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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대한민국 제52대 법무부장관 송정호 宋正鎬 | Song Jung-h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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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2년 7월 16일 ([age(1942-07-16)]세) | ||
만주국 펑톈성 펑톈시 (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 |||
본관 | 여산 송씨 | ||
현직 | 법무법인 한중 고문변호사 재단법인 청계 이사장 | ||
재임기간 | 제52대 법무부장관 | ||
2002년 1월 29일 ~ 2002년 7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배우자 | 김초원 | |
자녀 | 장남 송동훈, 차남 송동욱, 3남 송동준 | ||
형제자매 | 동생 송철호 | ||
학력 | 남성중학교 (졸업) 남성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61 / 학사)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 석사 수료) | ||
병역 | 대한민국 육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1968년 6월 22일 ~ 1971년 3월 31일)[1] | ||
약력 | 제6회 사법시험 합격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장 서울지방검찰청 공판부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법무연수원 기획부장검사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보호국장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삼성전기 사외이사 제52대 법무부장관 청계재단 이사장[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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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제52대 법무부장관.2. 생애
1942년 7월 16일 만주국 펑톈성 펑톈시(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경상남도 부산부로 온 가족이 이주했고,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전라북도 이리시[3]에 있던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1957년 남성중학교, 1961년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에 제6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1968년 6월 22일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1971년 3월 31일 대위로 전역하였고, 같은 해 청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첫 발령되었다. 1973년 대구지방검찰청, 1975년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 1978년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 1980년 수원지방검찰청 등지에서 검사로 근무하였다.
1982년 8월 16일부터 1983년 8월 16일까지 제25대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장, 1983년 8월 8일부터 1985년 3월 11일까지 제24대 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장을 역임하고 1985년 인천지방검찰청 형사1부장검사가 되었다. 1986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국가정책과정을 수료하였다.
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공판부장검사의 요직에 올랐다. 서울지방검찰청 공판부장검사로 재직할 당시 법원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힘썼다. 1988년 청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와 1989년 마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거쳐, 1990년 다시 상경하여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차장검사를 지냈다. 1991년에는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차장검사로 있었다.
1992년 8월 6일부터 1993년 3월 22일까지 제4대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 1993년 법무연수원 기획부장, 1993년 9월 21일부터 1994년 9월 15일까지 제35대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 1994년 9월 16일부터 1995년 9월 19일까지 제37대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1995년 9월 20일부터 1997년 1월 22일까지 제38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었다. 특히 부산지검장 재직시 투명한 업무 스타일로 지역에서 평판이 좋았으며, 부산시 건설본부 비리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1997년 법무부 보호국장이 되었고, 1997년 8월 10일부터 1998년 3월 18일까지 제27대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되었다. 비록 김영삼 정권 당시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일선 지검장만 두루 거치는 등 인사에서 소외 받았지만[4], 검사장 재직시 부드럽지만 원칙에 입각한 일처리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선후배들 모두에게 매우 온화한 성격의 검사로 기억되는 이유.
1998년 3월 19일부터 1999년 6월 3일까지는 제21대 법무연수원장을 지냈고, 1999년 6월 사법시험 두 회차 후배인 박순용[5]이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제6회 사법시험 동기들과 함께 검찰에서 퇴직하였다. 그 후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99년 9월부터 2002년까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통령직속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 2000년 삼성전기와 LG산전의 사외이사, 재정경제부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2002년 1월 29일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제52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어 2002년 7월 10일까지 재임하였다. 이 시절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의 비리와 관련해 상당한 외압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김홍업을 구속처리하면서 법무부장관직을 그만두고 나왔다. 이임 당시에 "160여 일의 짧았던 재임 기간이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물러난다"며 "수즉다욕(壽卽多辱) 이란 말이 있듯이 어려운 때일수록 장수하면 욕되는 일이 많은데 지금 물러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후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으로 변호사를 재개업하였고, 같은 해 법무법인 한중(韓中)의 고문변호사로 위촉되었다. 2003년에는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최고위언론과정을 수료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대선 후보의 후원회장을 지냈다. 이명박과 고려대학교 61학번 동기로, 고대 61학번 동기모임인 '61회' 멤버[6]로서 학창시절부터 이명박과 친구였기 때문.[7] 이명박이 BBK 사건으로 곤욕을 치를 때에는 검찰 후배인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BBK 관련 인맥을 샅샅이 뒤지고 김경준에 대한 검찰 수사를 24시간 모니터링해 당 차원의 대응 방안을 실시간으로 내놓는 등 이명박을 크게 도왔다. 그 덕분인지, 이명박 정부 초대 국정원장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본인이 고사했다. 2009년에는 고려아연의 사외이사와 이명박이 세운 청계재단의 이사장이 되었고, 2010년에는 대한공증협회장도 맡았다.
2011년 4·27 재보궐선거 이후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사의를 표하자, 후임 대통령실장 물망에 올랐다. 전북 익산에 연고가 있어서 지역 화합의 의미도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을 곁에서 지킨 문재인과 같은 콘셉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검토되었던 것.# 그러나 본인이 끝까지 고사하였다.[8]
3. 기타
- 항상 웃음이 가득한 모습과 같이 자상하고 온화한 성품이지만 업무수행에서는 치밀한 외유내강형의 성격이다. 주로 지방에서 지청장과 지검 차장을 등을 두루 역임한 야전출신의 실무통 검사로 합리적인 일 처리와 후배검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배로 평가받고 있다.
- 학구파로 수사관련 논문 '형사법상 폭행·협박에 관한 고찰' 등 연구논문이 많다.
- 친동생 송철호 변호사는 '울산의 노무현'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송정호와 같은 고대 동문이며, 참여정부에서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울산광역시장에 선출됐다. 지역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26년간의 도전이었다. 동생인 송변호사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부산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익산에서 8년 산 것 때문에 전라도로 찍혀 악성 지역주의 네거티브로 인해 연거푸 고배를 마셨었다.
- 집무실에서도 양복 상의와 구두를 절대 벗지 않고 소파에 잘 앉지 않는 업무 스타일로 유명했다.
- 부인 김초원씨와 사이에 아들만 셋을 두었다.
[1] 병무청공고제2002-18호(병역사항공개대상자병역사항공개) 45쪽 참조.[2]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그 재단이다.[3]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4] 다만 일선 지검장은 수사 지휘를 할 수 있고 고검장들은 수사 지휘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검장이 꼭 고검장에 비해 한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인사에서 소외받았다면 부장·차장검사에서 퇴직하지 지검장까지 오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5] 196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6]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유지담 전 대법관, 서경석 전 3군 부사령관, 김화남 전 경찰청장 등도 그 멤버이다.[7] 학창시절부터 자연히 알게 돼 인간적 신뢰를 쌓는 등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다고 한다.[8] 친동생인 송철호와의 형제우애 때문에 국정원장, 청와대 비서실장 싹 다 고사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