무소로 복귀한 셈이다.[23] 퇴임 후 첫 직함으로, 낙동강 개선을 위한 지역 환경 단체의 고문직을 맡았다.[24] 참고[25]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고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출처, 사진 블로그 출처)[26] 어차피 유명인들의 휘호는 그의 삶에 대한 평가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지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는 부차적 요소이긴 하다.[27] 모음은 휘갈겨 쓰면서도 가독성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자음은 큼직큼직하게, 구분이 확 되도록 쓰는게 고시체의 특징이다. 'ㄹ'자는 'ㅈ'과 구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한 획에 쓰지 않고 3획으로 쓰고, 'ㅁ'자는 'ㅇ'이나 'ㄹ'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 삐침을 강하게 주는 것 등이다.[28]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철 없던 시절,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있다. 그 외에도 길가던 아주머니들한테 음담패설을 하거나 노상방뇨를 했다는 등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이 내용자체는 자기자랑 같은 요소가 아닌, 철 없던 시절의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의 의미에서 나온 부분이다.[29]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60여명이었고,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부산의 변호사 수가 3명에 불과했다.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한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30]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300명, 700명, 그리고 1000명으로 늘어난 이후에도 고졸 출신 합격자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작 60명을 선발하던 시절에 고졸/상고 출신이 합격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노무현이 학창 학교를 다녔을때에는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도 시험쳐서 가야했던 시절이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하거나 부모님일을 도왔던 청소년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와 2010년대를 비교하는것은 사실 넌센스이기는 하다.[31] KBS의 前 아나운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인 김민석의 아내. 지금은 이혼했다.[32] "스머프 무슨 그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뭐..."[33]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이 이뤄졌을 당시의 발언이다. 헌데, 워낙 당시에는 원더걸스가 절대적인 존재였는지라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권영길 같은 다른 대선 후보들도 하나같이 같은 대답들로 일관했다.(...)[34] 유시민: 권 여사께서 담배 갖고 지청구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우리가 관저에 들어 갈 때면 우리와 어울려서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그러면 권 여사께서 말을 못하니까. 어느 한 날은 우리도 지청구를 들었다. 대통령이 담배를 많이 피우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권 여사가 나가시면 또 담배를 피우곤 했다.[35] 다만 대중의 이미지와는 달리 변호사의 업무는 주로 서면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모든 변호사가 꼭 달변인 것은 아니다. 그냥 노 대통령 본인이 연설을 잘했던 것이기도 하다.[36] 2018년 아셈 회의 때 친구 문재인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연설문 점검하고 손수 고치다가 포토타임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아셈의전 관계자 연락 받고 이동했으나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포토라인에서 빠진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37]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5.18 관련 기록집을 본 이후에 노무현의 감시역으로서의 임무에 회의를 느꼈고, 그걸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에게 털어놓자 감시자가 그래서야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이화춘이는 요즘 왜 안 오나 하면서 찾기도 했다고.[38] 이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연설문에서 군대 다녀온 뒤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다고 언급된다.[39] 80년만 해도 진보성향에 가까웠다. 우경화가 된 것은 시간이 지난 뒤의 일[40]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41] 반면 노사모에 비해 정치적 성격이 옅은 노무현 재단의 회원들이 증가하였다.[42] 심지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같은 당 내에서도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즉 16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경쟁자 진영에서는 노무현 당시 후보의 장인의 이력을 들어 색깔론 공세를 펼치기도 했었다.[43] 노무현이 당선됬던 16대 대선 빚은 민주당에 고스란히 남았다.[44] 영남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터전이었던 부산에서조차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호남도 전남권은 전부 동교동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라 불릴 지역은 전북밖에 없었기도 하다.[45] 특히 김영삼과 이명박의 경우 지지율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거의 압도적이다시피 했다.[46] 다른 얘기지만, 삼성공화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참여정부 말기 삼성X파일 특검법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47]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탈당파와 민주당 탈당파를 포함해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은 당대표나 당총재라는 이름 대신 의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은 정동영 의원이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원내대표를 맡았다.