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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3764> 출생 | 1888년[2] 9월 24일 | ||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대곡리 (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3] | |||
사망 | 1968년 5월 25일 (향년 79세) | ||
부산시 남부민동 자택 (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 |||
묘소 | 경상남도 통영시 인평동 | ||
본관 | 대구 서씨[4] | ||
호 | 면산(勉山) | ||
재임기간 | 초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
1948년 ~ 1950년 | |||
제3대 검찰총장 | |||
1950년 6월 22일 ~ 1952년 3월 5일 | |||
제6대 법무부장관 | |||
1952년 3월 5일 ~ 1954년 6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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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경상남도 군정청 고문 경상남도 내무국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제3대 대검찰청 검찰총장 제6대 법무부장관 |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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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법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1933) 전 내무부 장관 형제는 그의 종손자(從孫子)이며,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그의 재종손(再從孫)이다. 서상호 전 국회의원은 그의 4촌 형이다.
독립유공자 박중한은 그의 손아랫처남이다.
2. 생애
서상환은 1888년 9월 24일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대곡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서인순(徐璘淳, 1835. 4. 17 ~ 1899. 11. 12)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아버지 서인순은 1883년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종9품)을 역임했다.이후 용남군 동면 서부동(현 통영시 문화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6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918년 7월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다.
그는 통영군 지역의 혁신 유림으로,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 서상일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했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곧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해 3월 17일 박종환(朴鍾煥)의 집에서 김영중(金永仲), 유금룡(兪今龍), 공상로(孔庠魯), 김시조(金時朝), 이종준(李鍾俊)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경남 일대에서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고등법원에 이송되었다. 그 뒤 고초를 겪다가 상고 끝에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1925년 고향 통영군에서 허기엽(許基燁)[6]과 박종한, 박종환, 김영중 등과 함께 남선해산물주식회사(南鮮海産物株式會社)를 경영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 교육이 불필요하며 조선어의 통역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박봉삼 등 10여 명이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했다가 김기정의 고소로 그해 5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덕윤,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등 35명의 인사들은 5월 10일 모임을 갖고 구금 인사들에 대한 금전 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막자, 황덕윤, 황봉석 등은 5월 13일에 다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매를 인쇄해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서상환은 여기에 호응해 시위에 가담했고, 수천 명의 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 파괴하고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서 앞장섰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7년 6월 5일 마산지방법원 충무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마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다.
그 뒤 1년 반 동안 고초를 겪다가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달 20일 상고가 취하되어 곧 출옥하였다.
1934년 일본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귀국 후 1936년 1월 21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변호사 명부 등록을 거쳐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8.15 광복 후 미군정기에 경상남도 군정청 고문, 경상남도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고, 1950년 6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대검찰청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검찰총장 재임 시절, 1951년 1월 1,901명에 대해 특별사면, 1,259명에 대해 특별감형을 실시했으며, 1951년 7월 19일 국내재산 도피방지법 시행령을 제정하고, 1951년 9월 8일 국가배상법을 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1952년 3월부터 1954년 6월까지 제6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8년 5월 25일 부산시 남부민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서상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후손
- 부인 밀양 박씨(1890 ~ 1965. 4. 11) 박순일(朴順日)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서병태(徐丙太, 1908. 6. 9 ~ 1928. 3. 9)를 두었으나, 서병태는 결혼도 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조카 서병두(徐炳斗, 1899. 8. 10 ~ 1961. 2. 9)[7]의 막내 아들인 서정신을 봉사손으로 입양했다.
[1] 懽(기뻐할 환)의 이체자인 歡(기쁠 환)으로 표기한 자료도 있다.[2] 1887년생이라고도 한다.[3]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 관련 신문조서[4]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4세 상(相) 항렬.[5]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장흥 고씨(1833 ~ 1886. 5. 3) 고화진(高華鎭)의 딸은 슬하에 형 서상관(徐相灌, 1874. 1. 2 ~ 1923. 12. 22)을 둔 뒤 별세했다.[6] 일제강점기 때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6년 간 근무했고, 그 뒤 경상남도 의원 및 통영읍회 의원을 각각 한 차례씩 역임했다.#[7] 창씨명은 오오야마 헤이토(大山炳斗), 족보명은 서병두(徐丙斗). 형 서상관의 아들.[8] 족보명 서창석(徐昌錫).