[48] 이 시기를 탄핵 정국이라고 하며, 여론은 기존 정당에 대한 비토로 들끓었으며 4월 총선에서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출처)[49] 실제로 동교동계에서는 현재도 노무현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거나 적대적인 인물의 경우도 수가 상당하다. 그 결과, 보수정당-동교동계 비노가 연합해서 노무현 탄핵 소추를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그 구 동교동계 비노 성향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당으로 김한길, 안철수와 같이 당적을 옮겼다.[50] 당시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21에서 사설로 노무현의 대연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정도였다.[51] 당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 간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책 방향이 모호할 뿐더러 참여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평이 높았다. 출처[52]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을 제외한 한나라당은 150석을 가볍게 획득했으며, 그 당선자 중 친이계-범친이계 정치인만 무려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45%에 달할 정도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엄청났다.[53]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는 여당이 없었다.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54] 원래 여당 후보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지리멸렬해지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 이건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이다. 부시가 임기 말년에 공화당 대선 후보들로부터 받은 푸대접은 눈물이 날 정도이다. 오바마가 힐러리와 자주 같이 다니는 건 그의 인기가 높아서이지 미국 정치가 선진적이어서가 아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팽당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은 임기 말에 스스로 만든 당에서 쫓겨났다. 민주화 이후 당적을 유지한 채 임기를 마친 최초 대통령이 후임인 이명박이다.[55] 사실 정동영도 노무현 정권의 일등 공신으로서 중반까지는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노무현은 정동영을 장관으로 임명시키며 대권 주자로 밀어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침을 두고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정동영도 노무현과 선을 긋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얻게 될 정도였다.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며 민주평화당 소속 국회의원이다.[56]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57] 국정원 독대를 받지 않았고, 검찰 권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58] 당시 노무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섰던 이상돈 교수는 저 정도면 잘못하면 사람이 죽고 임기를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후 이상돈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대위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 심판을 말하였다.[59] 노무현은 검찰에 피아제 시계를 권양숙이 밖에 내다버렸다고 진술했다.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노무현이 직접 망치로 깨부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노무현은 검찰에서 허위진술을 한 것이다.[60] 잘 알려진 대로 일베저장소가 주범이지만, 시작은 디시인사이드이다.[61]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사망 후에 노무현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62] 이전 문서엔 이 영상 속 노래의 제목을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실 똑같은 노래다... 카메라를 찍은 위치만 다를 뿐.[63] 정세균은 20대 국회 상반기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현재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문재인은 이들보다는 조금 늦은 2012년 정계에 입문해 대통령의 자리까리 올랐다. 현재 문재인은 친문이라는 별도의 계파를 이룬 상태이기도 하다. 한명숙은 2015년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2년, 피선거권 10년 박탈등의 처벌을 받으며 현재는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64] 친노이자 청와대 참모진을 거치고 더불어민주당의 전 당대표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된 문재인을 따르는 소위 '친문재인'까지 포섭하는 경향도 보인다.[65] 당시 문재인에게도 제안했지만,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66] 김영삼이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67] 역사상 최대의 득표율 차이였다. 군사독재때조차도 이정도의 차이를 낸적이 없다.[68] 깨어있는 시민과 더불어 현재 노무현의 가장 대표적인 어록 중 하나로 손꼽힌다.[69] 참고로 이 담화문은 노무현이 직접 일필휘지 한 것이라고.[70] 절묘하게도, 이 발언 직후에 연설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71] 이게 그 유명한 "대통령 못해먹겠다"의 원본이다. 조중동에서 앞뒤 다 자르고 보도해서 논란이 된 적 있다.[72] 노무현 대통령의 큰형이며, 부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법관의 길로 가게 도와줬다. 출생연도가 미상인데, 노무현 대통령의 형제자매들의 생년을 대충 끼워맞춰서 가정하면 1933년쯤으로 예상된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73] 초선[74] 재선. 전임자 이명박1998년 의원직 사퇴로 보궐선거. 우리가 아는 그 이명박이 맞다.[75] 2003.09.29 새천년민주당 탈당
2004.05.20 열린우리당 입당
2007.02.28 열린우리당 탈당
[76] 바로 앞의 선거 포스터에서 좌우만 바뀌었다.[77]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이다.[78] 최석필은 김종성이 해설할 때, 이상훈은 원호섭이 해설을 맡은 뒤 연기했다.[79] 물론 사진은 합성. 이 사진은 순재네 병원에 걸려 마지막화까지 뒷배경으로 쭉 등장한다.[80]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기 짐(이게 지금)'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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